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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 루 살로메 루 살로메 본명 루이자 살로메(Luíza Gustavona Salomé) 출생 1861년 02월 12일 사망 1937년 01월 05일 국적 독일 살로메에게 바치는 시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나는 당신을 내 마음으로 잡을 것입니다. 내 심장이 멈추게 하세요. 그러면 내 머리가 고동칠 것입니다. 당신이 내 머리에 불을 지르면 그때는 내 핏속에 당신을 실어 나를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 처절한 시는 천재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가 지은 〈내 눈을 감 기세요(Lösch mir die Augen aus)〉라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릴케가 애절하게 찾는 '당신'이 바로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이다. 루 살로메는 나름대로 인정받은 작가이자 평론가였으며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저술이 나 학문적인 업적보다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철학자 니체(Friedrich Neitzsche) 와 〈말테의 수기〉, 〈비가(悲歌)〉와 같은 명작을 남긴 시인 릴케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여인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그녀는 결과적으로 조르주 상드와 유사한 길을 걸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상드와 상반되 는 여인이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그 시대의 뛰어난 남성들로부터 일방적으로 사랑받는 입장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루이자 살로메(Luíza Gustavona Salomé)로 1861년 2월 러시아의 상 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나치 독일에서는 그녀를 핀란드 출신의 유대인이라고 공격했지만, 그녀의 혈통은 유대인과는 별로 연관이 없으며 굳이 따지자면 프랑스의 종 교 전쟁 때 해외로 망명했던 위그노의 후예였다. 루 살로메는 뛰어난 군인으로 차르의 측근이었던 구스타프 폰 살로메(Gustav von Salo mé) 장군의 막내이자 외동딸이다. 그녀의 위로는 오빠만 다섯 명 있었기 때문에 귀여 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라 아주 고집이 센 아이가 되었다. 그녀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프로 이트(Sigfmund Freud)는 그녀를 유심히 관찰한 후 이 시기에 다섯 오빠들이 지나친 관 심과 애정으로 이 어린 소녀를 '공유'했기 때문에 후일 루가 남성들과의 일대일 관계에 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루 살로메의 전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특이한 정 신세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지만, 그녀 자신이 이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복잡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아버지와 오빠들을 제외하고 가장 처음 등장하는 남성은 네덜란드 출 신의 루터교 목사인 길로트(Heinrich Gillot)였다. 그녀를 '루이자'라는 이름 대신 '루'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다. 루는 열일곱 살 때 무려 스물다섯 살이나 연상인 길로트 목사를 만났다. 당시 루는 지적 으로 이미 성숙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회의론자였으며[3]당연히 그녀가 길로트를 찾아간 것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 길로트는 유부남이 었고, 황실에도 드나드는 대단히 유명한 목회자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총아였 다. 표면적으로 루는 종교에 대한 교육을 받으러 그를 매일 방문한 것이지만, 그녀는 그 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길로트는 그녀의 연인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루는 맑고 푸른 눈과 오뚝한 콧날, 육감적인 두터운 입술, 조그마한 얼굴, 날씬한 몸매, 가는 허리, 긴 다리를 가지고 있어 절세가인은 아니라고 해도 기묘한 중성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여인이었다. 아주 납작한 가슴만이 그녀의 유일한 단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길로트는 그녀에게 매료되었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 녀에게 쏟아 부었다. 신학, 철학, 논리학, 비교종교학, 불문학, 독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 식이 길로트로부터 루에게 전수되었다. 루는 길로트의 무릎에 앉아서 그 깊고 푸른 눈을 반짝이며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고, 길로트는 싫증내지 않고 충실하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러한 순수하면서도 부도 덕한 관계는 무려 2년이나 지속되었다. 길로트의 비극은 루를 성숙한 여인으로 오해했 다는 사실이었다. 길로트는 자신의 무릎에 앉아 있는 루를 자주 애무했고 세게 껴안기도 했으며, 루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루가 그에게 육체를 허용하겠다는 의사표현은 아니었다. 루는 육체적으로 아직도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인 상태였으며 그러한 행위에 대한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 어느 날 길로트는 루에게 진한 키스를 했다. 그녀는 대단히 혼란스 러워했다. 그날 루는 길로트가 부인과 이혼하고 그녀와 재혼할 준비를 오랫동안 해 왔다 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단호하게 결별을 선언했다. "나는 영원히 당신의 아이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루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스위스에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스위스의 취리히 대학 은 여자에게 입학을 허용하는 몇 개 되지 않는 대학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이 대학에 입학 해서 철학부의 알로이스 비더만(Alois Biedermann) 교수에게 수학했다. 그 시대의 가 장 뛰어난 신학자였던 비더만은 루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를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라고 극찬했다. 그런데 이 보기 드문 천재가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기침을 심 하게 하다가 피를 토하고 만 것이다. 루가 스물한 살이 되기 직전에 그녀의 어머니는 죽어가는 그녀를 데리고 이탈리아의 로 마에 도착했다. 이탈리아의 따뜻한 기후가 루의 건강 회복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 이다. 취리히 대학의 교수들은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던 말비다 폰 마이 젠부르크(Malwida von Meysenbug) 남작부인[6] 에게 루를 부탁했다. 말비다는 루 모녀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루는 건강 문제로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니체와 만나게 된다. 이 만남에는 말비다가 개입되어 있었다. 말비다는 전 유럽의 지성인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 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있었다. 워낙 까다롭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니체에게는 친 구가 그리 많지 않아 작곡가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부부와 파울 레, 말비 다를 포함해도 대여섯 명 정도가 전부였다. 루와 먼저 만난 사람은 니체가 아니라 그의 친구였던 철학자 파울 레(Paul Ludwig Carl Heinrich Rée)였다. 당시 그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도덕적 감각의 근원(Origin of the Moral Sensations)》이라는 철학서를 출판한 꽤 잘 나가던 사람이었지만, 현대에 들어 와서는 독보적인 철학체계를 구축한 학자라기보다는 니체의 주변 인물로 그의 철학에 영향을 끼친 인물 정도로 기억된다. 파울 레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대단히 부유한 기업가의 아들이었는데 상습적인 도박중독 자였다. 루가 말비다와 함께 있을 때 파울 레는 몬테카를로에서 도박을 하다 가지고 있 던 돈을 몽땅 털리고 마침 가까이에 있던 말비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그녀를 찾아 왔다가 루를 만났던 것이다. 서른두 살이었던 파울 레는 루를 처음 만나는 순간 그녀에 게 빠져들었다. 루 역시 그를 몹시 좋아했지만, 문제는 두 사람이 이성을 좋아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는 사실이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루는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파울 레에게 자신에게 이성에 대한 사랑은 완전히 닫혀 있다고 말했지만 파울 레는 그녀 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서 괴로워했다. 루는 그에게 남녀의 관계보다는 '학문적인 공동 체'로 지내자고 제안했다. 파울 레는 어떤 방식으로든 루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었다. 곧 그는 오랜 친구인 니체가 고독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두 달 후에 니체가 로마에 나타났다. 니체는 천재적인 철학자였다. 그는 스물네 살에 바 젤 대학교의 철학과 주임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역사상 어느 누구도 그 나이에 철학 부 문에서 이러한 위치까지 올랐던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니체가 그 시기에 사회적인 명성 까지 얻은 것은 아니었다. 니체는 20세기의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의 정신병이 발병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니체가 루를 처음 만났을 당시 니체는 젊은 시절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쇼펜하 우어의 '미학적 염세주의'의 그늘에서 막 벗어나 고유의 철학체계를 구축하던 시기였다. 당시 그의 저술은 지나치게 난해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유 럽을 통틀어 수천 명 정도의 마니아만이 그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니체에게는 건강도 항 상 골칫거리였다. 그는 평생을 심한 편두통에 시달렸는데, 바젤 대학교에서도 교수로 재 직한 지 10년이 조금 지났을 때 편두통 때문에 교수직을 사임해야 했다. 루, 파울 레, 니체 루 역시 철학자 니체와의 만남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드디어 니체가 도착하고 루와 니체와 파울 레,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나이로 보자면 니체는 파울 레보 다는 다섯 살 위였고, 루보다는 열여섯 살 위였다. 이 세 사람은 루의 어머니와 함께 여 러 달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했다. 그들은 겨울을 함께 나기 위해 '겨울 계획'을 세 웠다. 그러나 독일의 라이프치히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은 것은 루와 파울 레 두 사람뿐 이었다. 니체는 루에게 끔찍한 저주의 말을 퍼붓고 그들과 결별했다. "조그맣고 나약하고 더럽고 교활한 여자, 가짜 가슴이나 달고 다니는 구역질나는 운명." 무슨 일이 있었을까. 루와 함께 지내는 다섯 달 동안 니체의 정신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 다. 그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실질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던 파울 레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처절하게 그녀에게 매달렸으나, 루는 육체적으로 남자와 사랑을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Elisabeth Förster-Nietzsch e)가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엘리자베트는 나이가 니체보다 두 살 아래이고 루보다 열네 살이나 많았다. 그녀는 루를 병적으로 증오했으며 루 역시 그녀에게 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심한 언쟁을 벌이곤 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한 데는 파울 레도 한 몫을 했다. 니체는 루가 결별을 선언한 이후에도 계속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화해를 시도했지만 레 가 그 편지들을 대부분 가로챘다. 때문에 루는 내막도 거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절망 에 빠진 니체로부터 끔찍한 저주의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루 역시 강렬하게 대응했다. "당신이 내게 준 행복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어요. 그래도 당신은 값진 고통을 여전히 가 지고 있지 않나요?" 니체의 과도한 집착에도 불구하고 당시 루가 철학자 니체에게 내린 평가는 매우 긍정적 이었고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니체와 결별할 무렵 자신의 일 기장에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는 니체가 새로운 종교의 예언자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는 많은 영웅들 을 제자로 두게 될 것이다. 루가 니체와 레, 두 사람과 함께 기묘한 삼각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 그녀의 이름도 점차 지성인들의 사회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니체의 경우는 마음의 상처가 뜻밖의 성과로 이어졌다. 루와 이별한 상처를 안은 채 절망 속에서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작인 《차라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oke Zarathustra)》의 제1부를 불과 열흘 만에 완성 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얼마 후에는 제2부도 비슷한 속도로 썼다. 루는 니체의 절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울 레와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해 기묘한 동거를 계속했다. 레의 가족들은 이들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루에게 빠져 고질적인 도박 중독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고무되었기 때문에 가족들 사이에 의견충돌이 생겼 다. 레는 자신의 저서를 출판함으로써 가족들을 안심시켰고, 루 역시 소설 《어디에서 와 서 어디로 가는가(Im Kampf um Gott)》를 발표해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루와 파울 레의 동거는 여러 해 지속되었지만, 두 사람을 포함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 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동안 루는 '헨리 루'라는 남자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던 반면 레의 경우는 불운이 연속되고 있었다. 그는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논 문을 여러 대학에 제출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모두 시큰둥했다.[8]이러한 와중에 레는 루의 결혼이라는 의외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루의 남편 안드레아스(Carl Friedrich Andreas)는 루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 중에서 상 식적으로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그는 페르시아 문화에 정통한 베를린 대학교 언어학과 교수였다. 그는 자연에 대한 동경의 표현으로 채식만을 고집했고 맨발로 풀밭 을 걸어 다니곤 했다. 또한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사람으로 정서가 불안했고 가끔 발작 적으로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도 있었으며 항상 칼을 지니고 다녔다. 루가 안드레아스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의사와 베를린 경찰은 루로부터 다급 한 비상호출을 받았다. 그들은 루의 식탁에서 가슴 한복판에 칼을 꽂은 채 쓰러져 있는 안드레아스를 발견했다. 그는 루에게 청혼했고 그녀가 다른 남자들에게 제시했던 이유 를 들어 거절하자 그 자리에서 칼을 꺼내 자신의 가슴을 찌른 것이었다. 아무리 당돌한 루라고 하더라도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에 불과했다. 안드레아스의 자살 시도에 어지간히 놀랐던지 그녀는 '독신결혼'이라는 조건으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섹스를 하지 않고 루와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도 용인한다는 조건이 었다. 안드레아스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는 루가 육체적으로 미성숙 상태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녀가 제시한 조건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루가 잠들었을 때 안드레아스가 그녀와 육체관계를 시도하자 루가 그를 거의 죽일 뻔했던 사건이 발생하면서 루가 제시한 조건이 무척 진지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확 인되었다. 이 사건 이후 두 사람의 기묘한 결혼 생활은 무려 43년 동안이나 처음의 조건 그대로 유지되었다. 안드레아스와 루의 결혼으로 파울 레와 루의 관계는 끝장이 났다. 파울 레 역시 니체와 마찬가지로 절망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때 루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었던 니체와 레의 인생은 절망과 고통으로 얼룩지고 말 았다. 니체는 루와 헤어지고 나서 저술에 몰두해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 악의 피안(Jenseits von Gut und Bös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와 같은 불후의 명저들을 잇달아 출간했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자신을 극복해 차라투스 트라와 같은 완전히 자유롭고 창의적인 '초인(Übermensch)'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시절까지도 그의 독자는 소수의 마니아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는 가난과 편두통에 시 달리다 루가 안드레아스와 결혼한 다음해에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 마부가 말에게 채찍질하는 것을 보고 달려들어 그 말의 목을 잡고 보호하는 제스처를 하다가 쓰러진 것 이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의 병은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면서 인격이 수시로 바뀌고 뇌의 기능이 서서히 마비되어 가는 치명적인 것이었다.[9]아이러니하게 도 니체가 정신병으로 쓰러진 이후에 유럽에서 그의 명성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루는 니체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 그에 대한 평론집 《작품으로 본 니체(Friedrich Ni etzsche in seinen Werken)를 발표했다. 니체의 연구가들의 입장에서는 그와 동시대 인물이 쓴 니체에 관한 저술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니체는 죽을 때까지 무려 11년 동안이나 고통을 받았다. 마지막 수년 동안은 뇌경색이 언어중추까지 번져서 말도 전혀 하지 못했다. 이즈음에 그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했고, 그가 고통 속에서 출판한 책들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은 고스란히 여동생 엘리자베트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인종차별주의자인 남편을 따라 남미로 이주했다 과부가 되어 혼자 귀국한 참이었다. 그녀는 이 정도의 행운에 만족하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는 철학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여자였지만, 니체가 남긴 유고 중에서 니체 가 폐기한 것들을 집어넣고 '반그리스도(Der Antichrist)'와 같은 핵심적인 부분은 삭제 하는가 하면, 원고의 순서를 바꾸어 제멋대로 편집하고 일부는 조작까지 해서 《권력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다. 후일 이 책은 독일 나치 정권에 이론적인 기반을 제공하게 되며, 엘리자베트는 나치 정권하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된다. 파울 레의 마지막 모습은 니체만큼 비참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극적이었다. 그는 루가 안드레아스와 결혼하자 루의 사진 한 장만 달랑 챙겨서 그녀의 곁을 떠났다. 대부호의 아들이었던 그는 자신에게 막대한 토지와 재산이 상속되자 이를 모두 처분해서 굶주리 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선행을 베풀며 살았다. 그는 니체가 죽은 바로 다음해에 스위 스 남동부에 위치한 첼레리나 부근의 산위에서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깊은 골짜기를 향 해 몸을 던졌다. 그때는 루와 헤어지고 15년이나 지났을 때였으며, 그곳은 그가 루와 함 께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장소가 바라보이는 곳이었다. 루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으며,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 은 그녀에게 집착하다가 그 사랑을 잃고 나서는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혼 후에도 계속되었다. 작가 게오르크 레데부어(Georg Ledebour)는 후일 정치가로도 크게 성공할 사람이었 다. 루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에게 사랑을 느꼈다. 물론 루의 입장에서는 플라토닉한 사랑이었다. 게오르크는 루에게 기만적인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과 결혼하자고 정 식으로 청혼했다. 안드레아스는 루와 다른 남자들과의 플라토닉한 관계에 대해서 무척 관대했지만 결혼 자체를 부인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친구의 집에서 모임이 있을 때 안드레아스는 자 신의 칼을 꺼내 사람들에게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 주다 갑자기 그 칼을 게오르크의 가슴 을 향해 겨누었다. 게오르크는 루에게 당장 이 미치광이와 이혼하라고 처절하게 애원했 지만, 루는 게오르크가 아니라 안드레아스를 선택했다. 게오르크는 루를 떠났으며 평생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루는 작고 볼품없는 몸매에 쉽게 부러질 것 같은 아주 가느다란 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자들을 열광하게 하는 강한 마력도 있었다. 천재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역시 그녀 의 덫에 걸려들었다. 루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여 섯 살이었고 릴케는 열네 살 아래였다. 원래 그의 본명은 르네(Renee Maria Rilke)였는 데, 루의 충고에 따라 '라이너'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루에게는 아주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동안 소녀의 몸에 갇혀 있 던 루의 육체가 눈을 떠서 비로소 진정한 여인이 된 것이다. 루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관계는 바로 그 시기에 시작되었다. 환희에 찬 시인은 노래했다. 그 길은 어떤 사람도 나보다는 먼저 밟지 못했으리. 나는 그대 안에 있노라. 서른여섯 살의 숫처녀. 감격한 릴케는 정열적인 시 수십 편을 써서 루에게 보냈고, 릴케 의 편지를 안드레아스가 볼까 봐 기겁한 루는 그 주옥같은 시들을 찢었다. 그렇지만 자 신이 쓴 글은 항상 복사본을 남겨놓는 것이 릴케의 버릇이었다. 그가 루를 위해서 쓴 시 들은 후일 릴케의 시집에 고스란히 실렸다. 루와 릴케의 관계는 대략 3년 정도 지속되었 으며, 그들의 러시아 여행에는 안드레아스가 동행하기도 했다. 1900년 모스크바를 여행한 루와 릴케 그렇지만 릴케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루의 첫 남자가 릴케였는지 아니면 그보다 1년 전 쯤에 만나 11년간이나 관계를 지속했던 신경정신과 의사 프리드리히 피넬리스(Friedric h Fineless)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피넬리스는 당시 프로이트에 의해 막 개화된 정신분 석학에 깊이 빠져 있었고, 루가 육체적으로 완벽한 여인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심리적인 요인을 찾아내어 치료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피넬리 스는 루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루가 중요시하는 철학에 대해 냉소적이었으며, 루가 평생 고민했던 문제인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어떠한 의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루와 릴케의 관계는 후일 《닥터 지바고》를 쓰게 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 ak)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화가인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Leonid Pasternak), 그리고 보리스의 어머니인 뛰어난 피아니스트 로자(Rosa)를 만났던 두 번째 러시아 여행에서 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 여행에 안드레아스는 동행하지 않았다. 릴케는 뛰어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작품을 통해서 본다면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였지만, 인간 적으로는 아주 심약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 릴케 그는 주변의 사소한 소리나 냄새에도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신적인 불안감을 안 고 하루하루를 위험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루는 릴케의 이러한 면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 게 된 것이었다. 더욱이 그녀에게는 그녀를 숭배하는 다른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당신의 아내였던 이유는 나에게는 당신이야말로 유일하게 실존 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단호한 이별 통보를 릴케는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곧바로 젊은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Clara Westhoff)와 결혼했으며, 외동딸 루스(Ruth)를 낳았다. 릴케 가 가정을 가지면서 안정되자 루와 릴케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그 이후 평생 동안 절친 한 친구로 지내게 된다. 릴케는 간간이 정신착란 증상을 보이다 1926년 스위스에서 만 성 백혈병과 종양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임종 직전 그는 루에게 편지를 보내어 애절하게 그녀의 방문을 청했다. 루는 답장을 보 냈지만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신분석 의사로서의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병이 육체적 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위안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면서 오지 않는 루를 애타게 기다리던 릴케. 그의 사망 소식 이 전해지자 루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뼈저린 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 녀는 2년 후에 릴케의 독자들이 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를 회고하는 짧은 책 을 출판했다. 한국에서는 《하얀 길 위의 릴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 원래 루가 붙인 제목은 무미건조하게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 이 책이 영문판으로 번역되면 서 붙여진 제목은 《오직 당신만이 나에게는 현실이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그 리며(You alone are real to me. Remembering Rainer Maria Rilke)였다. 루의 성격은 대단히 낙천적이었다. 니체의 사망 소식에 이어 파울 레가 자살했다는 소식 을 들었을 때 루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절망만을 안겨 주는 저주받은 존재가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안드레 아스가 게오르크 레데부어를 질투해서 발작을 일으켰을 때에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계 획하기까지 했지만,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빠른 시간 내에 극복할 수 있었다. 그녀는 릴케와 헤어진 이후에 대부분 연하인 연인들과 자유로이 교제하면서 그동안 그 녀가 치중한 정신적인 교감을 통한 쾌락이 아니라 새롭게 체득한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 하기 시작했다. 루는 여러 명의 애인을 갈아치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성적 쾌락이란 그녀가 평생 추구해 왔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 니었다. 그녀는 항상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고뇌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근본적 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루가 최종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분야가 당시로는 새로운 개척지였던 정 신분석학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대략 1870년대부터 독일과 프랑스 의학계에서 정신역학(psychodynamics)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정신에 대해 과학적 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긴 했으나,이 분야의 실질적인 선구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루 살로메와 프로이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루보다 다섯 살 위였다. 삼십 대였던 1880년대 말부터 잠재의식 이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시작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몇 년 지 나지 않아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정신분석과 관련된 그의 첫 번째 논문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Studien über Hysterie)〉가 1895년에 발표되고, 이어서 유럽 사회에 다윈의 《종의 기원》만큼이나 충격을 주었던 《꿈의 해석》이 1899년에 출판되 면서 그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프로이트의 저서 《꿈의 해석》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당시 유럽에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문하에는 당대의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이들 중 가장 초기 멤버 에는 후일 프로이트만큼이나 명성을 얻게 될 칼 융(Carl Gustav Jung)이 있었으며, 아 버지의 천재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후일 그를 계승하게 될 막내딸 안나(Anna Freud)도 스무 살 전후에 이 연구 그룹에 합류했다. 언제부터 루가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학을 배우려고 작정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녀는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선구자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피넬리스와 10년 이상 친구 이자 연인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와 만나기 전에 이미 이 분야에 대해서 상 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루는 당시 대단히 영향력 있는 작가였음에도 쉰 살 을 바라보는 나이에 과감하게 프로이트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루가 프로이트의 문하에서 정신분석학의 발전에 기여한 바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프로 이트는 그녀에게 항상 친절했으며 그녀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은 엄 격한 프로이트에게는 대단히 어색한 것이었고, 두 사람 모두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의심 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갖가지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성적인것 과는 거리가 멀었다. 루는 그동안 많은 연인들을 만들고 버렸지만, 프로이트에 대해서만은 30년 전 니체에게 대하듯이 접근했다. 지적인 교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프로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루와 프로이트의 지성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충돌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서로 에 대해서 아주 빠르게 분석을 완료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프로이트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루는 프로이트를 완벽하게 분석했다. 말년에 프로이트는 루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토록 빨리, 그토록 훌륭하게, 그토록 완벽하게 나를 파악한 사람은 만나 보지 못 했다. …… 니체는 그녀가 악마 같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루가 프로이트의 문하로 들어갔을 때 정신분석에 대해서 이미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가 지고 있었고, 프로이트가 '두려워할 정도의'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루는 프로이트에게 충실했다. 프로이트의 수제자 칼 융이 스승에게 반발하고 그와 결별하면 서[21]개척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단히 취약했던 정신분석학 연구 그룹 자체가 해체의 위기를 맞았을 때에도 그녀는 굳건하게 프로이트의 곁을 지켰다. 루는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들, 특히 막내딸 안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 관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굳건하 게 이어졌다. 유럽 사회는 1910년대에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과정을 겪었다. 이것은 지성인 들에게도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전쟁의 와중에 러시 아에서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가족들은 위기에 빠지고 오빠 한 사람은 자살했다.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다. 그간 장군의 딸로서 러시아의 차 르에게 받던 연금이 1914년에 끊긴 것이다. 그녀는 이전까지 최소한 생계에 관한 문제 만은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았었다. 루는 다작형의 작가였지만 글 쓰는 일을 생계를 위한 직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 데 난생 처음 '직업'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괴팅겐에서 정신분석 전문의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전쟁은 유럽의 모든 것을 파괴했으 며 수천만 명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았다. 당시의 유럽인들이 모두 그랬듯 이 루는 꽤 여러 해에 걸쳐서 전쟁의 후유증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났다. 그녀는 프로이트 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기도 했었고, 하루에 열 명이 넘는 환자를 상대하는 무리한 일정으로 자신을 혹사시키는 생활을 계속했다. 지성인들은 삶과 투쟁하면서 동시에 절망과 투쟁해야 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서 환멸을 느꼈고 무력한 신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는 화해와 관용 의 시기이기도 했다. 루는 프로이트와 가족처럼 친밀해졌고, 한때는 격정적인 사랑을 나 눈 연인이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의 애틋한 우정도 깊어져 갔다. 루는 정신분석의의 입장에서 릴케의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붙잡아 주려고 노력했다. 한편 루의 남편 안드레아스는 오로지 인내와 관용이라는 미덕으로 루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영원히 소녀로만 살 것 같던 루가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육체적인 사랑에 눈 을 뜨고 그 이후 갑자기 대책 없는 바람둥이로 바뀌었지만, 안드레아스는 전혀 그 기회 를 살리지 못했다. 그는 루가 화려한 남성 편력을 자랑하던 시기에도 굳건하게 그녀의 주변만 맴돌았을 뿐이다. 사실 자유분방한 루에 대해서 안드레아스 역시 반격을 가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복 수는 상당히 치졸했다. 그는 하녀인 마리 슈테판(Marie Stephane)과 바람을 피웠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루는 마리 슈테판에게는 크게 분노를 터뜨렸으나 그 녀가 낳은 아이 마리센(Marisen)은 끔찍하게 사랑했다. 후일 안드레아스가 죽고 나서 루는 마리센을 정식으로 입양해 자신의 딸로 삼았다. 안드레아스는 루의 인생에서 대부분의 기간을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일관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무렵 루는 안드레아스의 곁으로 돌아왔다. 루는 자신 의 회고록에서 예순 살쯤 되었을 때 성적 욕구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대략 이 시기부터 루와 안드레아스 부부는 서로를 이해하는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너 무 많이 흐른 뒤였다. 안드레아스는 이미 귀가 먹어가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루는 그와 이야기하기 위해서 악을 쓰다가 점차 편지로 의사소통을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루의 건강도 그리 좋지 않아서 여러 곳에서 이상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1929년에는 사소한 수술을 받기 위해 괴팅겐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가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안드레아스도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 여러 가지 증세가 뒤섞인 노인성 질환의 합병증이 었다. 그는 걸어서 병원 문을 나서지 못했고, 여러 달 입원해 있다가 다음해 초 여든다섯 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루는 그 마지막 몇 달 동안 자신이 어떤 남자와 함께 살아왔는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안드레아스는 날카로운 칼과 불안한 정신을 가지고 있던 위험한 남자 였지만, 진정한 안드레아스는 넘치는 기품과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으며 동료들과 제 자들로부터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루는 안드레아스가 죽기 전 몇 달 동안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진정한 아내였다. 루 살로메는 수많은 소설을 발표하고 꽤 많은 독자를 가졌지만, 그녀의 중요한 업적은 대부분 평론 분야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인형의 집》으 로 유명한 노르웨이 출신의 극작가 입센(Henrik Johan Ibsen)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분석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가 출간한 니체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 대한 비평서도 그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상당히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학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루에게는 니체와 릴케와 프로이트를 매료 시켰던 인물이었다는 이미지가 훨씬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루는 말년에 자신의 회고록 인 《회상(Lebensrückblick)을 통해 이 대가들과의 관계를 상세하게 밝혔고, 이들과 주 고받은 수많은 편지들을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때문에 그녀의 일생은 지금도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당시의 루 살로메는 뛰어난 지성과 신비한 미모로 사람들을 매혹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뮤즈(muse)' 그 자체였다. 특히 니체와 릴케라는 두 천재에게는 더욱 그랬다. 비록 15년 정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이들에게는 기이하게도 루에게 차이고 나서 정확하게 아홉 달 후에 각자 일생일대의 최고 걸작들을 완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는 그들에 게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렇지만 루의 마력은 영원하지 않았다. 시간은 그녀에게도 공평하게 작용했다. 안드레 아스를 잃고 나서 루는 급격히 쇠약해져 갔다. 골절상과 허리의 통증, 그리고 유방암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녀의 터무니없는 낙관주의는 여전했다. 유방절제수술을 받고 나 서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니체가 옳았어. 지금 이렇게 가짜 가슴을 달고 있잖아." 히틀러가 집권하고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는 니체의 유작들을 나치의 입맛에 맞게 교묘하게 변조하면서 사회적인 명사가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루에 대해 지니고 있던 열 등감을 폭발시켰다. 그녀를 유대인이라고 모함하고 갖가지 형태로 그녀를 공격했지만, 루는 철저하게 그녀를 무시했다. 당시 독일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프로이트, 토마스 만, 슈너츨러의 걸작들이 단지 유대인들에 의해서 쓰였다는 이유로 불태워졌다. 오스트 리아가 병합되자 프로이트는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다시 한 번 루가 그토록 두려워하 는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명확해졌다. 그렇지만 루는 전쟁의 공포에서 쉽게 벗어났다. 유럽에 불길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 던 1937년 1월 5일 그녀는 괴팅겐의 자택에서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잠을 자다 맞이한 편안한 죽음이었다. 집안에는 마리센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들의 아이만 있었다. 집 밖에는 게슈타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서재에서 유대 인들, 특히 프로이트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거하여 불태우기 위해서였다. 루의 유해는 화 장되었고, 재는 안드레아스의 곁에 묻혔다. 루 살로메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나 현대의 기준으로 보나 대단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녀는 분명히 페미니스트였고 '능력을 가진 여성의 행복'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 시 대를 풍미하던 여성 해방론자는 아니었다. 이른바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들의 집요한 질문에 대해서 그녀는 극히 이단적인 대답으로 그들의 기대를 무산시켰다.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한다." 루 살로메는 '여성'으로 생을 산 인간이 아니라 '인간'으로 생을 살았던 여성이었다. 남 성들을 압도하는 지성과 순수한 소녀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 에게 천국과 지옥을 차례로 선사해 주는 절망의 뮤즈. 이것이 당시의 사람들이 본 루 살 로메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이는 천진무구한 낙천주의와는 달리 루는 치열한 내면적인 투쟁을 지속했던 사람이다. 그녀는 평생 '인간을 저버린 잔인한 신'을 그리워하며 그와의 대화 를 모색하던 진지한 철학자이었으며, 동시에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 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서전 《회상》에서 자신이 최종적으로 신과 화해했는지의 여부를 밝히지는 않았다. 루 살로메 전기 - 옮긴 글 - |
Music For Soul - Am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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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다녀갑니다
감사합니다 ~
沃溝서길순 님 !
2024년 갑진년 설을 맞아
바라시는바 모든 소망
이루시고 건승하시길
빕니다 ~^^
좋은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
동트는아침 님 !
2024년 갑진년 설을 맞아
뜻하시는바 모든 일들이 잘
성취되시길 축원합니다
~^^
책한권 같네요 아무리 좋은 글 이라도 긴글은 읽기 어렵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안녕하세요
석담 하기 님 !
장문의 글 읽으시고
감상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즐건 연휴보내시고
행복하세요 ~^^
루 살로메의 일대기 이네요.
2차 세계대전을 얼마 안남겨두고 생을 마감했군요.
유명한 사람들과 교류도 많이 했고,
니체와 릴케 같은 유명한 사람들과 연분이 있었다니
대단한 매력을 가진 여성이었었나 봅니다.
이제 루 살로메 이 여성은 제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네요.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망실봉님!
어제 설날에는 떡국을 많이 드셨어요?
남은 설 연휴 즐겁게 보내셔요.
새해에도 福 많이 받으시고,
健康하셔야 합니다.
感謝합니다.
반갑습니다
바다고동 님 !
짧지 않은 글 읽어주시고
고운 멘트 글 남겨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노년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두더지게임과 같다하네요 ㅎ
한가지 잡어면 없던 병이
되살아나고 ~
늘 건승하시고
만사형통하시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