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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옥(신암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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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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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의 체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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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 시대 다른 나라 |
유럽 중세의 체육 유럽 문예부흥기의 체육 동양 중세의 체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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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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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 체육에 대한 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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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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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의 체육에 대해 이해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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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환경 |
교단 선진화 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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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이용 방법 |
교사는 본 자료를 선행학습 후 수업시간에 본 페이지의 창을 띄우고, 항목별로 창의 박스 내용을 위주로 설명하고, 삽화와 사진을 시청각 자료로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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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활동 내용 |
< 도입 > 1.생각열기(삽화 및 사진: 1장) 2.학습목표 제시
< 전개 >(삽화 및 사진: 6장) 1.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의 이해 2.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의 체육
< 정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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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종 교과서·지도서
- 노희덕 외 2인(2002),체육사.서울.형설출판사
- 노희덕(1999).세계체육사.서울.서울대출판부
- 소재석외 3인(1999).생활체육의 이론과 실제.서울.숭실대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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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코리아(http://www.history.sportskorea..net)
- 체육박물관(http://www.sportsmuseum.co.kr)
- 한국체육학회(http://www.kahperd.or.kr)
- 한국사회체육진흥회(http://kasf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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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각열기 활인심방의 도해를 보여주며 조선시대의 체조와 현대의 맨손체조의 유사점을 찾아보도록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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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 중세 고려시조선 이해
1)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의 이해 고려말에는 공민왕 사후 친원 정책을 쓰는 우왕과 친명 정책을 주장하는 당시 세력가 이성계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당시는 최영의 집권기로 명은 고려에 압력을 가해 원의 땅인 철령 이북 땅을 얻으려 하자 최영은 요동을 정벌하여 어부지리를 얻고자 이성계를 출정하게 하나, 뜻이 달랐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과 최영을 죽이고 전제개혁을 하고, 정권·군권·경제권을 장악하고 1392년에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왕권의 확립과 통치 제제의 정비로 사회가 안정되고, 유교를 중심으로 학문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모적인 당쟁을 겪으면서 많은 모순을 낳게 된다. 또한 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국가는 재정적으로 파탄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나, 노력만으로 그치게 되어, 청, 노, 일등의 외세에 밀려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데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2)조선시대 사회 특징 조선 사회는 유교적 관료 국가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체제를 구축하였고, 국방정책은 농병일치제이자 국민개병제(국민 모두 군역에 의무를 갖는 제도)였으며, 신분은 어느 정도 세습되고, 귀천의 구분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다.
3)조선시대의 교육 교육 기관은 사설 초등 교육 기관으로 전국에 서당, 중등 교육기관으로 서울에 4부학당과 지방에 향교, 고등교육 기관으로 서울에 성균관이 있었다. 여기서는 문과에 관계된 교육만이 이루어졌고, 무예에 관계된 것은 교육되지 않았다. 무학 교육 기관으로 훈련원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학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고, 활쏘기를 하는 사정(射停)이 그 역할을 수행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또 다른 무사교육은 궁마(弓馬)나 병서(兵書)를 익히기 쉬운 환경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부자 지간의 전수로 이루어졌으며, 즉흥적 내지는 시험을 앞두고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교육형태였다. 교육의 형태는 유학 교육, 무학 교육, 기술 교육이 있었으나, 조선조는 문치주의의 경향으로 무학을 비롯한 기타 교육은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조선 사회는 양반 사회로써 무반에 대한 사회적 위치와 대우가 결코 낮지 않았고, 무과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 선발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병서와 무예를 같이 시험보았고, 실기보다는 이론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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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 무사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 내지 제도적 장치로써 그 역할을 수행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세종 17년에 세종이 병조에 전지한 다음과 같은 기사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말타기와 활쏘기의 시급한 급무를 의당 강습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군사들이 모두 훈련관에 모여 활쏘기를 연습하기 때문에, 하루 동안 연습하는 것이 수십 명에 불과하여 한낱 활쏘기 연습의 이름만이 있을 뿐 그 실효가 없으니, 이제부터 궁성 안에 민가가 회소한 곳에 사장(射場)을 설치하고, 번으로 들어가는 군사들로 하여금 각기 그 부근의 군사들을 나누어 집합하게 하여 활쏘기 훈련을 권장 시험하게 하되, 그 절차는 삼군도진무와 이를 의논하라.”하니, 모두 의논하고 아뢰기를, “서울 안에 사장 8개 소를 설치하고, 번을 나가는 군사들로 하여금 각기 그 부근의 사장에 모여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고, 훈련관의 관원을 나누어 보내어 이를 감독 관정하게하고, 또 궁성 안에 사장 2개소를 설치하고, 번으로 들어가는 군사들로 하여금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고, 입직한 진무로 하여금 이를 감독 관청하게 하되, 그의 근만과 능부(能否)를 상고하여 이를 기록하고, 맞힌 자는 도(到) 하나를 주고, 이르지 못하는 자와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벌을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러한 사장이 교육 기관의 역할을 하였음을 어느 정도 분명한 사실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한편에서 보면 사장이 학교의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느냐는 해석상의 문제가 있겠으나, 무사를 양성하는 장소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노희덕외2,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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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의 체육
인재 등용과 체육, 편사와 체육, 활인심방과 체육, 상류층의 유희와 오락, 서민의 유희와 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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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재 등용과 체육 선시대 무관 등용 방법은 과거의 무과시험을 통해서였다. 무과에서는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로 나누어, 초시에는 목전(가벼운 화살:240보), 철전(무거운 화살:80보), 편전(특수화살:130보), 기사(5개의 표적을 각각 35보의 거리에 세워 놓고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맞추는 것), 기창(3개의 허수아비를 각각 25보 거리로 세워 놓고 말을 달리면서 창으로 찔러 맞추는 경기) 무예만을 복시에는 초시에 보았던 무예 모두와 경국대전과 사서 오경 중 일서, 무경칠서 중 일서, 통감·박의·무경·소학 중 일서등의 강서를, 전시에는 왕 앞에서 당시 무예 훈련의 기초가 된다는 여겼던 격구(기격구,보격구)만를 보았다. 무과 시험보다 한 단계 아래인 일반 무사들에게는 활쏘기와 주(走)와 역(力)등의 시험을 보았다. 조선 중기 이후에 적용된 《대전통편》의 <권무재초시>의 시험과목에는 기창교전, 편추, 마상언월도(이상은 장교와 기병), 조총, 용검, 쌍검, 제독검, 언월도, 왜검, 교전, 본국검, 예도, 목마창, 당파, 낭선, 등패, 권법, 보편추, 협도, 봉, 죽장창(이상은 보병) 등의 여러 무예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자세한 무예들의 모습은 《무예도보통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와 같이 관직 임용에 무예와 강서가 중시 되어졌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강인한 체력과 정신 함양이 주된 체육 활동이라고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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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구: 세종 7년(1425년) 무예 훈련의 기초가 된다고 하여 무과와 전시의 고시 과목으로 채택하였다. 세종 10년 정사조에 “격구는 말과 사람이 모두 자세를 갖추어 3회를 능히 구문으로 쳐보낸 자를 1등으로 하여 15분을 주고, 말과 사람이 모두 자세를 갖추어 3회를 쳐서 구문으로 보내지 못하였으나 능히 막대기로 맞춘 자를 2등으로 하여 10분을 주며, 말과 사람이 모두 자세를 갖추어 2회를 능히 구문으로 쳐 보낸 자를 3등으로 하여 5분을 주고, 분이 제일 많은 자를 1등으로 하여 상으로 1계급 승진시켜 주고, 2등은 150점, 3등은 100점을 준다.”고 하는 세세한 고과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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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격구는 말을 달리면서 숟가락 모양의 지팡이로 50보 거리에 놓여 있는 구를 쳐서 200보 전방에 있는 5보 너비의 구문에 넣는 시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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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走): 일정한 시간 동안 멀리 달리는 능력을 시험하는 과목이었다. 휴대용 물시계인 동호를 사용하여 물이 흘러나와 없어질 때까지 뛰어서 뛴거리가 270보이면 1주, 260보이면 2주, 250보이면 3주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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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力): 무거운 물건을 들고 멀리 달리는 능력을 시험하는 과목이다. 양손에 각각 50근씩을 들고 160보를 가면 1력, 130보를 가면 2력, 100보를 들고 가면 3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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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 정조가 직접 편찬의 방향을 잡은 후 1790년에 간행되었다. 1598년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의 6기(技)와 1559년에 간행된 《무예신보》의 18기를 근간으로 더욱 발전시켜 24기의 각종 기예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편찬한 책이다. 앞부분에는 정조의 서문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이래 전투 기술의 대강과 이 책의 바탕을 마련한 사람들의 간단한 전기와 관계 사실들, 인용 서목 등을 담았다. 총 24가지의 기술이 수록되어 있으며, 각 항목마다 병기와 개별 동작 및 전체 움직임에 대해 매우 사실적인 그림과 해설을 붙였다. 뒷부분에는 의복에 대한 설명과 그림, 그리고 각 부대별 차이점을 담았다. 언해본도 비슷한 시기에 간행되었는데, 개별 동작의 해설 부분을 번역하여 누구나 그 내용을 암기하고 그림을 보며 전투 기술을 익힐 수 있게 하였다. 이 책에는 조선조에 가장 대표적으로 실시했던 활쏘기에 대하여는 다루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당시 궁술만을 중시하였기에 왜적과의 싸움에서 칼과 창의 기예가 전혀 연습이 이루어지지 않아 왜적에게 당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에 중국의 장사들이 우리 나라에 주둔함으로써 조총과 패·선·창·파를 보았고, 그 사용법을 익혔으며, 기효신서를 구하고 그림을 살피고, 고증한 후에 총을 쏘고, 패와 선 등을 격파하는 법과 적을 죽이는 법을 연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는 할쏘기는 다루고 있지 않다. 활쏘기에 대한 책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의 사설조에 활쏘기에 대한 과학적인 방법이 망라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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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사와 체육 편사란 궁술 대회를 말한다. 편사는 5인 이상으로 조직된 여러 개의 단체나 각지의 궁수가 자기 사정을 대표하여 서로 승부를 겨루는 것인데, 양편이 각기 일정한 수의 선수를 선정하고, 각 선수가 쏘아 맞힌 화살의 총수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이다. 편사의 종류에는 사정 사이의 경기인 퍼편사, 구경간 경기인 골편사, 한량들만 참가하는 한량편사, 아동으로만 구성하는 아동편사 등이 있다.(노희덕외2,2002)
3)활인심방과 체육 활인심방은 중국의 주권이 저술한 고가류의 의서이며, 정신통일, 목돌리기, 마찰, 침삼키기, 다리의 굴신 동작으로 구성된, 치료보다는 예방을 위한 보건 체조의 기능을 한 인위적 운동방법이다. 위 의서가 국내에 언제 도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황 선생이 이 책을 모사하여 후세에 전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영남과 호남의 문인과 학자들 사이에 널리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4)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체육사상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은 체육 활동을 단순히 신체를 단련하는 것을 넘어서 마음을 다스리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이황 선생은 도인(활인심방책의 체조)과 함께 투호를 함으로써 절도와 규범 및 정신 통일을 배울 수 있다고 하였고, “학업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적당하게 심신을 휴양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였다. 이이선생은 “지나치게 신체의 편리함만 좇으면 근육과 피의 흐름이 느슨해져 일상적인 움직임이 어려워지고, 말의 의미를 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며 마음이 어지러워진다.”라고, 성종은 “투호는 놀이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다.” 라고 한 것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겠다.
5)상류층의 유희와 오락 고려시대의 유희와 오락 활동이 더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상류층의 양반들은 활쏘기를 즐기고, 사정이라는 체육클럽을 만들어 클럽 대항 경기를 개최하는 등 무예를 무예로서 뿐만 아니라 그것의 우열을 가리는 스포츠의 단계로까지 발전시켰다. 또 일부 학자들에 의해 체육 보건 사상의 성립 등이 이루어져 근대적 체육 발전의 기저를 제공하였다. 기타 체육 활동으로는 말타기, 씨름, 바둑, 장기 등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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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서민의 유희와 오락 서민들은 명절에 축제의 형식으로 다리밟기나 줄넘기, 줄타기, 널뛰기, 농악, 그네뛰기, 자치기(격양) 등을 하였고, 단결력을 강조하는 형태의 놀이인 줄다리기, 석전 등을 하였다. 아이들은 제기차기, 연날리기, 공기, 팽이, 썰매 등의 놀이를 하였다. 이중 널뛰기, 썰매, 격양, 공기, 줄타기, 줄넘기, 차전놀이, 그네뛰기, 고싸움 등은 고려조 문헌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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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 오늘의 스키와 비슷한 것으로, 주로 산간 주민들이 눈 위에서 교통용 또는 수렵용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스키와는 크게 다르다. 길이가 짧으며, 험한 숲길에서는 스키보다 활동하기에 간편하고 매우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어서 수렵 등에 많이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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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다리기: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줄을 당겨 승부를 가르는 대중적 유희로, 주로 단오날에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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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 천민층의 재인(지금의 광대)들이 상류층의 경연이나 기타 모임에 불리어 재주를 부리는 유희로, 지금의 서커스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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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다섯 개의 작은 돌을 공중에 던져 손으로 받아 승부를 정하는 여자 아이들의 유희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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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뛰기: 기원은 삼국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주로 부녀자들이 즐긴 체육 활동이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행하여졌다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5월 단오에 성대하게 행해졌다. 젊은 남녀가 새 옷으로 단장하고 모여, 큰 고목에 그네를 매고 뛰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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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전놀이: 길이 20-30척의 참나무를 엇갈리게 끈으로 동여매어 동채를 만들고, 동채 위에 대장이 올라가 자신의 편을 지휘하여 상대편 동채를 땅에 닿게 하거나 빼앗으면 승리하는 놀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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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싸움놀이: 짚을 꼬아 만든 커다란 고를 서로 맞부딪쳐서 상대의 고를 떨어뜨리는 놀이이다. 남자를 상징하는 동부와 여자를 상징하는 서부 두 편으로 갈려서 싸움을 하는데, 서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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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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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풍속화 씨름 |
씨름과 택견 |
무예도보통지 |
무예도보통지궁술 |
차전놀이 |
예지각 p.15 |
금성출판사 p.19 |
교학연구사 p.13 |
교학연구사 p.13 |
보진재 p.11 |
교학연구사 p.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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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1392년 개국한 이후 개항 이전까지를 말한다. 2.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 무관의 교육 기관으로 훈련원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교육은 사정에서 이루어졌다. 3.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 무인은 과거제도 무과를 통해서 등용되었다. 4.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 궁술은 가장 대표적인 무예 활동이었고, 편사라는 스포츠형태로 발전하여, 후에 여가선용의 방법으로 활성화되었다. 5.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 활인심방은 신체의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체조의 형태로 학자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6.우리나라 중세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은 체육 활동을 단순히 신체를 단련하는 것을 넘어서 마음을 다스리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7.우리나라 중세 조선시대 상류층의 오락과 유희는 편사, 말타기, 씨름, 바둑, 장기 등이 행해졌다. 8.조선시대 서민의 유희와 오락은 줄넘기, 널뛰기, 줄다리기, 석전 등을 하였고, 아이들은 제기차기, 연날리기, 팽이, 썰매 등의 놀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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