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입니까?
사도행전 11:19-26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부터 성령강림절이 시작된다. 모든 교회의 생일은 성령강림주일이다. 성령강림과 함께 예루살렘교회가 시작되었다. 처음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을 가리켜 성령행전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교회 입구에 아름다운 성령강림절 배너를 장식하였다. 2층으로 내려가는 유리창에도 빛난다. 절기를 준비하는 마음은 참 아름답고 귀하다.
마침내 성찬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2020년 주현절에 마지막으로 성찬식을 하고 그동안 못했으니 꼭 2년 5개월 만의 일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예배를 드리던 때에 그런 꿈을 꾸었다. 한 달에 한 번 가족예배를 드리며, 절기에 맞춰 성찬식을 하고, 또 주일마다 애찬과 축하를 나눌 그 날을 기다렸다.
특별히 오늘은 평신도주일이다. 평신도란 교역자와 구분하는 이름으로 직분을 맡거나 맡지 않거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교역자든 평신도든 역할이 다를 뿐 모두가 거룩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존귀하며 특별하다. 특히 평신도는 교회 밖에서 세계 안의 일상적인 활동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역할과 사명이 더욱 중요하다.
1)
오늘 설교 제목은 ‘그리스도인입니까?’이다. 2021년 한국천주교회 표어 ‘당신이 천주교인이오?’에서 빌려온 것이다. 한국 가톨릭의 이름은 천주교이고, 신자를 천주교인이라고 부른다. 개신교인과 구별된 이름이다.
우리나라 첫 사제 김대건 신부는 1년 만에 체포되어 관아(官衙)에서 심문당할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천주교인이오?’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관헌은 본인의 목소리로 직접 답을 들으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성령강림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례로 일어났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가이사랴에서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성령강림 이후 예루살렘에 첫 교회가 탄생하고, 곳곳에서 신앙공동체로 모였다.
마침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그 부류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6).
지금 터키 지역인 안티오키아(안디옥)에서 일어난 일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성령강림 후 숨 가쁘게 상황이 전개된다. 그 배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었다. 부활 이전과 이후에도 숨을 죽이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제자의 무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하면서부터 성전과 거리, 광장과 이방지역까지 나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였다. 협박, 체포, 매 맞음, 구속,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다.
이름은 얼마나 중요한가? 모든 사람의 이름에는 소망, 축복, 기대, 정체성, 사랑이 담겨있다. 그 이름으로 나를 세상에 내놓는다. 누구든 그 이름값대로 살 것이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이란 작명 배경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을 꼽으라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민족, 국적, 언어, 성별, 인종 등 어떠한 차이도 구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은 이름이다. 이만한 이름의 가치가 둘도 없다.
이름은 얼마나 소중한가? 처음 이름은 부모가 지어 주었지만, 나중 이름은 내가 선택한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선택한, 하늘이 내려주신 내 이름이다.
내 평생 가장 잘 지은 이름은 ‘색동교회’이다. 바로 여러분이 선택한 이름이다. 2009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강화로 수양회를 갔다. 그곳에서 앞으로 탄생할 교회 이름을 짓기로 하였다. 미리 접수를 받은 후보만 80여 개였다.
1차로 5개를 골라냈다. 그중에 장터교회도 있었다. 걱정이 되었다. 이러다가 시장 한복판으로 가야 하나? 최종적으로 두 개를 골라냈는데 그물짜기교회와 색동스톨교회이다. 모두 내가 지은 책 이름인데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교회 이름으로 정하기에는 안 어울린다. 이제 투표를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당시 김무상 권사님이 일어나서 제안하였다. 색동스톨에서 스톨을 떼고 ‘색동’으로 타협안을 냈다. 내 생각에 지금껏 김무상 장로님이 한 일 가운데 제일 잘한 일이었다. 성령의 감동이고, 집단지상의 힘이었다.
우리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을 지녔는가? 누구나 아름다운 이름에 대한 욕구가 있다. 색동이란 이름은 부르면 꽃이 되고, 노래가 되고, 문화를 빚고, 평화를 이루어가는 그런 이름이다.
2)
오늘 이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이 사람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된 배경이 된 장본인이다.
누가는 바나바란 이름을 ‘위로의 아들’로 번역하였다. 여기에서 ‘위로’를 뜻하는 헬라어는 ‘파라클레시스’인데 사도행전에서 ‘권함’(행 3:15), ‘후원’(행 9:31), ‘위로한 말’(행 15:31) 등으로 그때마다 번역이 풍성하다.
바나바란 인물은 신약성경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온 레위 사람으로(행 4:36-37), 회심한 사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사도들에게 소개하였으며(행 9:27), 안디옥에서 사역하며 사울과 동역하였고(행 11:22-26), 바울 사도의 1차 선교여행에 동반하였으며(행 13:1-14:28), 후에 바울과 뜻이 맞지 않아 다투기도 했으나(행 15:36-41), 바울은 여전히 그를 훌륭한 동료 사도로 인정하였다(고전 9:3-6).
사도행전 전체를 볼 때 바나바는 12사도 및 바울과 비교해 주연급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바나바는 초대교회, 특별히 이방 선교에 있어 중요한 사역자였다.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고, 교회를 위해서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바나바는 빛나는 조연이었다.
당시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을 경험한 사람들로 시작하였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제자들의 삶을 깊이 변화시켰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천부적으로 닮은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가 바나바이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바나바는 구브로(키프러스)라는 이방지역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인데, 초기부터 예루살렘교회에 참여하였다. 그는 헌신과 친절로 든든한 신뢰를 받았다. 그래서 본명은 요셉이나,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불러 주었다. 위로자, 권면자, 후원자란 뜻이다.
차차 자리를 잡고 성장하던 예루살렘교회에 변화가 일어났다. 스데반의 순교로 큰 환난을 치루었다. 예루살렘교회에는 사도들을 비롯해 소수만 남고 대부분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그 사건이 오히려 전도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0-21).
놀라운 전도폭발이었다. 이방지역에 교회가 생겨나자 신생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든든히 서기 위해 조력자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일에 가장 유능한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위로와 권면과 후원을 잘하는 바나바일 것이다. 예루살렘교회는 이런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였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이르러 형편을 살피니 놀라웠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바나바는 새로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하였고,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고,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바나바는 사람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23)고 권하였다. 이런 바나바 사역은 커다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바나바는 높이 평가를 받았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24).
이런 바나바의 성품과 헌신 덕분에 훗날 ‘바나바 사역’이란 말이 생겨났다. 바나바 사역은 이러한 긍정적인 마음, 믿어주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바나바 사역에서 새 신자 환영 사역이든, 화해와 평화를 위한 사역이든 누구에게나 편견 없이 친절하고 진심으로 대하도록 한다.
바나바는 친절한 그리스도인, 화목한 그리스도인으로 통한다. 언제 어느 곳을 막론하고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 필요하다. 진정한 위로와 격려를 위해서는 얼마나 적극적인 공감이 필요한가?
영어로 공감이란 단어는 엠퍼시(empathy)이다. 같은 공감으로 번역하나 심퍼시(sympathy)와는 조금 다르다.
브래디 미카코의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 나오는 이야기다. 영국 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학교 시험 문제로 ‘엠퍼시란 무엇인가’가 출제되었다고 한다. 아들은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라고 썼단다.
심퍼시는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는 ‘동정의 감정’이다. 그러므로 가여운 사람을 보면 자연히 생기는 감정이다. 엠퍼시는 타인의 감정이나 경험을 이해하는 ‘공감하는 능력’이다. 역지사지이다. 남의 신발을 신는 일이다. 그러니 심퍼시를 넘어 엠퍼시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다.
바로 바나바와 같은 존재가 그랬다. 그는 성령의 사람으로 불린다. 성령의 사람은 온갖 선한 열매로 가득하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 곧 성령의 능력을 얻어야 한다. 믿음과 사랑, 공감하는 능력과 의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이런 바나바 덕분에 얻은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처음에는 안디옥 사람들이 약간 비하하면서 부른 이름인데, 그 이후 세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권사(勸士)라는 직분의 역할은 바로 권면하는 사람(행 13:15), 위로하는 사람인 바나바의 사역을 의미한다. 오늘 예배지기 위임식을 하는 권사의 의미가 여기에서 나왔다. 바로 화목의 직책을 수행하는 일이다.
자녀를 교육할 때, 청소년들에게 그런 연민과 공감의 능력을 키우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런 교육은 우리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될 것이다.
3)
몇 해 전, 성탄절 아침이었다. 마음이 분주한데 독일에서 전화가 왔다. 당시 서재기 집사님이었다. 오는 2월에 장로 취임식을 한다면서, 오실 수 있냐고 웃는다. 그는 만년 복흠교회 대표집사였다.
처음 독일에서 목회할 때 대표집사님 때문에 자주 놀랐다. 전화하면 “목사님, 큰일 났어요”로 말을 꺼낸다. 그때마다 나는 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데 사정을 자세히 듣고 보면 큰 사고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누구네가 부부싸움을 하였다, 누가 교회를 안 나온다고 한다, 누구는 비자 연장이 안 되어 걱정이다, 누구네 식당이 장사가 안된다, 누구가 누구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 같다, 누구네 집에 아기가 안 생겨 걱정이다, 누구네 자동차가 시동이 자꾸 꺼진다.’
서 집사님은 독일 이민 사회에서 동네 이장님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과장이 심한 것 같이 느껴져 판단에 혼란이 왔다. 그런데 점점 남의 아픔에 예민하고, 또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민 사회에는 그런 공감능력을 지닌 이장님이 꼭 필요하다.
물론 지금 서재기 장로님은 나에게도 ‘갯마을 차차차’의 홍반장이었다. 늘 나를 걱정해주고, 내 뒤를 돌봐주고, 내게 협력해준 그 사랑 덕분에 8년 반 동안 독일에서 목회를 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다. 내가 귀국한 지 20년인데, 지난 스무 해 동안 나는 독일 복흠-지겐교회에서 전임 목회자로서 마음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살았다. 이장님은 내게 한 달에 한 번씩 어김없이 전화하여 똑같은 소식을 전해준다. 누가.. 누가.. 누가.. 그래서 고맙다.
오늘은 평신도주일이다. 평신도의 깨어남은 제2의 종교개혁이다.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경을 평신도의 손에 들려주었다면, 제2의 종교개혁은 사역을 평신도의 손에 들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바나바 사역이다.
바나바 사역은 그냥 말로 하는 서비스가 아니다. 한두 번 인사치레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권면과 위로와 후원은 적당한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참 신앙은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현실을 변화시킨다. 교횡 안에서 또 세상 가운데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한다.
바나바는 오늘 나를 향해 묻는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위로와 감동과 성품과 능력과 충만함을 주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