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둑에서 만나는 루이 암스트롱/구활
어느 해 늦봄 무렵 시골집 아래채에 젊은 남녀가 이사를 왔다. 이삿짐이래야 가방 두어 개뿐이었다. 그들은 서울의 미술대학을 다니던 학생으로 어쩔 수 없는 사랑때문에 가출하여 그들의 선배인 고향 중학교 미술교사의 소개로 우리 집으로 왔다고 했다. 그들은 대학 풋내기인 내 보다 몇 년 선배였으며 가출 남녀였지만 예의와 행동거지는 반듯했다.
남학생은 석월(石月), 여학생은 우경(雨景)이란 예명을 사용했으며, 이름에 걸맞는 예술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석월 형은 경기용 오토바이를 즐겨 타다가 미끄러져 다친 검은 반점을 얼굴에 훈장처럼 달고 있었다. 우경이는 아주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뭔가 모를 매력을 은은하게 내 뿜고 있었다. 나는 석월 형과 우경이가 무턱대고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름날 온종일 무료하게 지내는 석월 형을 금호강으로 데리고 나가 피라미 낚시법을 가르쳐 제법 손놀림을 익숙하게 만들었다. 채비래야 미늘 없는 파리낚시 몇 개를 매단 대나무 낚대와 작은 소쿠리가 전부였다. 그러나 허탕치는 날이 없어 은빛으로 반짝이는 피라미들이 바구니에 가득했다. 강은 모래의 속살이 보일 정도로 청정했고 미술학도가 강 소년으로 변해 피라미 낚시에 심취해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내겐 작은 행복이었다.
저녁 해가 노랑 물감을 풀어 ‘노을’이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강둑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석월 형은 휘파람으로 같은 곡을 계속 불었다. 처음 듣는 곡이 너무 멋있어 “형 그게 무슨 노래예요” 내가 물었다. “흑인들이 즐겨 불렀던 흑인영가란 것이야. 나중 가르쳐 줄게”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와 우경이 누나의 합작품인 홍두깨로 민 손국수, 파릇한 호박 나물이 듬뿍 얹혀있는 그 국수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흑인영가의 제목은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성인들이 행진해 들어갈 때)이란 노래였다. 강에서 돌아올 때마다 피라미 낚시꾼인 우리는 형편에 맞게 가사를 고쳐 불렀다.
’우리는 즐거운 피라미 낚시꾼/ 지친 걸음으로 터벅터벅 강둑을 걷고 있네/ 기다리는 사람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네/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석월 형이 앞 소절을 선창하면 나는 뒷 소절인 ’오 휀더 쌩 고 마칭 인‘을 추임새 넣듯이 즐겁게 불러제꼈다. 팝을 배우고 있던 대학 친구들보다 한발 앞서 루이 암스트롱 음악을 내 멋대로 즐길 수 있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새 여자와 가출해 버렸고 어머니는 살길이 없어 매춘으로 돈을 벌었다. 그는 먹을 것이 부족하여 거리의 잔반통을 뒤져 먹다 버린 고기조각을 씹어 먹었다.
취학 연령이 되어 흑인 소학교에 등록은 했지만 제 손으로 돈을 벌지 않고는 먹을 것이 모자랐다. 또래들과 사중창단을 만들어 요즘의 버스킹처럼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그 돈으론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었다. 루이에게 일거리를 자주 주던 이웃 흑인 아저씨에게 중고 코넷을 살 돈 5달러를 빌렸다.
루이는 친척 집에서 몰래 빼낸 권총으로 오발 사고를 내는 바람에 소년원 신세를 지게 됐다. 그곳에서 피터 데이비스라는 음악교사를 만났다. 코넷 연주법을 비롯한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아 밴드의 리더가 되어 소년원 밖의 공연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그는 낮에는 노동일을 하고 축제가 있을 땐 거리를 돌아다니며 연주했다. 그는 마칭 밴드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재즈계의 거물 벙크 존슨, 키드 오리, 버디 프티 등을 만나 연주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는 운 좋게도 미시시피 강을 오르내리는 선박의 선상 밴드의 일원이 되었다가 시카고로 진출하여 키드 오리 밴드의 코네티스트 자리를 차지했다.
루이는 밴드의 피아니스트 릴 하딘과 눈이 맞아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였고 그녀가 그의 음악 인생에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아내의 권유로 뉴욕으로 진출하여 플레처 헨더슨 밴드의 단원이 되었다. 루이는 부드러운 음색의 코넷 대신 힘 있고 강렬한 음색의 트럼펫으로 바꿔 최고의 트럼펫 명인의 경지에 올라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생애 동안에 네 번 결혼했다. 첫 번째는 1918년 데이지 파커와 세 번째는 1938년 알파 스미스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모두 짧게 끝났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루실 윌슨과 결혼, 그녀의 보살핌으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루이는 트럼펫 연주 외에 타고난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를 보컬로 취입한 것이 대성공을 거뒀다. 악기 연주보다 재담과 익살을 겸한 재즈풍의 노래가 크게 히트하여 명성과 돈을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었다.
일부 흑인들로부터 ’백인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는 시샘과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으며 백인들이 방위군을 동원하여 흑인 아이들의 공립학교 등교를 막았을 때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국무부가 후원하는 소련 연주 여행까지 거부했다.
루이가 부른 ‘참 멋진 세상이야’(What a wonderful world.)란 노래는 불멸의 명곡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1971년 7월 6일 69세 때 심장마비로 이승을 떠나 집 가까운 플러싱 묘지에 안장됐다. 고향에 갈 때마다 강둑길을 걸으며 ’오 휀더 쌩 고 마칭 인‘을 흥얼거리며 루이 암스트롱을 만난다. Oh, What a wonderful world!
첫댓글 멋진 수필입니다. 이미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퍼날한 것 밖에 없는데
감사라 하시니 더 퍼 나르겠습니다. 라~랄라 랄라라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I see them bloom
For me and you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I see skies of blue
And clouds of white
The bright blessed day
The dark sacred night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The colors of the rainbow
So pretty in the sky
Are also on the faces
Of people going by
I see friends shaking hands
Saying how do you do
They're really saying
I love you
I hear babies cry
I watch them grow
They'll learn much more
Than I'll ever know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Yes,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Ooh, 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