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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며 건장한 사내 하나가 안으로들어섰다. 사내는 목에 힘을 주면서 거만한 눈으로실내를 둘러보았다. 유남지(兪南芝)는 직감적으로 바로 저남자구나 하고 생각했다. 동시에 적이실망을 느끼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생각같아서는 뛰쳐 일어나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중간에서 소개해 준 사람을 생각해서 그럴수도 없는 일이었다. 옆에 앉아 있는 중매쟁이 여인이 반색을하며 그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눈길이 마주치자 사내는 뚜벅뚜벅 걸어왔다. "체격이 당당하죠?"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보면서 여인이남지의 귀에다 대고 재빨리 속삭였다. 말이중매장이지 마흔 안팎의 나이에 무스탕인가뭔가 하는 털이 달린 가죽 반코트 차림이 흡사 귀부인 같은 모습이다. 남지는 대답대신 밑으로 시선을 깔았다. 실망, 그것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모든 것에 회의를 품게 한다. 이번이 다섯 번째 맞선이었다. 그리고다섯 번째 맞보는 실망이었다. 단 한마디이야기를 나누어보지 않았는데도 보는 순간첫눈에 실망을 느낀다. 그리고 그 같은실망을 부푼 기대감으로 바꾸어준 남자는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중매쟁이 여인이 일어서서 사내를 맞았다. 남지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담배를 꺼내 피우고 싶었다. "실례합니다." 사내가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데 보니 의자가 작은 것 같았다. 향수냄새가확 풍겨왔다. 이발소에서 갓 빠져나온 듯기름이 발라진 머리는 흐트러진 구석 하나없이 빗질이 잘 되어 있었고, 혈색 좋은얼굴은 깨끗이 면도질이 되어 있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차가 밀리는바람에" 요즘은 으레 말끝마다 <차가 밀리는바람에>하고 덧붙이는 것이 인사말처럼되어 버렸다. 차가 밀리는 바람에 늦었다고?흥, 웃기는군. 약속시간은 12시 정각이었는데 사내는이십 분이나 늦어서 나타난 것이다. 중매쟁이가 붙잡지 않았다면 이십 분이나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로 인사들 하시죠. 이쪽은김창대(金昌大)사장님." 사장님이라는 말에 중매쟁이는 힘을 주는것 같았다. "김창대라고 합니다." 크고 걸걸한 목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그목소리에 남지는 주눅이 들었다. "유남지입니다."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몇학년입니까?" 묻는 것도 순서가 있는 법인데 이 사람은제멋대로다. 중매쟁이 여인한테서 들었을텐데 괜히 묻고 있다. "3학년이에요." 남지는 비로소 상대방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느 학교죠?" 어느 학교면 뭐 할 텐가. 건방진 녀석같으니. 남지는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보다도 먼저 차를 시키시죠." 그녀의 입에서 총알처럼 말이 튀어나오자사내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것을 보고중매쟁이가 몹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 차는 차고 묻는 말에 먼저대답해야지." 곁눈질로 흘기는 것을 보고 남지는 은근히부아가 치밀었다. 성질 같아서는 뛰쳐일어나 나가버리고 싶지만 소개해 준 사람의체면도 있고 해서 그녀는 지그시 감정을눌렀다. "사모님이 저에 관해서 말씀드리지않았나요? 전 말씀 드린 줄 알았는데요." "내가 말한 건 말한 거고 직접물으시니까 본인이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지않아. 그래서 서로 친숙해지는 거 아니야." 사내한테는 눈에 띄게 절절 기고 있으면서나한테는 시종일관 반말이다. 왜 남자쪽에만 굽실거리는 걸까.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말씀드리죠 .학교는 ㅇ대이고, 전공하고 있는건불문학이에요. 졸업 후에는 프랑스로유학가는 게 소원이에요." 재빨리 지껄이고 나서 그녀는 차를주문받으려고 옆에 기다리고 있는 웨이터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피주세요." 그녀가 차를 주문하는 바람에 다른 두사람도 못마땅한 얼굴로 마실 것을주문했다. 그들은 똑같이 인삼차를 달라고말했다. "요새 젊은 여대생들은 발랄하면서도당돌하죠?" 마담뚜가 동의를 구하듯 사내를쳐다보았다. 사내는 굳었던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띄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더 귀엽지 않습니까. 허허허허." 전혀 우습지도 않는데 억지로 너털웃음을웃는다. "귀엽게 보시니까 다행이네요. 대학교3학년이면 귀여울 때이지요 . 아무튼 요즘여대생들은 우리 때에 비하면 참 당돌하고자기 주장이 뚜렷해요 . 우리 때에는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고 지낼 때가많았는데 요즘 애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미스 유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여대생들의 전반적인 경향이 그렇다는거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웃기는 것들이다. 사내와 뚜쟁이가 서로죽이 맞아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하여간 귀엽지 않습니까. 허허허허." 남지는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물에젖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는기분이다. 웨이터가 차를 가져왔다. 차를 마시는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지는 오른쪽 창 밖에 쏟아져내리고 있는폭포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인공폭포였는데수 미터 높이에서 꽤나 시끄러운 소리를내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호텔 커피숍은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커피숍은아주 넓어 보였고, 사치스럽게 실내장식이되어 있었다. 인공폭포 뒤쪽으로 보이는야산의 푸르름에 눈을 주고 있다가 남지는갑자기 사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질문을던졌다. "실례지만 사장님이라고 하시던데 무슨사업을 하세요?" 생글거리며 시침을 떼고 묻자 두 사람은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말해 줬는데 사장님한테서 직접듣고 싶은가 보죠. 말씀해주세요." 마담뚜가 깍듯이 말하자 사내는 미소를지으면서 명함을 꺼내 남지에게 건네주었다. 명함에는 여러 개의 회사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뒷면에도 무엇인가 빽빽이적혀 있었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것들은 그가 사회적으로 맡고 있는 명예직들인 것같았다. 대산실업(大山實業), 대산관광,대산온천, 대산클럽이런 것들이 김창대 사장이 가지고 있는업체들이었다. 아직 미혼인 30대의 나이에여러 개의 사업체를 굴리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흔치 않는 일이다 . 하지만 김 사장은결코 입지적인 인물은 아니다. 남지가 마담뚜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김사장은 세상을 떠난 선친으로부터 막대한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그가 굴리고 있는 사업체도 모두 그의선친이 세운 것들이었다. 외아들인 그는 손하나 까닥하고 있지 않다가 아버지가 죽자 절로 굴러들어온 그것들을 물려받게 되었던것이다. 업체 이름은 그렇다 치고 뒷면에 인쇄되어있는 것들은 한마디로 웃기는 내용들이었다. 청년회의소 지구 회장, 청소년선도위원, 사회정화위 위원, 한미친선협회부회장, 대한요트협회 클럽 회장, 반공수호연맹 부회장, 구의회 의원,관광협회 이사 한 면에 가득 차 있는것이 맡고 있는 직책이 너무 많다 보니 미처다 싣지 못한 것 같았다. 명함치고는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과시를 위해 이렇게 명함에다 잔뜩무엇인가를 적어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볼때마다 그녀는 구역질이 나곤 했다. 그런명함을 준 다음 추근대는 사람을 그녀는 몇번 만난 적이 있었다. "대단하시군요. 하시는 일이 참많으시네요." 남지가 속으로 잔뜩 비웃으면서 겉으로는듣기 좋으라고 말하자 마담뚜가 잽싸게끼어들었다. "명함에 적혀 있는 것 말고도 하시는 일이얼마나 많다구. 강남에다 호텔도 하나 짓고있고, 내년에는 설악산에다 콘도도 지을계획이라구. 김 사장님, 그렇죠?"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이란 끝이 없으니까요." "돈도 잘 버시겠네요?" 빈정거리며 물었지만 상대방은 눈치를 못채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런 거야 말할필요가 있겠느냐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것을보고 마담뚜가 또 참견했다. "차암, 미스 유두 뭘 몰라도 한참모르네. 엄청난 사업체를 굴리고 계시는데돈 잘 버느냐는 게 질문이 되는 소리야. 그런 건 문제가 안 되지. 수백억 자산을가지고 계시는데." 곁눈질로 눈치를 보면서 말꼬리를 흘리자 김창대는 만족스러운 듯 껄껄거리고 웃었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번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이죠. 돈이란언제라도 벌 수가 있는 거니까요." 제법 공자같은 말씀을 한다. 웃기지만않으면 좋겠는데. 마담뚜가 또 나서서 사내의 기분을 잔뜩추켜세워 주는 말을 늘어놓더니, "아이구, 나 봐, 주착없이 앉아서 두 분데이트만 방해하고 있었네. 자, 그럼다정하게 이야기들 나눠봐요. 난 일이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어요. 두 분이 아주 잘어울려 보여요." 마담뚜가 몸을 흔들며 사라지자 남지는사내 보기가 더욱 거북살스러워졌다. 너무거북해서 숨쉬기조차 불편할 정도였다. 김창대에 관한 이야기를 맨 처음 꺼낸사람은 친구의 언니였었다 . 친구의 언니라는여자는 강남의 이른바 <로데오거리>라는고급의상실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지난 겨울 친구와 함께 그 의상실에놀러갔다가 마담뚜의 눈에 띠었던 것이다. 친구의 언니인 디자이너 강채리와마담뚜는 친구 사이인 듯 의상실 옆에 있는응접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날인가강채리로부터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는데, 좋은 남자가 한 사람 있으니 한번 만나보지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남지는 사귀는 남자가있기 때문에 아직은 선볼 생각이 없다고잘라 말했다. 그러나 강채리는 그 후 두 번이나 더전화를 걸어왔다. 웬만한 남자라면 동생친구한테 소개해 주지 않는다. 상품으로말하면 상당히 값나가는 물건이기 때문에놓치기가 싫어 그러는거다. 알고 보니까사귀고 있는 남자가 고시준비생으로 고시에계속 떨어지기만 한다던데 그런 사람 기다릴필요 뭐가 있느냐. 합격해 봐야 판검사아니면 변호사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대단하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돈 잘버는 사람이 최고다. 돈만 있으면 못 할 게없지 않느냐. 이 언니가 이렇게 권할 때는그럴 만한 상대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거절하지 말라구. 내 자존심도 좀 생각해줘야 할 거 아니야. 남지 너 정도의미모라면 재벌 2세 하고도 결혼할 수가있어. 사람은 기회를 잡아야 해. 기회를 놓치면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나 보라구. 나도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요 모양 요 꼴아니야. 남지가 알기로는 강채리는 한결혼한 경력이 있는 이혼녀로 지금은연하의 남자와 동거중이라고 했다. 이튿날 남지는 강채리의 체면을 생각해서의상실로 나갔고, 거기에서 마담뚜를소개받았다. 마담뚜는 그녀에게 명함을건네주었는데, 거기에는 <헤어 뷰티 살롱이문자>라고 씌어 있었다. 미장원이라는말을 사용하면 격이 떨어지는지 헤어 뷰티살롱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남지는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그녀가 마담뚜인지는 몰랐었다. 그녀가 중매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나중에 친구를 통해서였다. 마담뚜는 입에침이 마르게 김창대라는 남자에 대해서칭찬을 늘어놓았고, 강채리는 옆에서 미소를지은 채 가끔씩 그녀의 말을 거들곤 했다. 전혀 모르는 남자를 한번쯤 만나 보는손해볼 것은 없다. 밑져봐야 본전이기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솔직히 말해 또실망을 느낄까봐 그것이 겁이 났다. 그녀는 집안에서 서둘러대는 바람에 네번인가 맞선을 보았었다. 결과는 한마디로실망이었다. 실망감을 안고 돌아올 때의기분이란 당사자가 아니고는 모른다. 실망감과 함께 그녀는 배신감까지 느꼈었다. 그래서 속으로 굳게 다짐한 것이 앞으로는절대 맞선 따위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안사람들과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가만 놓아두지를 않았다. 다섯 번째 맞선을 보기 위해 호텔커피숍으로 들어설 때 그녀는 자기 걸음이아닌,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등을떠밀리다시피 해서 들어선 기분이었다. "식사 안 하셨죠? 우리 식사나 할까요?" 우리라고? 이 남자 꽤 웃기네. 그녀는 사내의 제의에 응할 듯이 미소를 지었다. "라면 먹고 왔어요." "라면이오?"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쳐다보았다. "라면 가지고 식사가 됩니까. 자, 우리 요위에 가서 프랑스 달팽이 요리나먹어봅시다. 달팽이 요리 먹어볼 만해요." 사내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남지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가 불러서 못 먹겠어요." 달팽이 요리라고? 흥, 달팽이 요리라고하면 이가 갈린다. 고등학교 동창들 가운데공부를 지지리도 못 해 국내 대학에는진학을 못 하고 프랑스에 유학을 간 멍청한애들이 있는데(프랑스라고 그런 멍청한것들을 받아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어학연수니 실내디자인이니디스플레이니 해서 정규대학이 아닌, 한국같으면 학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들어가서 아까운 시간과 돈이나 잡아먹고있는 것이다) 그 애들이 방학중에 한국에돌아와서 하는 말이 프랑스 달팽이 요리칭찬이었다. 식사때마다 달팽이 요리 생각이 난다느니어쩌니 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달팽이라는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웨이터가 종이 딸랑거리는 팻말을 들고지나갔다. "저기 이름이 적혔는데요." 남지가 턱으로 팻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검은 매직으로 그의 이름이 크게 적혀있었다. "아, 전화가 온 모양인데. 잠깐 좀실례합니다." 목에 힘을 주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는사내의 뒷모습을 남지는 눈여겨 바라보았다. 맞선 상대이니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자세히보아둘 필요가 있다. 일단 한번 실망을느끼면 그것은 더욱 증폭되기 마련인가보다. 사내의 걸음걸이는 오리와 닮아보였고, 좌우로 씰룩거리는 엉덩이가 퍼질대로 퍼진 중년여인의 엉덩이보다 더 커보였다. 무슨 남자가 엉덩이가 여자처럼 저렇게클까. 정말, 망칙스럽고, 그야말로꼴불견인데. 저 남자하고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것같다. 자리를 다른 데로 옮겨가면서까지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상대방에 대해 탐색할 필요도 없고 이것저것물어볼 것도 없다. 상대는 이것저것꼬치꼬치 캐묻겠지. 형식적으로 대답하고일어서는 거다. 창 밖으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고있었다. 인공으로 만들어놓은 벼랑여기저기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고, 거기에부딪치며 쏟아져내리는 폭포는 인공치고는아주 그럴 듯해 보였다. 눈도 오는데 걸이한테나 찾아갈까. 강화걸(姜和杰)은 지금 서울에서 가까운어느 고시촌에서 사법고시 준비를 하고있는, 남지의 애인 아닌 애인이라고 할 수있는 남자였다. 그녀는 부르기 쉽게 그를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는 몹시 외로울 것이다. 그를 보지 못한지가 두 주일이 넘는다. 주인 아주머니가주는 밥만 먹고 있겠지. 집안이 워낙가난해서 부식비 하나 마련할 처지가 못된다. 따라서 그녀가 부식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그는 콩나물국과 김치만으로 밥을 먹을수밖에 없다. 몸이 워낙 허약한 그는 영양을충분히 섭취해야만 그 기나긴 싸움에서쓰러지지 않고 버텨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그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동정하고 있는 걸까. 첫번째로 관계한남자라는 것이 이렇게도 끈끈하게 사람을붙들어매는 것일까. 고시를 볼 때마다떨어지는 그를 그녀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떨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고개를 돌릴수가 없는 것이다. "아, 미안합니다." 창대가 돌아와 앉는 바람에 그녀는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단발머리를 쓸어넘겼다. "머리를 보니까 여고생 같군요. 그래서그런지 아주 앳되 보이는데요." "앞으로 기를 거예요." "그대로가 좋겠는데요." "왜요? 어려 보여서요?" 그녀는 음흉스럽게 웃고 있는 사내를 빤히쳐다보았다. 빨간 넥타이가 아주 촌스러워보인다. 돈푼깨나 있는지는 몰라도차림새하며 행동거지가 촌스럽기 짝이 없다. "어려 보인다는 건 좋은 일 아닙니까?" "그래요? 남자들은 어려 보이는 여자를좋아한다면서요? 술집에 가면 영계만찾는다면서요?" "흐흐 영계만 찾는 남자들이 있지요." "아저씨는 영계 안 좋아하세요?" 필드에 나가 골프를 자주 치기 때문인지는몰라도 사내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다. 거기에다 혈색이 좋기 때문에 건강미가 넘쳐보인다. 그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것같았다. "그,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 듣기에 별로안 좋은데요." "그럼 뭐라 부르죠? 사장님이라고부를까요?" "글쎄, 그것도 좀 어색한데." "알았어요. 그럼 제가 알아서 적당히부르겠어요. 사장님은 영계 안 좋아하세요?" 거침없이 영계 운운하는 그녀를 보고 그렇게 당당하고 거만해 보인던 사내도머뭇거리기만 했다. "난 뭐 그런 데 취미 없어요." "그래요? 그런데 왜 나이 어린 여자만신부감으로 찾으세요?" "내가요? 누가 그런말을 하던가요?" "아까 그 아줌마가요. 사장님은 나이차이가 많은 어린 여자만 찾는다면서 나이 많은 남자하고 결혼하면 귀여움 받고좋을 거라고 하던데요." "그, 그건 다르지요. 술집에서 영계를찾는 거 하고 신부감으로 나이 어린 여자를찾는 거 하고는 다르지요." "그럴까요? 지금 실례지만 춘추가 어떻게되세요?" 가능하면 판이 깨지는 방향으로 나가는 게좋겠지 . 마담뚜한테 가서 고 계집애건방지고 싸가지가 없어서 못 쓰겠다고 말해주면 되는 거다.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눈을 내려깔면서담배를 피워물었다. "서른여덟입니다. 미스 유는스물셋이라면서요?" "네. 그래요. 한 번 재수해서 3학년이에요. 이번에 또 낙제하면 두 번재수하는 셈이에요." "낙제할 만큼 성적이 나쁜가요?" "네, 형편없어요. 대 입학할 때도 겨우턱걸이로 들어갔어요." 창대는 믿을 수 없다는듯 고개를갸우뚱했다. "왜 자기 단점을 그렇게 강조합니까?" "이런 자리에 나오면 으레 단점은 감추고장점만 늘어놓는 게 싫어서 그래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잖아요. 그건그렇고 저하고는 꼭 열 다섯 살 차이네요. 엄청나게 나이 차이가 많네요." "사실 뭐 그렇게 많은 건 아닙니다. 남녀사이에 나이 차이 같은 게 무슨 문제입니까. 중요한 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문제이죠." 웃기네. 그만 좀 웃기시지. "그건 그래요." 남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졸업 후에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게 소원이라고 했죠?" "네, 파리에 가서 실컷 공부나 하고싶어요. 그리고 그 분위기에 푹 젖어보고싶어요. 서울은 이젠 싫어졌어요." 사내가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탁자위에 팔굼치를 올려놓고 두 손을 마주 잡는데 보니 그 손이 괴물처럼이나 커 보였다. "유학은 결혼하고도 갈 수 있는 거아닙니까. 난 내 아내될 사람이 결혼 후에외국에 유학가겠다면 얼마든지 보내줄생각입니다 . 물론 공부하는 데 지장없이학비도 넉넉히 보내주고요. 난 별로 공부를못 했기 때문에 아내가 공부하겠다면얼마든지 지원해 줄 생각입니다. 나한텐다른 건 없어도 다행히 경제적인 여유는있으니까요. 이건 빈말이 아닙니다." 계속 웃기는 걸 보니 이 남자는 차라리코미디언 쪽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훌륭하신 생각이네요 . 누가 사장님아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행복하겠어요." "하지만 아내될 사람 만나는 게 그렇게쉬운 일입니까. 아직 못 만났으니까지금까지 요 모양 요 꼴로 지내오지않았습니까. 결혼한다는 거 정말 힘들어요." "너무 최고만 고르시니까 힘들죠. 그런데왜 그렇게 결혼이 늦으셨나요?" "사업하느라고 정신없이 뛰다보니까이렇게 늦었죠.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여자도없었구요. 이젠 결혼해서 좀 쉬고 싶어요. 남자는 역시 가정이 있어야 마음이 안정이되고, 책임감도 생기고 해서 일을 더 열심히하게 되나 봐요. 저기 그건 그렇고 여기서이럴 게 아니라 우리 어디 가서 식사나합시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라면 먹었다니까요." "아, 침, 라면 먹었다고 했죠. 라면이야간식이지 그게 어디 식사라고 볼 수있습니까." "어머나, 멋있어! 눈 좀 봐요!" 남지가 창 밖으로 바라보며 감탄하자사내는 무표정하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씩 흩날리던 눈이 어느새 굵은함박눈이 되어 날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있는 동안 그녀는 누군가를 찾아 어디론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 뭉클하게 젖어오는것을 느꼈다. "눈도 멋지게 오는데 우리 드라이브나하죠. 우이동 쪽으로 가면 분위기 좋은방석집이 있는데 한식을 잘 해요. 우리 거기가서 식사나 하면서." "아뇨. 이만 가봐야 해요." 이 남자는 걸핏하면 우리라는 말을 즐겨사용하곤 한다. 우리라니.그녀가 일어설 듯이 백을 집어서 무릎위에 올려놓자 사내의 안색이 굳어졌다.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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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재미있게 구독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