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회고(回顧)
우리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0년대에 17세에 시집을 오셨다.
당시 나로서는 증조모님, 조부모님이 계시고 두 분의 숙부와 고모가 계셨다.
우리 형제자매는 5남매다. 그리고 머슴을 비롯 13명의 가족을 건사하는 주부로서 눈•코 뜰세 없이 살다 저 머나먼 황천길을 떠나셨다.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증조모님은 88세, 조모님은 97세, 부친은 88세 까지 계시는 동안 어머니께서는 이 모든 시중을 다 드시다가 작년에 98세로 운명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시어머니를 80년간 모셨다. 조모님은 완고하신 성미로 동네에서도 엄하다는 말을 들어 어머니 시집살이는 가혹하기만 했다. 이른 봄에는 누에고치, 여름에는 삼베, 가을에는 무명길쌈 그리고 밭농사와 논농사를 하셨다. 베틀에 베를 짤 때면 밤 12시까지 베짜는 소리가 잠자는 동안 들렸다.
나는 초•중교를 고향에서 다녔다. 그 이후 고교 대학은 객지로 나가 생활하였다. 그런데 고향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뭣인가를 하셨다. 무척 근면 성실하셨다. 양파가 나올 때면 새벽 네 시 6 킬로미터나 되는 곡성 장에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가 시장에 내다 팔았다. 벼농사 보리농사 온갖 농사를 아버지, 머슴보다 더 솔선수범 하셨다.
110가구가 사는 마을에 주민들이 500여명이 살았는데 동네에서 시부모를 잘 모시고 형제간 우애에 본을 보였다고 동네에서는 최초로 '효부상장' 과 함께 부상을 받았다. 이 사실이 곡성군에 알려져 군수로 부터도 상을 받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70년 함께 해로하시고 부부의 화합에 본을 보이셨다고 곡성, 구례, 담양 3군 경로잔치 때 '장한 어머니상'을 받으셨다. 2012년 당시 상금으로 100여만원을 수령하셨다.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담양군 실내 체육관에 갔었다. 당시 곡성 구례 담양 3군에는 부부가 70년 이상 해로하고 자손들이 무탈한 사람은 10여 쌍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어른들에게 효성을 다하고, 아버지께도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자손들도 훌륭하게 건사함은 집안의 광영이라 생각한다. 3군 경로잔치에 우리 부모님이 상을 받은 것도 마을에서 처음이다. 어머니는 마을과 군에서 효부상, 곡성 구례 담양 3군 경로잔치에서 장한어머니상을 수상하셨다.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3군 군민 수 천 명이 모인자리에서 귀한 상을 받으니 감격하여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수상하고 부모님과 군수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어머니가 부상으로 받은 큰 벽시계는 우리 집 귀물이었는데, 2020년 섬진강 범람으로 집안이 온통 침수되어 모든 살림 가구며 상장과 부상으로 받은 벽시계도 수몰로 멸실 된 상태다.
어머니의 흔적이 있는 벽시계가 없어지고 보니 너무 허전하다.
나는 인생 후반기, 자주 만나 교우 관계를 나누는 지인 두 분이 계시는데 그분들의 산소를 구경하는 기회가 있었다.
S 분의 묘소를 갔더니 ‘표창장’ 표지석으로 훌륭한 어미니 상 석물이다. 또 한 분 L 분은 ‘장한 어미니 상’ 표지석을 세워 놓으셨다.
두 분 산소 석물을 보고 부러운 마음과 나도 석물을 챙겨야겠다는 다짐을 속으로 했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효부이시고 장한 어머니이신데 아들로서 이 일을 안 할 수 없다 결심했다. 지금까지 S, L 위 두 분의 ‘어머니 상’ 표지석을 보기 전에는 생각없이 살다가 이제 숙제가 되었다.
어머니 자손으로서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손자녀들이 고려대 2명과 연세대를 졸업했다. 시골에서 자녀들이 의사 되기를 그렇게 염원했는데 손녀도 손사위도 의사가 됐다.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하신 어머니는 마을 회관에 가시면 자손들을 잘 두셨다고 부러움을 받으셨다. 그런데 정작 어머니에 대한 훌륭한 업적이 육신과 함께 사라지고 흔적조차도 없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이 되겠는가! 표지석이라도 하나 남겨 놔 후손들이 이것을 보고 귀감이 된다면 큰 보람이 될 것이다. 어머니는 매사 말보다는 행동으로 솔선수범하여 자녀들의 큰 힘이 되었다.
‘중도 제 머리를 깎지를 못한다.’는데 어머니의 고귀한 삶을 아들인 내가 꼭 드러내 후손에 전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옛날과 같이 농경 사회라면 대가족이 함께 살고 성묘도 하면 좋으련만 이제는 자손들이 뿔뿔이 헤어져 나 아니면 조상 산소 벌초마저 잘할지 걱정이 앞선다. 나중에 후손들이 도시에서 만 살아 산소에 풀이 무성하고 무덤인지 언덕인지 모를 때 표지석이 발견되면 후손들이라면 정신을 차릴 것이다. 막상 일을 혼자 하자니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깨질 것 같은’ 심사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4~5곳에 뿔뿔이 있는 조상 묘소를 나 혼자 한곳에 안치했다. 나로서 20대부터 28대까지 양위분을 다 한곳에 모셨다.
어머니는 말이 적지만 동네에서 시부모 공경 잘하고 남편과 금실이 좋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60년, 할머니를 80년 공경 봉양하고, 아버지와는 71년간을 금실지락의 좋은 부부로 살다 가셨다. 효 사상이 점차 사라지는 이때 어머니의 효성은 귀감이 되리라 생각한다.
첫댓글 김선생님 자당님께서도 훌륭하신 분입니다.
시어른을 수십 년간 모시고 가족을 건사하셨으니 장하십니다.
나도 뒤늦게야 송선생님의 모친 표창장을 묘소앞에 세워둔 것을 보고
크게 느낀바가 있어서 금년에 어머님이 받으신 표창장을 산소에
세워드렸는데, 김선생님도 그리해드리면 좋을것 같군요.
이세상 어느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 분이 있으리오마는
저의 어머니는 각별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사랑, 가족을 위한 헌신을 생각하면 목이 메입니다.
어머니께서는 17세에 시집오시어 할머니를 80년간 모셨습니다.
할머니가 97세에 돌아가셨는데 그 시중을 다드셨습니다.
어머니는 시할머니,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어 마을, 군, 곡성구례담양
3군 경로대회에서 상을 수상하셨으니
자손들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공경과 형제화합에도 본을 보여 장손 며느리로 치하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임선생님과 송샘의 어머니 표지석을 보고 숙제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두 분 어머니를 보고 우리 어머니도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지금도 어머니가 그립죠?
양선생님 안녕하셨죠!
어머니가 보고 싶네요.
살아생전 잘 해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절절하신 사모곡에 숙연해집니다
기나긴 70~80년 세월 시조부모님과 시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니 그 오랜 인고와 희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비록 표창장들은 유실되었지만 그 공적을 선생님께서 다 기억하고 계시니 비문에 새겨 드려 후손에게 본이 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인산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사랑스럽고 어여뿐 자야 !
구구절절 말씀 한 마디 한마디는 꿀송이 보다 더 아름다운 지요!
산과 같이 높은 님(人山) 거룩한 말씀 따라 제 살아 생전에 돌에 새겨 드릴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