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강
정영선
산집 비운 날 부엌 쪽 구멍이 께름해
끈끈이 쫘악 깔고 떠났다가
열흘 지나와 보니 새앙쥐 네댓 마리 붙어
어떤 놈 벌써 허물어졌고 그중 운 없는 놈
질기게 울음 붙들고 있더라고 그가 일러주었지
순간 내 신발 밑창에도 끈끈이를 느꼈어
묘한 웃음처럼 서로 밀고 당기는
신용, 은행, 백화점, 할인, 각종 포인트 카드의 마그네틱 끈끈이
귓구멍에 쌓인 헛말, 헛꿈의 뿌리는 밑창까지 뻗어
과거의 울분 끈끈이와 합세해 초강력 끈끈이가 되어 있었지
나 꼼짝 못하고 거기 붙어 있는 거 보았어
가끔 자정 강둑에 섰던 건
베란다 난간에 맺혔다 떨어지던 또록한 눈매의 빗방울이
달빛 휘젓는 시퍼런 물머리, 고래 지느러미 같은
은빛 물살을 치는 강으로 다가와
나를 끌어당겼다가 세차게 물살 속으로 던져
세상 끈끈이에 물려 있는
내 발목 힘을 무너뜨리고
역류해서 내 영혼의 물꼬를 틀어줄지도 모른다고
초저녁 별이 깜박깜박 자리 찾아오듯이
벚꽃잎 눈보라 봄마다 돌아오는 약속같이
산발한 미친 여자 되어
기다렸던 건 아닐까
기다렸던 건 아닐까
----정영선, [강](랜덤하우스, 2007년)전문
운명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일체의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노력으로는 그 운명을 극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힌두교에서는 브라만이 모든 사물들의 탄생을 주재하고, 비쉬누는 그 생명을 보호하고 유지시켜주고, 시바신은 그 사물들의 죽음을 주재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모리아라는 세 운명의 여신이 존재하고 있는데, 클로토는 인간의 탄생을 주재하고, 라케시스는 모든 인간들의 생애를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연장자인 아트로포스는 우리 인간들의 죽음을 주재한다. 이 힌두교의 삼신三神이나 그리스의 운명의 여신들을 생각해볼 때, 너의 인생이나 나의 인생,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인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예정된 길을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굴려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대 로마시대의 옥타비오 시이저와 앤토우니, 그리고 폼피이와 미이내스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들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장 명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옥타비오 시이저는 줄리어스 시이저의 양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린 나이에 자기 자신만의 황제의 길을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발걸음으로, 그토록 의연하고 당당하게 걸어가지만, 앤토우니는 천하의 상승장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오 시이저의 운세에 주눅이 들어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의 품으로 달아나, 주지육림 속의 쾌락만을 추구하다가 그만 파멸해버리게 되고 만다. 그리고 또한 폼피이는 옥타비오 시이저, 앤토우니, 레피더스의 삼인체제에 반발하여 그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들과의 회담을 끝내고, 그 세 사람들을 제거하고 천하의 황제로 등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으나, 자기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그의 충복인 미이내스의 모략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건 자네가 실행했어야 할 것이지. 입밖에 내지 말고! 나로선 비겁한 일이야, 자네가 했으면 충성이 됐을 것이지만, 여보게 실속을 차리는 것이 내 명예는 되지 못하네. 명예가 있고서 실속이 있는 것 아닌가. 계획을 입 밖에 낸 것을 후회하게. 나 몰래 했으면 나중에 칭찬을 받았을 것 아닌가. 그러나 이제는 안 되네. 포기하고 술이나 들게(셰익스피어, [앤토우니와 클레오파트라])”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이내스는 폼피이의 충복으로서, 그 주연의 자리에서 옥타비오 시이저와 앤토우니와 레피더스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연출해냈지만, 그러나 그의 주군인 폼피이의 한 마디의 거절로 그 기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비록, ‘명예가 있고 대권(실속)이 있는 것이지, 대권이 있고 명예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폼피이의 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폼피이의 말 한 마디에 그 기획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또, 폼피이의 곁을 떠나가버린 미이내스의 짓은 그야말로 천하의 바보같은 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왜, 옥타비오 시이저는 그토록 어린 나이에 자기 자신만의 황제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며, 왜, 앤토우니는 주지육림 속의 쾌락만을 추구하다가 파멸해버렸던 것일까? 왜, 폼피이는 그토록 소망했던 황제의 꿈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수많은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그 바닥에서 그토록 명예만을 외쳤던 것이며, 왜, 미이내스는 그의 주군인 폼피이의 바보같은 말을 넘어서서, 그 얼간이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자기 자신이 황제로 등극할 수 있는 고귀하고 웅대한 꿈을 갖지 못했던 것일까? 운명론은 결정론이며, 그 결정론을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가 움추러 들고, 그 모든 것이 허무해진다. 나는 때때로 그 운명론의 한가운데서, “나의 태어남은 시기상조였을까? 제 아무리 지혜, 용기, 성실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보았자 나의 시대는 오지 않는다. 어느 먼 훗날 나의 시대는 기필코 올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을 위해서 더욱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나의 역량은 끝끝내 그 새싹을 피워보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운명에의 사랑이 아닌, 그 탄식만을 덧보탠 적도 있었다.
사르트르는 그의 {구토}에서 우리 인간들은 하나의 돌이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우연히 존재하고 있을 뿐, 그 어떠한 존재의 정당성과 그 필연성도 갖고 있지 않다고 역설한 바가 있었다. 왜냐하면 실존이 본질에 우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이 본질에 우선하는 존재는, 다만, 껍데기와도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그 존재의 근거 역시도 텅 빈 ‘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운명론을 다만, 맹목적으로 수용하게 되면 우리 인간들의 삶과 그 자유와 주체성이 없어지게 된다. 외디프스가 살부와 근친상간을 범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이상 시인이 폐결핵 말기의 환자로서 죽어간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김수영 시인이 너무나도 뜻밖에 윤화輪禍를 당하고 비명횡사해간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운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운명을 창조해내는 일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운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운명을 창조해낸 인간은 과연 어떠한 인간이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운명을 창조할 수 있는 자는 영원한 신성모독자이자 낙천적인 인간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가 살고 싶은 곳, 그 이상세계를 향해서 날아갈 수 없는 새가 파멸하듯이, 자기 자신만의 사유의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날아가지 못하는 인간은 고은과 신경림처럼, 운명론자이며, 언청이며, 곰보이며, 소경인 사상의 불구자에 지나지 않는다. 운명에의 거역, 바로 이것만이 이 세상의 진정한 시인의 모습이며, 따라서 오늘도 진정한 시인들은 운명의 여신인 모리아의 목을 비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부와 근친상간을 범하고 테베사회를 구원했던 외디프스를 생각해보고, 선악과를 따먹고 이 세상의 판단력의 어릿광대들인 우리 인간들을 구원해냈던 아담과 이브를 생각해보라! 요정 칼립소가 제안했던 영생불사의 삶을 거절하고 우리 인간들의 삶을 옹호했던 오딧세우스를 생각해보고, 한여름의 날씨가 너무 뜨겁다고 태양신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댔던 헤라클레스를 생각해보라!
우리 인간들은 존재의 본질이 없는 존재이며, 그 존재의 근거가 텅 빈 ‘무’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 인간들은 축복받은 존재가 아니며, 그 저주받은 존재로서 불행한 의식의 소유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인간들의 존재의 근거가 ‘무’이고,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그 삶을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으로 변모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그 어떠한 이유도 이 세상을 비방할 근거가 되지 못하며, 또한, 그 어떠한 삶도 이 세상의 삶보다 우선하지 못한다. 운명에의 사랑, 그러나 그것은 무기력한 자의 자기 체념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운명에의 거역, 즉, 새로운 운명의 창조는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고 옹호하는 낙천주의자의 삶의 형식이 되어 줄 것이다. 운명론자는 주체성과 자유을 상실한 염세주의자이며, 반운명론자는 주체성과 자유를 획득한 낙천주의자이다.
정영선 시인은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는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와 {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를 출간한 바가 있다. 그의 [강]은 어느덧 일상생활의 덫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 운명에의 거역을 통해서,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일상성의 세계는 주체성과 자유가 없는 세계이고, 탈일상성의 세계는 주체성과 자유가 있는 세계이다. 그가 그 일상성의 덫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산집 비운 날 부엌 쪽 구멍이 께름해/ 끈끈이 쫘악 깔고 떠났다가/ 열흘 지나와 보니 새앙쥐 네댓 마리 붙어/ 어떤 놈 벌써 허물어졌고 그중 운 없는 놈/ 질기게 울음 붙들고 있더라고 그가 일러주었지”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산집 이야기를 듣고나서부터 였던 것같다. 산집을 비어두었더니 부엌쪽에 구멍이 나 있었고, 그 산집 주인은 그 구멍을 께름칙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구멍은 쥐의 구멍이었고, 그 쥐들은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쪼아대고 그 산집의 살림살이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끈끈이 쫘악 깔고 떠났다가/ 열흘 지나와 보니” 어떤 놈은 벌써 몸이 허물어져 있었고, 또 어떤 놈은 아직도 찍찍거리며, 질기게 울음을 붙들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쥐도 생명체이고, 인간도 생명체이다. 쥐도 그의 삶의 의지에 충실하고, 인간도 그의 삶의 의지에 충실하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이 끈끈이라는 덫으로 쥐를 그처럼 무차별적으로 살생을 해도 좋은 것일까? 또, 그리고, 그것은 다같은 생명체인 우리 인간들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영선 시인은 이러한 생명주의 사상과 그 민감한 감수성으로 그 사건들을 재구성해보며,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연 나도 만물의 영장이 아닌 쥐와도 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순간 내 신발 밑창에도 끈끈이를 느꼈어/ 묘한 웃음처럼 서로 밀고 당기는/ 신용, 은행, 백화점, 할인, 각종 포인트 카드의 마그네틱 끈끈이”라는 시구와 “귓구멍에 쌓인 헛말, 헛꿈의 뿌리는 밑창까지 뻗어/ 과거의 울분 끈끈이와 합세해 초강력 끈끈이가 되어 있었지/ 나 꼼짝 못하고 거기 붙어 있는 거 보았어”라는 제2연의 시구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시인의 신발 밑창에도 끈끈이가 붙어 있었고, 그 역시도 찍찍거리며, 질기게 울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사회이고, 소비사회는 신용사회이다. 오늘도 더 많은 이익과 더 많은 자본의 축적에 안달이 나 있는 자본가들은 ‘생산의 축’과 ‘소비의 축’을 다같이 움켜쥐고서 끊임없이 상품의 구입과 소비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광고의 언어는 토씨 하나와 쉼표 하나까지도 가짜이며, 또한 단어 하나와 문장 전체와 그 감미로운 배경음악까지도 가짜이다. 오직 더 많이 유혹당하고, 더 많이 속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광고의 언어이며, 자본가들은 그 ‘헛말’과 ‘헛꿈’의 언어를 위하여, 가장 더럽고 추한 미인계까지도 마다하지를 않는다. ‘당신의 신용은 제일급이며 당신은 아주 훌륭한 고객입니다’라고 그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무이자에 가까운 값싼 돈으로 당신도 가장 멋진 사업을 해보세요’라고 그의 호주머니를 노린다. 또한, ‘이번 주는 전폭적인 바겐 세일기간이예요’라고 그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온갖 대사은품과 포인트 카드로 그의 호주머니를 노린다. 하지만, 그 반면에, 이 소비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소비자는 그 광고의 언어에 현혹되어 명품 하나를 사면서도 매장의 청년 앞에서 으시대고, 별로 쓸모가 없는데도 사치스러운 옷을 구입하면서, 마치, 아름다운 나비부인처럼 으시댄다. 또한 그는 부동산 투기가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부를 좀먹는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금리의 주택자금으로 두, 세 채의 아파트를 구입하면서 으시대고, 영업 이익의 배당과 주식가치의 상승에 의한 장기투자를 하기보다는, 속칭, 헤지펀드와도 같은 단기투자를 일삼으면서 으시댄다. 자본가와 소비자, 또는 소비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그들이 주고 받는 언어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가 가짜의 언어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시인은 어느날 문득, 그 ‘헛말’과 ‘헛꿈’의 끈끈이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인이 자본가이고 자본가가 시인이다. 시인이 쥐이고 쥐가 시인이다. 아니, 자본가가 쥐이고 쥐가 자본가이다. “묘한 웃음처럼” 서로가 서로를 밀고 당기는 그들의 관계는, 마치, 무서운 원수형제들처럼 그 일상성의 덫에 갇혀 있는 관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나는 일상성의 덫에 갇혀버린 한 마리의 쥐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이 충격적인 외침에 의하여, 현대사회의 모든 관계는 해체되고, 따라서 이 [강]이라는 시는 제일급의 시로서 그 참신성과 새로움을 얻게 된다. 산집에서의 쥐의 출현과 끈끈이를 놓는 상황도 현실적이고, 한 열흘 지나 생쥐 네댓 마리가 그 끈끈이에 붙어 있는 모습도 현실적이다. 또한 “신용, 은행, 백화점, 할인, 각종 포인트 카드”를 두고 일어나는 관계의 묘사도 탁월하고, 그 묘한 웃음의 관계를 일상성의 덫으로 인식하는 장면도 탁월하다. 따라서, 이 현실적인 힘찬 토대가 [강]의 시적 수준을 탁월하게 만들어 주면서, 또한, 그만큼, 만인들을 위한 감동의 드라마로 울려 퍼지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성의 세계는 주체성과 자유가 없는 세계이고, 탈일상성의 세계는 주체성과 자유가 있는 세계이다. 요컨대 정영선 시인은 그 일상성의 세계에서 탈일상성의 세계를 꿈꾸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주체성의 확립과 자유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가끔 자정 강둑에 섰던 건/ 베란다 난간에 맺혔다 떨어지던 또록한 눈매의 빗방울이/ 달빛 휘젓는 시퍼런 물머리, 고래 지느러미 같은/ 은빛 물살을 치는 강으로 다가와”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나를 끌어당겼다가 세차게 물살 속으로 던져/ 세상 끈끈이에 물려 있는/ 내 발목 힘을 무너뜨리고/ 역류해서 내 영혼의 물꼬를 틀어줄지도 모른다고”이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가 이 ‘강물’을 그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 구원의 손길로 인식하게 된 것은, 왜냐하면 그 강물들이 “베란다 난간에 맺혔다 떨어지던 또록한 눈매의 빗방울”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또록한 눈매의 빗방울”은 제 정신을 가지고 도덕적인 순결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그 또록한 눈매의 빗방울로 이루어진 강물만이 “은빛 물살을 치는 강으로 다가와/ 나를 끌어당겼다가 세차게 물살 속으로 던져/ 세상 끈끈이에 물려 있는/ 내 발목 힘을 무너뜨리고/ 역류해서 내 영혼의 물꼬를 틀어줄지도 모른다고” 그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체가 더럽다는 것은 영혼도 더럽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 더러움을 씻어줄 수 있는 것은 맑고 깨끗한 물 뿐인 것이다. 정영선 시인은 이 맑고 깨끗한 물에 의해서 그의 더러운 몸과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아름다움이 반드시 도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도덕적인 것은 반드시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된다.
정영선 시인의 [강]은 생명의 물이며, 정화의 물이다. 그 강물은 일상성의 때를 씻고, 자기 자신의 몸과 영혼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그의 구도의 힘에 의해서 솟아나오고 있는 강물이며, 심지어는 모든 생명들과, 우리 독자들의 몸과 영혼마저도 아름답고 깨끗하게 정화시켜주고 있는 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초저녁 별이 깜박깜박 자리 찾아오듯이
벚꽃잎 눈보라 봄마다 돌아오는 약속같이
산발한 미친 여자 되어
기다렸던 건 아닐까
기다렸던 건 아닐까
내 영혼의 맑은 물을 간직하고 싶은 그의 꿈은 그러나 이 마지막 시구에서처럼, 그의 광기로 나타나게 된다. 주체성과 자유에 대한 간절함이 광기(열정)로 나타나고, 그 광기는 “산발한 미친 여자“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초저녁 별처럼 아름답고 해맑은 눈동자를 지닌 그 여자, 벚꽃잎처럼 눈부신 살결을 지닌 그 여자----. 이제 정상은 비정상이 되고, 비정상은 정상이 된다. 미쳤다는 것과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동일한 말이면서도 동일한 말이 아닌 것이다. 일상성의 덫은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일상성의 덫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인간들은 그 일상성의 덫을 벗어나 아름답고 풍요로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자(자유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자유와 주체성만을 강조하고, 사회주의자(구조주의자)는 우리 인간들을 사회 속에 갇힌 존재로만 본다. 개인주의자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를 인정하지 않고, 사회주의자는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회(구조)는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사회(구조)는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에 의해서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개인과 사회, 이론과 실천, 적과 동지, 일상성과 탈일상성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여, 이 더럽고 추한 세상을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으로 가꾸어 나가고 있는 것은 순전히 정영선 시인과도 같은 이상적(낙천적)인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운명에의 거역, 오직, 그것만이 우리 인간들의 삶을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줄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