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피터슨 교수의 ’우물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 중
요약: 현대 사회에서 ‘유교적 관행’이라고 말하는 여성에 대한 성차별, 사회적 위계는 최소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것이다. 신라시대 유학자 설총부터 시작된 ’한국식 유교‘는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 이었지만 17세기 후반부터 우리가 유교적 관행이라고 부르는 ’중국식 유교‘로 변질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최소 2세대(약 100년)후에 이루어 졌으며 마크 피터슨 교수는 해외의 비슷한 사례로 보아 ’인구 문제‘가 원인일 거라고 추측한다.
즉, 인구 증가가 한계점에 도달하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장자 상속 및 부거제를 도입하고 ‘중국식 유교’ 사상이 이것을 합리화 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이다.
마크 피터슨 교수가 말하는 ‘한국식 유교’의 증거들
1. 족보
17세기 후반이 되기 전까지 족보에는 아들과 딸의 가계도 모두 세밀하게 서술되어 있다.
-사례: 1476년에 발행된 ‘안동권씨성화보’, ‘8고조도’
8고조도에는 부계와 모계 조상의 가계도가 평등하게 그려져 있고, 안동 권씨 가문의 족보의 경우 여성의 재혼 사례가 10건 기록되어 있다.(즉 당시에는 ’열녀‘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다.)
2. 신사임당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당시 아들, 딸 상관없이 공평하게 재산을 상속받은 대표적인 사례.
그녀부터가 부모로부터 5자매 들과 공평하게 재산을 상속받았다.
예를 들어 ’오죽헌‘의 경우 그녀가 모친에게 상속받은 집이다.
(당시 신사임당의 집안은 남성이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러한 사례가 ‘장가가다’의 어원이다‘)
<동생화회문기>에 보면 율곡 이이를 비롯한 일곱 남매(아들 넷, 딸 셋. 율곡 이이는 셋째)가 공평하게 재산을 상속받았음이 확인된다.
3. 17세기 후반 이전까지는 딸도 제사를 지냈다.
이른바 윤행이라는 풍습으로 모든 아들과 딸들이 번갈아 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사례:
3-1. 1666년부터 시작되는 부안 김씨 가문의 상속문서에 보면 ‘우리 가족은 이제부터 딸들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즉, 그 전까지는 딸들도 제사를 지내왔고 이러한 변화(딸들은 제사x)는 아직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3-2. 경상북도 지역의 또다른 상속 문서에는 ‘8남매 중 세딸은 먼 곳에 살아 제사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래 몫의 8분의 3만 주기로 했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형제들이 상속 문서를 수정해 딸들의 몫을 늘려준 것으로, 기존 딸들도 제사 참여 및 공평하게 상속 받음->딸들은 제사 지내지 않고 재산도 상속x 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보여줌
4. 양자 제도 변화
마크 피터슨 교수는 족보, 입양 증명서인 <계후 등록>, 과거 시험의 합격자 명부를 비교 분석한 결과 18세기부터 40대-50대 남성을 입양하는 사례가 급증함을 발견했다
이것은 제사를 지낼 가문의 상속자를 들이기 위함으로, 절반 정도가 이미 죽은 사람의 양자로 들어가는 사후 입양 이었다.
마크 피터슨 교수가 그린 이 그래프를 딸이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비율을 나타내는 그래프와 비교하면 더욱 명확해 진다.
이 자료 역시 마크 피터슨 교수가 제작한 그래프로 조선의 아들, 딸 균등 상속에서 장자 상속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겹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물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에서 이 부분(2장)을 읽은 감상
마크 피터슨 교수의 주장은 명확하고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서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주장이라고 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크 피터슨 교수가 주장하는 ‘인구 문제’보다는 17세기 후반에 있었던 경신대기근(1670년-1671년)이 더 직접적인 원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시스템이 제 몫을 못하고, 신분에 관계 없이 사람이 마구 죽어나가며, 삼강오륜이 무너저 폐륜과 식인이 빈번한 절대 미문의 재난.
‘경신 대기근’이 가져온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의문이 ‘한국식 유교’를 무너트리고 우리가 아는 억압적이고 성차별 적인 ‘중국식 유교’의 도입을 초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자유롭고 개방적인 한국식 유교 vs 억압적이고 성차별적인 중국식 유교
이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단순화시켜 비교하는건 좀 이상한거 같은데...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상, 학문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혼힙되어 있고 시대에 따라 진화라는 터라 너무 국뽕적인 대비가 아닌가 싶음
거기다가, 그 ‘중국식 유교’라는게 17세기 이후 한국에 와서 정착했다면 그 또한 ‘한국식 유교’라 할 수 있는거지(또는 한국에서 유교의 변천과정의 일부로 설명하거나) 그걸 굳이 중국식 vs 한국식으로 구분하여 대비하는 의도도 매우 비학문적임
이 챕터의 주제가 ‘무조건 유교를 악으로 보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 본연의 장점을 받아 들여 발전시켜야 한다’ 입니다.
그래서 18세기 이전에 조선의 유교 사회 모습이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과 다르다는 것을 중심으로 서술했고, 이것이 신라시대 학자 설총부터 약 1천년간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기에 ‘한국식 유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한국 유교가 변질된 원인이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매우 강해졌고, 그 결과 중국 사회의 악습을 무비판 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댓글에 변질된 유교가 ’한국식 유교‘라고 볼 수 있는가? 그것보다는 한국 유교의 발전 과정이 아닌가? 라고 달아 주셨는데
책에 보면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설총 때부터 독자적으로 1천년간 발전한 한반도 유교 사회‘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우리가 아는 유교는 ’중국에서 발전한 유교 사회‘의 모습에 훨씬 가깝다는 정도의 의미로 ‘한국식 유교’와 ‘중국식 유교’라고 서술한 것 입니다.
(사실 이것도 1문장 정도 이고, 대부분 18세기 이전vs 18세기 이후 라고 적혀 있습니다.)
@최온유 그렇군요
책의 논지는 18세기 이전 vs 18세기 이후 조선시대 유교의 변화이고, 그 변곡점이 중국 유교 중 부정적인 요인의 유입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면 합리적이네여
이슬람으로 비유하자면 저무렵부터 IS같은 이슬람원리주의 세력이 주류가 되었다라는 그런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