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문에서 ‘한국 시장이 마케팅의 시험무대로 떠오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우리의 소비자들이 유행에 민감하고 특히 고급 소비재를 수용하는 속도가 빨라 한국 시장에서 먼저 제품 반응을 타진한 뒤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례는 한국의 기업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외국의 기업들까지도 한국을 아시아 시장의 소비성향을 가늠하는 잣대로 삼고 주요 마케팅 시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이 일본에 비해 시장 규모는 작아도 유행의 확산 속도가 빨라 소비의 흐름을 읽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사는 이런 내용만을 중립적으로 전할 뿐 가타부타 해설 같은 것을 담지는 않았다. 이를 읽는 독자로서의 내 감정도 이중적이어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믿었던 세계화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증거를 거기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안심이 되고, 세계의 소비 시장에서 적지 않은 자리를 우리가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새로운 물건에 특별히 기민한 우리의 감각이 산업의 첨단을 예리하게 다듬으려는 우리의 노력에 크게 도움을 줄지언정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순간 단 한 걸음이라도 남에게 뒤처질세라 허둥지둥 달려가는 우리의 가뿐 숨소리를 여기서도 듣는 것 같아 반드시 기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이 특별히 유행에 민감한 나라라는 것은 모든 것이 가장 빨리 낡아버리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라는 뜻도 된다. 어제 빛났던 물건이 오늘 낡은 버전이 되어버리며, 내일 내리게 될 구매 결정이 모레는 벌써 성급한 판단이었던 것으로 증명된다. 결혼을 하면서 그렇게 요란을 떨며 장만했던 가구와 전자 제품들은 손때가 묻기도 전에 돈을 들여 처리해야 할 쓰레기더미로 전락하고, 10년을 살았던 아파트도 거기 쌓인 추억이 없다. 심지어는 주소를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마음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이 슬픔이 유행을 부른다.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삶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삶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가지가지 유행이 밖에서 생산된 바로 그 기호다. 밖에서 기호를 구해 의미의 자리를 메울 때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밖의 기호 속에는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진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의 문화는 열등감의 문화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
현대의 다단한 문명을 만들기까지는 권태에 대한 두려움이 큰 몫을 담당했다.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것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는 것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내가 해안의 굴곡을 바라보고 있을 동안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언덕 뒤에서 달이 떠올랐다. 달아오른 돌처럼 노란 둥근 보름달이었다. 나는 그 달이 어둠 속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눈 한 번 떼지 않고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폴 오스터의 긴 소설 ‘달의 궁전’의 마지막 대목이다. 달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서울에서는 달을 보기도 어렵다. 달이 보이지 않으면 옛날 달이 떠오르던 언덕이라도 바라보며, 아파트가 들어서 그 언덕마저 없어졌으면 언덕이었던 자리라도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살자. 가을이 깊었는데 이런 소설이라도 읽으면서 살자.
황현산(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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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년 국민일보 칼럼입니다.
책읽다가 발견한 글인데 넷상에 여전히 걸려 있는 거 확인하고 저작권 상관없겠다 싶어서 퍼왔습니당.
첫댓글 너무 일찍, 갑작스레 가신 것 같아서 안타까움
전대 지성들이 작고할 때마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잡았거나 최소한 무언가 제대로 물려받은 것은 있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ㄷ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