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
1942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사범학교와 원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
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1976년 첫 소설집 『황혼의 집』을 출간하기
전까지 국어교사와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습니다. 초기에는 중편 「장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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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되는 작품들로 전쟁과 분단체제, 폭력의 역사에 고통 받는 민중의
모습을 주로 그렸으나 두 번째 소설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부터는 근대 산업화 시대의 노동과 소외의 문제를 다각도로 다루기 시작
합니다. 이후 발표한 「꿈꾸는 자의 나성」 등에서는 소시민의 갈등과 좌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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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화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유효한 세계의 복합적 아이러니를 핍진하게
그려냅니다. 2018년 20년에 걸친 작업의 결과물로 식민통치하의 대한제국
을 배경으로 사상과 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한 가족을 통해 근대사의
비극을 조망한 대작 장편 『문신』을 출간했으며, 전통적 질서와 이데올로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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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탁월하게 보여주었다는 평과 함께 2020년 박
경리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 한서대학교 문예
창작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16년 대한민국예술원 일원이 됩니다.
주요 작품으로 『묵시의 바다』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순은의 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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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완장』 『백치의 달』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소라 단 가는 길』
등이 있다. 한국문학 작가상, 한국창작문학상, 현대문학상, 21세기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장마 개요
윤흥길의 『장마』는 1973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한 중편소설로 혈연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얽힌 집안간의 갈등과 화해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사돈관계인 권 씨 집안과 김 씨 집안이 6.25전쟁으로 인해 받은 재해가
조장한 반목이 토착의 무속적 사고로 해 해소되는 과정을 1인칭 어린
아이의 시각으로 묘사합니다. 서술자인 소년은 이념의 대치가 일으키는
두려움과 어른세계와 전쟁이 내포한 비인간성을 깨달으며 성장합니다.
내용
지루하게 계속되던 긴 장마 중 어느 날, 주인공 소년 동만의 집으로 전쟁터
에 나간 국군 소위 외삼촌이 전사했다는 연락이 온다. 그때 동만의 외할머니는
전쟁으로 피난을 와 동만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빨치산에 대해 분노에 찬 말을 퍼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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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이러한 행동은 빨치산이 되어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 지내는
아들을 둔 친할머니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했고 두 노인은 크게 대립하게
된다. 두 노인의 갈등으로 온 가족이 숨을 죽이고 지내는 집안에는 냉기가
감돈다. 친할머니는 점쟁이의 말에 따라 빨치산이 된 아들이 언제 돌아올
것이라며 아들 맞을 준비를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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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할머니의 지휘아래 음식을 마련하고 청소를 한다. 그러나 점쟁이가 일러준
그날이 되었지만 삼촌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그 대신 어디선가 구렁이 한
마리가 나타나는데 이를 두고 죽은 아들이 변한 것이라고 생각한 친할머니는
그만 실신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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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자 외할머니가 선뜻 나서서 감
나무를 칭칭 감고 있는 구렁이를 정성을 다해 달랜다. 그러나 구렁이가 꼼짝도
하지 않자 친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 한줌과 잘 차린 음식들을 감나무 아래에
준비해 놓고 불씨 담긴 종지에 머리카락을 넣자 구렁이는 몸을 풀어 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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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툭 떨어졌다. 구렁이는 마치 외할머니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감나무에서
내려와 대밭으로 사라진다. 정신을 차린 뒤 고모를 통해 이 일을 전해 듣게 된
친할머니는 외할머니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화해한다. 친할머니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길고긴
지루했던 장맛비가 그친다.
의의와 평가
『장마』는 6·25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증언하는 윤흥길의 여러 작품
가운데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전쟁의 폭력성을 증언하는 한편, 그 전쟁의
폭력성에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정신을 놓친 사람들의 상처투성이 영혼을
껴안고 위무하는 연민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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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어 온전한 삶을 누리길 간절히 기원한다.
이 작품의 중심 언어는 전라북도 익산 방언이다. 이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표준어인 서울말과 중앙중심주의에 대한 부정의식의 실현이라는 것
으로 설명될 수 있다. 중앙중심주의 즉 서울말이 지배하는 질서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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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란 주변의 변방 언어로 설자리를 확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작가는
그 주변부의 언어를 소설 속 중심 언어로 삼음으로써 중심의 언어가 지배
하는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다. 한편 1인칭 주인공 서술자 시점이 특징인
『장마』는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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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서술자인 주인공 소년 동만은 갑자기 덮쳐와 일상이 되고 만
악몽과도 같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한다. 죽음과 인간관계의
비정함, 세계의 폭력성을 알아가는 한편, 의리, 신의, 순정, 상처입은 자
약자를 보살피는 이타적 연민의 마음 등 지켜야 될 사람살이의 도리를
깨우치며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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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구렁이의 출현으로 인해 두 사람의 어긋한 관계가 정감적으로
화해되는 장면은 근대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반근대적인 무속신앙이
해소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반근대적인 민족적 공동체 감각의
회복에서 분단극복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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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동질감의 회복을 통해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시도함으로써
분단문제의 소설적 형상화의 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장마』는 윤흥길의 친구인 시인 정양의 부친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정양 시인의 아버지는 “6·25직전 콩깍지가 콩을 삶는 저 비극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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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와중에서 좌우익의 사상싸움에 쫓기다가 끝내 실종되고” 말았다는
것, 행방불명된 그가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점쟁이가 예언한 그 날 그의
시골집 마당으로” 그 “대신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기어” 들었다는 것이
그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정양 시인은 그 특별한 체험을 시 「내 살던 뒤안에」
에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79년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장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저자의 말
여생을 특별히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우선 지난 삶부터 정리하고 볼
일이다. 말하자면 묵은 작품들을 손봐서 책으로 묶는 일은 지난 삶의 정리
작업인 셈이다. 간절히 소망하건데, 이번 작품집 출간을 계기로 해서 내
삶의 내용이 과거에 비해 실팍하게 달라졌으면 한다. 더욱 더 간절히 소망
하건대,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한결 원숙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바뀌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