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세한도에 담긴 명언
분양 도깨비 ・ 2024. 3. 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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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이자 실학자입니다.
김정희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추사(秋史), 원춘(元春)이고 호는 완당(阮堂), 예당, 시암, 과파, 노과, 농장인, 보담재(寶覃齋), 담연재, 천축고선생 등 무려 503개나 된다고 하는데요.
사(史)에 붓잡이라는 뜻도 있어서인지 보통 추사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김정희 특유의 서체인 추사체로 유명하여
글씨나 금석문의 대가 정도로 많이 알려졌지만
추사 김정희는 후학도 많고 관직에도 나가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던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근자에 들으니 내 글씨가 세상눈에 크게 괴(怪) 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이 글씨를 혹시 괴하다고 헐뜯지나 않을지 모르겠소.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것은 그들에게 달린 것이외다.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怪) 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걸 어떡하나요."
추사 김정희의 말입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글씨체에 당시에도 추사의 글씨가 괴이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추사는 "서예가는 모름지기 팔뚝 아래 309개의 옛 비문을 완전히 익혀서 간직하고 있어야 된다."라고 했다는데요.
굵고 단조롭게 느껴지는가 하면 구불구불하고 길게 흘러내리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추사의 글씨는 당대에도 파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정희는 1786년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합니다.
젖을 떼자마자 붓을 가지고 놀았는데 부친 김노경이 붓을 빼앗으려 하자 사력을 다해 붓을 쥐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로 붓에 애착이 강했다고 합니다.
그의 니이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 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이 이를 보고 명필이라고 칭찬했다는데요.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오. 허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라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예언이 적중했던 것일까요?
김정희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아내들과도 사별하였고 귀양을 두 번이나 가는 등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24세 때 부친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 완원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교류했다고 하는데요.
담계 옹방강과 운대 완원으로부터 금석학의 기본과 서법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정희는 이 두 문인을 통해 여러 금석문을 보았고 필담도 나누었고 많은 책과 글씨, 탁본 등을 선물로 받았다는데요.
완원에게는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얻기도 했습니다.
옹방강은 한나라와 송나라 학문의 절충을 주장했고 완원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設)을 비롯한 고증학의 학문적 체계 수립에 영향을 주게 되니
김정희는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은 갖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조강, 서송, 이정원, 주학년 등 많은 연경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학문의 토대를 금석학과 고증학에 두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중국의 학계와 예원을 들러보게 된 경험은
김정희로 하여금 안목을 높이고 학문과 사상과 예술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경을 다녀온 뒤에도 김정희는 역관 우선 이상적, 추재 조수삼, 역매 오경석 등의 도움으로 계속 연경학계와 교류하였고
자하 신위, 운석 조인영, 이재 권돈인 등이 뒤이어 연경을 다녀오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학풍의 바탕은 고증학이었습니다. 금석학과 결합시킨 금석고증학 연구는 독보적이었는데요.
김정희는 조선에서 금석문 연구를 금석학의 반열에 올린 선구자였습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당시 '무학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로 알려져 있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비문에 적힌 구절을 통하여 진흥왕의 순수비라고 밝혀낸 일입니다.
또한 문무왕비와 김인문 묘비 등에서 발견한 신라 성한왕이라는 글자에 주목하여 이를 경주 김씨의 역대 족보와 비교 대조하여
성한왕이 김알지 또는 김알지의 아들인 세한과 동일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예당금석과안록'과 '진흥이비고'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겼고
자신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1819년 나이 34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50세가 되기까지
규장각 대교, 충청우도 암행어사, 예조참의, 규장각검교, 대교 겸 시강원 보덕 등을 거쳐 성균관대사성, 병조참판 등을 지내며 출세 길을 달렸습니다.
등석여, 이병수, 옹방강, 유용, 양동서, 왕문치 등 청나라와의 학예 교류도 이어나가며 글씨 연마를 계속하였고
이재 권돈인, 자하 신위, 눌인 조광진 등과 일파를 이루며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조면호, 신헌, 남병길 등 양반 출신과 이상적, 오경석, 김석준 등의 역관들 그리고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고람 전기, 희원 이한철 등 중인 출신 화가들도 있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이렇게 일파를 형성해 나가면서 자신의 글씨와 서예론을 확립하고 있었던 것인데요.
일찍이 채제경의 예언이 말했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되고 말았습니다.
김정희 인생의 황금기는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저물기 시작했는데요.
'윤상도 옥사'를 빌미로 6차례 혹독한 고문과 36대의 곤장을 맞고 죽음 직전에 풀려나 유배를 떠나냐 했습니다.
머나먼 섬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것인데요.
'김치를 얻어먹을 길이 없고 또 젓국과 새우젓도 없으니 집에서 절인 무우나 얻어 보내게 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부인에게 좋은 음식 좀 보내라고 편지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설상가상 재혼한 부인도 1842년 병들어 세상을 떠나는데요.
두 달이 지나 뒤늦게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정희는 '내생에 다시 부부가 되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죽어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알게 하고 싶다'라는 애절한 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김정희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약 9년간을 지내게 되는데요.
김정희에게 제주유배 기간은 큰 시련임이 틀림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과정이었고
그의 학예와 사상이 일보 진전을 보았다는 점에서 도약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김정희는 유배 기간에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요. 그는 편지를 통하여 안부와 소식을 전하고 학예 교류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김정희의 제자였던 역관 '우선 이상적'은 오랫동안 김정희를 지원하고 도와준 충실한 제자였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꼽는 '세한도(歲䗙圖)'는 바로 이상적과의 인연에
그 아름다운 제작 동기가 있습니다.
1844년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된 지 5년 즈음에 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었습니다.
'세한'이란 아주 추운 겨울 날씨를 의미하는데 한 그루의 소나무와 세 그루의 잣나무 사이 작은 집 한 채는
추사 김정희 자신의 신세를 빗댄 그림입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랫동안 잊지 말자'라고 추사는 사제지간의 정을 담아 발문을 썼습니다.
세한도는 사의를 위주로 한 문인화풍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늘 푸른 소나무같이 변함없는 사제지간의 정을 담아낸 발문으로 더욱 빛이 나는 작품입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가지고 연경에 가서 반증위, 장악진, 장요손 등 청나라 학자 16인의 제찬을 받아왔으니
이것이 바로 세한도에 붙어 있는 '청유십육가(淸儒十六家)'의 제찬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를 통하여 자신이 추구한 문인화의 절정을 발견하였고
제자 이상적에게 이 세한도를 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습니다.
김정희의 글씨는 제주유배 기간을 거치면서 특유의 조형미가 '괴(怪)'라는 미학적 특성으로 구현되었고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었으니 그것을 우리는 '추사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라는 세한도의 발문은
고난의 운명에 굴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을 돌아 보며 갈고닦은 역경의 시간을 이겨낸
추사 김정희의 명언입니다.
마음이 부자 되는 글은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구멍 냈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했다."라고 말한 추사 김정희의 '학예 일치'를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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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추사 김정희 세한도에 담긴 명언|작성자 분양 도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