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고집 - 청바지에 미쳐 40년 뱅뱅 회장 권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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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고집 - 청바지에 미쳐 40년 뱅뱅 회장 권종열

버려진 외제 청바지의 지퍼·단추,
그걸 재활용해 만든 '뱅뱅 청바지'…
37세 옷장수는 77세 CEO로
1그땐 전국 청바지 70~80%가 뱅뱅‐ 죠다쉬, 리바이스도 울렸지2

1970년 봄이었다. 서울 평화시장 2층에 있는 옷 가게 '제일사' 주인 권종열(權鍾烈)에게 이런 소문이 들려온 것이었다. "태창이 수출용으로 청바지용 원단을 처음 만들었는데 수출하고 조금 남았다더라."

평양에서 태어나 타향에서 20년을 보낸 37살 가게 주인의 눈이 반짝였다. 그토록 원하던 청바지를 제대로 만들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가게에서 수입 청바지가 팔리는 걸 보니 '저거 돈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 서울 도곡동 뱅뱅어패럴 권종열 회장의 방은 건물에서 어지러운 순서로 따지면 첫 번째다. 다음 시즌에 나올 옷 수백 벌을 모두 가져다 놓고 있다. 글자 그대로, 옷에 파묻혀 살고 있다. /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당시 한국은 청바지 원단을 만들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진짜 청바지도 있을 리 없었다. 퍼런색으로 흉내만 낸 바지가 있기는 했지만 한번 빨면 물 빠지고 한 뼘씩 줄어들었다. '청바지'라기 보다 그냥 퍼런 바지였다.

태창에서 원단은 샀지만 다른 재료가 없었다. 진짜 청바지엔 튼튼한 지퍼와 구리 단추가 필요했다. 권종열은 넝마주이를 불렀다. "외제 청바지 버려진 거 있잖아요. 그거 보면 자꾸(지퍼)하고 단추만 빼와 봐요."

며칠 지나 넝마주이가 몇십 개를 갖고 왔다. 돈을 주니 점점 더 많이 가져왔다. 급기야는 몇백 개씩을 들고 오기도 했다. 그걸로 청바지를 만들어 남대문의 소매 상가에 공짜로 준 뒤 "팔아보시라"라고 했다.

입질이 서서히 오기 시작했다. 하나둘 주문이 늘었다. 특히 단추나 지퍼에 'USA'라고 써 있는게 효과가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건 보세 제품"이라고 해서 팔았다. 청바지 이름도 지었다. '뱅뱅'이었다.

그 뱅뱅 청바지가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권종열은 지금 뱅뱅어패럴 회장이다. 패션 업체 CEO답게 머리는 염색을 했지만 나이 77세로 업계의 가장 큰 형님이다.

'쫄쫄이'

권종열이 평양에서 열일곱의 나이로 피란 내려오던 1950년 12월, 그의 머릿속에 패션은 물론이고 옷조차 없었다. 권종열은 "먹고 살려고 옷을 만들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고향에서 그의 집은 못살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내려오는 순간 그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 탓에 1950년 7월 졸업예정이던 평양 제2 고등학교를 한 달이 모자라 마치지 못했다.

할머니, 부모, 5형제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할머니, 어머니, 조카와 막냇동생이 못 내려왔고 흩어져 내려온 나머지는 3~4년이 지난 뒤에야 만났다. 입대한 둘째 형은 아직도 생사를 모른다.

"걸어 내려오면서 못 볼 거 많이 봤어요. 충남 아산의 신창초등학교에 설치된 수용소까지 오는데 두 달 걸렸습니다. 머슴살이도 해보고, 기차 화물칸에 몰래 타고 원주에 가서 미군 부대에서 일했습니다. 차 고치는 기술도 배워봤어요. 나중에는 혼자 내려오신 큰 형님이 대구에서 하던 '성문노트'라는 공장에서도 일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다시 모였지만 식구가 다 입에 풀칠하기는 힘들었다. 살 길을 찾다 들은 말이 '평화시장 가면 돈 번다'는 말이었다. 1961년 아내와 서울 평화시장으로 무작정 올라갔다.

전쟁 탓에 무일푼이 된 평안도, 황해도 쪽 피란민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평화'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들리는 말이 전부 평안도, 황해도 사투리여서 대화가 편하다는 것, 그것 빼고는 다 낯설었다.

무조건 덤볐다. '쫄쫄이'라는 게 있었다. 군복과 비슷하게 만들어 군복이라고 파는 일종의 작업복이었다. 겨우 얻은 세평 가게에 미싱 한 대 놓고 제일사라고 이름 붙였다. 재단사를 불러서 배우면서 만들었다.

물론 처음엔 안 팔렸다. 몇 원짜리 국밥 먹으면서 일했건만 소용이 없었다. 하루에도 때려치우자는 생각을 몇 번씩 하면서도 달리 할 일이 없어 관두지 못하던 3년차였다. 그러다 보니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추석 직전에는 아기들 옷 만들고 입학 전에는 학생들이 입을 만한 옷을 지었더니 조금씩 팔렸다. 미싱 1대가 3대가 되고 다시 7대가 됐다. 그래도 번듯한 2층으로 옮겼다. 청바지를 만든 1970년까지 그가 안 만들어 본 옷이 없었다.

"그때 고생이 결국은 1970년의 청바지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이 콱콱 붙은 거죠." 돈은 청바지를 만들기 시작한 뒤부터 붙기 시작했다.

▲ 권종열에게 뱅뱅제품을 입어 달라고 했다. 마침 뱅뱅 모델인 배우 이민호가 드라마 촬영차 들렀다. 권종열이 이민호에게 같은 옷을 입어 달라 고 부탁했다. 54살 차이지만, 옷은 같다. /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뱅뱅사거리

'뱅뱅(BANG BANG)'이란 이름은 권종열이 지었다. 서부영화 속 카우보이가 청바지 입고 총 쏠 때 나는 소리로,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을 이름이었다. 권종열은 "당시 도매를 통해 전국 청바지의 70~80%를 장악했다"고 말했다.

1983년에 죠다쉬라는 청바지가 백화점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그때쯤 교복 자유화로 청바지 수요가 마구 늘어나는 시점이다. "우리는 그때 3000~4000원 받고 파는데 거기는 외제라고 2만4000원 받는 거예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도 무리해 광고와 점포를 열었다. 소매업에 진출한 것이다. 8억원을 빌렸다. 지금 돈으로 80억원 이상이다. 당시 KBS에서 300만원 주면 광고를 만들어 줬는데 거기에 돈을 내고 당시 최고 인기 가수였던 전영록을 기용했다.

효과가 있었다. 처음부터 50개의 대리점을 모을 수 있었다. 많이 사가는 점주들에게는 전영록 대형사진을 줬다. 순식간에 점포 수가 200개를 넘었다. 지금은 인기 배우 이민호, 한지혜를 쓴다. 꼭 젊은 연예인이 모델이다.

이유가 있다. 인기인들을 쓰면 이미지가 젊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팬클럽 회원들이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영업사원이 된다. "팬클럽은 디자인이 나쁘다, 바느질이 이상하다, 이런 거까지 얘기해줍니다. 박중훈, 신성우, 조성모 같은 분들이 우리를 거쳐갔죠."

품질도 괜찮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종열은 "공업진흥청이라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청바지를 수거해 발표를 한 적이 있는데, 죠다쉬, 리바이스 이런 거와 비교해서 우리가 1위를 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청바지를 넘어 본격적인 캐주얼 패션 브랜드를 만든다는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평화시장에서 멀어져서 싸구려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었다. 1982년, 현재의 강남대로 옆 도곡동에 5층짜리 사옥을 지었다.

청바지가 아닌 셔츠, 재킷 같은 옷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천루가 펼쳐져 뱅뱅의 사옥은 잘 보이지도 않지만 당시 허허벌판에 아파트 몇 채 있을 뿐이었다. 길 포장도 안 돼 있었다.

유일하게 5층 건물 하나 있으니 사거리 이름이 자연스레 '뱅뱅사거리'가 됐다. "뱅뱅 돈다"라는 말과는 전혀 상관없다. 권종열은 그때나 지금이나 땅값을 모른다. 다만 1평당 1억5000만원이라는 얘긴 들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결국 대박이 났다. 세일도 필요 없었다. 30% 세일을 한번 했더니 뱅뱅사거리 일대 교통이 꽉 막혔던 적도 있었다. 권종열은 "신나게 일했다"고 말했다.

위기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이후 권종열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매출이 급격히 줄었다. 1990년대 초반 2000억원대에 달하던 매출이 700억원대로 고꾸라졌다. 점포는 100개 아래로 줄었다.

아무리 로열티 안 주고 만들어 파는 뱅뱅이지만, 감당할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발음이 비슷한 '뼝뼝'이라는 여성복 브랜드가 부도가 나 뱅뱅이 오해를 받기도 했다. 망하기 직전이었다.

이때 '중소기업은 죽으라'고 한 게 은행이었다. 은행은 당장 돈을 못 갚으면 금리를 높이겠다고 했다. "대기업은 그래도 이거 팔아 저거는 건질 수 있었지만 우린 그럴 게 없었어요. 그동안 번 돈을 회사에 빌려주는 형식으로 넣었습니다. 자본금 늘리려니 세금을 내라고 하더군요."

수백억원은 넣었다고 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부도 내고 도망가는 분도 있지 않나"라는 질문에 "그런 짓은 안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브랜드 포기하고 팔 생각은 없었냐"는 묻자, "그러면 한국은 만날 로열티만 계속 내자는 거냐"라는 답이 나왔다.

대신 권종열은 '박리다매'로 전략을 바꿨다. 고급 이미지를 버렸다. 대형 쇼핑센터에도 들어가고, 세일도 하고, 홈쇼핑에서도 팔았다. 심한 경우 20년 전 가격으로 돌아가서 팔았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잘나갔던 1990년대 초반에 생산 공장을 전부 중국으로 돌려놨기 때문이었다. 이익을 조금만 내면 그래도 손해는 안 볼 수 있었다. 외제, '보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했던 과거는 그냥 과거에 묻어버리고 팔고 또 팔았다.

5~6년 고생하니 다시 매출이 2000억원 수준이 됐다. 이익도 나고. 매장 수도 다시 200개를 넘었다. 그의 직원은 한국에 700여명, 중국에 50여명 정도다. 공장을 직접 소유하지 않고 OEM 방식으로 여러 공장에서 납품받고 있다.

"살아남았지"라고, 권종열은 중얼거렸다.

"고급 브랜드도 좋지만, 일단 살아야지요. 살아 있어야 그다음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은행에서 매일 '돈 좀 쓰시라'고 찾아올 정도가 됐습니다. 이젠 내가 안 씁니다. 그때부터 현금 주고 재료 사서 써요. 고급 브랜드 도전은 이제 다시 할 겁니다."

이 과정에서 권종열을 자극했던 죠다쉬가 철수했고, 써지오바렌테, 핀토스, 하우스, 닉스, 겟 유스트 등도 철수하거나 사라졌다. 그들이 무너질 때마다 권종열은 환호했을까. '나도 까딱하면 저렇게 된다'는 생각을 했다.

1주일에 6.5일

그는 세 아들에게 아직 아무것도 재산을 물려준 것은 없다고 했다. 계열사를 하나씩 맡겨 보고 있는데, 잘하면 물려주겠지만 아니면 안 준다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권종열은 모든 결정을 자신이 다 한다. 몇 년 전 협심증 수술을 했지만 아직 건강하다. 일요일에 교회 갔다 와서 서울에 있는 매장을 둘러보니, 1주일에 0.5일 쉬는 셈이다. 한 달에 세 번 해외 출장을 간다. 중국 공장과 일본이나 홍콩의 옷 매장들을 본다. 비즈니스호텔에서 직원 한 명과 함께 자면서, 오전 9시부터 옷 가게 문 열면 밤 10시 정도까지 계속 돌아다닌다.

이렇게 사는 데 취미가 있을까.

"건강을 위해 걷기는 하는데, 그게 취미라고 할 수 있나 싶은데. 이젠 일하는 게 습관이 돼서요, 일만 재미있어요. 이젠 친구도 거의 없네요. 일만 하다 보니 자연히 떨어져 나갔겠죠…."

그는 유니클로, 자라 같이 중저가 해외 브랜드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했다. 디자인도 좋고 원단도 좋고, 가격도 싸다. '대단한 회사들'이라고 권종열은 감탄했다. 패션업은, 한순간 놓치면 끝이라고 했다.

매장에서 보면 하루 이틀 사이에 팔리는 물건이 바뀌는데, 그걸 파악하지 못하면 재고만 늘어난다. 언제까지 현장에 있고 싶을까.

"힘들겠지만 올해 목표가 매출 3000억원입니다. 저는 4000억원될 때까지는 해보려고 합니다. 그 다음은…. 생각해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