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베데스다
요한복음 5:1-9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부활절 여섯째 주일이다. 세계교회의 전통방식으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 저녁,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고난함께’ 거리기도회에 참석하였다. 평소 중국인 관광객으로 가득한 곳인데, 코로나19로 인한 영업 제한이 풀렸음에도 아직은 한산한 편이었다.
거리기도회가 열린 곳은 카톨릭센터 건너면 수녀원 성물방 2층 건물 앞이다. 그곳을 명동 2지구 재개발구역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성당 구역 안으로 이전한 옛 성물방의 2층 건물에는 여전히 가게 아홉이 세 들어 있다. 그들은 재개발법에 따른 공식적인 보상을 받지 못할 형편에 놓였다. 편법적인 재개발 때문이다. 이주비와 권리금도 없다. 몇 년째 명도소송 등 재판이 진행중에 있다.
아홉 가게 주인들이 모두 거리기도회에 참여하였다. 다 영세한 세입자들이니 그만큼 절박한 심정이고, 누군가 편들어 주는 일에 고마워하였다. 가게 주인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은 아니겠지만, 정성껏 예배에 참석하는 모습이 귀하다. 그들에게는 간절한 기도였을 것이다.
거리기도회 설교는 참 어렵다. 잘 마련된 예배 공간에서, 들을 귀가 있는 여러분 앞에서 하는 설교와 정말 다르다. 거리에서 설교를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구경하며 간다. 그래서 좀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 아마 존 웨슬리도 야외 설교를 하면서 처음에는 부끄러워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소 위안을 삼는다. 오늘은 웨슬리회심기념주일이다.
1)
본문은 유명한 베데스다 연못을 배경으로 한다. ‘오늘의 베데스다’라는 제목을 붙이고 읽으니 거리기도회의 풍경과 다름없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2).
연못 주위에는 많은 병자들이 몰려 있었다. 선천성 장애인도 있고, 아예 거동이 불편한 중증 환자와 각종 병자가 섞여 있었다. 그들이 몰려 있는 이유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가끔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었는데,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선착순이다. 정상인에게는 미신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간절한 희망 사항일 것이다. 그러니 고통받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이러니저러니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니다.
이런 기적을 바라기에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진을 치고 살았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3).
병자들은 연못가에서 기다리면서 그 신비한 기적을 사모하였다. 유일무이한 대책이었기 때문이다. 다섯 행각 안에 누워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현재의 장애와 질병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당장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가장 큰 고통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라는 사실이었다. 모두 다 어슷비슷한 상태처럼 보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경쟁력이 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5).
38년 된 병자는 오랜 세월 동안 은혜의 집에 머물면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38년이란 긴 세월 동안 걷지도 못하고, 자리에 누워있었던 병자를 생각해 보라.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누가 그를 이 연못에 데려왔을까? 누가 그를 하루하루 먹였을까? 순간순간 기적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생이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란 뜻이다. 그곳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 중에 특별히 38년 된 그의 비참한 처지를 한눈에 보셨다. 연민하셨다. 긍휼히 여기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6).
애초부터 그에게 치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기에, 행여 가장 먼저 연못의 움직임을 느꼈다고 해도, 누구보다 앞서 연못에 내려가 몸을 담그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예수님의 물음에 38년 된 병자는 하소연한다. 낫는 것은 두 번째 일이다. 도무지 경쟁에조차 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개인의 능력, 경쟁의 원칙 즉 베데스다의 질서보다 전혀 새로운 방식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은혜의 방식이다.
2)
오늘 말씀은 구원을 갈망하는 구체적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담고 있다. 다름 아닌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을 통해서다.
아마 38년 된 병자에게 기회는 평생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그에게 기대란 있을 수 없었다. 그때 예수님이 다가오신 것이다. 예수님과 만남, 그 자체가 은혜였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의 하소연을 들으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베데스다의 치유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한다. 병자 치유는 메시야 예언의 실현이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예수님의 3대 사역은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니’(마 4:23)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체적인 한 인간의 고통을 치료하는 의사였다. 동시에 병든 세상을 고치는 위대한 의사였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이 아프거나 재난을 겪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다. 이를 치료하고 재난을 극복하는 것은 창조 질서의 회복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와 이적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예수님은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몸이 아프고 인생이 괴로운 이들이 주님을 의지하였다. 장차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들을 통해서도 병 고침과 기적이 나타났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을 의지할 수 있다. 그것은 은혜의 통로이다.
더 이상 자신에게는 기회가 없다고 절망하던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
성경은 이 기적을 아주 간단히 증언하고 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9).
예수님은 38년 된 중환자를 낫게 하셨다. 눈을 부릅뜨고 몇 년씩 연못을 지켜보다가 남과 경쟁에서 이긴 끝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졸지에 일어난 일이다. 오직 은혜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베데스다이다.
주님은 38년 동안 병든 몸이 의지했던 침상을 스스로 들게 하시고, 마침내 걸어서 베데스다 연못가를 벗어나게 하셨다. 불구의 회복은 현실이 되었으며, 몸의 온전함을 넘어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다. 예수님은 마치 38년 된 병자에게처럼 우리를 향해 물으신다. ‘네가 참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느냐?’
만약 38년 된 병자가 아예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다면, 그는 대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38년 된 병자가 아직 자기 힘으로 해볼 만하다는 가능성이 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38년 된 병자는 은혜를 갈망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오시고, 직접 물으시고, 사랑의 눈빛으로 대하실 때에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은 한 병자에게만 해당되는 회복의 선언이 아니다. 세상의 질서에서 소외되고, 좌절한 사람들을 향한 희망의 선언이 되었다.
예수님은 ‘은혜의 집’조차 경쟁으로 굳어진 베데스다의 질서를 하루아침에 깨셨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만 통하는 관례와 상식을 무력화시키셨다. 예수님의 은혜의 방식은 사회의 억압적인 질서, 비인간적인 제도에 대한 도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고통을 외면하기 십상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소홀히 여긴다.
생각해 보라. 고통받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런 많은 사람들 중에 몇몇 사람을 고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가? 여전히 대부분 사람은 질병의 고통을 겪고 있을 텐데, 과연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구체적인 개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가지셨다. 그 예수님은 바로 거대한 무리들 속에서도 구체적인 나의 문제를 아신다. 그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건이었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를 원한다면,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하였지만, 특별히 구체적인 개인의 아픔과 문제를 통해 접근하신다.
3)
1989년 12월에 처음 만난 이경구 선생이란 분이 있다. 1930년생이었다. 그분이 성탄절을 앞두고 감신대 강당에서 열린 고난모임 후원공연에 구경 왔다가,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얼마 후에 다시 만나 식사를 하였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자신을 소개하며 38년 동안 분단의 감옥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의용군으로 자원했다가 1952년 지리산 근처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평생 징역을 산 것이다. 언뜻 38년이란 말을 듣자마자 내가 떠올린 것이 베데스다 연못였다.
“이경구 선생, 아마 사도 요한이 현대판 복음서를 다시 쓴다면 5장 l-9절 쯤에는 꼭 등장할만한 분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수많은 병자들 틈에 38년이나 된 불구의 몸으로 누워 고침 받기를 기다렸던 불운한 인물, 그 주인공이 지난 해 6월 무려 38년간 긴 감옥살이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했습니다. ‘요를 들고 일어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의 선언 대신 사회안전법이란 올가미를 계속 뒤집어 쓴 채...”(<고난함께> 15호. 1990.8.15.)
이경구 선생은 우리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한번은 <월간 말>이란 잡지에 영업직 사원으로 취직하였다. 38년 동안 감옥에 있었으니 아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영업을 할 수 있을까? 남에게 부탁할 요령도 없고, 배짱도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분의 영업을 도우며 구독자를 늘리는 일에 동참하였다.
38년 된 병자의 구원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오늘도 계속된다. 우리 민족의 경우 38년을 넘어 해방 후 77년 동안 앓아온 중병이고, 고통의 흔적이고,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를 가리켜 ‘38선’이란 상징적 언어로 부르면 뭇 고통이 두루 다 통한다.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삶의 현장 곳곳에 오늘의 베데스다는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곳이라면 모든 사람의 삶의 자리는 베데스다이다. 예수님은 내게 가까이 오셔서 네 고통의 자리, 네 아픔의 자리, 네 불신의 자리, 네 원망의 자리, 네 무능의 자리를 걷고 일어나라고 하신다.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오늘은 존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이다. 회심 이전의 웨슬리와 회심 이후의 웨슬리는 달랐다. 회심 이전에는 자신의 경건, 개인의 영성에 더 많이 집중하였다. 회심 이후에는 교회 제도와 사회 문제로 그 관심을 확장하였다.
존 웨슬리가 살던 영국 사회를 보면 베데스다는 어디에나 있었고, 또 어디에도 없었다. 교회는 주님의 은혜, 곧 베데스다를 전했지만 고(高)교회인 성공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타고난 특권층이었다. 이웃과 사회의 부조리와 불행에 대해 무심하였다. 교회 밖의 사람들의 구원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웨슬리의 회심이 특별한 것은 그 역시 영국국교회 사제였지만, 그는 성공회 사제로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거리와 광장 설교이다. 이것은 당시 성공회가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존 웨슬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광장과 광산과 감옥에서 복음을 전하며, 설교하였다.
소수의 무리와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루었고, 그런 믿음의 힘으로 영국 사회와 교회를 개혁하였다. 그것이 감리교회이다. 이렇듯 감리교 신도회는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는 동시에, 사회악을 없애는데 헌신하였다. 어린이 노동법, 노예 교환 폐지, 가난한 사람들의 처우 개선에 앞장 섰다.
그 결과 존 웨슬리는 트러블 메이커가 되었고, 신분이 높은 고교회인 성공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평화를 증거 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지금껏 존경과 사랑을 받는 신앙의 위인이다. 웨슬리는 성공회라는 제도를 떠났지만, 복음 안에 남은 사람이 되었다.
오늘의 베데스다는 세상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어디든 베데스다이지만, 불신과 원망에 갇혀있다면 베데스다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의 방법은 가장 긴요하고 긴급하다. 기다리기보다 찾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관행에 기대기보다 하나님의 방법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자비와 은혜의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도 베데스다를 허락하시고, 주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