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은 성에 차지 않는 결과와 미지근한 실력을 보며 경기장에 오물을 투척할 권리가 있다. 정해진 돈을 내고 표를 끊는 의무가 있었기에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이다. 맘에 안 들면 야유가 나오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장관이 펼쳐지면 금세 환호하는 일희일비가 그래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관대한 관전 문화와 별개로 어떤 사람들은 선수를 그 자체로 존경할 줄 모른다. 누군가 당혹스러운 패배를 맛보거나 평소같은 실력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손쉽게 거품론을 제시하는 사람이 말썽이라면 그런 건 단순 지식의 부재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런데 볼 때는 실컷 푹 빠져서 감상하다가 패배한 선수에게 관광이라며 조소한다거나 깨진 선수를 두고 절대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투의 엉성한 예단으로 뒤에서 낄낄대는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많아졌다. 브라운관 너머의 닭장과도 같은 전쟁터가 과거 로마인의 콜로세움처럼 살육의 장이 될수록 함성은 커지지만 누군가 하나 실신해 나가면 곧바로 패배자의 낙인이 찍히거나 조롱을 받는다.
무대에 선 객체는 팬이라는 군집의 잔재미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 우리 안의 동물같은 대우를 감내하고 외롭게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 안에서 선수를 대하는 마음에 존엄과 품위는 없다. 인간과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사람을 보는 윤리나 최소한의 존경심 같은 품성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 성질은 일종의 수직적인, 지켜보는 자의 권위와 가까울 것이다. 조금 전까지도 모든 신경은 화면을 향했지만 경기가 종료되고 쓸모 없는 것이 되면 즉시 폐기되고 비웃음을 짓는 이런 갈래의 사람들이 팬이라는 계급을 달고 있다고 해서 무작정 이해되어야 할까. 그러한 자세는 바닥에 눕기만 하면 야유로 무장하는 통상적인 북미대륙 MMA팬의 몰이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이런 분위기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너무도 쉽게 주위에서 볼 수 있다.
링 위에서 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려고 뛰어다니는 저렴한 상품은 그 판에서 내려오면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된다. 길거리에서 보거나 지하철을 타면서 만나게 되는, 대부분은 투잡을 가진 사람들. 타인의 인격에 존경을 표하는 일은 큰 맘을 먹어야 하는 대단한 일이 아니다.
못할 때 못한다고 화를 내더니 제 실력을 선보이자 안면몰수하며 박수를 날리게 되는 건 그 사람이 얕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재미있는 걸 구경하러 온 손님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일 것이다. 문제되는 건 그 이후의 속물적인 행동이 아닐까.
켄 섐락이 티토 오티스와 3번을 붙으면서 원했던 것도 결국은 승리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켄은 자신을 못 삶아 먹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 프로레슬링을 뛰었던 전력에 비정상적으로 역반응을 토해내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인정을 받으며 은퇴하고 싶어했다. 표독한 인상의 전성기를 보낸 대스타가 마지막 경기에서 처참하게 쓰러졌지만 상대와의 악연을 털어버릴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가능한 결심이었다. 그렇지만 그나마 달랑 한 게임에 몇 천 달러를 받아가며 링에 서는 언더카드급 선수들은 그마저도 바라는 게 사치다. 별 것 아닌 그들의 사연은 훨씬 쉽게 묻히고 소외된다.
실제로 오랜 기간 지켜본 묵은 팬은 단순한 논쟁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수지만 겉으로 시장 논리를 냉철히 분석하고 비판하거나 안으로는 선수에게 남다른 애정을 피력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한다는 말이 협소한 시각에서 비롯된 선수들 간의 상성 문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시합의 승자와 패자를 알아맞춘다든지 하는 일에는 무심하며 애초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대개는 그런 기준까지 다다르지 못한다. 왜 사람들은 이것을 배우지 못 하는가. 앞서 말했듯 팬의 속성이란 원래 단순함을 바탕으로 해서이다.
광마는 커녕 조랑말 급의 경기를 마치고 내려온 히스 헤링이 모두를 소침하게 만들었지만 종국에는 다시 활기를 찾고 떠들썩한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온 것도 팬의 본질이 반영된 움직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샤드 에반스가 이제는 UFC에 둥지를 튼 미르코 크로캅처럼 상대 숀 새먼을 하이킥으로 끝내면서 확실한 방점을 찍었고 이같은 화끈함은 그날의 시청자에게 끝까지 주시한 보람을 안겨주었다.
다른 측면으로 여기서 선수를 대하는 시각의 비애도 맛볼 수 있다. 에반스에게 쓰러진 새먼은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대부분은 단발의 화려함에 넋이 나가서 일개 무명선수의 개인 사정을 염려하는 애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기 마련이다. 몇몇 업계 전문가와 팬을 제외하고 원래가 소수 선수들에게 배려라는 것을 바랄 수 없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대전료 3000 달러를 형성하는 급수는 무엇을 해도 주목받기 어렵다는 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Dark Side on MMA / Why Do I Watch MMA
마음이 동해서 MMA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을 보며 때로 생각할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MMA는 사람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패는 것이 허용되는 냉혹하고 비정한 무대이다. 작정하고 어둡게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아니다.
일본의 메이저 단체는 일찍이 그런 면을 알고 엔터테인먼트를 가까이하여 대중에게 다가갔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UFC가 매각을 거쳐 연명하다가 방송 계약을 맺으면서 비로소 협소한 네바다 주를 본격적으로 벗어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11년이었다. 변함없이 대중에게 MMA는 비주류일 뿐이며 사고가 막힌 북미의 복싱 프로모터들은 여전히 무규칙 개싸움이라는 비난으로 종합격투기의 가치를 폄하한다.
그러한 편견도 있지만 태생적으로 비주류적인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건 인기도의 높낮이와는 상관없이 예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다. 그런 일반적이지만 왜곡된 눈길에 맞서 MMA의 매력을 알리고 그릇된 면의 부당함을 제대로 잡는 것이 식견 있는 팬이 보여야 할 태도 아니었을까.
다른 분야에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관련 팬 스스로가 다양한 범위의 전문적인 내공을 쌓아야 하지만 기껏해야 가상 대결이나 일삼는 토론 방식이 팬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한계이다. 정해진 답도 없고 시종 서투른 주제의 논쟁만 부추기는 것은 유치하며 그때마다 무시를 당할 뿐 얻는 건 보이지 않는다. 이 바닥의 커뮤니티에서는 그 점이 뼈저리게 부족하다.
비슷한 분야지만 국내의 한 프로레슬링 애호가는 프로레슬링이 유치한 어른들의 장난이라는 치우친 견해를 불식시키려 나름의 목표를 품고 계몽하는 글을 써왔다. 그런 깨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닳고 고인 논의에서 벗어나 무언가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의 접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우리의 인식은 발전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을까.
다수의 언론이 종합격투기의 규모와 선수의 계약을 과하게 포장하는 기사로 여론을 모는 데 정신없는 와중에 이런 생각은 부질 없을 수도 있다. 기사의 제목은 억대가 쉽사리 왔다갔다하지만 실제 국내 선수 중에 그토록 거대한 금액을 받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심심하면 억억대며 대단한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소리가 쉬지 않고 특종을 먹으려 들기에 체한 소리처럼 들린다. 이런 흐름은 이미 만연돼 있고 하나의 뉴스라도 더 퍼다 날라야 하는 속도전 속에 그만큼 남들에게 읽히는 소식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과 조바심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이익을 보는 건 독자일까 관련 언론이었을까.
계속 MMA를 보게 되는 건 어쩌면 승자를 가리는 일처럼 단순 흥미성에 한정된 욕구 뿐만 아니라 험난한 선수 개개인의 인생이 경기를 통해 투영되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승패의 유무로만 선수의 가치를 따져보는 이분적인 시각에서 한 발짝 발을 빼고 물러나 한층 개인적인 특성에 가깝게 기반한 분석으로 광대한 시야에서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간다면 박봉의 고된 인생을 사는 이름값 저렴한 선수들에게도 이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배리 반즈와 로저 클레멘스가 MLB의 전부는 아니듯이 표도르 예밀리야넨코나 미르코 크로캅이 MMA의 모든 부분은 아니니까.
2007-03-03 오전 9:18:00 승인 2007-03-03 오전 8:56:33 수정 |
첫댓글 이것 역시;; 잘 적은... ㅎㄷㄷ
명문입니다 이런 낙에 이종에 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