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 차례 성서 시대 제 2 성전시대 – 시온으로의 귀환 외세의 지배 이스라엘 국가 평화 협상 역사적 주요사건 유대 민족의 발생지는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이다. 이 민족의 오랜 역사 중 상당 부 분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그 중 2천 년의 역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곳에서 이 민족의 문화적, 종교적,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 땅에서 강 제로 쫓겨난 후에도 그들의 실제적 거주는 많은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오랜 세월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결코 이 땅과의 유대를 끊거나 잊지 않았다. 1948년에 이스 라엘이 건국됨으로써 유대인들은 2천년 전 잃었던 독립을 되찾는다. זכור ימות עולם בינו שנות דור ודור... (דברים ל"ב ז')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신명기 32:7) 성서 시대 족장 시대 유대민족 역사는 약 4천 년 전(기원전 17세기경)에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 과 손자 야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2000~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메소포타미아 발굴 문헌은 성서에 나타난 그들의 유목 생활의 단면들을 확증해준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민족을 형성하도록 부르 심을 받은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만연해지자 야곱(이스라엘)과 그 의 열 두 아들과 가족들은 이집트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그의 후손들은 노예로 전락하여 강 제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이집트 탈출과 정착 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4백 년의 노예 생활 만에 모세에 의해 해방된다. 성서의 이야기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세는 자기 민족을 출애굽 시켜 그 조상들에게 약속되었던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 간다(기원전 13~12세기경). 40년 간 시내 광야에서 방랑하게 되는 동안 그들은 그곳에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되고 십계명을 포함하는 토라(모세오경)을 받게 되며, 이것은 그들의 유일신 신앙에 형식과 내용을 부여하게 된다. 출애굽 사건(기원전1300년경)은 유대 민족의 기억에 지워질 수 없는 인상을 남겼고, 자유와 해방의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다. 해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Pesach), 오순절(Shavuot), 초막절(Succot)을 지키며 그 당시의 사건들을 기념한다. 그 후 2세기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땅 대부분을 정복하고 농부와 장인들이 되었으며, 어느 정도 경제적 사회적 통합을 이루게 된다.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과 전쟁의 때가 반복되는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사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규합하게 되는데 이들은 지도자적 자질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노련함을 바탕으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지파 조직의 근본적인 약점은 블레셋 사람들(소아시아 출신으로 지중해 연안에 정착한 해양 민족)의 위협 앞에서 부족들을 통합하며 상속을 통해 항구적인 지위를 계승할 수 있는 통치자의 필요성을 대두시키게 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내리시고 너를 지키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를 베푸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드시고 평화를 주시노라.” (민수기 6:24~26) 왕국 시대 초대 왕 사울(기원전 1020년경)은 느슨한 지파 조직에서 그의 후계자 다윗의 통치 하에 완전한 왕권국가가 수립되기까지의 기간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다윗 왕(기원전 1004~965년경)은 팔레스타인 제패를 끝으로 군사 원정에 성공하고 주변 왕국들과 우호 동맹을 조직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 지역의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그의 왕권은 이집트 국경 지대와 홍해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미치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12개 지파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고 수도 예루살렘과 군주제가 국민 생활의 중심이 되게 했다. 성서에서 다윗은 시인이자 음악가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시들이 시편(The Book of Psalms)에 등장한다.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솔로몬(기원전 965~930년경)은 국력 신장에 더욱 힘썼다. 솔로몬 왕은 여러 정략 결혼으로 더욱 공고해진 이웃나라 국왕들과의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의 평화를 지키고 그 당시 열강들과 대등한 지위를 다졌다. 그는 구리 광석과 금속 제련 등 주요 사업을 육성하여 해외 교역을 확대하고 국내 경제발달을 촉진하는 한편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기존 도시를 더욱 강화했다. 그의 업적 중에서도 단연 최고봉은 유대인들의 국가적, 종교적 삶의 중심이 된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이었다. 성서에 따르면 잠언(The Book of Proverbs)과 아가(Song of Songs)서는 솔로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분열 왕국 시대 솔로몬 왕의 통치 말기는 그의 야심 찬 계획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겪은 민중의 불만으로 얼룩졌다. 동시에 왕 자신의 지파에 대한 특혜 대우는 다른 지파들의 원망을 샀고, 결국 왕권국가와 지파 분리주의자들 간의 반목의 골을 깊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솔로몬의 사망(기원전 930년) 후 일어난 공공연한 반란으로 북쪽의 10개 지파가 이탈했고,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이 중 유다 왕국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세력권 안에 세워졌다. 사마리아를 수도로 둔 이스라엘 왕국은 19대 왕까지 200년 이상 지속되었고, 유다 왕국은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다윗의 혈통을 이은 19명의 왕들에 의해 400년간 통치가 이어졌다. 아시리아와 바벨론 제국의 확장으로 인해 먼저 이스라엘이, 그리고 뒤이어 유다가 외세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되고(기원전 722년) 그 주민들은 추방당하고 잊혀졌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바빌로니아가 남유다 왕국을 점령하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것은 물론 대부분의 거주민들을 추방했다(기원전 586년). 최초 유배 (기원전 586~538년) 바벨론의 정복으로 제1 성전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유대민족과 이스라엘 땅의 연결고리까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 그들의 고국을 기억하리라 맹세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 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시편 137:5~6). 제1 성전의 파괴(기원전 586년)에 이은 바벨론 유수는 유대인 이산(Jewish Diaspora)의 시발점이 되었다. 바로 거기서부터 유대교는 이스라엘 땅 밖에서의 종교적 틀과 삶의 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며,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민족적 생존과 영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하나의 민족으로서 유대민족의 미래를 보호할 수 있는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제 2 성전시대 시온으로의 귀환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142년) 기원전 538년 바벨론 제국을 정복한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1차 귀환에 나섰다. 이들을 이끈 이는 다윗의 후손 스룹바벨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채 지나지 않아 율법 학자 에스라의 인도 하에 2차 귀환이 이루어졌다. 그 후 4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페르시아(기원전 538~333년)와 뒤이은 헬라(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시대)의 지배(기원전 332~142년) 하에서 다양한 수준의 자치를 체험했다. 에스라의 솔선수범적 지도 하에 이루어진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 제 1 성전이 있던 터에 제2 성전의 건축,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 유대인의 종교적, 사법적 최고 기구인 크네세트 하그돌라(최고 회의)의 설립은 제 2 성전시대의 개막을 의미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세력권 안에서 유다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장로 회의에 지도력이 위임된 국가였다. 대왕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 중 하나로, 페르세폴리스의 궁전 벽에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기원전 332년에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고대 세계의 일부가 된 이스라엘 땅은 시리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 하에 유대 신정국(神政國)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유대 민족 전체에게 헬라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대교 행사를 금하고 성전을 모독하기에 이르자 유대인들은 그에 항거하여 들고 일어났다(기원전 166년). 하스몬 왕조 (기원전 142~63년) 처음에는 하스몬 왕조의 성직자 마타티아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의 주도 하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했다(기원전 164년). 유대인들은 이 사건들을 매년 수전절(Hannuka)에서 기념하고 있다. 하스몬의 승리가 이어지자(기원전 147년) 셀레우코스는 유대(이스라엘 땅을 지칭하던 당시의 명칭)의 자치권을 되돌려 주게 되었고, 셀레우코스 왕국의 몰락(기원전 129년)과 함께 유대인들은 독립을 쟁취했다. 그 후 약 80년간 지속된 하스몬 왕조의 통치 하에 유대 왕국은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영토를 탈환했다. 유대인의 지배 하에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유대인들의 생활은 풍요로웠다. 각 시대별 메노라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에 새겨져 있는 메노라(일곱 촛대) 황금 메노라(가지가 일곱 개 달린 촛대)는 고대 예루살렘에서 솔로몬 왕 성전의 예배의식 때 사용된 주요 도구였다. 그 후 오랜 시대에 걸쳐 이것은 수많은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유대 유산과 전통의 상징이 되어왔다. 로마의 지배 (기원전 63 ~ 서기 313년) 셀레우코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 지역에 집권한 로마인들은 다메섹의 로마 총독의 지배 하에 하스몬 왕 히르카누스 2세가 제한적인 왕권을 가지는 것을 승인했다. 유대인들은 새로운 정권에 반대하여 향후 수년 간 잦은 반란을 일으켰다. 마타티아스 안티고누스가 하스몬 왕조의 지난 영광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시도를 꾀했으나 그가 로마군에 패하고 사망하면서 하스몬 왕조의 통치는 끝을 맺고(기원전 40년) 이 땅은 로마 제국의 한 주로 예속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인들은 히르카누스 2세의 사위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내정에 대해서는 거의 제한 없는 자치권을 부여 받은 헤롯은 로마 제국의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헤롯은 대규모 건축 사업에 착수하여 가이샤랴와 세바스티아(사마리아)의 도시들과 헤로디움과 마사다의 요새 등을 세웠다. 그는 또한 성전을 증축하여 그 시대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대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헤롯왕의 사망(기원전 4년) 이후 10년이 지났을 때 유대는 로마의 직접 지배 하에 들어갔다. 유대적 생활양식에 대한 로마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늘어난 유대인들의 분노는 산발적인 폭력행위로 나타나다가 서기 66년에 전면적인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티투스가 이끈 우세한 전투력의 로마군이 결국 승리를 차지했으며, 이들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고(서기 70년) 유대인들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를 함락시켰다(73년). 예루살렘과 제 2 성전의 파괴는 유대 민족에게 큰 재앙과도 같았다. 당대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과 그 외 다른 지역의 포위 공격 속에 유대인 수십 만 명이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노예로 팔려갔다.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란(서기 132년) 직후 짧은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마지막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며 예루살렘과 유대를 탈환했다. 그러나 로마의 막강한 힘 앞에 이어질 결과는 너무도 자명했다. 3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은 로마 관습에 따라 “황소의 멍에로 갈아 엎어”졌으며, 유대는 팔레스티나, 예루살렘은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모두 불타버렸지만 유대민족과 유대교만은 로마와의 충돌 속에 서도 살아남았다. 입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 기구 산헤드린(크네세트 하그돌라의 후신)이 서기 70년에는 야브네에서, 후에는 티베리야에서 재소집 되었다. 국가와 성전의 통합된 체 계 없이 존속된 소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점차 복구되는 한편 때때로 고향으로 돌아온 망명자들이 힘을 보탰다. 제도적 공동 생활이 복구되었고, 랍비들이 제사장의 자리를 대신하 였으며, 유대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 점은 가버나움, 고라신, 바르 암, 가믈라 등지에서 발견된 유대 회당의 유물들이 잘 입증해주고 있다. 할라카(유대 종교 법)는 유대인들을 묶어주는 공통의 유대로 작용하며 대대로 계승되었다. 외세 지배 비잔틴의 지배 (313~636년)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비잔틴 제국 창건에 이어 이스라엘 땅 은 기독교 중심 국가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의 기독교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 졌고 나라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어느 정도 누렸던 자치권과 공 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일년에 단 하루(Tisha B’av – 아브월 9일)성전 파괴를 애도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다. 614년에 페르시아 침공이 있자 유대인들은 해방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품고 이를 지원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원조에 대한 보답으로 예루살렘 정부를 얻었고, 이 시기는 약 3년간 지 속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비잔틴 군대가 예루살렘을 재탈환하여(629년) 다시 유대인 거주자 들을 축출했다. 아랍의 지배 (636~1099년) 바위의 돔. 7세기에 움마야 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가 예루살렘 성전산(하람 알 샤리프)에 세운 사원 • I. 스툴만 아랍이 이스라엘 땅을 정복한 것은 무하마드가 사망(632년)한 지 4년이 지난 때였고, 이들 의 지배는 그 후 4세기가 넘게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메섹에서, 그 후에는 바그다드와 이 집트에서 여러 칼리프들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 지배 초기에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가 재개되고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딤미(dhimmi, 보호 대상이 되는 비무슬림들)라는 관습적 지 위가 주어졌다. 이로서 유대인들은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신 특별 인두세 와 토지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그 후 비이슬람교도에게 가해진 각종 규제조치(717년)는 유대인들의 종교 의식, 법적 지위 및 공적 행동에 악영향을 미쳤다. 경작지에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그곳에서도 그들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 차별이 심해짐에 따라 아예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11세기 말에 이 르자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사회는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고 조직적, 종교적 응집력도 약화되었다. 십자군 시대 (1099~1291년) 이후 200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한 것은 십자군 세력이었다.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 따라 이교도들에게서 성지를 되찾기 위해 유럽에서 진군해왔다. 1099년 7월, 5주간의 포위공격 끝에 제 1차 원정군의 기사들과 그들이 이끌고 온 하층민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 령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비기독교인들 대부분을 학살했다. 유대인들은 회당 안에 장벽을 쌓 아 자신들의 거점을 방어하려 했지만 결국 불에 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수십 년 에 걸쳐 십자군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넓혀갔는데, 조약과 협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유혈 군사 정복을 통한 확장이었다. 십자군의 라틴 왕국은 주로 요 새화된 도시와 성에만 국한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 십자군이 유럽에서 이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열자 성지 순례가 일반화된 것과 동시에 고향 땅으로의 귀환을 시도하는 유대인들의 수도 늘어났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300명의 랍비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무리를 지어 들어와 일부는 악고(아크레)에, 일부는 예루살렘에 정착했다. 십자군이 살라딘 휘하의 이슬람군에게 격파된(1187년) 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해 어느 정도의 자유를 되찾았다. 살라딘의 죽음(1193년) 후 십자군이 다 시 이 나라에 기반을 얻었지만 그들의 주둔지는 일련의 요새화된 성에 국한되었다. 십자군이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마믈루크 군대에게 최종적으로 패하면서(1291년)십자군의 이스라엘 지배는 종식되었다. 마믈루크의 지배 (1291~1516년) 마믈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 이스라엘 땅은 다메섹 관할 하의 고립 지역이 되었다. 악 고, 욥바를 비롯한 여러 항구들은 새로운 성전(聖戰)에 대비해 파괴되었고 육로와 해상 교역 모두 중단되었다. 중세 말에 이르자 이 나라 도시들은 사실상 폐허가 되고 예루살렘의 대부 분 지역이 버려진 바 되었으며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는 가난에 허덕였다. 마믈루크의 쇠퇴 기는 정치적∙경제적 격변과 전염병, 메뚜기떼, 지진 강타 등으로 더욱 암울한 시기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17~1917년) 1517년에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이스라엘 땅은 네 구역으로 분할되었고, 행정적으로 다메섹 에 포함되어 이스탄불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 시대 초기에는 약 1,000호의 유대인 가구가 이 땅에 살았는데, 주로 예루살렘, 나블루스(세겜), 헤브론, 가자, 사페드(츠파트), 갈 릴리 마을 등지에 거주했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이스라엘 땅을 떠난 적이 없는 유대인 후 손들과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술레이만 대제가 죽을 때까지(1566년) 오스만 제국의 안정된 정부에 의해 상황이 개선되면 서 유대인들의 이주가 활발해졌다. 새로 이주해온 이들 중 일부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사페드 지역으로 갔다.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사페드의 유대인 인구는 대 략 1만 명으로 증가했고 이 도시는 활발한 지적 활동의 중심이자 직물생산의 중심지로 번 창하였다. 이 기간 동안 카발라(유대 신비주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법전화된 <슐한 아루크>같은 유대법률에 대한 당대의 해석들이 사페드의 여러 학파들로부터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 는 유대인 사회로 퍼져 나갔다. 오스만의 지배 체제가 점차 열악해지면서 이스라엘 땅은 크게 방치되었다. 18세기 말에는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들의 소유 하에 궁핍한 소작 농민들에게 임차되었고 세금은 일관성 없이 마구잡이로 부과되었다. 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되고 농경지는 습지와 사막에 침식되었다 /출처ⓒ† : 창골산봉서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