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25
11월30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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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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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_SW-svrGqk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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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 말씀을 더 잘 경청하기 위해 영혼의 주파수를 오로지 스승님께로 고정시킨 안드레아 사도!>
살아생전 온몸과 생애 전체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풀풀 풍겼던 충실하고 사랑스런 제자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서, 그분 말씀을 좀 더 잘 경청하기 위해 점점 더 그분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마침내 그분과 동고동락하며 모든 것을 공유하는 그분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로마서 10장 17절)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곧 안드레아 사도의 삶을 통해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흔들리지 않는 깊은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들음을 통해서 왔습니다. 그는 스승님의 말씀을 좀 더 달 경청하기 위해 영혼의 주파수를 오로지 스승님께로 고정시켰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복음 말씀에 언제나 최우선권을 두고 경청했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했고 자신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화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눈여겨볼 만한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존경하는 헨리 나웬 신부님(1931~1996)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복음을 자신의 삶 속에 구체화하려고 발버둥쳤습니다. 명문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을 뒤로하고 장애인 생활시설 새벽 공동체로 내려갔습니다. 청중들의 갈채와 환호를 뒤로하고 거동이 불편한 가난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섬기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1996년 헨리 나웬 신부가 안타깝게도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난 후 여러 절친이 따뜻하고 비범했던 그의 삶을 회고했습니다. 그와 절친했던 교수 부부가 멕시코에서의 스페인어 연수를 끝내고 귀국하는 그를 공항으로 마중 나갔었는데,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꽤 오랜 기간의 연수였기에 짐이 꽤나 많은 줄 알았었는데, 그는 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딸랑 여권만 손에 쥐고 출국장을 빠져나왔답니다. 멕시코를 떠나오면서 그는 몸에 걸친 옷만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소유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고 떠나온 것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안드레아의 의미는 ‘사내다움’ 혹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게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셨던 안드레아, 사내답게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는 성격이 판이하였습니다. 단순하고, 과격하고, 급하고, 다혈질적이었던 형 시몬에 비해 안드레아는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그리스 북부 지방의 에피루스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박해 때 아카이아에서 체포되어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로 X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의 첫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안드레아에 관해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한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후 꽤 오랫동안 죽지 않고 매달려있었습니다. 이틀간 매달려있었는데, 그 순간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안드레아는 십자가 위에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주변에 둘러선 군중들을 향해 설교를 계속했답니다.
이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적대자들은 안드레아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안드레아를 오랫동안 감쌌답니다. 그 강렬한 빛 한가운데 안드레아는 숨을 거두었다는군요.
임종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람 낚는 어부로 살고자 노력했던 안드레아, 그리스도의 향기였던 안드레아 사도의 삶과 신앙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신앙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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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54iGKPjE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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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지만 형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일과 사람을 잡는 일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물고기를 잡으며 그냥 살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존엄성, 혹은 나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우리에게 사람이 물고기가 아닌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다 존중받고 싶습니다. 귀하게 여겨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정말 인간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엄할까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누가 보장해줄 수 있을까요? 적어도 나라는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역사상 어느 나라가 국민을 존엄하게 보았을까요?
2022년 10월 28일 금요일 밤 10시에 방송된 KBS1TV ‘시사 직격’이란 프로에서 ‘3천 달러의 삶 – 해외 입양 잔혹사’라는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입양은 우리나라에서 부모를 찾을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 입양되지 않는 아이들을 외국에서 찾아와서 아이들을 살펴보고 데려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60년간 약 25만 명의 아동이 마치 물건처럼 외국으로 팔려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냥 70~80년대는 특별히 더 나라에서 달러가 필요했고 입양기관도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경찰서에 길을 잃어 맡겨지는 아이들은 부모를 찾을 기회도 주지 않고 거의 해외로 입양을 보냈다고 합니다. 마치 현재 인터넷 쇼핑하듯 외국인들은 서류상으로 아이들을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팔려 간 아이들의 존엄성은 이미 포기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에 최근 어린 시절 해외로 입양된 한인 입양인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모여들었습니다. 덴마크를 주축으로 미국, 벨기에 등 여러 국가에서 모인 이들은 자신의 해외 입양 과정에서 강압, 뇌물, 문서 위조 등의 불법 입양 양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며, 인권침해와 국가개입 여부의 진실을 밝혀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고아가 아닌 데도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명목으로 문서를 위조하여 3천 불을 받고 보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인신매매이고 그 이상의 범죄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른바 ‘우편 배송 아기’라 불리는 이 대리입양 시스템이 한국의 해외 입양률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양부모의 입양 적격성 심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입양아동을 폭력, 학대 등의 위험에 노출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 아동 수출국 최상위 국가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인권을 가장 무시하는 나라입니다.
물론 입양을 가서 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지만 사진만 보고 서류 한 장으로 물건처럼 아이를 사 온 부모가 아이의 인권을 존중해줄까요? 방송에서 1984년 초등학교 6학년 때 프랑스로 입양된 김유리 씨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성폭력의 노예로 성장해야 했습니다. 부모를 고발하고 올해 초 입양서류를 확인하던 중, 자신이 호적상 ‘고아’로 기재되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친부모의 이름과 한국에서의 삶을 모두 기억하기 충분한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유리 씨가 받은 입양서류 속 친부모의 이름은 모두 ‘무명’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부모의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잠시 보육원에 아이들을 맡겼던 것인데 보육원은 그런 아이들까지도 다 고아로 서류를 위조해서 팔아버린 것입니다. 해외 입양률이 정점을 찍은 1980년대에는 출생아 중 1%가 넘는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었고, 이는 일종의 민간외교 정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김유리 씨는 아예 성적 욕구를 풀려고 자신을 입양하려고 한 양부와 이를 묵인한 양모에게 자신을 성적 노예로 넘겨버린 나라와 입양기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건 아동 인신매매라고 봅니다. 그 사람이 입양 수수료를 낸 목적은 아이를 물건처럼 사서 자기 성적인 욕구를 푸는, 아이가 그런 물건이 되는 것을 바랐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다시 생각해봅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합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존엄성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자기를 존엄하게 여겨주는 대상 안에 속해 있어야 존엄합니다. 만약 돈을 좋아하는 나라나 성적인 욕구에 빠진 양부에게 맡겨지면 그 존엄성은 짓밟힙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엄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을 존엄하게 보아주는 대상은 그 창조자뿐입니다. 인간에게는 부모입니다. 왜냐하면 자녀에게 자신의 살과 피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종교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물고기로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어렸을 때 길을 잃어 남의 집살이를 하던 10년간 학교도 가지 못하고 종처럼 일하면서 존엄성을 잃었습니다. 일하며 매도 수없이 맞았고 일한 값도 한 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존엄성을 짓밟은 그 집이 아주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습니다. 천주교를 믿는다고 사람을 존엄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도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냥 어쩌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물고기 대신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우리 존엄성을 보장해주실 수 있는 분이란 뜻입니다. 세상 누구에게 의존해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만든 사람만이 그 만든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그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좀처럼 이런 인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믿을수록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없는 나라가 됩니다. 생존, 곧 돈에만 집중하며 인간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우리는 우리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나를 만든 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려는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창조자이심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생존을 위해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웃을 살게 하는 창조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창조자가 되라고 하신다면 우리도 창조자의 자녀란 뜻입니다.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여 하느님 자녀로 만드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께 속하였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내가 존엄한 존재라는 인식은 내가 창조자의 일을 할 때 더욱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여자들을 사랑할 때는 ‘한 여자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존재’라는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창조자의 협력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스스로도 이렇게 큰 자존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느끼는 자존감이고 그 사람이 갖는 존엄성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자기를 피조물이라 여기는 한 우리를 존엄하게 보아주지 않습니다. 나도 하느님과 같은 창조자가 되었음을 믿지 않는 한 모든 인간을 물고기로 봅니다. 자신을 창조자의 자녀라 믿는 이들만 창조자의 존엄성에 참여하고 창조자답게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이 창조자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창조자로서 창조자와 함께 사랑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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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신문 홍보를 위해서 동창신부님이 있는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의 사제관에 머물면서 조금 놀랐습니다. 2층에 방이 있는데 거실에서 지냈습니다. 거실에 책상과 매트리스를 놓고 지냈습니다.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것을 좋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옷도, 살림살이도 거의 없었습니다. 동양화에 있는 여백처럼 신부님의 사제관은 여백이 많았습니다. 저도 단순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님을 보니 저는 가진 것이 참 많았습니다. 아프리카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내전과 분쟁 그리고 갈등과 분열이 있습니다. 서구 열강이 인위적으로 식민제국주의 시대에 국경을 정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같은 나라에 서로 다른 부족들이 살고 있기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낮은 민도와 독재정치가 내전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우라늄, 금, 다이아몬드와 같은 광물과 천연가스와 원유의 매장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강대국들이 개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지역의 반군과 테러리스트들은 이권을 노리면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광산개발을 하면서 환경이 오염되고, 생명이 죽어갑니다. 차라리 지하자원과 천연가스와 원유가 없었다면 분쟁과 갈등은 적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자 청년이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말고, 거짓 증언하지 말고, 남의 재산을 탐내지 마라.’ 그러자 부자 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을 기특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하였다. 네가 한 가지 더할 것이 있다.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라라.’ 그러자 부자 청년은 몹시 슬퍼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부자청년은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와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에게 그물과 배는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 안드레아는 요한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와 베드로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이 ‘반석’이라면 안드레아 사도의 이름은 ‘남자다움, 용기’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 또한 용기를 가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주님의 제자가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진 것이 없는 것도 만족할 줄 알면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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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4,18-22: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안드레아는 남성적이라는 뜻으로 친절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고 열린 마음을 가진, 열심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폈다고 전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소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는 X형으로 된 십자가 위에서 Patrasso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동방 교회에 되돌려 주었고, 후에 Patrasso로 옮겼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고 계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즉각적인 순종을 바라신다. 그러면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보다도 그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 버림을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었느냐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이 말씀을 따라 어부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얻기 위해 세상의 아버지를 떠났다. 세속적인 낚시에서 거룩한 낚시로 바뀌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낚듯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깊은 오류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낚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세상,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의 그물로 사람을 잡도록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의 제자로서 살면서 결국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하고 자신 있게 말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복음선포는 은총 체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지만, 미루거나 꾸물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22절) 하느님의 뜻 앞에는 한 치도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듣기는 하면서도 실천을 올바로 하면서 그분을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생활을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고 주님 앞에 나의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좀 더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느님 안에 이어가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교만 그리고 집착을 피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을 드리며 실천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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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믿음과 선포’라는 주제를 묵상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어부였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전합니다.(1,40-41 참조)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믿음 선포로 예수님을 만난 뒤 그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믿음을 전하며 주님을 믿도록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믿으려면 먼저 믿음의 내용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듣지 않고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데, 선포의 내용은 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사로운 내 생각이나 견해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믿음의 내용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을 전해 준 신앙의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우리도 후손들에게 믿음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탁월한 복음화의 방법은 삶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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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공관복음은 공통적으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하던 어부였습니다.
고기를 잡던 어부는 이제 사람을 낚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와 함께 복음서는 그들이 지체 없이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첫 제자들의 모습은 말씀에 대한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독서의 표현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의 응답은 믿음의 행위이고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행동으로 응답한 제자들도 아직 확고한 믿음을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오해하기도 하고 가르침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에 한 번 응답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자주 그 말씀을 듣고 되새기며 그에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들의 믿음이 깊어지는 것처럼 우리도 꾸준히 그 말씀을 듣고 말씀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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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안드레아는 베드로의 동생으로, 어부였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안드레아는 본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는데,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요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전한 인물이 안드레아입니다.(요한 1,40 참조)
이렇게 본다면 안드레아는 맨 먼저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전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전해 들은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직접 확인한 뒤 다른 이에게 전한 첫 사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듣는다고 하여 모두에게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들었던 많은 이들 가운데 정말 소수의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였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믿음을 얻게 되었다고 하여 누구나 죽을 때까지 그 믿음을 충성스럽게 지켜 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던 안드레아 성인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는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모든 부족함을 털어 내고 끝내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보니 어떤 이가 믿는지 믿지 않는지는 그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나 봅니다. 성인은 오늘날 그리스 땅 펠레폰네소스반도 북서쪽에 있는 파트라스에서 엑스자형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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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보좌 신부일 때 청년들과 함께 구유를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함께 아이디어를 짜고 구유 안에 어떤 의미를 담을까 고민도 많이 하였습니다.
한 번은 구유를 가장 가난하게 만들어 보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가장 가난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쓰고 버린 폐기물들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버려진 물건들로 구유를 만들어 보려고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폐자재도 주워 오고, 플라스틱 페트병도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버려지고 쓸모없는 것,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것, 그래서 우리가 거들떠보지 않는 것으로 예수님의 자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구유가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누우신 자리가 그러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의 기다림 또한 우리 자신의 가장 쓸모없고 버려진 마음, 너무 추악해서 들추어 보고 싶지 않은 자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곳으로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런 곳을 바라보고, 거기에 자리를 마련해 두어야지만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과 처음으로 만난 제자들도 그러한 자리를 마련합니다. 어부에게 그물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물에 집착하였고 크고 좋은 그물을 얻고자 사람들과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였습니다.
제배대오의 두 아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렸다고 합니다. 같은 어부였지만,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호수로 나갈 수 있는 배를 가졌고 그런 배와 그물, 그리고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권력이었고 힘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그분을 만나 버렸던 것은 다름 아닌 욕심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사람에 대한 욕심, 권력과 힘에 대한 욕심이 바로 우리를 가장 추악하고 더럽게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는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탐욕을 마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의 자리를 비워 두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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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르심과 따름>
마태오 4,18-22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부르심과 따름>
나를
보시고서
나를
부르시니
그분을
따름으로써
그분을
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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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이에게 “너는 쓸모없어.”라고 계속 말하면, 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도 쓸모없다고 말하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고 하더군요.
쓸모없다는 말은 어떤 행동에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을 때 듣게 됩니다. 문제는 그 한 번의 일로 쓸모없다고 단정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부분을 보고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잘못입니다. 이 잘못에 누군가의 삶이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빠다킹 신부의 맘고 생크림케이크’라는 평화방송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촬영은 모두 제가 있는 갑곶성지에서 합니다. 공개 방송이라 누구나 함께할 수 있지만, 평일 오후의 촬영시간이 부담되는지 또 텔레비전에 자기 얼굴이 나올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오시는 분이 늘 적습니다.
‘많이 오시면 더 힘내서 할 텐데...’라는 마음만 간절합니다. 그러나 만약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냥 벽보고 강의한다고 생각하자, 적은 수라도 자리를 채워주시는 그분들이 정말 고마운 것입니다.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영광이 더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 역시 이렇게 신부가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쓸모없는 것을 쓸모가 있게 주님께서는 만드십니다.
성 안드레아 축일인 오늘, 그의 부르심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의 형 베드로와 함께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목직을 받고 흔쾌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죽음의 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 성인 역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떠올린다면, 세상의 가치는 모두 이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서 주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나를 쓸모 있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부르고 계시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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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2년 11월 30일 -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영적 중매쟁이>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안드레아 사도는 제게 구약의 아론과 같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론이 형제간이면서 영도자 모세를 조용히 보필했던 것처럼 안드레아도 사도들의 대표인 형을 조용히 보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단 안에서 역학관계입니다. 안드레아는 형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함께 주님의 첫 제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중요한 사건 때 그러니까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타볼산 변모 때, 그리고 겟세마니에서 주님께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다른 세 사도는 주님과 함께였지만, 안드레아는 거기에 끼지 못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안드레아는 이렇듯 중요한 역할에서 벗어나 있음은 물론 많이 등장하지도 않았고 요한복음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닙니다.
이런 역학관계 안에서 안드레아는 열등감을 느낀다거나 소외감을 느껴 주님께는 반감을, 세 사도에게는 시기 질투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이럴 수도 있었음에도 안드레아는 그러지 않았음을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아는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모두 영적 중매쟁이의 역할입니다.
형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첫 제자가 될 때 주님을 먼저 따라가 본 것은 안드레아였고, 주님 계신 곳을 보고 와서는 베드로를 주님과 연결해 줍니다.
다른 두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소년이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를 주님께 연결하고, 그리스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러 왔을 때 연결한 것은 안드레아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신 후에도 안드레아는 앞에 나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형을 주님께 인도하고 옆에서 도왔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리던 구도자였고, 메시아를 만났을 때는 그분을 자기만 독점하지 않고 형과 다른 제자들과 나누는 영적 사랑의 소유자였고 중매쟁이였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오병이어나 그리스 사람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소년의 오병이어를 주님 앞에 가지고 왔을 때 그는 이것이 그 수많은 사람에게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소년과 함께 주님께 가지고 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주님께는 소용이 있음을 알고 소중히 여긴 그입니다.
작은 자를 내치지 않고 끌어안고,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고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능성을 보고 소중히 여긴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작은 역할이지만, 영적인 중매의 중요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인간적으로 보면 무시할 수도 있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주님께서 소중히 쓰시도록 연결한 그의 영적인 사랑을 본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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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따라 오너라”>
-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삶 -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사내다움’ 또는 ‘용기’를 뜻합니다.
형 베드로와는 달리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부활해 승천한 뒤에는 그리스 지방으로 전교 여행을 갔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서 제자인 사도 스타키스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안드레아를 초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보고 있습니다.
성 안드레아는 어부, 생선장수, 밧줄 만드는 사람, 그리스, 스코틀랜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수호성인이며 러시아 최고 훈장 이름이 사도 성 안드레아 훈장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국기도 파란 바탕에 흰색의 X자형 십자가를 사용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가 순교한 곳은 그리스 아카이아 지역의 파트라라고 하며, X자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기에 X자 십자가를 ‘성 안드레아 십자가’로 부릅니다.
안드레아가 X자형 십자가를 선택한 까닭은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글자였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아가 형장에 끌려갔을 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다오.”하며 기쁨에 넘치는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인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에는 십자가를 든 모습이 많습니다.
참 인상적인 성 안드레아 사도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감화가 얼마나 컸으며 또 얼마나 주님을 일편단심 사랑하고 따랐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새삼 성소는 순전히 주님 주도로 이루어진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어부인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 던지는 것을 보시자 즉시 이들을 제자로 부르시니 첫눈에 반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이들의 성실함과 내적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것 같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어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데오와 함께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자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는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떠날 정도이니 이들의 내적 갈망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이 갑니다.
이제 이들 삶에는 획기적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따를 주님이 이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해, 목표 없이, 방향 없이, 중심 없이, 의미 없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런 성소는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의 갈망에 응답해 주님께서 이들을 부르신 것이니 섭리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총으로 불러주신 섭리의 결과입니다. 만약 부름받지 않았다면? 가정법의 질문은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의 삶이 중요합니다. 끝까지 부르심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두 번의 부르심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 날까지 한결같이 주님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금까지 잘 살았어도 앞으로 잘 못 산다면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보시는 주님이 아니라 현재를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내외적으로 불편하고 불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말 그대로 순교적 삶입니다. 제 좌우명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시도 이런 삶에 대한 다짐을 표현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34년동안 요셉수도원에 정주하다 보니 참 감동적이 사례도 많이 목격합니다. 자기 뜻과는 무관한 질병도 많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병고중에도 믿음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들이 참 눈물겹습니다. 어느 암투병 중인 자매는 날마다 오후 2-4시 사이 수도원 성당에 와서 조배를 드리곤 하며, 또 한 분 자매 역시 암투병에 믿음으로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건강하게 활동했던 분들인데 참 예측 불가능한 삶같습니다. 또 한 자매역시 한결같은 믿음으로 사셨던 분인데 수술후 어제 보낸 메시지입니다.
“수술은 잘 받았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토,일 빼고 30번 받습니다. 이상 없이 잘 받을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듣고 걷고 말하고 볼 수 있음에 성모님 통하여 예수성심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보살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평상시 한결같이 믿음생활을 충실히 하였기에 이런 곤궁한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참 장하고 아름답습니다. 제1독서 로마서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원망, 절망, 실망은 금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소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심기일전 어떤 상황이든 주님을 받들어 부르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이에 맞갖는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치유의 구원도 뒤따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제 삶의 자리에서 삶자체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 역시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한결같이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십자가의 길'을 시종여일 기쁘게 항구히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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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4,19)
<부르심의 응답인 선교!>
'11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며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 '성 안드레아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마태4,18-22)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두 형제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를 보시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러자 어부였던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주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인 오늘 독서(10,9-18)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사도직 사명인 선교의 시작은 내가 먼저 믿고, 내가 먼저 주님 부르심에 응답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10,9-10)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10,14-15)
그렇습니다. '세상 복음화의 시작은 내가 먼저 믿고 내가 먼저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으로 갈아입고, 세상 안에서 내가 예수님의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은 매일 말씀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니 늘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부르심에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는 사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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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8wX5VPIGok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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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1.30.수.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 19)
삶이 있는 곳에
부르심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시고
사람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소박한 어부(漁夫)인
안드레아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가십니다.
부르심은
만들어가는
사랑의 벅찬
여정입니다.
사람을 낚기 위해
아끼던 그물마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여정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따름이라는
과거의
그물까지
버리는 행위입니다.
이와 같이
버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 없이
따를 수 없고
사랑 없이
이어질 수 없는
부르심의
숨 가쁜
현장입니다.
신앙의 이야기는
열매를 맺는
감사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부르심과 응답의
치열한
관계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풍랑처럼
요동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사람을 낚으면서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부르심의 여정은
사람이 되어가는
창조의 아픔입니다.
낚이는 아픔
건져 올려지는
두려움을 거칩니다.
부르심의 길은
사람으로
시작하지만
사람이 아닌
하느님과의 힘겨운
내려놓음과 버림의
반복입니다.
하느님으로
가득찬 행복은
집착하고 있는
그 그물마저
버리고 따르는
행복입니다.
사람을 낚고
사람을
건져 올리는
성 안드레아 사도의
치열한 내적 행복을
만나는 기쁜 축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버리고 낚이고
건져 올려지는
사랑과 아픔이라는
성장의 여정입니다.
성장의 그 이름
값진 신앙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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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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