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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24년 2월6일(화) 13:30
★ 자택: 중앙공원인근 아파트 샛별마을 라이프
★ 참석반창(7명): 김용석, 박종권, 서태영, 성복용, 청안 양완식 반 이사, 이혁진(진희), 채희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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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서현역(분당선)집합
11:50~13:00 식사( AK플라자7층 그릴H한식), 선물 마련
13:30~15:10 은사님댁에서 담소
15:15~ 중앙공원 산책
16:24 커피(폴바셋)
16:37 수내역
17:36 대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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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1기인 분당의 시범단지와 대형 중앙공원 인접 단지로 1990년대 초 아파트다. 그래서 주차장은 노상. 설이 가까운 가운데 입구에는 재활용 쓰레기가 많이 쌓여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올라갔다.
한층 4세대라 엘리베이트가 2대. 7명이 한 엘리베이터에 다 타지 못하고 성복용 친구가 따로 올라왔다. 문간에는 은사님이 외출시 쓰시는 우산과 스틱(지팡이)이 벽코너에 기대서 있다. 청안이 초인종을 누르니 누구냐며 은사님이 나오신다.
깜짝 반가와하신다. 거실에는 소파에 조그만 탁자와 의자 둘이 한가운데 있고 정면 벽에는 TV가 있다. TV 오른쪽 아래는 은사님가족 사진이 놓여있고 왼쪽에는 아담한 성모마리아 석고상이 서있다.
혹시 사모님 살아계실 때 찍어놓은 사진인가 했는데 형씨 종손 4대의 사진이란다. 은사님, 의대교수인 큰 아들, 큰손자, 큰증손.
우리 7명은 의자에 앉아 계신 은사님께 세배를 드렸다. 건강은 좋으시고 귀만 조금 듣는게 약하신듯하다. "찾아올 사람도 없고 찾아갈 곳도 없는데 고맙다"고 하신다.
" 쓸모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일찍 데려간다는데 쓸모없어 안데려가는가보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님은 104세인데 쓸모가 없어서일까? 생각을 바꾸실 때같다.
술은 한잔씩 하신단다. 맥주도 있고 소주도 있다고 하신다. 박스를 열어 복분자병을 꺼내 다같이 한잔씩 따라 ‘은사님 만수무강을 위하여!’ 건배를 하였다. 서태영변호사는 감귤, 깎은 배와 부연 치즈를, 청안은 찰시루떡을 내놓았다. 그 윤기나고 먹음직한 딸기도 펼쳐놓았다.
분당성요한성당
하루 일과를 여쭈어보았다. 5시 기상, 세수하고 안추우면 중앙공원 한바퀴 빙돌고 와서 아침식사를 하시고 신문보시고 TV방송을 시청하신단다. 오후에는 다시 할 일 없어 밖에 나가 걷다 오신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크게 없다. 그런데 날이 추워 요즈음은 버스 타러 시범아파트까지 15분 걸려 가기때문에 분당성요한성당은 한달 일요일 두 번 만 다니신다고한다.
1993년 1월 7일 오픈한 이 성당은 광주 오포로 넘어가는 도로옆에 있다. 동양 최대 2,500명이 들어가는 대성당과 500명 수용하는 소성당이 있는데 예전에는 소성당에서 20분 기도하고 1시간 미사 드리고 6시에 출발해 걸어 댁에 오셨다고 하셨었다.
4년 연하인 사모님(‘35년생)을 2015년 4월 20일 사별하셨으니 홀로 되신지도 9년째다. 그전 해 8월 심상보 친구의 초청으로 연천 한탄강 지류 차탄강변에서 닭백숙으로 4반 반창회를 할 때였다. 은사님은 처음으로 사모님을 동반하여 모임에 참석하셔 공식적으로 4반 제자들에게 선뵈었었다. 부부 싸움 한번 해본적 없으셨다던 수줍음 타시는 사모님이셨다. 홀로 계시는 외로움을 누가 알겠는가?
평소 양평에 사는 막내아들이 서울 직장을 다니는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녁에 퇴근해 은사님과 같이 지내고 주말에는 양평으로 간단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18년 전원생활을 하시던 집이다.
주말에는 충북대 의대교수인 큰 아들부부와 서울에 사는 딸(맏이)이 교대로 반찬등을 준비해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 준다고 한다. 3남 1녀중 둘째 아들은 카나다 거주.
서변은 수첩을 꺼내 4반 친구들 한 사람 한사람 근황을 얘기해드린다. 선생님도 제자들 현재 사진과 고3사진이 같이 수록된 20년 가까이 된 4744 동창회 會員名簿를 탁자 아래서 꺼내 손에 드신다.
안준근이 보고 싶으시단다. 거의 만나지는 못했지만 재주가 있었다고 하신다. 2018년 필동에서 아들 결혼식을 올린 준근친구는 현재 대구에 거주. 글 솜씨가 남다른데 직업은 사업. 종섭 친구 얘기도 해 전날 부인과 함께 딸 유럽 연주여행을 떠나 불참했다고 전해드렸다.
서상기 친구 얘기
서변이 서상기친구는 교감으로 퇴직했다고 전했다. 총동창회 연회비, 100주년 기금등을 열심히 내는데 반창회, 송년회등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은사님은 전여고에서 상기 누나를 가르쳤는데 전고 가니까 동생 상기가 재학중었단다. 은사님은 전주고에 전근 오시기 전 5년동안 전여고에 재직. 전고에는 68년 오셔서 47회를 2학년, 3학년때 가르치시고 그 이듬해 70년도 48회를 맡으셨고 그리고 서울 경동고(8년)로 전근오셨다 여의도고에서 퇴임.
부모님이 안계신 상태에서 상기가 어렵게 지내는데 그렇게 어려운 처지였으면 학교 안다녔을 법한데 열심히 다니더란다.
한번은 전여고시절 풍남동 사는 여학생이 서상기 누나가 배가고파서 집에 찾아왔다고 전하더란다. 풍남동, 교동은 부자가 사는 동. 당시 전여고는 한학년 6개반이었는데, 1개 취업반, 5개 진학반으로 그의 누나는 취업반이었단다.
학교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시청에 이렇게 어려운 학생이 있다고 연락을 했더니 깜짝 놀라더니 남매가 얼마나 어렵게 살면 밥을 달라고 했겠냐며 시에서 도와 졸업을 했다는 것이다. 전고에서는 제대로 안돼 마음으로만 안타까웠다며 강렬한 인상이었는지 어려웠던 상기친구 남매를 소환해주셨다.
상기 친구는 어떤 모임에도 나타나지 않으면서 2019년 모교 100주년 기념 사업 기금 모금 초기에 교원 연금 한달분(300여만원)을 쾌척하여 4반 반창들 뿐 아니라 전 4744동기들을 깜짝 놀라게했다.
정남식 친구 얘기
정남식친구에 대한 얘기를 해주신다. 은사님은 딸이 맏(전고 52회에 해당, 교사출신)이고 그 아래 장남은 서울의대를 서태영친구 동생(홍관, 54회, 국립암센터 원장)과 같이 졸업했다고 한다.
은사님은 사모님께서 남식 친구가 마음에 들어 사위로 삼고 싶어하셨는데 자신이 무관심했었단다. 은사님은 “제자에게 딸 얘기를 하는게 마음으로 허용하지 않아 말았다“고 사모님의 남식친구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 조금만 적극성을 보이셨다면 남식 친구는 은사님 사위가 될지도 몰랐다는 의미일 것이다.
30년된 당뇨 안고 살아
은사님은 당뇨를 30년동안 앓고 계시는데 먹고 싶은 것은 다 드신단다. 은사님은 "이 나이에 병에 걸리면 수술할 필요있겠냐"며 "그냥 죽으면 되지 뭘 가리느냐"는 거다. 그래서 술도 권하신다. ”오늘 같이 반가운날 한잔 해야지....“
베트남을 상대로 사업하는 손주가 있는데 위스키 32년산을 가져다 주기에 결혼하면 개봉하기로 약속해 보관하고 계신단다. 아들이 32년산은 향으로 마신다고 했다며 마셔본적은 없으시단다.
은사님 주치의
6년 의대를 같이 다닌 아들 친구(기억니은순이라 형, 황으로 앞뒤 번호)가 분당에 내과를 개원해 30년 주치의로 한달에 한번씩 다니며 혈당을 재고 계신단다. 물론 진료비 무료.
서변이 심상보 친구 속 안썩였냐고 하니 그러지는 않았다며 송영대가 좀 말썽을 부린것 같은데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시단다. 일이 있어 불참한 '동안(童顔)'의 전 웅, 곽종훈 장로, 14년째 하림 계열사 사장 등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달중 친구도 궁금해하신다.
박유식(3반 담임)은사님과 교분 제일 깊어
은사님은 현 교단의 삭막한 세태를 얘기하시며 요순시대 교직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특히 전주고 시절이 제일 좋았고 지금도 이렇게 제자들이 찾아주어 행복하다고 하셨다.
은사님은 3반 담임 박유식선생님(2014년 7월 88세로 소천)과 친교가 깊었다며 깔끔하고 인간관계가 좋고 대외관계가 넓어 당시 류청(1919~2002, 1936 전주고보 졸업, 13회) 국회의원과도 잘 알고 지낼정도였다고 말씀하셨다.
류청씨는 초기 교육계에 투신, 전주고 교장(1949~1952년)을 역임하기도 했다. 은사님은 1951년 북중 6년제를 마지막 졸업하셨는데 당해년도 3년제, 4년제 졸업생도 있었다. 동창중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이 김선홍 기아그룹 전 회장. 박유식 선생님과 김원섭(전북대, 경원대 총장 역임, 2012년 11월 작고) 수학선생님은 은사님의 2년 연상.
박유식선생님은 전여고에 같이 재직하다 먼저 전고에 전근오셔 가장 가깝게 지냈다고 회고하셨다. 박선생님이 경제와 재리(財利)에 밝아 도시, 농촌 로테이션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촌으로 정규 발령이 나자 사립인 성심여고로 갔으며 퇴직후에는덕진동 구법원 지나 밭을 매입, 유송(裕松)농원으로 이름짓고 살았다고 전해주셨다. 주위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식구들보고 아무에게도 죽음을 알리지 못하게 해 은사님도 후에 알았다고 전했다.
은사님 사모님도 자신이 죽으면 알리지 말라고 해서 2015년 4월 사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4반 제자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 5월 스승의날 전일 4반 반창회에 참석, 은사님께서 말씀을 해주셔 뒤늦게 알게되었다.
종교관
은사님은 조선 초기 학자이자 문신인 성삼문(1418~56)이 사형장에서 지었다는 절명시(絶命詩)와 성경 구절을 들며 종교관을 말씀해주셨다.
믿거나 말거나 성삼문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하신다.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북치는 소리 사람의 명을 재촉하는데
회두일욕사(回頭日欲斜)
머리를 돌려 보니 해는 서산으로 넘어 가려 하는구나
황천무객점(黃泉無客店)
황천가는길엔 주막 조차 없다던데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
오늘 밤은 뉘 집에서 묵고 갈꼬.
은사님은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에서처럼 하나님은 큰 집을 마련해놓을테니 어디서 묵을 걱정이 없으련만 성삼문은 그런 믿음이 없어 뉘집에서 머물가 걱정을 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며 ”종교는 마지막 가는데 꼭 필요하다“고 역설하신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불편한 행동과 언행에 마음이 편하시지 않음을 내비치신다. ’윤석열대통령이 비행기 타고 가다 떨어져죽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한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 대통령 부인에게 몰카 시계를 차고 용산 대통령실에 들어가 영부인 녹음을 한 목사, 윤대통령 퇴진 기도회를 연 전주 성당 등 종교인들의 빗나간 행동과 발언의 예를 드신다.
김형석 교수 책
지금은 책을 읽지 않고 신문만 읽으신다지만 예전에 김형석 교수의 저서가 좋아 많이 읽으셨는데 현대인 강좌 시리즈 12권 중 두번째 <종교>가 맘에 특히 드신다고 하신다.
은사님은 ”인간이 사회생활하면서 정치적 영향을 안받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적인 영향을 받아도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나 바람이 잦아지면 제자리 온다. 사람은 정치 바람 지나면 다시 와야하는데 그게 종교의 힘“이라고 종교의 역할을 말씀하신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에피소드
6.25전쟁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능통한 영어로 미국을 끌어들였고 통일을 위해 휴전을 반대하고 전쟁을 주장해 미국이 골치 아파 제거하려하자 반공포로 석방을 제의해 깜짝 놀라게 했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하셨다. 특히 당시 키가 큰 제임스 밴플리트(1892~1992) 미8군 사령관의 볼을 쓰다듬어주면서 말할 정도였으며 이박사 앞에 오면 미국 장군이나 정치인들이 말을 제대로 못할 정도의 카리스마와 리더쉽이 넘쳤다고 전했다.
선후배의 끈끈함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규율반이 서 있는 교문을 들어서면 본관까지 절도있게 걸어가야했는데 봉안전(일본왕 사진 모신곳으로 현재 충혼탑자리)에서 경례하고 가야했었다며 강한 학교규율을 상기하셨다. 선후배가 엄격해 길에서 만나도 경례를 해햐할 정도였는데 패싸움이라도 생기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선배들이 말리거나 싸워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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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은사님을 생각하면 년전에 년말 동창회에 참석하여 花香百里 酒香千里 人香萬里라는 덕담을 해주셨지요
송원 기억력 짱이네여
4반 친우들의 의미있는 신년 행사에 찬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