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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임수정, 정지훈, 박찬욱 모두에게 있어 ‘체인지’의 순간이다. 임수정과 정지훈은 신세계 정신병원으로 향했고, 박찬욱 감독은 자기만의 청춘 로맨스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마치 가족 같은 앙상블로 그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 부모의 영화였다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자식의 영화다. 임수정과 정지훈은 지금껏 박찬욱 영화의 주인공들 중 가장 어린 세대들이다. 쉽게 말해 복수 3부작의 주인공은 부모들이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주인공은 자식들이다. ‘부모’라고 하는 현실적 자각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했던 송강호의 <복수는 나의 것>, 최민수의 <올드보이>, 이영애의 <친절한 금자씨>와 비교하자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그러한 이전 3부작이 지닌 무게감을 덜어냈다. 복수 3부작이 보여주는 현실의 고통은 그 자체로 주인공들이 모두 부모이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다.
그런 점에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단지 이전 작들과 장르가 다르다는 것 이상으로 전혀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영화다. 캐스팅만으로 이전 작들과의 연결고리를 찾는다면 정신병원 환자 중 한 명으로 출연한 오달수 정도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교집합이다. ‘박찬욱의 12세 관람가 영화’라는 등급 또한 무척 낯설고 신선하다. 아마 커버를 장식한 이 세 사람의 그림은 올해 가장 독특하고 산뜻한 조합 중 하나일 것이다. 복수 3부작으로 기억되는 하드보일드의 대가 박찬욱 감독, <각설탕>에 이어 두 번째 주인공으로 나선 임수정, 그리고 ‘영화배우 정지훈’이라는 본명이 너무나도 낯선 비, 이렇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감독과 배우들의 조합부터가 영화를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박찬욱 감독 스스로 ‘나의 로맨틱 코미디’, 그리고 복수 3부작과 그 다음 작품 <박쥐>를 잇는 깔끔한 디저트 혹은 맛난 전채라고 얘기해둔 상태다. “예전 내 영화를 보고 거북스러워했던 분들, 가까이 하기 두려워했던 분들 모두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그의 얘기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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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가 괜찮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이해하기 쉽게 영화에 빗대 풀어보자면 ‘싸이보그지만 먹어도 괜찮아’다. 영화 속에서 스스로를 전투용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영군(임수정)은 밥을 먹는 대신 도시락통의 건전지를 꺼내 양손의 검지를 (+)극과 (-)에 대고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충전을 시작한다. 그 사이 수면비행법을 구사하는 왕곱단(박준면)은 영군의 밥을 대신 먹어치운다. 신세계 정신병원에 새로 들어온 영군을 눈여겨 본 일순(정지훈)은 시시각각 영군을 예의주시한다. 다른 사람의 기술이나 성격까지 훔칠 수 있는 일순은 오직 영군을 위해 정성스런 A/S를 제공한다. 하지만 계속 밥을 먹지 않는 영군은 심각한 육체적 위기에 몰린다. 이에 일순은 영군을 살리기 위해,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싸이보그지만 먹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 함께 살아가자고 건네는 화해의 제스처다.
이전 3부작은 ‘결코 괜찮지 않아’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영화들이었다. 딸이 유괴를 당했지만 괜찮아(<복수는 나의 것>), 딸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됐지만 괜찮아(<올드보이>),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들어갔지만 괜찮아(<친절한 금자씨>),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전 3부작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파스텔 톤의 프로덕션 디자인과 더불어 그렇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밝고 화사한 감성으로 완성됐다.
달라진 감수성을 위해 임수정은 영화에서 특별한 변신을 시도했다. 부푼 머리는 어깨 넓이만큼이나 넓고, 눈썹은 노랗게 탈색했으며, 사물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할머니 틀니를 착용한다. 할머니 말투로 수다스럽게 음료수 자판기, 형광등 등과 대화를 나누는 임수정의 모습은 이 영화가 주는 유머의 중요한 영역이다. 특히 임수정의 머리를 두고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의 오대수 머리보다 클 것”이라고 말한다. 외모 변화라는 측면에서 임수정은 오히려 정지훈보다 더 힘든 선택을 했다. “영군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감독님을 비롯해서 스탭들이 갖가지 아이디어들을 내놓았다. 눈썹 없는 느낌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감독님은 눈썹을 없애자는 가혹한 농담까지 하셨다.(웃음) 그러다 결국 눈썹을 마치 없는 것처럼 탈색하기로 했는데, 최대한 영군을 ‘쾡’한 느낌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판타지영화라 불러도 좋을 만큼 인물들의 외모부터 초현실적이다. 더불어 임수정은 밥을 먹지 않아 말라가는 몸을 위해 계속 더 큰 옷을 입었고, 갈비뼈까지 앙상하게 뒷모습이 드러나는 신을 위해 본의 아닌 다이어트를 하기도 했다.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가 뒤엉키는 이야기는 그러한 캐릭터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올해 임수정은 두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여배우들의 전반적인 침체 속에서 그야말로 소리 없이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각설탕>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비교하는 임수정의 얘기는 간단하다. 장르도 다르지만 환경도 달랐다는 것. “<각설탕>은 세트 촬영이 전혀 없고 전부 로케이션 촬영이었다. 하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실내 촬영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많은 공상을 펼쳐야 하는 캐릭터에 더 큰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나마 그런 분장과 외모로밖에 나가지는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웃음)”
더불어 가상의 인물로 가상의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느낌이 과거 <장화, 홍련> 때보다 더욱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영군은 아마 다시는 연기하기 힘들 캐릭터다. 영화 속에서 영군은 자신의 소망대로 행하고 그것은 적어도 영상으로는 현실화돼서 나타난다. 기관총으로 변한 그 손가락들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총격을 가한다. 이 영화까지 ‘복수 4부작’이라 부를 수 있다면 바로 그러한 영군의 억압된 성격에 기인할 것이다. “지금껏 해온 캐릭터들과 비교해 가상의 느낌이 가장 큰 만큼, 말 그대로 연기 모델을 찾지 않고 느끼는 대로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다”는 게 어쩌면 영군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그렇게 임수정은 싸이보그가 되면서 전혀 새로운 인간 혹은 배우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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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박찬욱 감독의 팬들이라면 그가 정신병원을 무대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새뮤얼 풀러의 <충격의 복도>를 떠올렸을 것이다. 실제로 박찬욱 감독을 비롯한 몇몇 스탭들은 함께 시네마테크에 <충격의 복도>를 보러가기도 했다. 먼저 결론은 간단하다. 공간은 같지만 정서는 180도 다르다는 것. “물론 촬영, 조명, 미술감독 모두와 함께 <충격의 복도>를 보러 가긴 했다.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 뭐 그런 얘기들을 나눴다(웃음)”는 게 박찬욱 감독의 얘기다. 그만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인물들은 참으로 밝고 유머러스하다.
지금껏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 태생적으로 밝은 인간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의미심장한 변화다. 예전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무언가 결핍돼 있거나 말 못할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할머니와 강제로 이별하게 된 기억을 갖고 있는 임수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다. 그 성격은 다르지만 이전 주인공들처럼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묘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정지훈이 연기하는 일순은 말 그대로 꾸밈이 없는 사람이다. 그 역시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특별히 정서적 울림을 갖는 장면들은 아니다. 군대에 있을 때 성폭행을 당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지금의 그를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는 그저 신세계 정신병원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또한 이 영화가 박찬욱 감독의 이전 영화들처럼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일순은 그 구원을 몸소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는 정말 아무런 조건 없이 ‘난 영군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훔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 가장 많이 미소 지은 배우를 꼽으라면 이제 단연 정지훈이 그 첫머리에 꼽힐 것이다.
임수정보다 다소 덜 할지는 몰라도 정지훈의 변화도 사실 그의 팬들에게는 ‘충격’이다. 더벅머리에다 그 날렵하고 단단한 근육질의 몸매를 최소화해서 드러내는 스즈끼 의상이 무척 낯설다. 더구나 의상은 수시로 그의 엉덩이에 끼어 씹었다 뱉었다를 반복한다. 이제 한류 그 이상의 ‘인터내셔널 스타’라는 호칭도 손색없을 법한 그의 영화 데뷔작으로는 그 변화가 파격적이다. 여느 스타 가수의 영화 데뷔 때처럼 손쉬운 영화를 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영 마뜩찮은 일이었다.
“영화를 접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런 점들은 특별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영화 속 인물이 되는 순간 그건 전혀 다른 세계의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이전 영화들에서 간혹 보인 유머가 보다 폭넓게 도처에 널려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아시아지역으로 집중된 한류 그 이상을 꿈꾸는 현재의 자신처럼 일순이 되는 과정 역시 새로운 도전이었던 셈이다. 사실 그를 설명하는 데 있어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상투적인 수식어는 매번 다시 쓸 수밖에 없다. 현재 그는 12월 중순 공연을 앞두고 하루 6시간 훈련이라는 강행군을 이어오고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원칙이다. 영화 속에서 그가 영군에게 들려주는 요들송 역시 남몰래 밤새 연습한 결과다. 그러한 성실함이 바로 지금의 그를 만든 원동력이다. 그렇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영화배우 정지훈’이 ‘가수 비’를 따라잡으러 나섰다.
사진 김재현
주성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