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9
#독생자 #발생 #발출
독생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에 대해 오직 성부께만 능동성을 부여하는것이 과연 합당한가?독생자와 성령도 성부와 동등한 위격으로서의 하나님이시므로,그분들께도 능동성을 부여하는것이 합당하다고 본다.즉,독생자께서는 성부에 의해 수동적으로 태어나심과 동시에 당신 스스로 성부께로부터 능동적으로 태어나셨고,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보내지심과 동시에 당신 스스로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능동적으로 나오시는 것이다.마찬가지로 성부께서는 능동적으로 독생자를 낳으시고 성령을 내보내심과 동시에 독생자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출생하시고 성령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내보내게 되시는 것이다.하나님의 세 위격간의 연합성은 서로에 대해 능동적이시면서 동시에 수동적이시다.
#말씀 #성육신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라 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연합해 계셨기 때문이다.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성자하나님께서 인성을 입으셨다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연합해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인성이 이땅의 인성으로 한없이 낮아지셨다는 것을 의미하며,이를 그리스도의 비하라고 하는것이다.그리스도의 인성은 처녀의 육체의 형질을 취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혼이 부여돼서가 아니라 단지 처녀의 몸을 빌리신 것뿐이시므로,처녀의 인성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성립하지 않으신다.
#예정
창세전에 그리스도의 인성안에서,그리스도의 인성과의 논의를 통해서 구원받을 성도들이 선택되었기 때문에,그리스도의 인성 자체가 선택의 원인이시다.그리스도의 인성을 피조물로 보는한 예정의 대상으로 치부할수밖에 없으나,그리스도의 인성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예정의 대상이 되실수 없다.
#벨기에신앙고백서 13.하나님의 #섭리
We believe that this good God, after he created all things, did not abandon them to chance or fortune but leads and governs them according to his holy will, in such a way that nothing happens in this world without his orderly arrangement.
우리가 믿는 바는, 이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피조물들을 우연이나 운에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인도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과, 이로써 하나님의 질서정연한 계획하심이 아니고서는 이 피조세계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Yet God is not the author of, nor can he be charged with, the sin that occurs. For his power and goodness are so great and incomprehensible that he arranges and does his work very well and justly even when the devils and wicked men act unjustly.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의 조성자도 아니시고, 죄가 발생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으신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은 너무도 위대하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마귀들과 악인들이 불의를 행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역을 매우 탁월하고 타당하게 계획하시고 행하십니다.
We do not wish to inquire with undue curiosity into what he does that surpasses human understanding and is beyond our ability to comprehend. But in all humility and reverence we adore the just judgments of God, which are hidden from us, being content to be Christ's disciples, so as to learn only what he shows us in his Word, without going beyond those limits.
우리는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고 우리의 파악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지나친 호기심으로 캐묻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모든 겸손과 존숭함으로 우리에게 숨기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사모하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으로써 오로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들로만, 이 말씀의 한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만 배우는 것에 만족할 따름입니다.
This doctrine gives us unspeakable comfort since it teaches us that nothing can happen to us by chance but only by the arrangement of our gracious heavenly Father. He watches over us with fatherly care, keeping all creatures under his control, so that not one of the hairs on our heads (for they are all numbered) nor even a little bird can fall to the ground without the will of our Father.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일도 우연으로 발생할 수 없으며 단지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계획하심으로만 발생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의 돌보심으로 우리를 지켜보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통치 아래 두시므로, 세신 바 된 우리의 머리카락 한 가닥도, 작은 새 한 마리 조차도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In this thought we rest, knowing that he holds in check the devils and all our enemies, who cannot hurt us without his permission and will.
우리가 이 사상에서 취하는 안식은, 하나님께서는 마귀들과 우리의 모든 대적들을 감찰하심으로 붙들어매셔서 저들이 당신의 허락하심과 뜻이 아니고서는 우리를 해하지 못하게 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For that reason we reject the damnable error of the Epicureans, who say that God involves himself in nothing and leaves everything to chance.
이런 연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것에도 관여하지 않으시고 만물을 우연에 내버려 두었다고 주장하는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저주받을 오류를 거부합니다.
사람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돌보거나 관리하거나 신경쓰는 것을 본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마땅히 자기자신이 누려야 할 시간과 건강과 소유 등을 상대 또는 대상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바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 지속적인 돌봄의 대상은 나 자신을 제외한다면 자녀나 가족이나 연인 등 극히 제한적이다. 심지어 요즘에는 사랑하는 자녀를 키우는 것 조차도 ‘독박육아’라는 험악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은 가급적 관심과 신경을 조금이라도 덜 쓰기 위해 대상에 대한 체계와 원리와 법칙 등을 만들어 자동화를 하려하고, 이런 것을 잘 할수록 효율적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혈액형, 요즘에는 MBTI 같은 성격유형분류법에 사람들이 지나치리만큼 열광하는 것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좀 더 편하고 손쉽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 각자가 갖는 가지각색의 성향을 깡그리 무시하고 몇 안되는 기준으로 욱여넣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람의 성향을 성경에서는 ‘6’이라는 숫자로 상징하는데, 이는 숫자 6이 세 인수 1,2,3을 더하거나 곱하거나 전부 6을 만들고, 자연에서도 벌집이 육각형으로서 가장 안정적인 형태를 취하는 등 완벽한 조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이든지 기계적인 자동화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알아서 작동하고 운행되게끔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천체들과 같은 광대한 것들의 움직임에서부터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미립자의 움직임까지 하나하나 관여하신다. 이는 단지 자연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사람, 특별히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모든 성도들 각자의 일생을 단 한 순간도 끊김없이 돌보신다는 것을 포함한다. 아울러 성도들에 대한 돌보심은 성도들 각자의 삶을 따로따로 분리해서가 아니라 성도들 각자가 처하게 되는 모든 상황들과, 성도와 성도가 만나게 되는 교회적 상황 모든 것을 합력하게 하셔서 선을 이루어 가신다. 그런데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되는 부귀영화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이나 질병이나 상실이나 몰락 같은 겪기 싫어하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세속인들은 교회와 성도들이 빈천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주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삼고, 거짓 교회와 거짓 신자들은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에게 경배하며 세속적인 부귀영화만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참된 교회와 성도들은 비록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이해하지도 예측하지도 못할지라도 결국 그 과정들이 자신들에게 진정한 복이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기 때문에 잠잠히 묵묵히 견고하게 인내하게 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묘막측한 섭리하심을 성경에서는 ‘7’이란 숫자로 상징하는데, 이는 숫자 7은 사람이 보기에 숫자 6과 비교해서 아무런 특징도 규칙도 매력도 없으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는 그 하나의 점으로 나머지 여섯 개의 점을 연결하셔서 여섯 개의 점들이 서로 간에 끊어지거나 넘어지지 않게 지탱하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세속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묘막측한 섭리하심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의 지성 수준을 벗어난 현상에 대해서는 우연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진화교도들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원리가 진화의 방식이라 주장하는 유신진화론자들도 겉으로는 교회 신자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우연 신을 섬기는 진화교도들일 뿐이다.
#20200109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9장. #롯 #소돔 #고모라
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2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1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아브라함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두 천사와 대동하신 반면에 소돔과 고모라에는 두 천사만 방문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소돔 순찰보다는 아브라함을 만나시는 것이 주 목적이셨던 것 같다. 여호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대접하는 자로 세우셨고 그에게 언약을 재확정 하시며 소돔에 대해 귀띔을 하심으로써 롯을 위해 간구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아브라함과의 대화를 마치신 후에는 소돔 순찰은 두 천사에게 맡기시고 다시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신 것 같다.
롯은 소돔에서 당한 재앙으로 인해서 대대로 저평가 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분명히 롯이 의인이라고 칭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롯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되고 우리의 시각을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으로 조정한 후에 롯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롯은 두 천사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이 평범한 나그네가 아니라 범상치 않은 천상의 존재임을 알아차린 것 같다. 이것만 보더라도 적어도 롯의 영적인 판단력은 아브라함에 뒤쳐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그 패역한 문화 가운데서도 의인으로서 손님과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는 습관적으로 성문에 앉아서 혹시나 근처를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지 않은지 살펴보았을 것이고 그들에게 식사와 침소를 제공함으로써 나그네들이 사악한 소돔 사람들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 왔을 것이다. 그는 패역한 도시에 살면서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서 선행을 베풀어 오다가 드디어 뜻하지 않게 두 천사를 영접하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히브리서에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부지 중에 아브라함과 롯과 같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대접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대접하게 될 천사가 실제로 하늘의 천사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유적으로 언급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돌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께 해드리는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려운 이들을 돕기를 마치 아브라함과 롯과 같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듯이 해야 함이 마땅하다.
롯의 제안을 받은 두 천사는 처음에는 그의 청을 거절하는데 그들은 천사들이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을 필요가 없었고 위험에 빠질 일도 없었던데다가 소돔과 고모라에 그렇게 자기들을 영접할 자를 만난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해서일수도 있다. 그래도 롯은 천사들의 거절에 굴하지 않고 자기 집에 묵어갈 것을 간청하는데 이는 아마도 자기 경험 상 그들을 내버려두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반드시 해코지를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염려가 되어서 그랬던 것 같다. 비록 자기 잘못이 아니더라도 자기 청을 거절한 나그네가 안좋은 일을 당하게 되면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질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그렇게 간신히 두 천사를 자기 집으로 영접한 롯은 그들을 위해 무교병을 대접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접대와 다른 것은 음식 마련을 롯의 아내나 종이 아니라 롯 자신이 직접 한 것과 미각에 아무런 즐거움도 주지 못하는 초라한 무교병만을 대접했다는 것이다. 롯의 집에는 분명 자기뿐만 아니라 롯의 아내와 두 딸들이 있었을텐데도 나그네로 가장한 두 천사를 접대하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후에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리고 두 딸들은 아버지와 근친상간을 저지를 생각을 한 것과 연관지어서 결과론적으로 추정해 본다면 롯의 아내와 두 딸들은 롯처럼 의로운 심령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발달된 문명과 문화에 흠뻑 취해 있었으며 그래서 롯이 그렇게 자주 집안에 나그네들을 데려와서 접대하다가 사람들로부터 해를 당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이번에도 롯이 어디서 남루한 두 나그네를 또 데려오자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남편이, 아버지가 그들을 대접하건 말건 자기 방에 들어가서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롯이 두 천사에게 아브라함처럼 좋은 음식이 아니라 맛없는 초라한 무교병을 대접한 것에 대해서 장경동 같은 거짓 선지자들은 롯이 음식을 아까워해서 그런 것이라고 폄훼한다. 그러나 그럴 요량이었으면 아예 그들을 영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롯의 살림 형편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롯이 아브라함과 결별하고 처음 소돔 땅으로 이주했을 때만 하더라도 롯은 막대한 거부였다. 그러나 그곳의 악인들에게 여러가지로 부당한 재산 상 손해를 당하기도 했을 것이고 나그네를 접대할 때마다 떼거지로 몰려와 행패를 부리는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서 재물을 소비하다보니 십 몇 년 만에 그 많던 재산을 거의 다 소비해 버리고 무교병으로 끼니를 때울만큼 가난해 진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롯이 대접한 무교병은 엘리야를 대접한 사렙다 과부의 마지막 곡식 가루와 다른 어떤 과부가 성전에 헌금한 두 렙돈과도 같았을 것이다. 천사들에게는 아브라함의 살진 송아지와 고운 가루로 만든 귀한 음식이건 롯의 초라한 무교병이건 인간의 음식으로는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똑같은 것이었을테므로 단지 아브라함과 롯의 마음을 받은 것이다.
밤이 되자 소돔의 모든 백성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행패를 부렸다는 것은 그만큼 소돔이 상습적으로 그래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자기네들이 그 나그네들을 강간할테니 내놓으라는 것을 보면, 소돔 백성들은 자기네 도시를 방문한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남자건 여자건 성적으로 유린하고 그들의 소유를 갈취하며 그들의 생명도 아무렇지 않게 빼앗기를 일삼았던 것 같다. 즉 소돔과 고모라는 도시 전체가 강도와 강간과 살인자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롯이 자기네 도시로 들어와 자꾸 나그네들을 자기 집으로 들여 보호하니 그 때마다 롯을 위협했던 것 같다. 롯은 그런 패역한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 때마다 자기 재물을 풀어 주었고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거의 빈털터리 수준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내어줄 것이 없게 되자 급기야는 처녀인 자기 두 딸을 짐승보다도 못한 소돔 백성들에게 내어줄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소돔 백성들은 그렇게 만족할 줄 모르는 거머리처럼 다오 다오 하면서 롯의 재산을 야금야금 빨아먹어 온 것이다.
이러한 소돔 백성의 악행은 종종 동성애에 대한 해석 기준이 되고는 한다. 전통적으로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측에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 때문에 멸망 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대로 동성애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 전반적인 반 인륜적 행태 때문이라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동성애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추악한 죄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신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것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 것이다. 물론 그들의 행태에서 분명 동성애적인 죄악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소돔 백성들이 얼마나 패역했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죄악상인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는 반드시 거부되어야 하는 죄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성애만 저지하면 다른 모든 죄악은 눈감아도 된다는 듯한 극단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극단적인 교인들의 말대로라면 그들이 숭앙해 마지않는 미국이야말로 합중국 헌법으로 동성애를 인정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처럼 유황불로 멸망 당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소돔 백성들이 자기들을 저지하는 롯을 두고 자기네들의 법관이 되려 한다고 분노한 것은 롯이 지속적으로 소돔 백성들의 죄악을 책망해 왔음을 시사한다. 패역한 그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악을 판단하여 자기네들을 깨우치려는 롯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롯은 꾸준히 그 패역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 왔던 것 같다.
#20180109
#창세기 #아담 #하와 #원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
하와가 판단력이 떨어져서, 그 지능이 둔해서 저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오해한 것이 아니다. 하와는 아담과 동급으로 지어진 아담을 돕는 아담의 배필이다. 따라서 아담과 동등한, 아니, 어쩌면 아담을 도와야 하니 아담보다 더 우월한 지혜를 가진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런 그녀가 아담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명령을 잘못 들었을리가 없다. 따라서 저 대답은 하와가 아담의 말을 듣고서도 자신의 뛰어난 지혜로 교만하여서 과연 그러한가 자의적 해석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인류 최초의 인물은 바로 하와인 것이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아담이 하와가 건넨,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열매를 받아서 먹은 이유는 무엇인가? 통상적으로는 아담도 하와의 미혹됨에 동참하여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교만하여서 그런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지고 인류 최고의 지혜와 지식을 부여받은 자이다. 동산에서 얼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를 나누던 자다. 그런 그가 그 열매를 먹었을 경우에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몰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까? 도리어 그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받아먹은 것일까? 하와가 그 열매를 건넸을 때, 아담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그 열매를 먹지 않고 하와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열매를 먹는 것이다.
만약 아담이 그 열매를 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담 자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기 때문에 동산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으므로 동산에서 쫓겨나서 아무도 지켜주는 이 없이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담에게 하와는 어떤 존재였는가? 하와가 있기 전에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동산에서 잘 지내왔을 것이다. 그러나 하와가 있은 후에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할만큼 지극한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다. 그런 하와가 쫓겨나서 비참하게 죽을 것을 알고서도 혼자 동산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아마도 날마다 눈물로 지냈을 것이다. 때문에 아담으로서는 그 열매를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아담이 하와가 건넨 그 열매를 먹었던 것은, 하와가 당할 그 비참함에 동참하고자 한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아담은 자신의 생명을 대신하여 하와의 범죄를 없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따라서 자기가 짓지 않은 죄에 대해서 벌을 받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아담은 어쩔 수 없이 그 열매를 받아 먹은 것이다. 아마도 내 생각에, 아담은 하와가 그 열매를 건넸을 때 매우 심한 내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라고 본다.
아담은 하와가 건넨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와의 비참한 삶에 동참할 뿐 아니라, 하와가 먼저 지은 그 죄에 대한 모든 비난을 아담 자신이 대신 당하는 것까지 감수해야 했다. 아주 예민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일반적으로는 하와가 먼저 미혹되어 금지된 열매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중팔구 아담의 범죄라고 이야기한다. 아담은 그 열매를 받아먹음으로써, 자신이 지극히 사랑하는 하와가 당해야 할 온갖 수모와 비난을 대신 뒤집어 쓴 것이다.
아마도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제 3자가 보기에 너무나 어리석을 정도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성향이 있는 것은, 이런 아담의 성향을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베드로
베드로후서는 베드로 사도께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움을 감지하고서 유언의 형식으로 남긴 성경이다.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4), ‘내가 떠난 후에라도’(벧후 1:15).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베드로 사도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예언’을 잘 붙들 수 있도록 권면하는데 힘쓴다. 예언이 무엇인지 설명하기에 앞서서, 베드로 사도는 자기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닐 때, 하늘에서 예수님께 큰 영광이 내린 것을 직접 보았음을 먼저 간증한다. 이 신비한 체험은 복음서에도 기록될 정도로 너무나 크고 놀라운 것이었으므로, 믿는 성도들은 베드로 사도의 이 간증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베드로 사도의 말년에는 베드로 사도보다 더 크고 놀라운 신비한 체험을 한 성도는 같은 사도급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말씀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바로 이어서 이보다 ‘더 확실한 예언’(1:19)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예언은 바로 다름아닌 ‘성경’이라고 하신다. 베드로 사도가 체험한 하늘의 영광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큰 신앙적 체험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 위대한 신앙적 체험보다도 성경이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베드로 사도께서는 단정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예언이 기록된 성경 앞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체험한 그 놀라운 개인적 체험 조차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성경이 너무나 보편화되어서일까,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신령한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한 성경보다는, 베드로 사도의 체험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큼도 가치가 없을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체험을 감히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우위에 두는 교인들과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에 감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끼워맞추는 저열한 자의적 해석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난무하는가. 시공간을 초월한 성경의 보편적 진리를 외면하고, 지금 당장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는 말씀이 아니면 외면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베드로 사도께서는 성경의 모든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사사로이 풀지 말 것을 주의시키셨다.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은, 자기 입맛에 맞게 자의적으로 아전인수식 해석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의 성경 해석이 과연 성경적인지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로 성경의 기록이 완성된 이후로, 이제는 아무도 사도들과 같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하나님께 직접 받아 말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경해석은 무엇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제 더이상 특정한 사람에게 직접 자신의 계시와 예언을 주시지는 않으시지만,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탁월하게 해석할 수 있는 ‘예언의 은사’를 역사 속에서 특정한 인물들에게 부여하셨다. 그 위대한 성경 해석자들의 성경 해석이 역사 속에서 검증되고 발전되어서 오늘날의 보편적인 신앙고백의 체계를 갖추기까지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사사로이 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역사 속에서 검증되고 발전된 보편적인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러한 신앙고백과 표준교리도 결국 불완전한 인간의 산물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인간의 산물인 신앙고백과 표준교리보다는 성경을 우선할 것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국 성경도 불완전한 인간이 손으로 기록된 것인데 어떻게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그리고 그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보편적인 신앙고백과 교리체계를 수립하고 발전시켜온 수많은 탁월한 성경해석자들보다 더 탁월하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 중에서 과거 위인들 중 어느 한 명이라도 성경지식에 있어서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만한 사람이 있는가?
보편적 신앙고백과 표준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견고한 터를 다지는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개인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신앙적 체험들은 인테리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다른 터를 찾아나서는 것이며, 그 터는 물을 저장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와 같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으며 불시험에 타버리는 지푸라기와 천쪼가리로 자신의 공력을 세우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앙고백과 표준교리가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익숙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체계의 넓음과 깊음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맛을 보았더라면, 그렇게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접하면 접할 수록, 이러한 체계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더욱 더 감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의 신자들만이 이러한 깊은 샘을 경험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