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소나기는 피해 가라는 속언이 있지만. 코로나는 잠깐 스쳐가는 액운이 아니라 언제 멈출지 모르고 계속 진행 중이다. 나와 이웃을 믿을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다. 문밖을 나서도 딱히 갈 곳이 없다. 한동안 호젓한 곳을 찾아 길을 나서봤지만 생각만큼 마땅치 않다. 다시 지난 시절로 돌아 갈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길을 나서본다.
이번에는 ‘서울의 5대궁궐’을 돌아보기로 한다. 먼저 지하철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에서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경희궁”으로 향한다. ‘서궐도’에 의하면 경희궁의 전각과 문은 약 190여개 달했다. 이모든 것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경희궁을 철저히 파괴했다. 500년에 역사를 가진 조선의 왕궁을 짧은 36년간 훼손하고 조선의 얼을 말살하려 한 것이다. 경희궁의 서너 전각도 근래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해버렸는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왕의 침전인 ‘융복전’ 과 왕비의 침전인 ‘회상전’ 자리를 헐어내고 방공호를 만든 것을 보니 말문이 막힌다. 뼈아픈 과거의 역사를 새삼 느껴지게 된다. 경희궁 앞에 있는 오래된 고목이 지나난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경희궁을 나서 경희궁공원 앞에서 새문안 도로를 건너 새문안 골목길로 들어선다. 200m를 걸어 정동 길인 덕수초등학교 앞을 지난다. 구세군 교회를 지나 정동 길 중간에 ‘고종의 길’로 접어든다.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 까지 120m, 10분 거리가 채 안 되는 거리다. 짧은 길의 마지막, 문을 나서면 보이는 정동공원은 각 계절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으며 우리를 환영하는 곳이다. 정동공원을 지나면 왼쪽 좁은 골목에 덕수궁의 별궁 역할을 하던 ‘중명전’이 있다.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동교회 건너편 미술관 앞 길게 뻗은 ‘덕수궁돌담길’로 들어선다. 노란 은행잎이 날리는 낭만이 가득한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이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하지만 연인들이 이 길을 걸으면 헤어지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 지금은 서울시 별관으로 사용하는 곳이 가정법원이 있던 곳이라 그런 말이 나왔을 까(?) 여기서 오늘의 걸음을 멈춘다....길은 계속된다..
흥화문(興化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회관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제가 박문사(博文寺)정문으로 사용하려고 떼어간 것을 1988년 경희궁 복원 사업을 하면서 현재 위치에 옮겨 세웠다.
서울고등학교자리; 1909년 개교한 일본인들의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해방 이후 1946년 서울공립중·고등학교가 세워졌다. 1980년에 정부의 강남개발시책에 따라 경희궁 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
경희궁(慶熙宮)은 광해군 때인 1617년에 짓기 시작하여 1623년에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지만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발음이 같아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또한 도성 서쪽에 있어 서궐(西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慶熙宮) 터에는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경희궁은 대지의 형세를 반영한 특이한 형태의 궁궐이다. 광해군은 새 궁궐을 빨리 짓기 위해 대지의 경계를 정하고 공사를 시작한 탓에 땅의 모양이 동서로 길고, 건물도 외전과 내전이 좌우로 배치되었다. (서궐도안)에서 볼 수 있는 전각과 문은 약 190여 개이며, 정문인 흥화문은 남향이 아니라 종로와 마주 보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면적도 절반 정도로 줄어들어 궁궐의 모습과 위상을 잃었다. 현재는 경희궁지 발굴을 거쳐 정전인 숭정전과 자정전, 태령전 세 전각이 복원되어 있다.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의 정전(正殿)이다. 경희궁 창건 당시에 건립되었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朝會)하거나 중중 현회 등 공식 행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세 임금의 즉위식이 이곳 숭정전에서 거행되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한 건물이고, 원래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으로 쓰이고 있다.
경희궁에서 살았던 왕은 인조에서 철종까지 10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머물렀던 왕은 영조이다. 또한 13년간 경희궁에 머물렀던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1625년 경현당에서 행해진 소현세자 관례를 시작으로 경종과 정조가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숙종과 헌종의 가례가 치러졌고, 숙종을 비롯하여 영조와 순조 등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숙종부터 정조 즉위까지 경희궁은 최전성기였으며, 왕을 비롯해 왕비와 후궁 등이 생활한 일상공간이었다. 인현왕후, 희빈장씨, 혜경궁 홍씨도 경희궁에 살았던 대표적인 왕족이었다.
자정전(資政殿)
경희궁의 편전(便殿)이다.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의 어진(御眞)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현재 건물은 복원한 것이다.
경희궁 방공호;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구석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남아있는 경희궁방공호는 일제말기 비행기 공습에 대비해 만들어진 방공호로 추정된다. 전체 면적 1,378 평방미터 규모로 10여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성토높이가 무려 8.5m, 외벽두께가 약3.0m에라고 한다. 원래 이 자리는 왕의 침전인 ‘융복전’ 과 왕비의 침전인 ‘회상전’ 자리를 헐어내고 방공호를 만든 것이다. 뼈아픈 과거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서궐도(西闕圖)
흥화문(복원), 금천교(복원), 빈청, 개양문, 정원, 약방, 도총부, 옥당, 예문관, 내각, 숭정문(복원), 숭정전(복원), 향실, 자정전(복원), 태령전(복원), 존현각, 흥정당, 융복전, 회상전, 집경당, 위선당, 융무당, 광명전, 영취정, 숭의문, 경현당, 장락전, 용비루, 봉상루, 흥원문, 상의원, 일영대, 도수연, 영렬전, 춘화각(정), 송단, 덕유당, 관사대, 마구, 궁방, 백파담, 금루, 집희당, 심서헌, 봉안각, 경봉각, 어조당
이 많은 궁궐과 전각들이 모두 사라졌다..그나마 복원 된것도 서너개 밖에 안된다..
경희궁 앞에 고목이 지나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서울시 교육청..저곳도 다 궁궐이었을 터..
서울역사관 가늘 길 새문안 로..
경희궁 공원..
서울역사 박물관 공원..
도로를 건너 새문안 골목길로 들어 선다..
정동길..덕수초등학교 길이다..
구세군 제일교회..
아관파천(고종의 길);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120m의 길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은 짧은 길이다. 고종의 길이라는 이름은, 이 길이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을 오갈 때 사용한 길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자객들의 의해 무참히 살해(을미사변)된 뒤, 고종은 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그때 조선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는 고종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권유했다.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은 엄상궁이 마련한 가마를 타고 왕세자와 함께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이후 고종은 무려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있었고, 이듬해인 1897년2월20일에야 덕수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관 파천 후에도 여전히 일본과 서양 열강의 압력이 계속되자, 조선정부 내에서는 고종이 궁궐로 돌아와 자주적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와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침을 알리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조선저축은행의 중역사택 터;
조선저축은행은 1929년에 유일한 서민금융기관으로 설립된, 제일은행의 전신으로 당시에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식산은행의 자금흡수기관으로 일관하였다. 이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터는 덕수궁선원전 영역으로 역대 왕들의 어진, 신주, 신위 등을 모신 곳으로 궁궐 내에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지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용도가 변경되어 조선저축은행 중역의 사택으로, 이후에는 미국 대사관저, 경기여자고등학교 등 본래의 용도를 잃고 사용되다 미국과의 토지교환을 통해 우리에게 돌아왔다.
고종의 길은 현재 매우 화요일~일요일 9시부터 18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짧은 길의 마지막, 문을 나서면 보이는 정동공원은 각 계절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으며 우리를 환영한다. 이곳에는 구 러시아 공사관이 위치해있었다. 아관파천의 현장이었던 이곳은 고종 27년(1890) 준공되었고 현재는 사적 제2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역시 지금은 보수공사 중이라 실물을 볼 수는 없다. 임시방편으로 실물사진을 확대해 놓았는데 조선 말기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 건물의 아름다움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러시아 공사관은 원래 벽돌로 된 2층짜리 건물에 3층짜리 탑이 딸린 구조였지만, 6·25전쟁 때 불에 타버려 탑 부분과 지하 2층만 남았다고 한다. 그것을 1973년 복원한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러시아 공사관이다. 이 정동공원을 나서면 이화학당, 정동극장, 정동교회 등 굴곡의 다양한 역사가 담긴 곳들을 볼 수 있다.
정동공원..
덕수궁돌담길
낭만이 가득한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이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하지만 연인들이 이 길을 걸으면 헤어지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 지금은 서울시 별관으로 사용하는 곳이 가정법원이 있었던 곳이라 그런 말이 나왔던 것 같다.
첫댓글 경희궁, 가까히 있으면서도 잊어버리는 궁 중에 하나이지요. 한양도성길을 걸으며 두어차례 겸사겸사해서 찾아가 보았던 곳입니다. 이렇게 자세히 후기를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부님께는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사람입니다만, 이번에 '조선의 왕릉'들을 돌아보고 '5대 궁궐' 길 나섬을 하면서 느끼는바, 세상을 그동안 겉 살아온것 같습니다.. 여하튼 지나간 과거는 돌릴수가 없지요~~내일 모래는 조선과 고려의 역사의 현장으로 '길 나섬'합니다. 사부님의 지도 편달을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