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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림문자
인간이 동물 수준에서 벗어나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소리언어만 사용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림으로 묘사하여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고 추상적인 개념도 상형문자로 묘사하게 된다.
그림문자의 한계는 대상이 있을 때에만 표현이 가능하고 추상적인 개념은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단점이 있다. 사물의 형상을 본떠 만든 문자로 상형문자의 대표적인 것은 한자, 이집트의 하에로글리프라 불리는 문자, 수메르의 설형문자다. 이 상형문자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글자는 한자가 유일하다.
그러나 그림문자에 바탕을 둔 상형문자는 날로 확장되어 가는 인간의 사상, 활동, 새로운 문물의 발명, 나아가 날로 복잡해지는 인간 내면의 심리 등을 표현하는 데 너무나 불편했다.
결국 인간은 뜻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로부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자의 소리만을 채택하여 표기하는 표음문자, 즉 소리글자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 결과 오늘날 지구상에서 사용되는 표의문자, 즉 뜻글자는 한자가 거의 유일하다. (한글전쟁 31-32피 김흥식)
4. 한자의 원형 갑골문자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甲乙丙丁과 子丑寅卯 시공간부호의 원류를 찾아가다 보면
우리는 가슴 벅찬 내용들을 만난다. 바로 동이족이 세운 은나라에서 갑골문자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즉, 갑을병정의 시공간 부호를 창조한 것은 동이족이었다.
이 세상에서 물질계의 창조를 뜻하는 글자는 甲목 뿐이다. 창조된 것을 활용하는 것을 상징하는 부호는 乙이다. 동이족, 동방예의지국 등의 동쪽은 甲乙을 상징하며 창조능력을 가진 민족임을 뜻한다.
왕제 편에 이르기를 ‘동방을 이(夷)라 일컫는다. 이(夷)는 뿌리(柢)다. 어질고 생명을 사랑하여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남을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천성이 유순하고 도리로 다스리기 쉬워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중국은 戊辰으로 표현하는데 뜻은 논에 농사를 짓고자 수많은 무리가 모이고, 장사꾼들이 시장에서 떠들면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을 의미하기에 창조능력과는 거리가 있다. 갑골문자에 대해 수많은 동양학자들의 주장이 있는데 잘 정리된 내용을 살펴보자.
夷族에 대해 설명한 오소운 목사의 글을 정리하였다.
지금의 중국 중심부, 이 지역의 역사를 논할 때, 그 중심에 있으면서 동아시아를 지배한 어질고, 예절바르고, 창의력이 넘치고 또 평화를 사랑하는 「동이족(東夷族)」을 빼놓을 수 없다. 해동성인(海東聖人)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도 동이족이요, 주역과 역법(曆法)을 창안했다는 희화자(羲和子)는 물론, 농사법과 의학을 발전시켰다는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도 동이족이다.
동양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최고의 성군(聖君)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도 동이족이요, 최초로 철갑(鐵甲)에 구리투구로 무장하여 박치기 전법으로 유명한 치우(蚩尤) 천황도 동이족이요, 갑골문자, 상형문자, 표의문자, 한문자(漢文字, 소위 漢文)를 만든 것도 동이족이요, 절개로 유명한 백이(伯夷)와 숙제(叔弟)도 동이족이다. 세계 석학들의 논문 중에서 동이가 우리민족의 조상임을 고증한 글과 그들의 업적을 모아 여기 실림으로써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바이다.
(1) 서량지(徐亮之) 교수: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 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10월초판)에서 이렇게 썼다.“4천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서량지 교수는 또 이렇게 썼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달력)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2) 장개석(蔣介石) :중국 총통 장개석(1887-1995)은 이시형 상해 임시정부 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고향이 옛날 백제(*대륙백제) 땅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
(3) 임어당(林語堂):중국의 석학이요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임어당(1895-1976)을 만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여담으로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안호상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는 한글전용에 문제가 많다."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임어당 :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 조상이 만든 문자를 우리가 빌려 쓰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무안을 당한 안호상 박사는 이후 평생을 민족사관에 매진 역사를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4) 왕동령(王棟齡)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 묘족(苗族=東夷)의 영속 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5) 임혜상(林惠詳) 교수 :홍콩대학의 임혜상(林惠詳) 교수는《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이렇게 말했다."맹자가 말하기를「순(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舜)임금은 은(殷)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興起)하였다."
(6) 중국학자 필장박(畢長樸) :중국의 학자 필장박은《중국인종북래설(中國人種北來說)》에서 중국의 고대 문헌, 고고학적 유물, 언어적 특성, 인류학적 특성, 민속 문화적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중국 인종의 시원(始原)이 북방의 시베리아 일대와 동북아 쪽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필장박은 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중국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7) 일본학자 고꾜 야스히꼬(吾鄕淸彦)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 이렇게 썼다.“사마천의《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갑골문자의 용도는?
홍콩 = 최형규 특파원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8/10/22/3227278.html 신문에 나온 내용이다.
갑골문자의 수는 대략 3,000자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반경(盤庚) 때부터 은말(殷末)까지 약 2백 수십 년에 걸친 것으로, 이것을 5기(期)로 나누어 연구하고 있다. 내용은 제사(祭祀), 군사(軍事), 천상(天象), 전렵(田獵), 농경(農耕), 임금의 행행(行幸)과 안부(安否)에 관한 것이 많고, 이것으로 은대의 정치, 사회, 경제 등이 밝혀져서 전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던 은 왕조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임이 실증되었다.
상(商)왕조는 당시 상당히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다.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지금 일컬어온 중원의 광대한 지구를 통치하였다. 이런 강대한 고대제국의 영도자인 상왕(商王)과 그 통치 집단은 조상과 여러 신들을 숭배하였다. 그러므로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제사를 지내고 점복에 나타난 신령의 의향에 따라 통치하였음을 오늘날의 우리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갑골문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나타난 점복활동의 기록이다. 이러한 점복활동은 상왕과 점복에 대한 전문직 종사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273년간 왕실의 제사, 왕의 안위와 출입, 사냥과 전쟁, 기후와 천문, 사회. 경제, 군사, 농경, 신들의 재앙에 관한 것도 있다. 이는 점복의 기록이면서 사실상의 실록에 해당한다.
하늘의 의지를 왕실에 전달하고 미래의 길흉을 예언하며 상왕 및 귀족 통치자의 미래를 향한 백성의 통치를 이끌었다. 이러한 무리들은 대체적으로 많지 않았을 것이고 정치 지위가 상당히 높은 제사를 집전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무사(巫史)집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들이 현재 볼 수 있는 상나라의 문자는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갑골 위에 새겨진 것이다. 왕실 점복활동에 대한 의식은 약간의 정인(貞人)으로 조성된 제사집단이 주재하였고 복조(卜兆)에 대한 판단과 해석은 오직 상왕의 고유 권한이었다. 이토록 점복활동은 대단히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 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신문에 올라온 자료를 살펴보자.
【서울= 뉴시스】이 예슬 기자 = 대만 신생보(新生報)가 은나라 마지막 황제 제신(帝辛)이 '목야(牧野)의 전쟁' 직전 별점을 치고, 그 점괘를 새겨 남긴 홍도관을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홍도관에는 모두 61개의 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연구에 따르면 '주왕(紂王)'이라고도 하는 은상 최후의 황제 '제신(帝辛)'의 재위 만기 시에 '태백경천'이라고 하는 금성의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반란 및 국가기강을 파괴하는 대 흉조였으니 은상으로서는 왕조 존망이 걸린 절박한 지경에 직면하게 됐다.
당시는 때마침 주나라 무왕이 기병해 주(紂) 왕을 치려는 시기여서, 주왕은 화근을 소멸시키기로 결정하고 이에 출병 전에 제사의 예를 거행하고 성상을 관찰, 그 결과를 구해 물었다. 주왕이 평상시처럼 그 결과를 수골(獸骨) 위에 새기지 않은 까닭을 규명해보면, 그 주된 원인은 중국전통의 천간과 지지는 60으로써 한 사이클을 이룬다는 사고방식이 있는데 주왕은 응당 천자의 군대가 작전 중에 전체 과정을 끝까지 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둥근 원에 꽉 차게 표시를 한 것은 승리를 획득해 상왕조의 사직을 지키는 의의가 있다. 이에 주왕은 특수한 정황에 직면한 상태에서 특수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장차 결과는 60개의 글자들을 둥근 도관 위에 새겨 구웠으니 이것이 곧 현재의 이 홍도관이다.
60개의 갑골문자는 각 30자씩 2조로 나뉘어져 있다. 제1조 복사는 '금(金)'에서 '후(侯)'까지로, 추구해 묻는 사항을 설명하고 있다.
"불길하게도 대낮에 금성이 나타났습니다. 신(辛)의 군대를 출병시킬까요? 주후서백(周侯西伯)의 군대와 그의 우군들이 주(州) 서읍 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께서 돕고 지켜주실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과연 서 백후(西伯侯)로부터 그러한 일이 있었다."
제2조 복사는 '조(祖)'에서 '어(御)'까지로 계속해서 질문을 구함과 아울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이시여! 문(文)을 치기 위해 저녁에 제를 올리면, 우리 군대가 승리를 획득할 수 있을까요? 정수(井宿)에 제를 올리면 짐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요? 왕이 성조를 살펴 길흉판단을 해 가로되, '각성(角星)이 밝게 빛나니, 나는 문(文)의 세력을 정벌해 배(나라)를 평안하고 고요하게 이끌 것이고, 승리를 획득한 후에는 서읍을 분봉할 것이며, 재앙은 능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해석 박대종)
이 60개의 글자들은 3000여 년 전 주왕과 주후 서백 간의 전쟁을 앞둔 장면을 생동감 있고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왕은 금성이 대낮에 출현한 사실을 흉조로 여기고, 국가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제성(以星制星)'의 전략적 사고 하에 각성(角星) 별점을 진행해, 금성으로부터 야기된 불안을 저지해낼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데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의의는 확실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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