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성탄 8부를 보내고 있습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지난 시간에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나십니까?
선악과, 다시 말하면 금단의 열매 이야기를 했죠.
왜 나무를 거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심으셨을까,
그리고 또 생명나무 열매나 선악과 열매는 누가 먹는 열매인가,
그리고 100%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인간에게 주셨다면 아담과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따 먹지도 않았을 터인데
하느님도 힘들고 사람도 힘들게 하셨을까?
그렇지만 하느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자로서의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 얘기 드렸습니다.
인간을 틀에 끼워 놓은 것이 아니라, 또 하등의 자유도 없는 본능만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가 있는 피조물로서 만들어 놨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그런 얘기도 드렸죠.
선악과를 먹자마자 초능력이 생기고 하느님과 똑같아진 것이 아니라
초능력이 생기고 난 다음에 벌어진 첫 번째 일은 무화과나무잎을 따서 자기의 치부를 가렸다는 거죠.
하느님과 같아진다는 것이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인가, 또 가리려면은 가슴부터 다 가려야지 왜 밑에만 가렸을까,
아마 그런 이야기를 지난번에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부끄러워서 앞만 가렸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분명히 성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같이 현명해지고 싶어 먹었는데, 먹는 순간 성(性)이 부끄러워졌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지나친 비약 같습니다.
성서 해석에 권위자인 구로사끼 고기찌는
‘그들의 자유 의지로써 자기를 지배하지 못할 최초의 부분은 성적인 부분이다.’라고 지적합니다.
확실한 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그 열매를 먹고 난 다음에 자신의 연약하고 흉한 모습을 발견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기는 고사하고 창조주이시며 절대자인 하느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신을 바로 발견했던 것이 아닌가,
아담과 하와는 비참한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부끄러웠던 겁니다. 가렸던 겁니다.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겁니다.
선을 알아도 선을 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요.
또 악을 알아도 악을 버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겁니다.
‘수치’라는 것이 단적으로 소위 성(性)에 상징 되어있는 것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는 허둥지둥 무화과나무잎을 휘감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치부를 가렸듯이, 우리들의 몸뚱아리도 옷으로 가릴 수 있지만,
영적으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은 옷을 아무리 겹겹이 껴입는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 가릴 수가 없는 겁니다.
무화과나무잎으로 수치를 가리고 난 다음 하느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동산 나무 사이에 몸을 숨깁니다.
만일 선악과를 먹고 하느님과 같이 되었더라면 절대 둘은 숨지 않았을 겁니다.
넘보지 못할 것을 넘은 것에 대한 그 비참함이죠.
나무 뒤에 숨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이 묻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셨겠습니까?
여기서 하느님이 물으시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네가 어떤 상태이길래 나를 보고 피하느냐 이겁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성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성 사이에 죄가 끼어들면 하느님을 보고 피합니다.
멀어집니다. 성당에 안 나오죠.
성당에 열심히 할 때는 길다가 수녀님을 봐도 반갑고, 차 타고 가다 성당 종탑만 봐도 성호를 그었는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성이 깨어지고 난 다음에는 성당 쳐다보질 않습니다.
어둠이 들어온 거죠.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하느님과 같이 산책하던 처지였습니다.
그때는 부끄러움을 못 느꼈던 거죠.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하느님을 보고 피했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든 겁니다.
‘너 어디 있느냐?’
어찌하여 너와 내가 이런 상태가 됐느냐 이겁니다.
도대체 너의 상태가 어떻길래 나를 보고 피하느냐 이겁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성이 깨어질 때도 이웃을 피합니다.
내가 나 자신과의 관계성도 깨어진다면 나 자신이 죽도록 싫은 거지요.
밉습니다.
나 자신의 긍지도 자기에 대한 사랑도 떠나버리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느님과 같아져 그야말로 하느님과 친구 정도 비슷하게 서로 맞먹을 줄 알고
오히려 그전보다도 훨씬 더 관계가 좋아질 줄 알았지만, 그렇게 되질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늘 점검해 봐야 할 것은 이 세 가지에 대한 관계성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성.
내가 요즘 성당에 나가기 싫다. 그리고 기도도 하기 싫다?
뭔가 이럴 때는 분명히 그 관계성이 깨져 나가고 있다는 싸인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이 물으셨죠?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물으시니까 아담과 하와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기에서 인류 최초의 거짓말이 나옵니다.
그들이 벗은 것이 부끄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숨은 첫 번째 이유는 금단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답변해야만 됐습니다.
‘우리들은 저 금단의 열매를 먹었기에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같이 되고 싶은 엉뚱한 생각으로 먹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구별하게는 되었으니 의당 이렇게 사죄해야만 됐습니다.
그렇지만 아까 얘기한 것처럼 그들은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됐고, 사죄해야 할 때 무엇을 사죄해야 할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선을 행할 힘이 없었던 겁니다.
야훼 하느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내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구나.’
아담은 또 핑계를 대죠.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저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주었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까지 끌고 들어갑니다.
이중의 책임 전가를 합니다.
‘당신께서 귀찮게시리 내게 짝지어 주신 저 여자가 그 선악과를 주어서 나는 할 수 없이,
먹기 싫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먹었던 겁니다. 하느님, 당신은 나에게 악한 여자를 주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책임은 하느님 당신에게도 있는 겁니다.
저 여자만 나에게 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책임 전가를 합니다.
하느님에게 따지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담의 이런 책임 전가의 모습을 우리도 어쩌면 그렇게 빼닮았는지.
우리도 살면서 끊임없이 책임을 남에게 돌리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때로는 하느님의 탓으로 돌릴 때도 너무너무 많습니다.
하와도 아담과 비슷하죠. 또 여전히 책임 전가를 합니다. 핑계를 댑니다.
하느님에게 꾸중 듣고 난 다음에 뱀에게 속았다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 두 남녀, 첫 번째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단 한마디도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질 않습니다.
만일에 두 사람이 꿇어 엎드려 하느님 앞에 사죄하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전 확신합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아담과 하와를 용서해 주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는 회개하지 않고 계속 핑계를 대고 거짓말하고 책임 전가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하느님이 어떻게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거룩하시기에 거룩함과 죄악은 물과 기름같이 합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담과 하와가 사죄하지 못한 것이 인간이 지은 죄의 뿌리 깊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 두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냥 무조건 용서를 청했다면 인류의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결국엔 이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식으로만 알려고 하지 말고, 아담과 하와의 이런 비겁한 모습, 핑계 대는 모습, 거짓말하는 모습,
책임 전가하는 모습, 하느님까지 원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을 봐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우리들의 거울입니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죄하는 일이 지극히 드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비는 일이 지극히 드뭅니다.
또 자기 자신에게도 용서를 청하는 일이 지극히 드뭅니다.
다시 말하면 관계 회복을 위하여 그 깨진 관계성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노력이 너무 인색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분명히 자기 잘못을 압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사과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사과하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죄하는 데 인색합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잘 알고만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학을 몇 개 나와서 학위를 몇 개씩 땄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결국에 아담과 하와는 세 가지의 죄를 짓게 된 것이죠.
하느님과 같이 현명해지고 싶다고 하는 교만,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던 불순종,
그리고 훔쳤다고 하는 도둑의 행위, 이 세 가지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고 보니 하와는 불안해졌을 겁니다.
자기 혼자서 먹은 것이 염려스러워서 아담에게도 먹어보라고 권했죠.
아담도 아마 하와가 먹은 나무 열매가 먹어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담도 먹었습니다. 이제 한 패가 된 겁니다.
결국 공범자가 된 겁니다.
그 시점에서 하와는 아마 마음이 푹 놓였을 겁니다.
예전에 어느 중학교 학생 몇십 명이 집단 절도를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절도한 학생이 친구 한 사람을 유혹하고, 그 사람이 또 하나를 유혹하고 이렇게 해서 금세 많은 공범자를 얻었습니다.
선행이나 악행이나 같은 상태에 있지 않고서는 불안하다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현상입니다.
이렇게 죄는 이 세상에 뻗어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죄가 퍼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죄의 연대성, 범죄의 연대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좀 심하게 말하자면 하와는 도둑의 원조입니다.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 과실을 따 먹은 것이죠.
금지된 이상 그것은 하와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담에게도 도둑질을 권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내가 사는 이 감곡은 햇살이라고 하는 복숭아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길 양옆으로는 논보다도 복숭아밭, 사과밭이 많습니다.
예전에 감곡 성지 신부를 하면서 한 달에 두 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월정리에 있는 공소로 미사를 나오다 보면,
정말 가을이 되면 복숭아가 손에 닿을 정도로 길 양옆으로 늘어져 있었습니다.
같이 타고 가던 신자에게 물었습니다.
‘저렇게 길옆에 과일나무들이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안 따먹을까요?’
그랬더니 ‘그거야 알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 그런데 시골에서는요. 보따리에 싸가고 갈 정도가 되면 도둑질이지만
그냥 차에서 내려서 한두 개 먹는 것은 괜찮습니다.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우리 형제님도 그렇게 따 먹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릴 때부터 많이 따먹었습니다.’
그때 그 얘기를 듣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것이 기억났죠.
‘사과 한두 개쯤, 복숭아 한두 개쯤 따도 괜찮다’라는 이 관념은 아담과 하와 이후 인간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담과 하와는 도둑의 조상이다’라는 흥미 있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 창세기를 읽었을 때 얼마나 소중한 나무 열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비싼 열매일지언정 그거 뭐 한두 개쯤 몰래 따먹은 것 어떠하리, 인간인 우리도 먹은 죄는 용서해 주는데,
어째서 하느님은 용서하지 못하고 낙원에서 추방했느냐고 하느님을 좀 부정적으로 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깊이 묵상을 해보면 그건 아니었던 거였죠.
아담과 하와가 공복을 견딜 수가 없어,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것이 아닙니다.
또 먹음직스러워서만도 아니었습니다.
따먹은 이유는 딱 하나, 하느님과 같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불손한 생각으로 먹은 것이었죠.
자기가 하느님같이 된다는 것은 결국엔 뭡니까?
하느님을 그 자리에서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을 추방하고 싶어 한 그 죄로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그래서 절대로 하느님이 가혹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뭐냐? 죄의 경중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이 되고 싶어서 금단의 열매를 먹은 죄와 사죄하지 않은 죄와 어느 쪽이 더 무거운가 하는 의문입니다.
여러분들 생각 어떠십니까? 다음 시간에 이어지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의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