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으로 받는 급여 외에 돈이 생길 때가 있다. 쓸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비상금으로 숨겨 두었다. 필요할 때마다 아내에게 달라고 하면 되겠지만, 분명 내가 벌어다 준 돈임에도 눈치가 보였다. 그뿐이 아니다. 내가 애도 아닌데 한참 잔소리를 들은 후라야 받을 수 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몰래 주머니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잔소리도 이해는 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필요한 돈은 대부분 아내가 싫어하는 내 취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낚싯대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을 사려면 거금이 든다. 전동 릴도 갈수록 더 좋아 보이게 만들어져 나온다. 편리한 기능 한 가지 더 얹어 신형이라면서 사람을 유혹한다. 있는 걸 그냥 써도 되지만, 옆 사람보다 고기가 덜 잡히는 날이면 은근히 장비 탓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럴 경우 가끔 일이 잘 되어 의뢰인에게 받은 사례금을 숨겨 두었다가 하고 싶은 장비가 나오면 사곤 했다.
비상금은 분산해 숨기는 것보다 한 곳에 숨기면 잊어먹는 일이 없다. 처음 한 곳을 정해 숨겨놓았다가 들켜 돌려받지 못하고 몽땅 압수당한 적이 있었다. 다 뺏기고 나니 피해가 막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비상금의 안전을 위해 여러 곳으로 분산해 숨기게 되었다. 한 곳을 들켜도 남은 곳이 있어 피해가 크지 않아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날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들켜서 뺏겼는데도 좀 달라며 사정하지도 않고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고는 감이 왔나 보았다. 퇴근해 서재로 들어서니 아내가 책을 한가득 쌓아놓고 열심히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숨겨놓은 비상금을 찾는 줄은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왜? 공부해 보려고?” 했다. 아내는 배시시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흔들었다. 아뿔싸! 그렇게 또 한 곳을 털렸다. 그 많은 책을 하나하나 뒤질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어찌 그리 돈 냄새를 잘 맡는지, 기가 막힐 정도로 찾아내었다. 어디 갈 일이 있어도 자기 차는 지저분하다며 항상 내 차를 이용한다. 타기만 하면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온갖 곳을 다 뒤진다. 그러면서도 대놓고 얘길 한다. “여기 또 숨겨 두진 않았겠지?” 하며 해 가리개도 젖혀 봤다가 의자 밑 사물함도 빼 보곤 했다. 정신 사납다고 가만 앉아 있으라고 했더니 “어머나, 뭔가 찔리는 데가 있나 보다.” 하며 더 뒤지는 통에 뭔 말을 못 한다.
하루는 계절이 지나서 입지 않는 코트 속에 분명히 넣어 두었다. 쓸 일이 있어 암만 찾아봐도 없길래 물어보았다. 아내는 모른다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면서도 몰래 돈을 숨기면 그렇게 없어질지도 모르니까 자수하여 광명을 찾으라고 했다. 말을 꺼낸 내가 어리석을 따름이었다. 찾고 또 찾으면 못 찾을 곳이 있을까 싶어 이곳저곳 둘러보며 열심히 찾았다. 설렁설렁 집안을 거니는 나를 보는 아내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뭐 또 숨길 곳을 찾나보다 하는 표정이다. 아무리 열심히 숨겨 놓아도 내 손바닥 안이니 헛수고하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다섯 군데나 숨겨 놓았었다. 하지만, 단 한 곳도 들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처음에 자동차 콘솔 상자를 비롯해 어떻게 알았는지 스페어타이어 밑까지 다 뒤져갔다. 서재에 꽂힌 책에 넣어두었다가 어느 책에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나 찾지 못한 것까지 다 꺼내 가기도 했다. 액자 뒤편, 욕실 천장 환기구 안과 심지어 봉투에 넣어 소파 밑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은 것까지 털렸다. 이건 돈 냄새를 맡는 특별한 재주가 있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숨기는 걸 포기할까도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 비자금도 없이 지낼 생각을 하니 사는 낙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서너 달 전, 해준 일이 잘되어 거금의 사례금을 받았다. 낡은 장비를 표나지 않게 하나씩 바꾸려고 계획을 짰다. 숨겨놓을 곳을 찾고 또 찾아도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귀신같이 찾아내니 도무지 대책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에 마땅한 곳을 찾았다. 예전 오토바이를 탈 때 쓰던 장비를 신발장 옆에 공간을 마련해 넣어둔 데가 있었다. 가죽 장화 속이었다. 설마 여기까지 뒤져보기야 할까 생각했다. 깔창 아래에 비닐로 싼 수표를 넣고 다시 깔창을 덮었다. 바닥이 약간 볼록해져 불안한 감이 없지 않지만 달리 다른 방법도 없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돈 쓸 일이 없어 잊고 지냈다.
유난히 올해는 갈치가 많이 잡혔다. 자주 다니다 보니 입고 있던 구명복이 낡고 더럽기도 했지만, 너무 더웠다. 숨겨놓은 비상금으로 시원한 팽창형 구명복으로 바꿔보고 싶었다. 마침 아내는 그날 좀 늦는다고 했다. 퇴근하는 길로 가죽 장화를 찾으니 보이지 않았다. 장화뿐만 아니라 헬멧이며 옷까지 남은 게 없었다. 혹시 다른 곳에 치워 놓았을까 싶어 베란다며 다른 붙박이 창고까지 모두 뒤져 보았다. 허탈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전화를 걸었다. 이제 오토바이 탈 일도 없는 데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어 재활용품 수거함에 갖다 버렸단다. 새삼스레 그건 왜 찾는지 묻는 말투가 능글거렸다. 속이 아려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내의 보물찾기에는 당할 재주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