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내가 숙련된 일꾼으로 그분 곁에 있었으며 날마다 그분이 각별히 좋아하시는 자가 되어 그분 앞에서 언제나 즐거워했다.—잠언 8:30. 예수께서는 땅에 계실 때 창조물을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아버지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이 가르치신 한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해와 비에 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해와 비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를 비추거나 비를 내려 주지 않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사랑 많으시게도 모든 사람이 해와 비를 통해 유익을 얻게 해 주십니다. (마태 5:43-45) 예수께서는 이 점을 언급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내기 바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노을이나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볼 때마다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내신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본을 생각하면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함으로 차별 없는 사랑을 나타내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파23.03」 17면 9-10항 |
내가 숙련된 일꾼으로 그분 곁에 있었으며 날마다 그분이 각별히 좋아하시는 자가 되어 그분 앞에서 언제나 즐거워했다. Then I was by him, as one brought up with him: and I was daily his delight, rejoicing always before him; —잠언 8:30. Pulpit Commentary Verse 30. - Then I was by him. Wisd. 9:9, "Wisdom was with thee; which knoweth thy works, and was present when thou madest the world." So John 1:2, "The Word was with God." As one brought up with him; Vulgate, cuncta componens; Septuagint, Ημην παρ αὐτῷ ἁρμόζουσα, "I was with him arranging things in harmony." The Hebrew word is אָמון (amon), "an artificer," "workman" (Jeremiah 52:15). Thus in Wisd. 7:22 Wisdom is called ἡ πάντων τεχνῖτις, "the worker of all things." The Authorized Version takes the word in a passive state, as equivalent to alumnus, "foster child." and this interpretation is etymologically admissible, and may possibly, as Schultens suggests, be glanced at in St. John's expression (John 1:18), "the only begotten 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But as the point here is the creative energy of Wisdom, it is best to take the term as denoting "artificer." It will then accord with the expression δημιουργὸς, applied by the Fathers to the Word of God,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Ephesians 3:9, Textus Receptus, and Hebrews 1:2). And I was daily his delight; literally, I was delights day by day, which may mean either as in Authorized Version, or "I had delight continually," i.e. it may signify (1) either that God took pleasure in the wisdom which displayed his workmanship, saw that it was very good (Genesis 1:4, etc.), looked with delight on the beloved Son in whom he was well pleased (Matthew 3:17, etc.); or (2) it may mean that Wisdom herself rejoiced in her power and her work, rejoiced in giving effect to the Creator's idea, and so "founding the earth" (Proverbs 3:19). Vulgate, delectabar per singulos dies. The Septuagint adopts the former of these views, "I was that wherein he took delight." But the second interpretation seems most suitable, as the paragraph is stating rather what Wisdom is in herself than what she was in the eyes of Jehovah. What follows is a parallel. Rejoicing always before him; Vulgate, ludens coram eo omni tempore, as though the work of creation was a sport and pastime of a happy holiday. The expression is meant to denote the ease with which the operations were performed, and the pleasure which their execution yielded. David uses the same word, speaking of his dancing before the ark, when he says. "Therefore will I play before the Lord" (2 Samuel 6:21; comp. Proverbs 10:23). Proverbs 8:30 강단 해설 30절 - 그때 내가 그 곁에 있었나이다. 지혜 9:9, "지혜가 너와 함께 있었으니 이는 네 행위를 아시고 네가 세상을 지으실 때에 함께 계셨느니라." 그래서 요한복음 1:2,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벌게이트, 쿤타 콤포넨스, 칠십인역, Ημην παρ αὐτῷ ἁρμόζουσα, "나는 그와 함께 일을 조화롭게 배열하고 있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단어는 אָמון(아몬), "기술자", "일꾼"입니다(예레미야 52:15). 따라서 지혜서 7:22에서 지혜는 ἡ πάντων τεχνῖτις, "만물의 일꾼"이라고 불립니다. 공인역은 이 단어를 "수양아들"과 동등한 수동적 상태로 취하고 있으며, 이러한 해석은 어원학적으로 인정할 수 있고, 슐텐스가 제안한 것처럼 "아버지 품에 있는 독생자"라는 성 요한의 표현(요 1:18)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요점은 지혜의 창조적 에너지이므로, 이 용어는 "창조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면 교부들이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한 δημιουργὸς라는 표현과 일치할 것입니다(에베소서 3:9, Textus Receptus, 히브리서 1:2). 그리고 나는 날마다 그의 기쁨이었다; 문자 그대로, 나는 날마다 기쁨이었는데, 공인 역에서와 같이 "나는 계속 기쁨이 있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의 솜씨를 나타내는 지혜를 기뻐하시고, 그것이 심히 좋았음을 보시고(창 1:4 등), 그 안에서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을 즐거이 바라보셨다(마 3:17 등); 또는 (2) 지혜 자신이 자신의 능력과 일을 기뻐하고 창조주의 생각을 실현하는 것을 기뻐하여 "땅을 세웠다"(잠언 3:19)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벌게이트, 델렉타바르 페르 싱귤로스 다이스. 칠십인역은 "나는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었다"라는 전자의 견해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해석이 가장 적합해 보이는데, 이 문단은 여호와의 눈에 지혜가 어떤 존재였는지보다는 오히려 지혜가 자신 안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평행 구절입니다. 그 앞에서 항상 기뻐하며; Vulgate, ludens coram eo omni tempore, 마치 창조의 일이 행복한 휴일의 스포츠이자 오락인 것처럼. 이 표현은 작업이 얼마나 쉽게 수행되었는지, 그리고 그 작업이 가져다준 기쁨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은 방주 앞에서 춤을 추는 것에 대해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앞에서 놀리라"(사무엘하 6:21, 잠언 10:23 참조). 잠언 8:30 |
잠언 8장의 내용은 독립된 잠언이 아니며 1장에서 10장까지 하나의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또는 스승)가 아들에게 베푸는 교훈 가운데 언급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보다 지혜를 가지도록 조언한다. 그 지혜를 가지기 위해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지적하며, 동시에 지혜가 갖는 창조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리하여 지혜와 미련함을 두 여인에 비유한다. 여기서 여인 '지혜'의 창조는 '있는 것'에 지혜를 더하여 플러스 된 창조를 이루지만, 여인 '미련'은 '있는 것'을 모양만 바꾸어 마치 창조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알린다. 그리하여 아들이 장차 어떤 일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조언하는 것이다. 이 지혜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리기 위해 잠언 8장의 비유로 설명하는데, 그 내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삼라만상이 바로 지혜의 힘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에게 지혜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지 알려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8장의 내용은 태초에 '지혜'라는 인격체가 존재했는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창세기와 관련된 내용을 알려주는 '하가다'서에도 각종 추상 명사를 마치 사람인 것처럼 묘사하여 설명한다. 이는 하가다서가 위경이냐 외경이나 하는 문제를 떠나서 문학적 서술 방법이 추상 명사를 의인화 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되다는 것이다. 따라서 워치타워 법인은 그들의 교리를 짜맞추기 위해서, 즉 예수가 이 우주의 2인자로 선재했다는 내용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 잠언 8장을 이용하고 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삶은 소머리가 웃을 일이다. 다시 한번 요약하면, 잠언 8장의 지혜에 관한 비유는 우리가 참된 지혜를 가질 때, 얼마나 큰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려는 것이다. 어리석은자는 도박과 같은 것을 통해 돈이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지만 그것은 제로 섬 게임이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첨단과학을 연구함으로써 얻게 되는 놀라운 창조의 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플러스 섬게임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추구해야 할지 참된 지혜와 그 능력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 잠언 1장에서 10장까지의 내용이다. 따라서 8장은 그러한 목적으로 끼어든 '지혜'의 비유인 것이다. |
질문:
1. 잠언 8장은 어떤 인격체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인가?
2. 잠언 8장이 도입된 목적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