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를 읽다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보인다.
요사에는 요 태조 야율아보기 이전 거란역사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데 이는 참으로 궁금증이 드는 대목입니다.
"야율아보기는 야율색륵달의 아들이다. 야율아보기의 형제 자매는 6명으로, 야율아보기는 장자이다" 하는 정도로 요사에 기록되어 있어서 궁금증이 더 커집니다.
야율아보기 이전에 거란 추장을 지낸 흔덕근이 요련 씨라 합니다.
흔덕근의 뒤를 이어 바로 야율아보기가 등장합니다.
어느 분은 흔덕근은 보수파,야율아보기는 진보파라 하시는 분도 잇엇습니다.
어느 정도 저도 이 점에 공감합니다.
물과 기름 같은 사이라 어느 중국 사이트의 글을 보니, 나와 있엇습니다.
"요련 흔덕근은 오늘날로 본다면 보수파이다. 야율아보기는 진보파이니,역사 발전의 흐름상 이들의 관계는 물과 기름 사이일수 밖에 없을 것이며 또한 요련 흔덕근이 물러나고 야율아보기가 거란 추장이 된 것도 역사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시대가 영웅을 부르고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고 하지 않던가?"
하는 내용의 글입니다. 전문을 잠시 인용하면...
거란 8부족장이 야율아보기와 손을 잡고 요련흔덕근을 몰아 낸것일수도...
그런데 이는 요사의 기록과 배치된 것이라 궁금증도 더 커집니다.
요사에서는 거란 야율아보기가 추장이 된뒤, 재선을 할 때 8부 족장이 반발하자 이들을 모두
독살해서 제거하고 8부 족장에 자신들의 측근을 모두 임명합니다.
여기에는 황후 술율평의 전언도 여기에 영향을 줍니다.
어쩌면 흔덕근이 물러날 당시, 야율아보기가 8부 족장을 회유하여 잠시 끌어들인뒤, 흔덕근이
제거되고 자신이 거란의 추장이 된뒤 다시 8부 족장과 간극이 벌어지게 되어 8부 족장들 역시
제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역사의 추측이지만...
재선 문제로 인해 8부 족장과 간극이 벌어진 것일수도...
참고로 거란 추장의 경우, 재선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3년을 임기로 해서 각 부족별로 거란 추장이 추대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위 추리는 조심스러운 추정이지만...
그리고 역사적 상상력과 가설을 동원하면, 일설에 야율아보기가 놀랍게도 발해인이라는 가설도 있다고 합니다.
이 가설이 사실일 경우 어쩌면 거란인인 요련 흔덕근과 8부 족장을 잇달아 제거한 것도 종족
문제일수도...
그러나 요사에서는 이 부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필자의 부족한 가설일 뿐입니다.
만약 야율아보기가 발해인이고,요련 흔덕근과 8부 족장들이 거란인이라면, 야율아보기
입장에서는 불리한 상황일수도 있으니 거란 추장이자 온건파 요련 흔덕근을 쿠데타로 제거한 뒤, 8부 족장들을 잠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듭니다.
여기에는 거란인들의 지지가 있어야 하니, 반대파들의 역공에 대비한 일종의 전략이라 하겟습니다.
8부 족장들을 일종의 방패막이로 삼아 거란인들을 지배하는데 성공한 야율아보기는 기회가
오자 방패막인 8부 족장을 제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이 이 때 눈여겨볼 점이 황후 술율평의 출신입니다.
황후 술율평이 잇던 술율부가 회홀 계통의 부족인데, (요사 후비열전 기록에 의하면) 이점이
사실이라면 역시 주목할 부분일수도 모르겟습니다.
이 부분을 검증하기에 앞서 북방민족사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홀과 발해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거란을 상대로 해서 발해와 회홀 사이에 일종의 보이지 않는 일종의 합종연횡을 햇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튼 황후 술율 씨의 출신지 역시 변수가 될지도 될지 모릅니다.
위구르 제국의 멸망 전후, 술율씨 부족이 거란으로 이주했을 가능성 역시 검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눈길을 그는 점이 야율아보기 선대 가계도를 보면, 고구려 멸망 시기와 일치합니다.
야율아보기 선대가 고구려 유민이엇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야율아보기 선대 가계도를 살펴보면 8대조 섭나로 시작하여, 필탑,해란,노이소,살랄달,이덕실,
색륵달,아보기 순으로 이어집니다.
이 부분 역시 연구가 필요합니다.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와 그 선대가 발해인 혹은 고구려 유민 출신이엇다면 거란주민들도 반발이 있엇을 것이니 어쩌면 야율아보기와 야율아보기 선대는 자신들이 고구려 인 혹은 발해 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숨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거란을 지배하는데, 불리한 조건이 될수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전설에 의하면, 9세기 후반 발해와 거란이 전쟁을 합니다.
서기 870년에서 서기 890년 사이 어느 시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발해와 거란 전쟁 역시 주목됩니다.
1차적으로 결론을 내리면 야율아보기는 발해인이었지만 거란을 지배하고 중원을 다스리기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거란인으로 살아간 고구려 유민이나 발해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라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에 대한 원한이 있을 것이니, 한 때 자신의 고향이엇을 가능성도 높은 발해 제국과 손잡고 중원 정복에 나서려 한것도 이 때문인지도 모르겟습니다.
그런데 발해 제국이 거란을 오랑캐의 나라라 부르는 등 적대시하자 중원 정복에 장애가 될지 모를 발해를 먼저 공격한 것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아무튼 이 점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부를 때 발해에 대해 누대의 원수라 한 점 역시 변수가 될듯...
이 기록은 요사와 발해고,고려사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925년 서방 정벌을 마친 뒤,발해 정벌을 선포할 때 한 말입니다.
어쩌면 야율아보기는 그 선대도 그러하지만, 야율아보기의 집안이 발해의 중앙 집권층에서
밀려난 세력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가슴아픈 뼈아픈 어떤 사연이나 이유가 있을지도. 결코 기록할수 없는.
또 하나 추측이자 가설이지만, 대조영이 발해 건설 당시 거란족 추장 이진충과 손만영이
적극적으로 고구려 유민에 협력한 점 역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대목입니다.
거란족 이진충이 당에 맞서 손만영과 손을 잡고 영주에서 서기 696년 먼저 일어나자 뒤를 이어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진충과 손만영의 봉기, 대조영과 걸걸중상,걸사비우 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고구려
부흥운동 두 운동이 일어난 시기로 보아 두 운동(거란족 독립 운동, 고구려 부흥 운동)이
잇달아 일어났다는 점이 결코 예사롭지 않는데, 여기의 배후에 혹시 고구려 유민이 잇엇던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이로 인해 당에 맞서 고구려,거란 연합군이 적극적인 공세에 당도 일시적으로 밀립니다.
그러나 이진충과 손만영의 잇다른 전사, 거란 장수 이해고의 투항 및 당의 적극적인 총공세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맞으며, 지도자를 잃어버린 거란은 결국 당과 손잡게 되는데, 여기에는 일부 반발한 세력도 있엇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들은 다름아닌 발해 건국에도 참여하는 거란과 해, 실위인들입니다.
발해 전설에 의하면 발해 건국 당시 고구려 유민 ,말갈인 외에도 거란,해,실위 등이 연합해 발해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거란이나 해,실위 등은 당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세력으로 일부 세력이기는 하지만...
김영종 씨의 역사소설 빛의 바다에 보니 흥안령의 노래라는 발해 관련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책에서 발해 전설을 인용해 적은 바에 의하면, 발해 건국에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 외에도
거란,해,실위 등이 당과의 투쟁을 선포하며 발해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야율아보기의 선대는 이 때 발해 건설에 참여한 거란인일 가능성도 있을지 모르겟습니다.
거란은 이즈음 당에 투항한 거란 세력,발해에 협력한 거란 세력,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게 되는 것인지도...
발해가 차차 발전하다 보니, 이 과정에서 일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외지 세력인 거란과 해,
실위 계 인물들이 밀려나게 되어 야율아보기 선대와 발해 사이 원수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정도 해 봅니다.
어디까지나 역사의 상상이지만....
그럴 경우 발해인 야율아보기나 야율아보기 선대는 고구려 유민이나 발해 유민 그리고 발해인이 아닌 거란인이라 볼수 잇을듯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 유민 설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추정을 해 봅니다.
고구려 유민 중 일부세력이 돌궐에 망명한 것처럼 거란으로 망명을 간 고구려 유민들도 일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야율아보기나 야율아보기 선대가 이 경우에 해당하는 고구려 유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율아보기는 거란으로 망명한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고 정리될수 있습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여러 가능성을 놓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 거란 장수 소손녕이 고려 대표 서희에게 우리 거란은 고구려의 후신이라 하고 한 말이 잇는데, 이 부분 역시 눈여겨 연구할 부분인지도 모르겟습니다.
거란이 고구려의 영토 때문에 그러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야율아보기와 야율아보기 선대가 고구려 유민 출신이어서 거란이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족상의 문제로, 소손녕은 당연히 야율아보기가 고구려 인이라는 것을 고려에 말할수 없었으니, 고려 입장에서는 땅 때문에 거란이 전쟁을 한 것이라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사료가 없어 더 이상 역사의 진실을 알수 없지만, 이 것이 사실이라면 요나라 역시 적어도 고구려의 뒤를 이은 한민족의 방계 역사가 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라인이 세웠다고 하는 금나라처럼, 요나라 역시 고구려의 유민이 건설한 한민족의 방계 역사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조심스럽게 해 보게 됩니다.
요,금,청이 한민족의 방계 역사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저는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김교헌이 편찬한 신단민사의 기록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요,금,청이 한민족의 방게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사 뿐만 아니라 경제사, 사회사,문화사,종교사,생활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