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 쿠온이라는 출판사가 있다. 한국인 김승복씨가 일본으로 건너가 설립한 출판사로 오랫동안 한국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이 출판사에서 지난 2014년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를 편자로 하여 한일 양국 140여명에 달하는 필진을 동원한 책 <한국의 지(知)를 읽다>를 펴냈다.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한국의 지(知)를 말해준다고 생각되는 책 3~4권을 추천하며 그 이유를 밝힌 짧은 글을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당시 일본 지식사회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예술신초> 등의 언론에 보도되었고 일본어판은 그해 출판계의 권위있는 상 파피루스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서인지 쿠온은 2020년에 역시 동일한 의도로 기획된 <한국의 미(美)를 읽다>를 펴냈다. 한일 문화 현장의 최전선에서 활동 중인 85명의 지식인, 문화예술인이 각자가 생각하는 한국의 미를 담은 책 203권 및 기타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이 책들은 각각 일본어판에 이어 한국어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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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나는 이 두 기획에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지라던가 미라던가, 이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의 바다에서 내 마음대로 나름의 책을 선정하고, 짧은 추천사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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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 청원이 어제 7월 1일자로 80만이 넘었다고 하더니 오늘은 벌써 90만이 넘었다고 한다. 며칠 전 내가 들어갔을 때는 59만이었는데 실로 가파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 속도라면 청원 마감인 7월 20일까지 100만이 훌쩍 넘을 것이 분명하다. 국회 국민청원에 청원자들이 몰려 접속 부하로 대기가 걸린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 아닌가 싶다.
쿠온의 책들이 갑자기 생각난 것은 이 뉴스 때문이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4년 전 <한국의 미를 읽다>에 내가 소개했던 책 중의 하나와 거기 덧붙였던 글이 떠오른 것이다.
그 책은 <2016, 겨울 밝음>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진집이었다. 현재 시중에서 찾아볼 수는 없겠지만, 그 사진집을 굳이 ‘한국의 미’라는 개념으로 포획해 소개한 이유는 추천사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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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겨울 밝음 당근농장(김정인, 류소현, 손영주, 조순영, 조아름) 기획 및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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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의병의 나라다. 의병의 전통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고, 을사늑약 후에도 들불처럼 일어나 일본 정부를 당황시켰다. '왕이 도장을 찍었는데 왜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말인가?'라고 말이다. 이에 대해 돌아가신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한국 사회가 일본과 같은 세로 사회(수직계열형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관의 명이라 해도 부당한 무엇에는 결코 순응하지 않았던 의병 정신은 일제 치하에서 거국적인 3.1운동으로 발화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으로 그 불길이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국민 개개인의 자발성에 기반한 이러한 역동적인 저항의 힘이 일구어낸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봄에 이르는 광화문 촛불집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냄으로써 또한번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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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도 그 광장에 있었다. 나도, 너도, 명령이나 동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의지에 따라 하나둘씩 모여든 사람들이 만든 거대한 촛불바다. 그것은 내가 본 가장 압도적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한국의 미가 단지 문화적 소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면 역사의 길목마다 분출되어온 이런 한국인의 자기헌신적인 힘이야말로 놀라운 아름다움이라 말해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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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겨울 밝음>은 당시 촛불집회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이다. 사실 촛불집회 사진집은 여러 사진작가들에 의해 여러 권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굳이 <2016, 겨울 밝음>을 고른 것은 이 책이야말로 그 겨울 광장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사진집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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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집의 기획자는 사진작가가 아니다. 출판사도 아니다. 그들은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5명의 평범한 20대 30대 여성들이다. 친구 사이인 이들은 자신들의 단톡방(단톡방 이름이 당근농장이다. 채찍과 당근이라고 할 때의 그 당근)에서 문득 “촛불 사진집을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라는 아이디어를 낸다. 사진집에 수록된 사진들도 유명한 사진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당시 집회에 참여했던 일반 시민들이 찍은 사진을 모집하여 골라 실었다. 책을 만드는 비용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충당했다. 사진집을 선결제하는 방식의 후원금이었다. 사진을 제공하거나 후원금을 낸 이들이 380명에 이르렀고 그 이름들은 사진집의 말미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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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들은 “책이 펼쳐졌을 때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사진집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나도 저곳에 있었다는 것, 희망을 발견했다는 것, 그것을 잊지 않게 만드는 책”을 갖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 광경들을 갖고 싶다면 그날, 그 장소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믿음은 맞았다. 나 역시 이 사진집의 사진들을 보며 집회 당시 광장의 공기와, 감정과, 서로의 가슴을 울리던 함성과, 강물처럼 흘러가던 촛불의 행렬을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우리를 한데 묶고 있었던 한국인의 피는 삼국시대부터 연면히 이어져온 바로 그 피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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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 또 저 청원의 폭발을 두고 동원이니 뭣이니 개똥같은 소리를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여기에 다시 한번 못박아둔다.
지금 청원 대기열에서 기꺼이 기다림을 감수하고 있는 이들은 2016년 겨울 광장의 그 사람들처럼, ‘나도, 너도, 명령이나 동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의지에 따라 하나둘씩 모여든 사람들’이라는 것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국민 개개인의 자발성에 기반한 이러한 역동적인 저항의 힘이 일구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 싶은 것이다.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다. 5만이면 유효성이 충족되는 국회 청원이다. 그 목표숫자가 이미 달성되었음에도 가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저 숫자에서 위험신호를 읽지 못한다면...아마도 그는 눈뜬 장님이거나 천치바보이거나 폭주 기관차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