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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02]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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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복수와 화해 <독서 : 에제 18,21-28 / 복음 : 마태 5,20ㄴ-26>
고대 근동 지방에는 동태 복수법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 방 맞았으면, 남을 한 방 때릴 수 있습니다. 내가 다쳐 다리가 부러졌으면, 상대방의 다리를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내가 목숨을 잃으면, 내 형제가 복수할 수 있습니다.
이 법의 내용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해석을 합니다. 하나는 형벌을 규정하여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함이라는 해석입니다. ‘피해자가 이런 피해를 입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복수를 해야 한다. 그러니 적어도 내가 당한 만큼은 복수를 해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다.’라고 해석합니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형벌을 규정하여 가해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함이라는 해석입니다. ‘피해자가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피해자가 복수를 하려고 할 텐데, 자칫하면 가해자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피해자가 화난 마음에 과하게 복수할 수 있다. 그러니 복수를 하더라도 피해를 입은 그 이상의 복수를 할 수 없다.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다.’라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어느 것이 하느님의 정의일까요?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그리고 복수의 정도는 점점 더 강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이 커지지 않았을 때 화해하여라. 태평하게 예물을 바치고 하느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서둘러서 이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미움과 분열의 싹을 자르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말씀자료 : 김태완 신부(대구대교구 수성천주교회)] |
[나해] 사순 제1주간 금요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
시작기도 : ▷
제 영혼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의 인간적인 부분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심화시켜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제가 스스로에게 자비롭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함을 인정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하셨듯이 저 또한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살게 하소서. 아버지께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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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청소년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매스컴의 위력이 커가는 이 시대 안에 놓인 청소년들이 건전하고 올바른 매체를 활용함으로써 선한 가치관과 사고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오늘의 복음 : [나해]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영적독서 : 자신을 극복하는 '사랑'
"저는 그 누구에게서도 그분처럼 위대함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 곁에 있으면 저의 소심한 태도가 거의 무너졌고, 그분의 눈은 마음을 활짝 열게 했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말을 경청했고 그 누구도 깔보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작은 실수를 그냥 지나치는 관용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이 분명했고 순수했고 단순했습니다. 그분에게서는 내적으로 깊이 성숙한 유쾌함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기초위에 어떻게 흔들림 없이 머물고, 그분 행동과 내맡김의 확실성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저는 도저히 적절하게 묘사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분으로 인해 제 삶의 풍부해졌습니다. 그분 얼굴은 제 영혼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말을 곰곰이 숙고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된다. 또한 평균을 넘어서는 사람을 주목하지 않으면 아무도 평균을 능가할 수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벨기에 작가에게서 엿볼 수 있는 본질과 삶의 업적의 조화로운 일치는 우리로 하여금 순수하지 못하고 과장된 모든 행동을 그만두고 내적인 모든 분열을 극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권태를 이겨내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마치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친구처럼 자비롭고 이해심이 많게 대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이렇게 행동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자신을 가장 인색하게 대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도 인색하다. 그런데 '사랑으로 자신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현존재의 중심'이라 부르는 '핵심'으로 되돌아감을 뜻하기도 한다. 그 핵심을 향하는 길에서 우리는 비로소 벨기에 작가에게서 엿볼 수 있는 단순 ․ 명료 ․ 순수 ․ 명랑 ․ 확실 ․ 안정 ․ 내적고요 등에 도달할 수 있다........<루돌프 슈테르텐브링크,「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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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사순 제1주간 금요일(2012-03-02) I 복음묵상방 |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사제 가문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직에 필요한 교육들을 받았고,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정착한 후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의 유배가 선조들의 죄에 대한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했다. 절망속에서 삶의 목적도 희망도 잃은 유배자들에게 에제키엘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면서 각자의 신앙생활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 앞에서 개인적인 책임을 강조하면서 과거보다 현재의 회개와 삶의 변화를 요구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율법의 본래 의미를 밝히신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은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그 의미를 넓히신다. 곧, 직접 살인하지 않았지만 분노나 비난은 간접 살인이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때 형제와 싸웠으면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사의 참된 의미와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신다(복음). |
<복음묵상-1> : † 더 옳게 사는 법을 따라...
8가지 참된 행복의 길을 훈시하는 것으로 시작된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도래로 세워지는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조건과 지침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자격조건은 모세의 율법(모세오경)과 예언서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따르고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주신 율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손수 돌판에 새겨준(출애 31,18) '십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십계명에 딸리고 관련된 수많은 규정들과 법령들이다.
후자(後者)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도 있고, 조상들에 의해 덧붙여 만들어진 규정과 전통들도 있다. 여기에 예언서의 말씀도 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으로 유다인들은 생각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이를 잘 따르고 지켰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아야 하느님나라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옳음과 의로움을 인정하신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은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것은 율사와 바리사인의 '옳음'과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옳음'이다. '더 옳음'이 원급(原級) '옳음'의 비교급(比較級)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원급과 비교급의 관계와 차원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옳음'의 깊은 뜻은 다른 데 있다는 말이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옳게 사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옳음은 그들만의 생각에 기준을 둔 것으로서, 결국 율법의 자구(字句)에만 매인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이 요구되는 '더 옳음'은 하느님의 뜻에 기준을 둔 것이며, 율법의 정신을 파고드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에도 하느님 계명의 근본정신은 분명히 있다.(신명 5,32-6,25) 그러나 그 근본정신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옳다는 행실'에는 빠져 있음을 예수께서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근본정신을 다시 심어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실이 우선 소금과 빛의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것이 되기를 요구하신다.(5,13-16) 그런 다음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신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6개의 대당명제 중 첫 번째의 대당명제에 해당한다. "살인하지 못한다."(출애 20,13)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기 목숨으로 그 죄 값을 치러야 한다.(출애 20,12-17)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다. 따라서 옳게 사는 방법은 이 율법을 잘 지키면 된다. 그러나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옳게 사는 것인가? 더 옳게 사는 것은 율법을 다 지켰다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기준은 예수님의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역설적인 도식 속에 숨겨져 있다. 율법에는 '살인'이 '재판'(사형)에 해당되지만, 예수께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만으로도 살인과 같은 '재판'(사형)을 받아야 한다. 더 나아가 '바보'라는 욕은 '중앙법정'에 넘겨지며, '미친놈'이라는 폭언은 '불붙는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형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마당에 '바보'나 '미친놈'이라는 폭언에 대하여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어도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허나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요구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제5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에 결코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 아무 이유 없이 죽이지 않음을 알고 계신다.
그렇다고 모든 성냄과 폭언이 살인을 몰고 오는 것은 아니다. 살다보면 형제에게 화도 내고 욕도 하고 폭언을 일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화가 욕이 되고 욕이 폭언되며, 폭언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보통 자기제어능력을 상실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을 내기 전의 단계인 마음속의 원한까지도 사전에 풀기를 바라신다. 형제에게 원한을 품은 마음으로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을 하느님께서는 바라지 않으신다. 예물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행위의 결과보다 그 행위를 촉발하는 마음속의 의도와 원인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사순시기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때이다..........◆
[말씀봉사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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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2> : † 화해하여라
그러므로 네가 제단 위에서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거기에서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우리는 어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을 들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즉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는 말은 율법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진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진다.
그러므로...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는 말씀은 율법을 완성하는 말씀이시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율법에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만 알려주었지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가르침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만일 나의 잘못으로 살인을 하였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 즉 완성시키신다.
살인이라는 것이 단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정말 어떤 것이 살인을 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율법만 지키는 사람이라면 형제에게 어떤 성을 내든 또는 어떤 모욕적인 말을 하든 괜찮은 것으로 생각한다. 살인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단순히 생명을 앗아가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라고 멸시하고 '멍청이!'라고 욕하는 것도 살인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은 외형적인 살인이라면 말로 짓는 모욕과 멸시는 정신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살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멀쩡한 사람을 "바보! 멍청이!"라고 한다면 "사람잡네"라고 말한다. 우리가 형제에게 성을 내고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살인과 같다는 것이다. 이로서 단순히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을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왜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지를 자세하게 가르쳐 주심으로써 "살인해서는 안된다"라는 율법의 의미를 완성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말로서 형제에게 살인을 하였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즉 "네가 제단 위에서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화해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잘못한 것이 생각나거든 물러 가서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거기에서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화해를 청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 "내가 어떤 형제에 대해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내가 먼저 그에게 가서 화해를 청하라는 것이다. 나는 비록 그 형제에 대해서 아무런 원망을 품고 있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화해를 청하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상대방에게 잘못했는지 또 형제가 왜 나에 대해서 원망을 품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 무조건 화해를 청해야 할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 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모르더라도 어떤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대화중에 아니면 무의식 중에 내가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모욕적인 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형제가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런 빌미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면 화해를 청하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논리가 일반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더군다나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만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내가 살인을 하지 안 했으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멸시하거나 멍청이!" 라고 욕하는 것도 일종의 살인행위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상대방이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날 때 나에게 와서 용서를 청하면 내가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는 아무 관계없이 내가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무조건 내가 먼저 가서 화해를 청하라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제시한 새로운 계명이 얼마나 혁신적인 가를 알 수 있고 우리들의 행동이나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조심스러운 가를 생각하게 한다. 한마디로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 자신의 생활에는 아주 철저하고 남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베풀어야 하는 것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새로운 삶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그냥 적당히 살면되지 않는가?
사람이 무엇을 지향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삶의 자세도 달라진다. 단순히 자기 건강 관리를 위해서 운동을 하는 사람은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운동을 하면 된다. 그러나 세계 참피온이 되려고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라면 적당히 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 누구보다도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결코 챔피온이 될 수 없고 그 자리를 유지할 수도 없다. 보라! 월드컵에서 우승 후보로 지목되었던 국가들이 예선전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는 것을. 실력이 부족하면 떨어지는 것이 운동하는 세계의 원칙이다.
오늘 복음은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한가지 잣대가 있다. 그 잣대란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실천하고 따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의지이다. 그 의로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앞에서 말씀하신 진복팔단이다. 그리고 진복팔단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의롭게 사는 삶이다.
진복팔단은 우리 신앙인의 삶의 원칙이라고 하였다. 즉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삶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의 자세는 일반인들과는 달라야 한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31)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 즉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는 것이나 모욕적인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사랑의 행위이다.
사랑의 행위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율법을 완성하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말씀자료 : 유광수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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