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군단(Legion)이다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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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나니머스의 상징인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영국 런던 트래팔가 광장을 행진 중인 어나니머스 지지자들. photo AP |
국제 해커집단인 어나니머스가 끊임없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4월 초에는 북한이 운영하는 웹사이트를 공격하는가 하면, 4월 22일에는 한국외환은행을 공격했다고 주장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다행히 외환은행 해킹은 사실무근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인 해커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자칭 ‘어나니머스 코리아’는 현재 내부적으로 좌우갈등을 심각하게 겪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나니머스’가 한국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북한의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 해킹 사건. 어나니머스는 지난 4월 3일과 8일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만5000여명의 ‘우리민족끼리’ 가입자 명단을 공개했다. 동시에 이들은 북한 체제의 민주화, 김정은 사퇴 등을 주장하는 한편 북한 주민들의 자유로운 인터넷 접근을 요구하였다.
‘우리민족끼리’ 해킹은 어나니머스의 전형적 해킹 형태이다. 어나니머스는 2011년에도 미국의 한 아동 포르노 사이트를 해킹해 회원 명단과 아이디, 패스워드 등을 공개한 적이 있다. 또 소니(Sony)사를 해킹해 고객 명단을 유출한 적도 있고, 미국의 국제정세 컨설팅 회사인 ‘스트랫포’ 해킹에서는 이메일 70만통을 통째로 빼돌린 적도 있다.
또 인터넷에서의 자유를 강조하는 어나니머스는 아랍의 봄 등 중동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정치적 활동도 활발히 벌였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인터넷 규정을 강화하자 FBI 애틀랜타 지부 웹사이트를 공격해 마비시킨 적도 있다. 이들이 북한 민주화나 김정은 사퇴, 그리고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터넷 접근 등을 주장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나니머스의 활동은 미국의 대형 커뮤니티 웹사이트인 ‘4chan’에서 비롯되었다. 4chan에 글을 남길 때에는 특정한 아이디를 입력하지 않는다면 기본으로 ‘Anonymous(익명)’라는 아이디로 글을 남기게 된다. 이후 4chan 회원들이 인터넷상에서 해킹과 같은 소동을 벌인 후 ‘우린 어나니머스다(이름이 없다는 의미)’라고 장난스럽게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 어나니머스의 시작이다. 농담 같은 존재였던 어나니머스는 해킹에 동조하는 4chan의 회원들이 점점 늘어나고 고급 기술을 가진 이들이 합류해 그 힘이 커지며 실존하는 집단이 되었다.
어나니머스가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된 첫 사건은 2008년 1월 미국의 사이비종교집단인 사이언톨로지와의 대결. 사이언톨로지 신도인 미국 영화배우 톰 크루즈의 행동을 조롱하는 영상이나 평론들이 웹에서 돌아다니자 교단에서는 이것들을 공유하는 네티즌에게 법적으로 경고하는 내용의 전자메일을 보내 삭제토록 하였다. 그러자 어나니머스는 사이언톨로지교 자체를 없애버리자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웹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도 사이언톨로지센터 앞에서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때 이들은 인터넷에 대한 통제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영화 ‘V for Vendetta’에 나오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착용하였다. 지금도 이 가면은 어나니머스의 상징이 되고 있다. 어나니머스 회원들은 사이언톨로지의 웹서버를 다운시켰다. 어려운 해킹 기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시험메일을 발송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이때 해킹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어나니머스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어나니머스는 온라인상에서의 해킹과 오프라인에서의 시위 등으로 위력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터넷 개방에 반대하는 기업이나 정부기관들을 상대로 어나니머스 명의의 해킹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2011년에 들어서면서 어나니머스의 활동은 매우 활발해졌다. 미국 정부의 외교문서를 폭로한 줄리언 어샌지와 관련, 마스터카드사 등이 위키리크스에 대한 지급을 거부하자, 어나니머스는 보복 작전을 벌여 비자·마스터카드사의 웹사이트를 다운시켰다. 어나니머스는 이어서 또 같은 해 6월에 발생했던 일본 소니사에 대한 해킹에서도 고객 명단을 유출하였다. 그해 4월 소니사는 자사 제품인 플레이스테이션3를 해킹한 미국의 조지 호츠에 대하여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조지 호츠는 아이폰을 해킹하는 등 절륜한 해킹 실력으로 해커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어나니머스는 소니에 대한 보복으로 소니사에 대한 해킹을 시작해,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에 침투하여 고객 7500만명의 신상정보를 훔쳤다. 이로 인해 소니사는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 운영을 40일 동안 중단했다. 또 해커들은 소니 온라인 엔터테인먼트사와 소니 픽처스사 등에도 침투하여 수천만 명의 고객 정보를 빼냈다. 소니·닌텐도·몬산토 등의 대기업, 부스앨런 해밀턴 같은 컨설팅 회사, 미국의 FBI·의회 등 각종 정부기관, 호주·짐바브웨 정부 홈페이지 등에 대한 해킹을 벌이기도 했다.
소니 등 기업들을 상대로 한 해킹은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므로 각국 수사기관에서는 해커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2011년 6월 미국 FBI는 어나니머스에서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던 ‘Sabu’라는 아이디의 해커를 붙잡았다. 그는 뉴욕에 사는 28세의 남성 백수 해커 자비에르 몬세구르였다. 미 FBI는 Sabu를 체포한 뒤 124년형을 받을 중죄라는 점을 알리고 수사에 협조하라고 설득하였다. 결국 Sabu는 8개월간 FBI 수사에 협력했고, 해킹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던 인물들이 미국에서 80여명, 유럽 등에서 25명이 색출되었다.
Sabu가 수사에 협력한 덕분에 어나니머스의 지도자급 해커로 구성된 해커조직 룰츠섹(Lulzsec)도 와해되었다. 룰츠섹은 미국과 영국 등의 해커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웹사이트를 해킹한 뒤 “우리는 당신의 웹사이트를 2011년부터 비웃었다”는 메시지를 포스팅하고 사라졌다. 기업들의 정보를 유출하기보다는 기업의 인터넷 보안의 허점을 드러내 경각심을 고취하는 일을 자주 벌였다. 룰츠섹의 주요 멤버였던 아이디 ‘Topiary’는 영국 청년 제이크 데이비드, Sabu의 측근으로 활동하던 아이디 ‘Kayla/KMS’는 영국 청년 라이언 아크로이드, 아이디 ‘Tflow’는 16세 영국 소년으로 밝혀지는 등 지도자급 해커들이 붙잡혔다. 이들은 더 이상 해킹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사람들은 어나니머스는 무력화되었다고 생각했다. 특히 어나니머스 멤버들 사이에서는 Sabu가 수사에 협력한 데 대한 실망감이 크게 일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에도 어나니머스의 활동은 침체되지 않았다. 어나니머스라는 이름이 일반인들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 사건이 바로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 제타스(Zetas)와의 대결. 제타스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 가운데서도 잔혹한 보복살인으로 악명을 떨치던 범죄조직이다. 제타스가 민간인들을 납치했는데, 그중에 어나니머스로 활동하던 회원이 포함되었다. 어나니머스는 멕시코 경찰 당국을 해킹해서 제타스와 협력한 혐의가 있는 경찰관, 운전기사, 언론인 등의 명단을 빼냈다. 그리고 유튜브에 회원을 석방하지 않으면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제타스는 그 회원을 석방했다. 다만 명단을 발표하면 민간인들을 무차별 살상하겠다고 협박해 명단 공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 지난 4월 4일 해킹당한 북한의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 ‘반제민족민주전선’ 메인화면에 김정은을 저팔계로 합성해 100만달러에 현상수배하는 사진이 실렸다. photo 뉴시스
어나니머스는 아랍의 봄에서도 튀니지 독재정권의 웹사이트를 해킹해 다운시키거나 회원들을 보호하는 등 민주주의를 위해 상당히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또 그해 9월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월가 점령 시위도 적극 지원하였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 ‘공로’로 어나니머스를 그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100인의 하나로 선정하였다. 타임은 어나니머스를 “충격적 유머와 권위에 대한 경멸로 단결한 지도자 없는 인터넷 벌떼들”이라고 설명했다. 타임의 설명대로 어나니머스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4chan 같은 온라인 사이트에서 개인(들)이 해킹을 제안하면, 동참하는 네티즌들이 있고, 나중에 해킹을 성사시킨 이후 어나니머스가 했다고 깃발을 꽂는 식이다. 해킹을 하든 말든 자유다. 또 해킹을 하는 데 누구의 허락을 받는 것도 아니며, 성공했다고 누가 상을 주지도 않는다. Sabu처럼 기술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해킹 프로그램을 공유하는 경우는 있다. Sabu 같은 사람들을 추적하여 잡고 보면 대개는 10대에서 20대 사이의 백인 남성들이다. 최근에는 17세 호주 여학생이 붙잡힌 적도 있다. 최근 북한 사이트 ‘우리민족끼리’ 해킹도 국내에서는 한국의 중학생이 주동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어나니머스 해킹의 주역이 아니다. 해킹의 주역은 네티즌들이다.
이 때문에 어나니머스가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오픈 소스 운동과 속성이 비슷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평론가들은 인터넷에서의 오픈 소스 운동의 상징인 리눅스(Linux), 정보 공유의 대표적 형태인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그리고 해커집단 어나니머스를 인터넷 3대 ‘do-ocracy(do와 democracy의 합성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리눅스나 위키피디아와 다른 점은 상설조직이 없으며, 책임을 지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나니머스를 인터넷의 하위문화(subculture)로 보기도 한다.
어나니머스가 각국 정부나 대기업들에 공포의 존재가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대목이다. 즉 뛰어난 지도자, 강력한 조직, 대단한 해킹 기술 등을 보유해서가 아니라, 불시에 자유와 개방의 기치 아래 다수의 네티즌들을 분노케 하고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웹사이트에 대한 공격이나 해킹 방법이 다양해지고 난이도가 낮아진 것도 어나니머스의 위력을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즉 천재적 실력을 가진 해커가 아니라 약간의 전문지식만 갖추고 있어도 어렵지 않게 해킹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의 표현에 따르면 “개나 소나 해킹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들은 ‘우리민족끼리’ 해킹 사건처럼 인터넷 사이트 해킹에 필요한 기술이 일반인의 예상처럼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실제 한국에서도 2010년 삼일절에 디시인사이드 회원들이 일본 웹사이트 2ch를 해킹한 사건이 있었고, 북한 사이트를 해킹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 경우 디시인사이드에 한 전문가가 나타나 회원들에게 해킹을 제의하고 방법을 알려준다. 그러면 이에 동의하는 다수의 회원들이 대상 사이트에 한꺼번에 많이 접속하여 다운시킨다. 특별한 해킹 전문지식과는 상관없이 접속한 뒤 엔터키만 치고 있어도 웹사이트가 다운되고 해킹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누구나 들어가서 자료를 빼오거나, 포르노 그림을 올려놓는 등 사이트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어나니머스는 초기에는 미국과 영국의 젊은이들이 활동의 주축이었지만 이제는 동유럽, 중동, 아시아, 남미 등에서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최근에는 시리아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여 시리아 정부 사이트를 공격해 폐쇄시켰으며,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는 차원에서 이스라엘 정부 사이트를 공격하기도 했다. ‘우리민족끼리’ 해킹은 최근에 있었던 어나니머스의 해킹 사례 가운데서도 커다란 사건이다.
그런데 ‘우리민족끼리’ 해킹 사태 이후 국내에서는 일부 인사들이 어나니머스 코리아라는 명칭을 내세우고 좌파적 정치 구호를 앞세우고 있다. 이들은 또 북한 ‘우리민족끼리’를 해킹한 집단은 짝퉁이며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처럼 스스로 해커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해킹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원래 어나니머스에는 정통이나 짝퉁이 따로 없다. 특별한 조직이나 관리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국적도 초월한다. 어나니머스는 자유, 개방, 폭력과 독재에의 저항 등에 뜻을 모은 전 세계 네티즌의 일종의 참여문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