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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간척역사
이 글은 최영준 선생님의 논문집 '국토와 민족 생활사'를 요약한 것이다.
강화도 간척과정과 특징
개요
강화는 서해안 중앙부에 위치하는 도서 지역으로 고려 및 조선시대 천여 년간 수도의 중요한 요충지로 역할을 담당해 왔다. 대륙 민족의 침입 시에는 대피와 항쟁의 근거지였으며 서양세력의 침입 시에는 이 지역을 방패로 삼아 수도를 방어하였다. 그러나 강화의 전략적 가치는 도서라는 단순한 특징으로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많은 난민과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경제력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 지역의 경제력은 800여년에 걸친 주민의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다.
강화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큰 하천의 하구에 위치하여 이들 하천이 운반하는 막대한 양의 토사가 강화수역에 퇴적되어 강화도, 석모도, 교동도 등 여러 섬의 주변에 갯벌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이 갯벌은 고려 중기까지는 거의 개간되지 않고 저습지로 남아 있다가 몽골침입 후 강화천도를 계기로 간척이 진행되었다. 간척사업은 한때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다시 재개되어 광대한 갯벌을 농토로 바꿔놓았다. 오늘날 강화지역 간척지의 총 면적은 130㎢에 달하며 이는 강화도 총면적의 약 1/3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 강화지역의 해발고도 10m이하의 광활한 평지는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이루어진 인공평야이다.
그러나 간척 후 즉시 농경지 확보로 이용된 것은 아니다. 강화지역은 수원이 부족한 곳에서는 관개용수의 확보, 토양의 염분제거, 토질개량, 염기성 토양에 적합한 종자를 선정하고 농법의 개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간척지를 적절하게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강화지역의 주민들은 제언(해안 제방) 축조 못지않게 간척지를 양질의 토양으로 바꾸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정성을 쏟았다.
간척사업은 강화지역의 자연환경, 특히 해안지형과 토지의 경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드나듦이 복잡했던 해안선은 단조롭게 변했고, 작은 섬들은 연륙되어 큰 섬을 이루었다. 이 같은 해안선의 변화에 따라 조류의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결과 갯벌의 침식, 지반의 침하 등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강화도는 우리나라 간척역사의 중요한 지점이며 이를 통해 오늘날의 강화도의 특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간척의 배경
간척의 입지 조건으로는 만의 입구가 좁고 안쪽으로 넓은 갯벌이 발달한 지형, 비옥한 토양, 큰 조수간만의 차, 폭풍과 해일이 적은 해안, 풍부한 관개용수 등 자연조건과 장기간 많은 인력과 자본을 투여 할 수 있는 사회적 뒷받침, 해안환경에 관한 지식, 제방건설에 필요한 토목기술 등 사회 경제적 조건을 든다.
강화 지역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조강 남쪽에 위치하는데 조강의 한줄기는 염하로 빠지고 또 한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예성강과 합류하여 교동도 서쪽을 지나 경기만으로 들어간다. 오늘날 한강과 임진강의 하류는 나팔형 하구를 하고 형성하고 있으나 해수면이 현재보다 낮았던 빙하기에는 조간의 유로가 경기만의 서남쪽으로 이어져 그곳에 넓은 삼각주를 형성했었을 것이다. 지금도 한강으로부터 많은 양의 운반물질이 퇴적되고 있다. 강화지역에는 강화도, 고가도, 황산도, 송가도, 석모도, 매음도, 교동도 등 수많은 섬들이 있었고 모든 섬들은 해안선의 굴곡이 매우 심하였고 넓은 갯벌이 섬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장기간의 간척사업의 결과 이 섬들은 대부분 강화, 교동도, 석모도 등 3개의 큰 섬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오늘날 연륙공사에 의해 조성된 간척평야의 범위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과거 조수의 영향을 받았던 갯벌의 범위가 거의 10m 등고선까지 미친다.
강화수역에는 하루에 두차례씩 왕복성 조류가 흐른다. 밀물 때에는 경기 만으로부터 조강 안쪽으로 그리고 썰물 때에는 그 반대방향으로 조류가 이동한다. 그러므로 썰물 때에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운반 물질이 먼 바다까지 퇴적되고, 밀물 때에는 조류성 운반물질이 섬 주위에 퇴적된다.
2. 역사적 배경
일반적으로 해안지역에 거주하는 것은 물이 귀하고 바람이 습하며, 왜구 등의 피해로 인해 좋은 입지는 아니었다. 특히 도서지역은 경지가 부족하여 주민의 대부분이 험한 바다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화도는 조선시대에도 산물이 풍부하고 인구가 조밀한 곳이었다. 이는 강화지역이 장기간에 걸친 간척사업의 결과와 관련된다.
고려말 원종 11년(1232년) 고려 조정은 몽고군의 침입을 피하여 황급하게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당시 강화로 이주한 피난민의 수는 대략 수십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급증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식량과 연료 생필품의 공급이 필요했다. 고종 43년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농촌을 부흥시키고 감소된 조세를 확보를 위해 각 고을에서 노는 땅을 개간하도록 하였으며 조강 연안에 제포와 와포에 둑을 쌓도록 하고 염하 연안에 이포와 초포를 막아 우둔전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때 강화의 외성이 축조되었는데 외성은 방조제의 역할을 겸하였다. 당시 갯골을 막을 수 있는 공법이 발달되어 둔전이 확대되었고, 공사에 필요한 인력도 인구가 많이 밀집된 강화에서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본래 강화 지역은 농토가 적어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 외에 어업과 염업으로 생계를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피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야산을 개간하고 건지를 확장하였기 때문에 조정은 사사로운 개간보다 체계적이며 대규모의 간척을 해안 저습지를 이용하여 실시되게 된다. 이후 망월포에 축조된 만리장성 둑은 삼거천 갯골을 막은 대표적인 방조제겸 해안방벽(강화도 외성을 가리킴)의 하나로 강화지역에 넓은 간척지가 나타나게 되었다.
3. 조선후기의 간척사업
왜란직후 조정에서는 전쟁 중에 떠도는 백성을 안주시키기 위해 농경지 개간에 힘쓰게 된다. 이때 해안 저습지의 개간도 이루어 지게 된다. 또한 청의 위협이 증대됨에 따라 수도권의 주요 피난처로 중요시된 강화와 남한산성의 성곽을 보수하는 등 방어체제를 정비하고 이를 계기로 강화도 해안에는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고 이를 연결하는 성곽이 해안선 전체를 둘러싸게 되었다.
현종대에 승천제가와 승천전제가 보수되는 동시에 대청언, 가릉언, 장지언 등이 축조되었다. 승천제를 쌍기 전인 고려말까지 승천포가 강화도와 개경을 연결하는 주요 항구였으나 간척 후 승천포의 동쪽의 송정포가 이용되었다. 영조대에는 둑을 보다 견고하게 증축하였다. 이로써 가릉평의 수천 경의 농토가 염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 광해군과 숙종대에 연안의 둑이 보수되고 개축되었으며 정조대에까지 염하연안 만월포에 제언이 완성되었다. 주변의 섬인 석모도와 교동도와 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어려우나 고려 말부터 간척이 이루어졌음을 고문헌을 통해 알 수 있으나 주로 민간에 의한 간척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강화지역의 간척사업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일단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1910년대까지 굴곶포와 초지의 남쪽에 남아있던 소금 밭을 제외하면 개간이 가능한 갯벌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 사실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현대적 토목기술에 의해 개간된 면적이 벌로 넓지 않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4. 간척기술의 발달과 간척지 확장
해안저습지에 제방을 쌓으면 대규모의 땅을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수를 막아 땅(전지)을 보호하는 것을 제언 이라고 한다.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언둑을 조성하는 일은 큰 정사이다.
강화지역은 고려 말부터 대규모 간척사업이 실행되었다. 몽고의 침입으로 수도가 이전되어 군사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간척이 이루어졌으나 치밀한 계획하에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수전에 약한 몽고와 대적하면서 방어를 목적으로 제언을 쌓았을 뿐 아니라 인구가 집중됨에 따라 발생한 경제적인 난관을 극복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강화로 이주한 난민들을 당시 고려의 귀족으로 해안지형과 조수 등에 대한 자연환경에 대한 지식이 미미했으며 개간된 땅에서 농사짓는 기술도 부족했다. 당시 남송과의 교류로 강남지방으로부터 관개기술, 토지이용, 시비법 등을 전수받았다. 고려 말의 간척기술은 조선시대로 전래되어 해안지형의 특성, 조류의 특성, 식생 등에 관한 지식과 방조제, 수문, 수로 등을 건설하는 토목기술도 발달하게 되었다.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간척을 위해 방조제를 축조하는 것이 일본에서 간척을 위해 축조하는 방조제에 비해 7분의 1정도의 비용만 투입해도 되어 경제적이었으며, 우리나라의 갯벌의 지반이 높아 제방을 높게 쌓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강화는 간척사업의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인다.
둑을 쌓는 작업은 5-10명으로 조를 이루어 주민들이 우선 5m정도의 말뚝을 1-2m간격으로 갯벌에 박고 이들 말뚝에 의지하여 싸리나무, 솔가지, 칡, 갈대 등으로 담장을 친후 담장의 앞과 뒤에 개흙으로 둑을 만들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둑은 견고하지 못해 조류 등의 영향으로 1-2년 정도 후에 무너지기 일쑤였다. 따라서 강화에서 둑을 쌓는 공사는 강한 조류를 피할 수 있는 아늑한 곳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전란 후 대대적 간척사업이 실시되었다. 실학자 중에서도 간척에 대한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707년에 완공된 선두포언은 조선후기 간척공사를 대표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이용 가능한 모든 기술과 장비가 동원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록’에서 방조제 건설에 관한 기술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간척사업에 염생 식물의 생태에 대한 지식을 간척공사에 활용하였다. 나문제, 퉁퉁마디, 갯잔디, 갈대 등의 염생 식물 중 갈대밭은 가장 지면이 높고 염분이 적은 편이기 때문에 선호되었다. 갈대는 염생 습지에서 잘 자랄 뿐 아니라 밀물에는 조류에 의해 이동되는 개흙을 포획하여 침적을 촉진하고 제반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였다.
고려 말에는 조수가 드나드는 깊은 갯골을 토석으로 막아 제방을 쌓고 조소의 출입을 차단하는 축언방법이 이용되었다. 강화도의 승천제와 망월포의 만리장성은 이러한 공법으로 축조되었는데 만리장성은 3km에 달하였고 이후 광해군대와 영조대에 보수 및 연장되어 제방의 길이가 6km에 달했다.
조선시대에는 제방공사에 보다 다양한 공법이 도입되었다. 공사 중 암반이나 단단한 사력층이 나타나면 철장을 이용해 파냈다. 이후 꾸준한 간척사업이 전개되어 강화지역은 넓은 경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간척이 가능한 갯벌이 거의 개발되어 진전이 없었다.
5. 간척지 확장
오늘날 강화군의 통 면적은 약 424㎢이다. 경지 가운데 논의 비율은 약 76%를 차지하며 해발 10m이상의 곡저 충적지에도 분포하는 논을 제외한 대부분의 논은 간척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강화지역은 우리나라의 도서 지역 중 가장 논의 비율이 높다. 고려말 이후 꾸준히 지속되어온 간척사업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 세종애에 강화부의 경지면적이 5,606결이었고 교동현의 경지면적은 1,986결로 강화부는 논의 비율이 경지면적의 1/2을 상회하였고 교동부는 2/3가 논이었다. 그런데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경지면적이 감소하여 18세기말 강화부는 약 2,000결, 교동부는 700결의 경지가 줄어들었다. 원인은 은결의 증가와 관련되나 전란 후 제방의 보수를 소홀히 하면서 간척지의 일부가 유실되거나 황무지가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다시 간척이 활발해 지면서 경지면적은 증가하게 된다. 18세기 경지 지수를 100으로 보면 19세기에 104로 증가하며 특히 논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6. 경관의 변화
1)해안선의 변화
대표적으로 간척사업의 결과 해안선의 변화가 가장 크다. 강화도는 간척의 역사가 오래된 지역으로 원래의 지형이 심한 변화를 받아 간척 이전의 경관을 복원하기는 어렵다. 과거 해안선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간척평야 내부에 남아 있는 과거의 해식애, 암초, 섬, 갯골 등 자연적 요소와 구해안선을 따라 분포하는 우물터, 관개용 연못, 지명 등 인문적 요소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강화도는 300-600m급 산이 도서 방향으로 발달하였으며 이들 산지 사이에는 넓은 평지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들 평야는 원래 대부분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포구로서 간척에 의해 조성된 인공평야이다.
대몽항쟁 시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한 축성공사와 간척은 해안지형과 생태계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의 팔도총론에서 보면 축성 이전까지는 강화도 해안에 넓은 갯벌이 있었으며 진흙땅이 매우 질어 썰물 때에도 쉽게 섬으로 침입하기가 어려워 방어에 유리하였다. 그런데 갯벌의 토사로 다진 위에 성을 쌓았으므로 병자호란 때 쉽게 연하를 건너 강화를 점령하였다. 조선후기 강화 해변의 갯벌은 간척으로 매우 협소하였다. 인위적인 해안선의 변화로 인해 조류의 역학적 변화를 가하여 갯벌의 성장이 중단되거나 심힌 침식을 받는 곳이 있었다. 강화지역의 간척지는 대부분 논으로 이용되고 있어 토양의 수분함량이 높으며 미세한 토양입자가 바람에 날려 이동하는 피해는 적은 편이나 해일이나 태풍 등에 의한 피해는 비중이 크다.
2)토지이용과 취락경관
대부분의 간척지는 논으로 이용되는데 개답이 되는 동안 토양의 염분을 씻어내야 한다. 관개 용수의 공급이 용이한 곳이면 빠르게 개답이 되나 관개시설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빗물을 지소에 지정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완전하게 개답이 되는데 10년 정도 소요되었다고 한다. 벼의 수확은 개답 후 3년이 경과해야 비로소 상답의 수준에 도달한다. 그러나 강화도는 용수가 풍부한 큰 하천이 없어 논으로 충분히 이용되지 못하였다. 수원이 충분하지 못한 강화는 작은 하천의 입구에 제언을 쌓고 습지수와 빗물을 이용하였거나 소규모의 보를 형성하여 저수를 만드는 등 다양한 방법이 이용되었다. 강화 북쪽의 조산평과 송가평은 조강의 물을 취수하였다. 만조 때 제방문을 열어 담수를 확보하고 썰물 때 물을 배수하여 조차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화지역은 한발의 피해를 많이 입는 지역이도 하였다. 과학적인 토지개량 사업은 식민지시대부터이다. 1929년과 1931년에 개답을 통해 수확량을 늘렸으나 강화지역의 간척평야가 지금과 같이 비옥한 농토로 변화된 것은 1960-80년대 고려저수지, 교산저수지 등의 저수지의 완공으로 수리 안전답이 되면서부터 이다. 20세기 초 강화도에는 300여개의 자연 부락이 있었는데 그중 52%가 해발 10m이하, 43%는 10-20m로 충적지나 구릉상에 입지한 취락으로 많은 마을이 포구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약 2/3가 간척지를 배경으로 발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강화도, 성형수술했다
한겨레 기사 등록일 : 2009-09-22
권은중 기자
간척으로 수십개 섬 연결
1916년 2269㎢ 면적
2004년엔 여의도 땅 30배 늘어
강화도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다. 강화도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연결돼 있어 섬보다 육지에 가까운 이미지를 준다.
하지만 현재 강화도와 강화도 옆 석모도는 수십개의 섬을 연결한 간척사업으로 오늘의 해안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참성단이 있어 강화도의 명소인 마니산도 엄밀하게 말하면 강화도의 섬이 아니었다. 강화도의 높은 콧대도 알고 보면 성형을 한 셈이다.
원래 마니산은 강화도 남서쪽 고가도에 있던 섬이다. 조선시대인 1600년의 간척사업으로 고가도가 강화도와 합쳐지면서 강화도 땅이 됐다. 1664년 강화도 유수인 조복양이 강화도의 가릉포와 고가도의 선두포에 둑을 쌓아 강화도와 고가도를 연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화도의 간척사업은 고려 때부터 왕성했다. 고려는 1200년대부터 강화도 북쪽의 망월포와 와포를 메워 간척논을 만들었다. 강화도 북쪽의 교동도 앞 갯벌도 넓혔다. 마니산이 있던 고가도 주변의 간척사업도 이미 고려 때부터 시작됐던 일이다. 고려시대의 강화도 간척사업은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란을 간 고려 정부가 식량 사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됐다고 역사학자들은 분석한다.
하지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간척사업은 산업화 이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일제가 측량한 자료를 보면 1916년 강화도와 인천 일대의 육지와 도서 면적은 2269㎢였지만 2004년에는 2486㎢로 증가했다. 여의도 면적(8.5㎢)의 약 30배에 이르는 간척지가 새로 생겨난 것이다. 이는 강화도와 인천 일대 전체 육지 면적의 22.6%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이런 간척은 강화도뿐 아니라 서해안 전 지역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신도시와 공단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영양이 풍부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 세계 최대 갯벌이라는 서해안의 갯벌은 이 때문에 지금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이런 간척사업은 갯벌이 많은 서해안 전 해안선에 걸쳐 진행돼 왔다. 국립환경과학원 조사에 따르면 1910년 평균 2148㎞였던 서해안의 길이는 1448㎞로 90년 사이에 40.3%가 줄었다. 길이뿐 아니라 해안선이 얼마나 들고 났느냐를 나타내는 수치인 굴곡도(직선이면 0)도 1910년 8.16에서 4.47로 낮아졌다. 이렇게 간척된 해안선의 10㎞ 이내 토지는 대부분 경작지와 주거지, 산업단지가 차지하고 있는 반면 녹지 비율은 20%에 불과하다.
간척으로 인한
강화도 지도의 변화
강화도 간척 지도
강화도의 언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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