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개똥벌레>/구연식
벌겋게 지글거리던 태양은 덥고 피곤했는지 서산 너머에 푹석 주저앉더니 보이지 않는다. 땅거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광체가 아닌 것은 어둠의 보자기로 모두 덮어 버린다. 별들은 촛불을 하나둘씩 불 붙여 하늘에 매달아 놓는다. 숲 속의 귀뚜라미와 여치들의 초저녁 향연이 시작된다.
휘황찬란한 별들의 조명과 오만 잡탱이 풀벌레들의 합주가 점점 무르익어 간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를 서서히 들어 올리려는 은은한 서곡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그러나 이곳은 수준 높은 오페라 극장이 아니고 풀 내음과 두엄 냄새가 어우러진 어느 시골 여름 밤 마당 한가운데 멍석 위의 단출한 가족 모임이다.
전깃불도 없던 1960년대였다. 아버지는 손끝이 야무져 농가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무엇이든지 주위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예쁘고 꼼꼼하게 만들어 사용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키가 큰 호밀대로 널찍한 방석을 엮어서 낮에는 고추 등을 말리고 밤에는 가족들의 푹신한 마당 방석으로 사용했다.
여름밤 아버지는 모깃불을 준비하고 어머니는 간식거리를 만드신다. 아버지는 보리까락 한 삼태기를 마당 한 구석 바람이 잘 부는 곳에 소복이 부어 놓는다. 모기를 내쫓는 연기도 많이 나고 한약 향기가 진동하는 생 쑥을 한 아름 베어다 그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면 빨리 타지 않고 서서히 타면서 연기만 뜰 안에 가득하여 모기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소쿠리에 찐 감자와 옥수수를 갖다 놓으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소쿠리에 손이 모인다. 하늘에는 별들이 속삭이고 울타리 숲에서는 풀벌레 소리 마당에는 개똥벌레들의 작은 불꽃놀이 그리고 밀짚 방석 위에는 식구들이 오손 도손 야참을 먹으며 시골집 여름밤은 무르익어 간다.
옛 선비들은 여름에는 명주 주머니에 수십 마리의 개똥벌레를 넣어서, 겨울에는 눈(雪) 빛으로 책에 비춰 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 경우를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고 중국의 「진서(晉書)」에서는 전하고 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학구열이 대단하여 뜻을 이룬 조상님들에게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남을 위해 헌신한 개똥벌레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개똥벌레(반딧불이)라고 불리던 이유는 예전에 시골 집집 마당에 소 거름이나 개똥을 모아서 퇴비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거기에 사는 달팽이나 벌레를 먹으려고 개똥벌레가 거름에서 날아다녀서 개똥벌레라고 불렀다고 한다.
할머니는 개똥벌레를 도깨비불이라고 공포감과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줄곧 들려주었다. 밤에는 땅강아지나 각종 풍뎅이 날아다니다가 이마를 부딪치기도 했다. 그런데 개똥벌레가 날아다니는 모습은 꼭 술 취한 사람같이 휘청거리면서 다가오니까 영락없는 도깨비불처럼 느껴져 행여 나한테 오면 으쓱해지면서 바로 피하곤 했다.
어느 날 인가는 도깨비불 정체가 궁금하여 어린이 손가락 마디보다 더 작은 개똥벌레를 잡아서 손끝에 올려놓고 시망스럽게 문질러보았다. 그랬더니 개똥벌레의 형광물질과 몸통이 분리되면서 좁쌀만 한 형광물질은 전혀 뜨겁지 않고 그대로 빛을 내고 개똥벌레는 바르르 떨더니 죽어버린다. 그 뒤부터는 도깨비불 공포가 사라지고 불쌍한 개똥벌레는 해코지하지 않았다.
개똥벌레의 꽁무니에는 루시페린(Luciferin)이라는 생물 발광 물질이 있고 이때 거의 100%의 에너지를 빛으로 바꾸기 때문에 열은 없단다.
개똥벌레 애벌레는 달팽이나 다슬기를 잡아먹고 살며 성충이 되면 입이 퇴화하여 먹이를 잡아먹을 수 없어 이슬만 핥아먹고 산다고 한다. 2주 정도 번식을 위해 아름다운 사랑의 빛을 뿜어대다가 고운님 만나면 사랑을 잉태하고 짧은 생을 마감하는 개똥벌레! 참으로 아름다운 한여름 밤의 순애보이다,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청정지역에서 보내며 오직 순수한 사랑을 위해 식음을 전폐하는 개똥벌레의 사랑 이야기!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사랑 타령 자들에게 각성제로 권하고 싶다. 옛날에는 「개똥벌레」의 노래 가사를 건성건성 익혔는데 이제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곱씹어 본다. 어느 개똥벌레의 엄마가 전생의 삶이 너무 서러워서 외딴집 소녀로 다시 환생하여 인간과 개똥벌레에게 절규하는 것처럼 가사와 곡이 가슴을 파고든다.
개똥벌레에 비교하면 그간 나는 고대광실에서 참으로 다복하게 살아왔다. 그러고도 불평을 토로했으니 염치없는 인간이다. 날이 새면 산모퉁이 오두막의 개똥벌레 여인을 찾아가 손을 잡아주며 밤새 흘린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밤이 깊었는지 하늘에는 별들이 졸고 밀짚 방석 위에 동생들은 이미 잠이 들었다. 그렇게 왕성했던 개똥벌레 불꽃놀이도 화약 떨어진 불꽃처럼 힘없이 떨어지고 있다. 하나 남은 개똥벌레마저 너울거리며 숲 속으로 사라진다. 에필로그인 양 애절한 개똥벌레의 일생을 가사와 곡으로 어우러진 ‘개똥벌레’의 노래 자막이 초 여름밤의 무대를 서서히 닫는다.
60여 년 전의 타임머신은 어느 사이 고향마당에서 나의 아파트 서재 안으로 돌아왔다. 컴퓨터 자판기 앞에 앉아서 개똥벌레와 나만 아는 모스(Morse)부호로 ‘개똥벌레 사랑합니다.’라고 타전하고 유성처럼 밤하늘을 가르는 개똥벌레를 생각하며 취침 불을 끈다. ******** 개똥벌레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 말아라 나를 위해 한번만 노래를 해주렴 나나나나나나 쓰라린 가슴안고 오늘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든다.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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