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탕에 얽힌 일
나는 오 남•매 형제자매 중 장남이지만 내 위로 누님이 있다. 누님은 21살에 시집을 가 올해 81세이다. 시집간 지 6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매형은 87세이다. 매형은 그간 건강했지만 80대 후반이 되니 건강이 쇠약하여 누가 봐도 환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말은 잘한다. 매형은 검소하고 절약하여 돈을 모아 지금은 ‘회장님’이라는 칭호를 듣는다.
매형은 80세 이전에는 나에게는 물론 동생들에게도 용돈이라고 단 한 푼도 주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4년 전 섬진강이 범람하여 가옥이 침수되고 살림 가지가 온통 침수되어 못 쓰게 되니 수리하라고 처음으로 돈을 보내 왔다.
그 돈으로 도배, 장판, 싱크대, 장롱, 침대, 수세식 화장실을 놓았다. 매형 덕분에 종전보다 더 깨끗한 집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매형에게 고마움을 가졌다. 뜻하지 않게 선의를 베풀어 그 이후 매형 생일 때에는 꽃과 케이크를 사가지고가 축하를 해 드리려 가는 날이다.
모처럼 매형이 소유한 빌딩에 가니 1층은 농협 영업소 2, 3, 4, 5층은 각종 의원이 골고루 들어와 있다.
가정의학과, 비뇨기과, 안과, 신경과, 치과가 성업 중이다. 금융기관과 의원이 있으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또 하나의 빌딩은 모두 식당을 영업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형이 왜 ‘회장님’이라고 사무실 직원들이 말하는가! 실감했다. 매형의 자녀로 생질은 하나인데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아파트, 외제 승용차에 오피스텔을 갖고 있다.
생질은 말하기를 '오피스텔은 가끔 머리를 쉴 때면 와서 쉬고 간다'고 한다.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만 있어도 살만한데 아파트에 오피스텔 외제 승용차를 몰고 있는 생질을 보고 부모를 잘 만나야 여유롭게 잘 살 수 있겠구나! 부러워했다.
나에게는 슬하에 삼남•매가 있다. 고교를 여수에서 졸업하고 대학을 서울에 진학하기 위하여 서울에 처음 올 때다.
서울에 누님이 거주하기에 입시 중에 매형댁에 기거하게 되었다. 시험을 치러 가는 날이니 매형이 자가용으로 시험장까지 동행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매형은 관심도 없고 ‘지하철 타고 가라’는 표정이었다. 속으로 이날 많은 승용차를 태워 줄줄 알았다. 딸에게 오히려 내가 미안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이후 내 자녀들은 매형댁이라고 하면 학을 떼는 신세가 되었다. 그 이후 내 자녀들은 매형댁은 얼씬도 안 한다.
몇 년 만에 서울에 왔다. 매형은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하여 따라나섰다. 여수에서 서울까지 왔으니 부자이고 하니 아주 맛 좋은 음식점으로 안내할 줄 알고 속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추어탕집으로 가자'고 한다.
따라 나서니 식당은 반지하에 있고 손님들이 줄을 서고 있다. 추어탕은 그런대로 맛은 있으나 가격이 9천 원이다.
여수에서도 일만 원인데 서울에서 9천 원이니 저렴한 식사비다. 나는 속으로 실망했다. 추어탕은 잘 먹었지만 그래도 비싼 음식을 사 주는 줄 알았다. 음식 맛과 양이 문제가 아니라 요즘 식사비로 너무 싼 음식이다. 잘 먹긴 했다. 여수에서 서울까지 왔는데 겨우 추어탕이라니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여수에서 서울에 한 번 오려면 비용만 일십만 원이 든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근검절약하니 돈을 모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죽음이 곧 문전에 있어 저승사자가 곧 모시러 올 것 같은 느낌인데 노인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지도 못하고 휠체어에 의지하는 분이 해도 너무 한다 생각했다.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돈이라면 뭐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니야! 그렇다고 그 돈을 요즘 기부로 회자 되는 광원산업 회장 이수영님과 같이 과학발전에 도움이 되라고 카이스트에 766억을 기부하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독일 사람이 2차 대전 중 프랑스에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매일 비누와 치약을 배급했다. 그런데 비누와 치약을 반만 쓰고 아꼈다. 프랑스 감독관은 독일인에게 “무엇 하려 그렇게 비누와 치약을 절약하느냐? 매일 수용소에서 주는데 말입니다.” 하니 독일 포로는 “우리의 포로 생활은 잠깐이지만 장차 우리나라에 가서도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했다고 한다. 매형의 검소한 생활이 나와 우리 형제자매들 모두에게 단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매형이 젊어서 허랑방탕 살았다면 어떻게 처가댁에 덕을 베풀었겠느냐 생각할 때 추어탕도 고마운 생각이 든다.
첫댓글 이 글을 읽기전에 매형의 이야기를 조금 들은바가 있는데 수해가 나서 처갓집 보수를 위해
많은 돈을 내어주시고, 집이 없는 둘째처남 집까지 사준신 것은 보기드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처럼 상경해서 값싼 추어탕을 대접받았다고 했는데, 말씀을 그리 하시지만 그 어간에는
고마움이 묻어나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한때는 이러저러한 일로 서운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지만, 생을 마감해가는 말년에 처가를 위해
아낌없이 배푸신 마음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암튼, 매형께서 대단한 재력가시군요. 부럽습니다.
옛말에 큰나무 밑에서는 덕을 보지 못하지만 큰 사람밑에서는 덕을 본다 했는데 결과적으로 큰
덕을 본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남동생 아파트를 사주었습니다.
수해를 당하여 보수비를 많이 받아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동생이 덕을 보고 저도 큰 덕을 보고 나서 매형에게 충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 융숭한 곳에 데리고 갈 줄 알았는데 추어탕집을 가자고 하여 조금은 서운했습니다.
끝으로 매형이 왜 돈을 모았는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절약하고 저축하여 모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제 매형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매형에게 충성을 할 것입니다.
맛깔나는 작품 잘 감상했습니다
돈을 모으는 기본은 아무래도 근검절약이다 싶습니다
매형되시는 분은 대인이시군요 소인은 쩨쩨한 데 돈을 쓰지만 대인은 큰일에 돈을 쓰지요
지난날 이런저런 오해도 있었지만 결과가 아름다우니 흐뭇합니다
추어탕으로 매형을 매도하시는 듯하더니 결국 매형을 존경하시는 선생님의 본심을 드러내셨군요~
그렇습니다. 그 먼거리에서 모처럼 갔는데 '최저가' 중식 추어탕이라니 양이 차겠습니까!
부자라고 기대했는데 말입니다. 추어탕을 먹으면서 생각하니
"아! 이것이 나와 동생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처방전 이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절약하고 저축하여 노후에 베푸니 얼마나 훌륭한가 생각했습니다.
인산님의 주옥같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장마에 농장으로 인해 혹시 어려움 없이 건강 잘 보존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