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경기 안산공단 내 한 자동차 부품 제조공장. 불황으로 자동차업계가 생산을 줄이자 공장은 기계를 세웠고, 근로자들은 일 감을 잃었다. 김용국 기자 young@chosun.com
아침에 일어나 밥먹고 집안 일 도와주면 12시
오후 애들과 시간 보내… "내가 뭐 하는건지"
공단내 약 4800명 '백수 아닌 백수'로 지내
월수 100만원 이하로… 기본 생계마저 막막
자동차 부품업체인 D공업의 용접공 지모(40)씨는 18일 경기도 안산시 와동의 집에서 오전 7시쯤 눈을 떴다. 평소 같으면 오전 6시 전에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마친 뒤 통근버스를 타고 회사가 있는 반월공단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날 지씨는 일찍 일어나도 갈 곳이 없었다. 자동차 업계가 감산(減産)에 들어간 뒤 납품할 양이 줄자 D공업이 지난 15일부터 보름 동안 휴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침식사를 마친 지씨는 대형 레저용 차량 부품을 용접하던 손에 빗자루와 걸레를 대신 들었다. 부인을 도와 방 구석까지 청소해도 시간은 정오를 넘지 않았다. 점심 밥을 먹고 하염없이 TV를 보고 있으려니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이 돌아왔다.
"아빠, 요즘은 왜 회사에 안 나가세요?"
지씨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요즘 자동차 회사들이 좀 어려워서 아빠 회사도 잠시 쉬는 거야. 걱정할 것 없어."
지난달 처음 휴업을 했을 때는 지씨도 마냥 집에 있지는 않았다. 회사에 나갈 때보다 더 이른 오전 5시쯤 눈을 떠서 안산역 근처의 인력사무소를 찾았다.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은 힘에 부치더라도, 안산시 반월·시화공단의 수많은 공장에서 용접 아르바이트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전 6시부터 9시30분까지 3시간이 넘도록 기다려도 지씨를 찾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휴업이 시작되면서 지씨의 수입도 줄었다. 15년 경력의 지씨가 한 달 70시간쯤 잔업과 특근을 했을 때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약 170만~200만원선. 하지만 이달은 100만원이나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휴업 기간에는 평균임금의 70%만 보장되기 때문이다. 잔업과 특근이 전혀 없었으니 수당은 O. 자연히 살림살이는 빠듯해졌다.
월 100만원을 받아서 전기요금·수도요금·전화요금과 연립주택 관리비 등으로 30만원을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결국 지씨는 아들이 한 달 9만원을 내고 다니던 피아노학원과 12만원이 들던 방문학습지를 끊었다.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고 한다. 요즘은 지씨의 부인(38)도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식당이나 부품조립 일을 알아보러 다니는 중이다.
지씨는 혼잣말로 다짐했다.
"어떻게든 부업거리를 찾아야죠."
불황의 찬바람이 경기도 안산시 반월·시화공단과 인천의 남동공단 등 중소 제조업체들이 밀집한 지역에 대량 휴업 사태를 불러오고 있다.
노동부 산하 안산고용지원센터에 따르면 12월 들어 15일 현재까지 휴업을 선언한 업체는 279곳. 이곳 근로자 4800여명이 하루아침에 '백수 아닌 백수' 신세가 된 셈이다. 지난 10월과 11월에 휴업 신고를 한 업체가 각각 11곳과 99곳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급증세'다. 남동공단을 포함한 인천시 남동부 일대에서는 11월에 231곳, 이달에는 115곳이 휴업에 들어갔다.
지씨의 회사 동료인 최모(51)씨도 이날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22년 동안 용접일을 해온 최씨는 지난해 잔업과 특근 수당을 합해서 연 3200만원쯤을 벌었지만 올해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그는 "차라리 한두 달이라도 회사가 완전히 쉬면 뱃일이라도 알아보겠지만 찔끔찔끔 쉬어서 아르바이트 구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D공업의 직원 90여명 중 용접공 40여명은 모두 지씨와 같은 처지다. 한 달이라야 용접공 7~8명이면 할 수 있는 일거리뿐이니 40여명이 조를 짜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씩만 일을 하고 휴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휴업은 공단 생산직 근로자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기업이 노동부 고용지원센터에 신고를 하고 휴업을 하면 직원들에게 평균임금의 70%만 지급하는 '유급휴업'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정부는 고용보험기금에서 기업이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돈의 3분의 2를 보조해준다.
하지만 근로자 입장에서 수입이 30%만 주는 것은 아니다. 평상시 잔업·특근 수당이 상당액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업체 근로자 중에는 평균임금의 70%를 받으면 100만원에 못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급휴업 대상자는 그나마 괜찮은 편에 속한다. 평균임금의 70%를 주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서 신고조차 하지 않고 '무급휴업'에 들어가는 업체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근로자는 한 푼도 받지 못한다.
경기 안산시의 한 반도체 회사에 다니는 박모(26)씨는 지난 15일 회사가 보름 동안 휴업하겠다고 예고하면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그동안 잔업 수당을 합해서 월 120만~130만원 이상을 받았지만, 휴업을 하면 받는 돈이 60만원대로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 돈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박씨는 낮 동안 공단 내 지인들에게 계속 전화를 돌려 다른 공장에 일용직 일자리가 없는지 알아보고, 밤에는 대리운전 회사를 찾아 다녔다. 아직 일용직 일자리는 하나도 구하지 못했다.
박씨는 "절박한 구직자가 넘쳐나는데 2주만 일하겠다는 사람을 누가 받아주겠느냐"고 말했다.
박씨처럼 잠시 일할 자리를 알아보는 사람들로 인력사무소는 북적거리고 있다. 안산역 부근 G인력사무소 소장 허동호(55)씨는 "이달 들어 일거리를 찾으러 오는 사람이 평소보다 70%나 늘었다"며 "하지만 사람을 쓰겠다는 곳은 90% 정도 줄어서 대기자가 매일 40~50명씩 된다"고 말했다.
안산공단을 덮친 휴업사태는 6만명이 넘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도 큰 타격이다. 자리를 옮기려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급증하고 있다.
안산고용지원센터에 근무처 변경을 신청한 외국인 근로자는 10월부터 12월 중순까지 399명. 지난해 같은 기간의 151명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안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의 임동근 상담팀장은 "새 일자리를 찾을 동안 쉼터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급증해서 쉼터가 미어터질 지경"이라고 말했다.
아예 귀국길에 오르려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있다. 조선족 근로자 장연평(48)씨는 20일 인천 부두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봐뒀다. 장씨는 "공장도 휴업이 많고 일용직 일자리도 없어 당분간은 중국에 가있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용접공으로 일해온 방글라데시인 셔브즈(30)씨도 "한 달에 보름은 쉬는 판이라 그동안 모은 돈에서 생활비를 도리어 까먹고 있다. 내년 초까지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 귀국할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