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이 남을 향해 내리다가 서해로 뻗어나온 차령산맥의 줄기에서 남서로 갈라져 내린 곳이 덕숭산이다. 이곳에 수덕사가 자리잡았다 원래는 그리 유명한 사찰이 아니었지만 "수덕사의 여승" 이라는 노래가 유행을 타면서 유명세를 타게되었다고도 봐야하는 수덕사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
일반 사람들에게 여승이란 묘한 호기심을 일게하는 대상일 것이다 여자의 상징인 긴머리를 싹 밀어버린 그녀들은 세속의 여자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몸은 어쩔 수없이 여자의 그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의 특별한 존재도 아닌 것은 분명하다
산속에 들어와 외부와 단절하며 득도를 위해 정진한다해도 열반하는 그날까지는 먹고 자고 싸고 생각하는 인간의 몸을 가진 엄연한 사람이다 하여 그네들도 어쩔수 없는 고뇌와 번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노래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미 득도했노라고 하는 비구나 비구니들이 들으면 절대로(?) 긍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과연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그럴 수 있을까 범종소리에 백팔번뇌가 끊어질까
덕숭산 수덕사는 규모가 큰 절이다 그리고 덕숭총림이라 불린다 우리나라에 총림이라고불리는 사찰은 현재 8곳이 있는데 총림이란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원, 교육을 하는 강원 , 그리고 율원이 모두 갖추어진 사찰을 말하며 보통 절이 단과대학이라면 총림은 종합대학이라고 하면 맞다 8대 총림은 순천 송광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장성 백양사, 동래 범어사, 대구 동화사 하동 쌍계사, 그리고 예산 수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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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는 여러개의 산문을 거치게 되는데 보통의 사찰은 일주문이 산문이지만 수덕사는 그 전에 2개가 더 있다 필자가 껴안고 있는것은 두번째 산문이며 그 기둥의 둘레가 저렇듯 어마어마하다 산문을 들어서기 전에 빼곡하게 들어선 상가며 식당이 엄청나게 많고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요즈음인데도 드넓은 주차장에 자리가 없었다 주차비는 2천원, 사찰입장료는 3천원이었다
들어가는 길은 평탄하고 거리가 짧다 절이야 대개 똑 같은 형식이지만 이 절은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부속 건물이 많았다 국보 49호인 대웅전의 모습인데 건축연도가 확실히 기록으로 남아있다는게 특징인 건물이다 대웅전 전면부의 문은 전부 위로 쳐들어 완전 개방이 되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 다음으로 오래된 건축물인 것 같다 천년도 훨씬 넘은 대웅전 나무 기둥을 만져보았다 고려시대 사람들의 손길이 내 손에 온기로 전해져 오는 느낌
소위 기도빨이 좋다는 관음바위다 기를 받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기가 약한 사람들은 기를 빨릴 수도 있다나? 여러분은 氣라는 걸 느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대웅전을 옆에서 본 모습인데 한 눈에 보아도 정말 튼튼하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용된 목재도 최상으로 보이고 골격의 구조도 굉장히 안정적이다 수많은 외침으로 우리나라의 사찰들이 소실되었지만 수덕사의 이 대웅전은 용케도 그런 화를 피했다고 한다
기록으로 보면 부분적인 보수는 조선시대에 4번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절은 기록문화가 모범적인듯 하다
수덕사는 청도 운문사처럼 비구니 사찰이라고 아는 사람이 많고 나도 그리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니다이다 그러니까 학교로 따지면 정확히는 남녀공학이라고 할까
아래 사진은 생뚱맞게도 수덕여관이다 일주문 밖에 있기때문에 그게 가능했던가 싶은데 지금은 수덕사에서 매입했기 때문에 사찰의 소유로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유명한 화가인 이응로 화백이 소유자였고 화백의 사후에도 운영되다가 지금은 관람용이 된 셈인데 이 수덕여관에 사연이 많다
한때 꽤나 입에 오르내리던 여승 일엽에 관한 사연들이 있다 그녀의 본명은 김원주, 일엽은 춘원 이광수가 지어준 것이다 일본 유학까지 한 여성이니 사람들은 신여성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비구니가 되기 전까지 수많은 염문을 뿌리며 남자편력을 해왔다고 한다
우선 그녀의 글 한편을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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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어질까요 보고 듣고 생각는 온갖 좋은 건 모두 다 드려야만 하게 되옵니까 내 것 네 것 가려질길 없사옵고요 조건이나 대가가 따져질 게 어딨겠어요 혼마져 합쳐진 한 몸이건만 그래도 그래도 그지없이 아쉬움 그져 남아요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 1928년 4월 수송동 여관에서 -
<청춘을 불사르고> 라는 책을 낸 김일엽 그녀는 시인이었다 이 글은 책 서두에 나오는 대목이다
33살에 출가하여 늦은 나이인 38세에 수덕사 비구니가 된 일엽 그녀는 몇번의 남자를 거친 뒤 일본에서 은행가의 아들인 오다 세이조라는 남자를 만나 또 다시 사랑에 빠지나 남자 부모의 반대로 헤어져야 하는데 이 때 이미 그녀는 아이를 가진다 아들의 이름은 김태신 ( 이 분도 후에 스님이 되었다) 오다와 헤어지면서 아들과도 인연을 끊었다 그 후로도 입산하기까지 여러남자를 거친다 가히 대단한 이력이다 이것이 신여성일까?
당시에 신여성이라고 불린 세 여자가 있다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 시인이었던 김일엽
그녀들의 외침과 주장은 과연 받아들여 졌을까 요즘의 페미니스트와는 약간 방향이 다르긴해도 오십보백보가 아니었을까 유교사상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당시에 말이다
자유로운 사랑놀이에 지쳤을까 아니면 자신이 외치는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일까 수덕사에 입산하고 스님이 되었다. 후에 그녀의 아들이 어머니를 찾아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냉정했다 "속세에서의 인연이 끊어졌으니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 그리고는 그 아이를 절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재웠다는데 일엽과 절친했던 나혜석이 마침 그 여관에 묵고 있으면서 아직은 어린 아이를 엄마처럼 데리고 잤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모진(?) 여자에게도 번민이란 있는 것인가 노래의 가사를 보면 법당에서 홀로 운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다 그녀도 스님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여자이며 어머니인 것이다
여자가 남자와 몸을 섞는 사랑을 했어도 그 남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면 다시 처녀로 재생된다는 그녀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그럴듯한 이론이라고 해도 정말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대를 앞서 간 소위 신여성들에 대한 생각은 너무 앞서간 여성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자도 아닌 내가 사찰을 즐겨 찾는 건 우선 경치가 좋고 공기 맑으며 조용하기 때문이다 수덕사에 얽힌 사연들이나 역사적 사실등이 내겐 흥미를유발하는 것이라서 절에 대한 세세한 내용 모두 생략한다(世) |
첫댓글 글도 좋고 사진도 너무좋아 옮겨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