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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성 사유와 미적 표현의 묘미
김홍은(충북대 명예교수)
문학은 소재를 찾아 새로운 생각을 언어의 기술로 표현한 예술이다. 수필은 서정과 수사가 겸비된 문장이맛이난다. 이런 글을 만나면 여유로운 오솔길을 걷는 행복스러운 기분이 든다. 글을 읽는 재미는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체험의 인생사를 서정의 흐름으로 사유를 담아내었을 적에 감동을 받게 된다.
임현택 수필가의 작품집은 바로 이러하다. 정감어린 언어로 형상화하여 서정적으로 이끌어간 주제의 문장들로 즐거운 미감을 주고 있다.
1.달빛과 대금소리가 빗는 운치
문장으로 쓰여 지는 서정적 단어는 그 어떤 말보다도 정감이 느껴온다. 뿐만 아니라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표현은 운치를 자아내어 상상을 하게 되고 감동을 갖게 한다. 함축된 의미가 깊다보면 오래도록 여운을 준다. 달빛과 대금의 소리가 빗는 조화로운 묘사의 운치는 잘 어울려져 생동감을 주고 있다.
쏟아지는 별빛을 밟으며 야간출사를 갔다. 가로등 불빛에 얼비추는 단풍과 달빛에 물든 명암저수지의 풍경이 마치 신이 내린 선물 같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호수에 빠진 만월(滿月)과 찬란한 불빛과의 조화를 이룬 반영, 고정관념의 틀을 깨지 못한 우리세대는 호수를 배경으로 반영만 촬영하고 있었지만 멀쑥한 키의 젊은 세대는 달랐다.(중략)
빛과 어둠이 있고 만남은 헤어짐이 당연한데 이유 없이 순리를 거부하고 싶기 때문에 아픔을 슬그머니 밀쳐내기도 했었다. 정거장이란 떠나는 이의 슬픔과 돌아오는 이의 행복이 무한 교차하는 곳이다. 아직도 못다 푼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며 왔던 길을 돌리는 것이다. 누구나 가슴속에 묻어둔 추억이 하나쯤이 있지 않는가. 작별도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매번 뒤가 저리고 아리다. 그렇게 반달의 정거장인 그곳은 내게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어둠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은 달빛 풍경. 명암호수에 빠진 달빛을 건져 올리려니 난 또 떨고 있다.
그리워서 생각이 나는 게 아니고 생각이 나서 그리운 것처럼.
<가슴에 반달하나>중애서
문장이 상큼한 향내를 풍기는 멋이 깃들여져 있다. 잔잔한 언어의 운치와 묘사가 정감을 불러일으키며 취흥에 빠져들게 한다. 서사적 서정성의 묘미가 수필 맛을 더해준다.
달은 누구나 바라보는 그 자체만으로 즐겁다. 거기다가 야간에 사진을 찍으러 저수지를 찾아가 단풍과 달빛이 물에 비친 불빛으로 하늘의 반달 영상이 화합된 미묘한 감성을 들려주고 있다.
호수는 어둔 밤에 비치는 정경의 이끌림에서 물과 빛이 함께 만나게 되는 미적경관을 상상하게 한다. 반달의 정거장, 그곳에는 이별과 만남이 공조하는 슬픔과 행복이 교차하는 세월을 담고 있는 추억이 서려있음이다.
명암호수에 잠긴 달빛을 렌즈에 담으려니 알 수 없는 회상에 젖는 심정을 가슴에 반달로 그려내었다. 인생의 달빛 여정의 비밀을 깊은 마음의 언어로 정거장에 은유하여 의미화시켰다. 하늘에 높이 떠있는 반달은 인생의 정거장으로 묘사한 재치가 돋보인다.
달빛이 휘영청 밝은 날이다. 도심 빌딩숲에도 달이 걸렸다. 온 방을 휘감은 가슴을 에는 듯한 대금소리에 취해 눈을 뜰 수가 없다. 하늘 저쪽 어느 행성에서 일까. 가슴을 울리고 떨리는 음률로 도취해 간다. 그것은 인위적이 아닌 자연의 소리 같고 신의 음성 같기도 하다. 나처럼 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람들도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애닯은 대금소리 앞에 자지러지고 만다. 청아한 울림, 심금을 울리는 저음과 요성 그리고 장쾌한 고음의 역취는 가슴을 파고든다. 그렇게 젓대소리는 온몸을 휘감아 돌고는 그 밤 달빛마저 잠재웠다. < 소리를 따라간 발자국> 중에서-
달밤과 대금소리는 어울림이다. 누가 이 아름다운 소리를 싫어하랴.
달빛에 묻어나는 음향의 낮은 젓대소리는 초승달로 태어났다가 그믐달로 사라지는 정막감의 몸짓을 느끼게 한다. 자연과 어둠의 조화로 들려오는 월광의 감정은 순박함으로 밀려드는 고요로움 이기도하다.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율동으로 간드러진 대금소리의 멋을 담아 독자를 스스로 감성의 음률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화자는 소리의 음률을 슬픈 듯 비통한 심정을 넘어 달빛마저 잠재워 주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음의 묘미가 글맛을 냈다.
대금소리는 한이 서린 소리라 하지만 울컥 치밀어 오른 슬픔 같은 그리움이 흐르다. 눈을 감으면 천상에 있는 듯 고뇌를 내려놓고 평온을 찾는다. 그리고 모든 이의 마음을 하나로 엮는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혼을 담은 음악임이 틀림없다. 아리랑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저 멀리서 실낱같은 북소리만 들어도 어깨가 들썩이고 절로 흥이 나는걸 보면 말이다.
대금소리는 천년의 소리인 민족의 소리가 아니던가. 달빛 따라 들려오는 즐거운 저 소리는 낙이불류(樂而不流)라 하지 않던가. 즐거우나 넘치지 않게 하며 애이불비哀而不悲)라고 애간장을 끊을 듯 가슴을 파고드는 슬픈 소리는 슬프되 비통하지 않게 느껴야 한다 하지 않았는가. 대금소리는 즐거움과 한이 조화된 슬픈 소리를 우리겨레가 수 천 년 동안 담아온 멋이다.
화자는 대금을 통하여 ‘인위적이 아닌 자연의 소리 같고, 신의 음성 같기도 하다’ 라는 도취된 순간을 기발한 표현으로 이끄는 문장의 묘상으로부터 아름다운 달밤을 매료시키고 있다.
작가는 표현의 수단으로 동(動)과 정(靜)이 만나 정중동(靜中動)으로 사색의 빛과 소리의 화음을 간드러지게 묘사함으로 엮어낸 문장이요, 내심(內心)의 감정을 서술하여 소리의 선율(旋律)과 음파(音波)가 어우러져 들리는 듯 달빛 같은 감성을 자아내는 문채의 미감(美感)으로 감흥을 일으키게 하였다.
2. 사유하는 정신의 각성
글은 작가의 심성과 안목이 조화로운 사색의 깊이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U턴’의 작품은 인간성을 자연에 이용한 수필로 소재와 제재를 만들어 내는 노련미가 배어있다.
주제에 따라 제재를 의미적 사유로 함축하여 표현함으로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심미적 사색의
각성을 생동감있게 주술사(呪術師)같은 인생관을 들려준다.
눈이 보살이다. 그날 자화상 같은 연설을 듣고 오는 길목 한적한 갓길에 기이하게 생긴 나무동가리를 주웠고, 끌림과 당김의 묘한 인연이 된 나무동가리는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나무동가리는 언제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우유부단하고 밋밋하게 살아온 내겐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고 그 동안의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U턴을 시켜놓았다. (생략)
그 후 서서히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고 나만의 색깔이 덧칠 돼 가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자칫 딱딱하고 인간미가 없어 보이겠지만 외려 관계유지가 부드럽고 명확해 졌다. 안방 가리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나무동가리를 볼 때면 그날의 연설이 바로 눈앞에 보는 것처럼 명백하고 또렷하다. 알량한 부와 명예에만 욕심을 부렸음에도 개념도 관념도 없이 생활해온 내게 이처럼 의미가 담긴 보물을 얻을 수 있었다니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지 않을까.
<U턴> 중에서
사람은 저마다의 성품이 있다. 타고난 천성을 바꾼다는 것은 각성이다. 새로운 각오로 자신의 품성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인생의 사는 길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생각으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이 따라주지를 않기 때문에 소망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화자는 스스로의 단점을 깨달아 '인연이 된 나무통가리'가 삶을 바꾸어 놓았다 함은 보살의 눈으로 변화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도 한다. 눈은 그 사람의 마음이다.‘사람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고, 짐승의 눈에는 짐승으로 보인다’라고 하지 않던가. 화자는 남다른 정신으로 자애로운 눈, 사랑의 심안(心眼)을 가졌기에 우유부단함을 바꿀 수 있었던 깨달음의 방법을 들려주었다.
누구나 지향하고 있는 목표, 도달해야 할 목적이 있다. 난 지금도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본다. 개념과 관념 그리고 신의를. 누구든 나를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기는 행운을 얻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젖어본다. 지금은 빛을 보일 때가 아니라 그 빛을 감추고 묵묵히 실력을 키워야 할 때이다.
말없는 손짓이 있는 그 곳에 바람도 머무는 것 같다.
<U턴> 중에서
동양철학에서는 모든 만물은 기(氣)로부터 이루어졌다고 하고 있다. 기는 만물의 생장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가 좌우한다고 믿는다. 사람에게는 칠정(七情)으로부터 기는 발하게 되는 것이며 선악의 문제는 기에 있다고 한다.
화자는 남다른 정신의 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누구든 나를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기는 행운을 얻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젖어본다’라는 착한마음을 지니고 있음의 의식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있다.
3. 지천명에 이른 인생의 향기
모든 사물은 향을 지녔다. 인간에게도 저마다 향기가 있다. 그 향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 낼 수가 없다. 불인지심(不忍之心)의 착한 근성이 있을 때 연륜에 따라 사람의 인향(人香)이 자연스럽게 스며나게 된다.
공자는 나이 오십을 지천명이라 하였다. 지천명에 이르러서,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마음을 갖는 본성을 부여한다고 하였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을 낳을 때부터 착함이라 했으나 인생은 죽을 때 관 뚜껑을 덮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예전에는 칠십이면 종심소욕(從心所欲)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 나이 오십은 인생의 반이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중반에서 인생을 재조명하는 선과 악을 저울대에 올려보아야 하는 의미가 아니던가.
임현택 수필가는 사유가 담긴 인생의 깊이를 더하는 의미의 표현으로 잔잔하게 매혹 시키고 있다. 굳이 문장에 대한 서평이 뉘가 될까 두렵다.
오십 즘, 기왕 항아리처럼 변한 모습이라면 옹기마냥 자연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는 게 어떨까 한다. 질그릇은 진흙만으로 만 구워 잿물을 안 입힌 그릇이고, 오지그릇은 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다시 구워낸 그릇이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똑같은 옹기이다. 유약을 입히지 않아 기공이 남아있는 상태라 곡식을 담아 두어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 질그릇, 반면 유약을 발라 한 번 더 구워내어 내화력이 강한 오지그릇. 품격과 편안함을 겸비한 나만의 수식어, 숫자에 옷을 입힌다면 오지그릇이 중년과 나이가 한데 섞여 어우러지지 않을까.
< 오십이되던날 >중에서
옹기그릇에다 오십이 된 인생의 마음을 끌어 들였다. 일천이백 도에 이르는 온도를 거쳐야 만들어지는 질그릇에 소박한 여인의 심정을 비유를 하였다.
오십 전은 질그릇처럼 고뇌하며 살아왔다면, 오십이 된 인생은 다시 고뇌하며 유약을 바른 오지그릇처럼 인품을 담아 살아야한다는 중년의 여인상을 깊은 사유(思惟)로 들려주고 있다.
질그릇과 오지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며 이를 통하여 중년을 보다 성숙한 삶으로 품위 있게 옹이와 오지그릇 어울같이 살아가야함을 표현해냈다. 지천명인 오십의 나이를 의미 깊게 쏟았다.
‘오십에 철든다’라는 속담이 있다. 철이든 다는 것은 사리를 분별할 줄 안다함이다.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안다는 뜻은 ‘가고나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월이고,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는 뵙지 못하는 것이 부모이다’라는 회심하는 심정을 털어놓는 나이도 쉰이다.
화자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운 심정을 그리움으로 물들게 표현하고 있다.
선비정신의 표상 대나무, 예로부터 품격이 가장 높은 나무의 하나로 완전한 덕을 갖춘 군자〔全德君子〕의 상징이다. 또한 대는 인간정신과 가장 가깝다고 했다. 모든 식물은 잎이 생산한 양분으로 튼튼한 줄기로 성장하여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대는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해 모든 양분을 모두 땅속으로 보낸다. 해가 갈수록 대 줄기는 누렇게 노화되면서 말라죽고, 그간 비축을 한 양분은 죽을힘을 다해 죽순 하나를 세상 밖으로 밀어 올린다. 후세를 위해 자신을 헌신한 대나무 우리 부모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백년 만에 꽃피는 인내력 강한 식물로 꽃이 피고 나면 말라죽는 대나무, 대를 두고‘세기(世紀)의 식물’이라 부른다.
<짙은 여름에 빚은 풍경>중에서
이 글을 읽다보니 대나무에 대한 생태학을 봉황새가 대나무씨를 먹는다는 전설을 유교 강의를 듣던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왕수인은 대나무를 보고 일주일동안 깨우치려고 하다가 병을 얻었단다. 이후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깨달았다. 지행합일로 ‘앎은 행함의 시작이요 행함은 알음의 완성이다. 지와 행은 둘이 아니고 하나란다. 지는 보고 듣는 것만으로 아는 게 참된지가 아니고 지는 행행으로 옮겨질 때 참된 지가 된다고 한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지가 아니라 하였다. 대나무의 생장이치를 표현하면서 인간의 정신과 살아가는 부모에 대한 도리(道理)와 효심을 들어내었다.
화자의 효심은 많은 작품 속에서 인간다움으로 이끌어내는 감성에서 명심보감을 읽고 깨닫게 하는듯한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아래의 문장들에서 보면 부모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오가리> 작품은 2편이 게재해 있다. 오가리는 우리민족의 정서가 담겨있는 가을의 농가에서 흔히 만들었던 풍경이다. 잘 익은 호박이나 박을 씨와 무른 속살을 파내고 껍질은 칼로 벗겨내고 좁다랗게 길게 연결시켜 오려내어 빨랫줄에 걸어놓고 말렸다.
호박오가리는 발그레한 색감이 아름다웠다. 더러는 호박오가리를 싸리나무, 대나무 발에도 말렸다.
화자는 지난날의 어머니가 마드는 오가리를 만드는 과정을 잘 표현하여 냈다.‘단단한 호박을 자르기 위해선 한번 칼집을 내면 쉽게 칼이 들어가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손등 심줄이 퍼렇게 튀어 나왔다. 입을 악 무시고 늙은 호박 껍질을 벗기실 때면 덩달아 내손에도 힘이 들어간다. 이내 발가벗긴 못난 늙은 호박, 통통한 아기엉덩이처럼 매끈하게 반짝이는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대나무자리에 널어놓는다. 빛과 바람을 맞으며 마르는 오가리, 손길을 많이 주어야 단맛이 난다며 뒤적일 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오가리, 탱탱하던 모습은 어머니 손등처럼 쭈글쭈글 변해갔다.’오가리를 만드는 모습을 눈으로 지켜보는 듯 실감나게 묘사를 하고 있다.
화자는 발목을 다쳐 2개월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에 오니 나방이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다용도실에 두었던 다양한 오가리의 출처임을 알게 되었다. 오가리는 바늘구멍처럼 작은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이 마치‘ 엑스레이로 보았던 예전의 어머니의 골다공증 뼈랑 흡사했다.’고 재치로 비유 시켰고 그 모습은 어머니 모습 같아 목울대가 뻐근해진다고 하였다. 호박오가리를 통하여 어머니의 그리움을 들려주었다.
장마가 문턱을 넘어서기 전에 아침을 여는 어머니의 발걸음은 진종일 바쁘시다. 지루하게 내리는 비로 인하여 채소가 녹아내리기전에 가지, 호박오가리를 만드셨다. 바람이 슬쩍 스쳐도 흰 머리카락이 보였다 사라졌다하는 화장기 없는 주름진 얼굴이다. 매끄럽고 부드러웠던 어머니 손등은 사라지고 얇게 썰어놓은 호박 밑의 대나무발처럼 두툼하고 굵어진 손마디, 거칠고 쭈글쭈글 거리는 손길로 여러 번의 햇빛을 따라가며 뒤적뒤적 뒤집으며 말라가는 오가리, 오가리가 뒤틀리면서 말라가는 모습은 애면글면 작아진 어머니의 뒷모습이었다.
<오가리 (2) > 중에서
지천명이 지났음에도 문득문득 돌아가신 어머니손맛이 그리운 건 왜일까. 체한 듯 가슴 한복판이 먹먹해진다. 오가리 때문이다. 가녀린 여린 순을 뻗어 담장을 기어 올라가던 호박꽃이 어여쁘지 않다는 이유로 꽃무리에서 밀려났지만 관대, 포용이란 꽃말을 가진 호박꽃, 실한 열매를 맺어준 호박, 현재는 과거의 모습이라더니 어머니가 생전에 계시다면 보리밥 그리고 호박오가리에 그리움을 달래지는 않았을 텐데.
<오가리 (2) > 중에서
산업화가 되기 이전인 60년대만 하여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을 중요시했다. 농업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근본이다.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농업이다. 가난했던 시절 춘궁기의 보릿고개는 배고픔을 이겨내는 눈물겨운 삶이었다. 속담에도 가난은 나라도 구제를 못 한다 하지 않았던가. 흙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던 시절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논 귀퉁이에 샘을 파 부족한 물을 충당 시켜도 가뭄을 이겨내지 못하는 논엔 벼 잎들이 배배 돌아가고, 팔순이 목전이신 아버지는 애간장을 태우시며 가뭄을 이겨내려는 모습을 화자는 학창시절 그런 시골이 싫었고, 슬펐다며 지난날 부모님의 삶을 선명하게 묘사하여 놓았다. 언불진의(言不盡意)라고 어찌 그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자루 가득 담긴 옥수수, 어느 때는 가격폭락으로 씨앗에서 판매까지 계산을 해보면 인건비도 건질 수 없을 때가 허다하다. 그래도 볍씨를 갈무리하고 옥수수를 심는 것은 손바닥에 세상을 그릴 수 없기에 당신의 숙명이라 생각하신 것 같다.’라며 아버지의 농심어린 농촌의 뼈아픈 현실을 토로하였다.
학창시절 그런 시골이 싫었다. 검은 얼굴, 거친 피부, 허름한 일복이 싫었다.
청명이 지나면서 논농사를 준비한다. 가래질을 시작한 논은 볍씨가 뿌려지고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벼는 들판을 가득 메운다. 새벽 일찍 기침을 하신 아버지는 삽을 메고 논물을 보러 논두렁의 아침이슬을 떨군다.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려온 아침이슬은 축 늘어지고, 어깨에 지고오신 햇살을 내려놓으신 아버지, 조반상 하얀 쌀밥위에 올려 진 마디 굵은 손은 유난히 솥뚜껑처럼 크고 우둔해보여 괜스레 눈빛을 돌리기 일쑤였다. 슬펐다.
<흙속에 녹아내리는 삶> 중에서
밭고랑에 떨어진 나락은 겨울철새 먹이로 남겨두고 긴 그림자를 끌고 가신다. 농사는 우리의 근본이요 뿌리라고 했다. 친정아버지와 남편은 뿌리를 저버릴 수 없기에 뿌리가 흔들리면 안 되기에 논두렁 밭두렁에 삽을 들고 나서신다. 밭둑에 드러누운 해, 은빛머리카락이 반사 될 때면 허연 수염을 단 옥수수도 긴 이파리를 바스락거리며 농심을 위로한다.
<흙속에 녹아내리는 삶> 중에서
어느 날부터 친정 안방 윗목에 예서의 8폭 병풍이 반쯤 펼쳐져 있었다. 팔순임에도 불구하고 친정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붓글씨를 쓰신다. 책상위에는 항상 돋보기와 중용의 책장이 펼쳐져 있다. 향이 짙게 배어 나오는 오래된 책에서 나는 종이냄새, 약간 퀴퀴하지만 누렇게 바래버린 책장엔 아버지의 향기가 있었다.
화자의 <비우는 것은 곧 채워짐이다>는 작품은 팔순인 친정아버지의 생활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출발의 의미를 들려준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중년이 넘어서면서 비로소 빈껍데기만도 못하단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움켜쥘 줄만 알았지 나눌 줄도 모르고 살아왔음을 알게 됨이다. 미련한 자존심을 버리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며, 비우고 내려놓으면 저절로 보이는 거. 마음을 비워야 비로소 채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됨을 화자는 이렇게 뇌이고 있다.
‘호수의 밤은 여자마음 같다. 묵화위에 불빛을 뿌려놓은 냥 화려한 야경을 삼켜버린 호수, 찬란한 색체를 수놓은 호수에 밤이 내리기 시작하면 거긴 또 다른 세상이 하나, 둘 그려진다. 머릿속이 시끄럽고 답답할 때면 홀로 찾는 호수다. 둥둥 떠다니는 달빛 사이로 달뜬 내 마음을 실어 호수 깊은 곳으로 떠밀려가는 곳, 시골집에 펼쳐진 병풍처럼 호수는 많은 밑그림을 그려놓았다.’라고 하였다.
고서가 언제나 자리 잡은 그곳, 달팽이처럼 커다란 집만 끌어안고 살아가는 물질만능주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당신이다. ‘요즘 젊은것들은 그놈의 핸드폰, 콤푸터만 보고 너무 게을러, 빈 잔은 채워야 하고 빈 그릇은 담아야 요란하지 않아’ 혀끝을 차며 나이가 먹었다고, 결혼을 했다고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지내는 삶은 빈껍데기만도 못하단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중년이 넘어서면서 비로소 빈껍데기만도 못하단 말씀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움켜쥘 줄만 알았지 나눌 줄도 모르는 미련한 자존심을 버리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비우고 내려놓으면 저절로 보이는 거 그것은 비워야 비로소 채워진다는 것이었다.
<비우는 것은 곧 채워짐이다> 중에서
소주와 땡감이 어떤 궁합인지 알 수 없지만 소주에 굴린 땡감을 며칠 숙성을 시키면 감의 떫은맛이 없어지고 단감처럼 달달한 감으로 변신한다. 예전 어머니는 팔팔 끓인 물에 소금을 넣어 짭짭하게 만들어 항아리 속에 땡감을 넣고 그 물을 부어 며칠 동안 이불을 덮어 숙성시켜 침시를 만들어 먹었다. 주전부리가 귀한 그때에는 침시도 아껴먹어야 했다. 지금 소주에 떫은맛을 없앤 감은 모양도 색깔도 그대로 선명하여 먹음직스럽다. 예전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침시는 뜨거운 소금물을 부어 검은색을 띤 못난 감이다. 그럼에도 그때의 잊을 수 없는 그 맛, 지금에는 맛 볼 수가 없는 아련한 기억속의 맛이 되어 버렸다. <비우는 것은 곧 채워짐이다> 중에서
임현택 수필가는 사물을 대하는 시감(視感)의 감성이 남다르다. <홍시와 땡감(1)> <홍시와 땡감 (2)> <그리움의 한접시> 작품은 인생의 삶을 사유로 담아 비유시켜 놓았다. 유년시절의 감을 숙성시키던 일들을 생생하게 들려주는가 하면 지난날의 추억에서 정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또한 홍시와 땡감을 의인화한 부모님에 대한 지난날의 회상으로 연로해 가신 아버지를 알게 되면서 감나무에 남은 까치밥 같은 애달픔의 심정을 그려내었다.
<홍시와 땡감(1)> 중에서
유년시절 홍시를 먹고 나면 감 씨를 반으로 쪼개 그 속에 들어있는 숟가락모양이 제대로 나오면 그날 운수가 좋고, 숟가락모양이 일그러지거나 부러지면 운수가 사납다했다. 어머니는 감 씨 속에 숟가락이 제대로 나오면 살림도 잘하고 시집을 잘 갈 것이라고 덕담을 해주셨다. 아마도 조심스럽게 감 씨를 쪼개야 하므로 여자들에게 조신한 몸가짐을 당부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감 씨 속의 숟가락처럼 생긴 모양이 이파리가 되고 손잡이처럼 긴 모양이 줄기가 되는 감 씨의 배아를 알기보다는 어른들의 시집을 잘 간다는 소리가 더 좋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가 되어보니 작은 일에도 덕담으로 아름다운 삶을 영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홍시와 땡감(1)> 중에서
치열한 현실속의 젊은이들의 삶, 땡감처럼 단단하지만 떪은 맛이 나는 미숙한 단계로 아직 풀지 못한 삶의 답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들의 삶의 길목이다. 반면 대문 밖이 저승길이라 하는 어르신들의 삶은 감나무 끝에 애처롭게 매달려있는 홍시와 흡사하다. 삶의 긴 여정의 어르신, 고난의 시간을 딛고 홍시가 되기까지 세상이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아서 홍시처럼 익어가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군자라 해도 노년기는 서러워지는 만년’이라 하는데,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다가 아닌 것처럼 무소유처럼 염화미소를 띤 어르신의 달달한 연시 같은 삶이 노을빛 속에 이어간다.
<홍시와 땡감(1)> 중에서
화자는 근검절약하며 살아가시는 아버지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음을 이렇게 실토하고 있다. '구두는 진정 검은색 구두이건만 얼마나 낡았는지 뒤축이 회색을 띠고 안쪽은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자식이 뭔지 그 싸 빠진 구두 한 켤레를 못 사신고 저리 궁상스럽게 사시나 싶어 속이 뒤집힌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하여도 자식은 부모의 검소하게 살온 삶을 알지를 못한다. 아버지는 구두 한 켤레 값이 없어서 못 사신고 궁상스럽게 사시는게 아니다. 인생이 살아가는 겸양과 검소한 미덕의 마음인 것이다.
중국의 제나라시대 안영이란 재상은 왕을 삼대를 모셨다한다. 안영은 밥상에 반찬을 두가지 이상 올리지 않았고, 부인에겐 비단 옷을 입히지 않았으며 근검절약하게 살아감에 우러름을 받았다고 전한다.
국가의 관리자는 백성의 표상이요,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검소하게 살아가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눈앞을 뿌옇게 만든다며, 감나무의 '그루터기에 묻어나는 그 숨결, 그 향기와 체취는 아버지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고 한다.
감나무 아래는 낡은 의자와 그 옆에는 이름 모를 그루터기가 아버지 쉼터인 냥 의자처럼 턱하니 버티고 있다. 오랜 세월 아버지와 동행한 그루터기는 반들반들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세월을 껴안고 있다. 그렇게 손때 묻은 의자와 그루터기에 앉아있으면 부모님 향기가 있어 참으로 편안하다.
<홍시와 땡감 (2)> 중에서
아버지 구두는 진정 검은색 구두이건만 얼마나 낡았는지 뒤축이 회색을 띠고 안쪽은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자식이 뭔지 그 싸 빠진 구두 한 켤레를 못 사신고 저리 궁상스럽게 사시나 싶어 속이 뒤집힌다. 노인들의 삶이 아무리 대문 밖이 저승길이라 해도 호사는 아닐지라도 무엇을 위해 저리 궁핍하게 사실까, 원망은 눈앞을 뿌옇게 만든다. 헐거워진 낡은 아버지의 구두가 자꾸만 눈에 밟혀 아버지 아픔보다 더 아픔에 눈언저리는 자꾸만 일렁인다.
<홍시와 땡감 (2)> 중에서
땡감은 서리를 맞아야 서서히 홍시가 된다. 부모는 자식을 바라볼때 늘 설익은 땡감으로 생각되어 걱정을 담고 살아간다. 혹여 잘못되지나 않을까. 아무리 겉은 건실해 보여도 불안하게 생각한다. 부모는 자식을 땡감처럼 느낌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어머니는 인생의 성숙함은 부모의 뒷모습을 바라볼줄 알때임을 넌즈시 들려준다.
마른 논에 물들어 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는 어르신들, 아버지 역시 그러했겠지만 구두를 보고 있노라면 서릿바람보다 더 시린 것이 자꾸만 명치끝을 아리게 찔러댄다. 쇠잔한 몸을 웅크리고 모로 누워 어깨를 들썩이며 잠든 아버지 모습은 점점 작아 보였다. 생전 어머니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철이 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늘 땡감 같은 내가 사람의 뒷모습이 제대로 보이기는 하는 걸까.
<홍시와 땡감 (2)> 중에서
까치밥만 더러더러 남아있는 감나무, 비바람에도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그루터기가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와 다시 온기를 느끼며 동행하고 있다. 그루터기에 묻어나는 그 숨결, 그 향기와 체취는 아버지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홍시와 땡감 (2)> 중에서
시선이 머무는 곶감을 보고 있노라면 쭈글쭈글한 곶감의 껍질은 생전 어머니의 손을 닮았다. 탱탱한 생감처럼 윤기가 흐르고 매끈한 고운 피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볼품이 없어지면서 노구의 몸은 어머니란 온기 오롯이 남아있는 기억들, 그렇게 달달한 속내는 어머니의 온기며 향기로 다가오고 하얗게 분칠된 곶감은 날 아픈 과거에 세워 두고 어머니를 그리는 응어리진 마음인 것 같아 아련함이 전한다.
<그리움의 한접시> 중에서
뒤뜰 감나무의 속이 점점 비워지면 어르신의 나이 숫자는 하나씩 더해간다. 세월이 더해가면서 나이테를 두른 나무는 더 강해지면서 밑둥이 굵어지고 있는 반면 감나무는 오래되면 될수록 속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속이 텅텅 빈다. 마치 자식걱정에 우리네 어머니들의 골이 다 빠져 푸석푸석해진 부모의 속과 닮은 것처럼.
<그리움의 한접시> 중에서
옹이는 데칼코마니다. 세월이 만들어낸 독특한 문양, 나무를 켜보면 똑같은 무늬가 반으로 갈라져 있는 것은 마치 부모와 자식이 똑 닮은 것처럼 데칼코마니다. 온고의 세월을 묵묵히 아버지의 길을 가고 있을 가장들, 세월 속에 얼마나 많은 옹이가 박혀 있을까. 굳센 강인함이 옹이의 단단함과 흡사하다. 모두가 쉽게 성공하려 하고 요령을 부리며 판을 치는 세상 속이지만 담담히 항상 그 자리를 지켜주는 가장들. 그 옆에 자식들도 데칼코마니처럼 닮아간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는 자연 앞에 굴레와 속박이 아닌 평온과 안락함으로 서로 기다려 주는 건 기다림의 여백이었다. 옹이처럼.
< 옹이(2)> 중에서
임현택 수필가는 부모님의 애정을 <시경>에 있는 한시의 해설인‘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아 애닯다 부모님이시어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애쓰고 수고하셨어라. 그 은혜를 갚고자 하나 넓은 하늘처럼 끝이 없어라.’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자식의 불효된 무심한 심경 앞에 울림으로 다가가게 하고 있다. <오가리(2)><흙속에 녹아내리는 삶> <비우는 것은 곧 채워짐이다> <홍시와 땡감(1)> <홍시와 땡감 (2)><그리움의 한접시>의 문장은 부모님을 그립게 한다.
<옹이(2)>는 생활에서 묻어나는 부모와 자식간의 유전적인 생각을 나무의 옹이와 무늬에 연계하여 독자에게 은연중에 풍수지탄(風樹之嘆)의 안타까운 심정을 젖게 하며, 종속간(種屬間)의 의미도 들려준다.
4. 사랑과 행복의 불사조
우주의 모든 만물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부부란 남녀가 짝을 이룸으로 일심동체라고 사랑으로 엮인 한 몸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워도 돌아서면 남이 된다. 부부는 사랑과 헌신적인 사랑이 따라야 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조류인 기러기와 문조는 함께 살던 짝을 잃게 되면 정절을 지키며 홀로 산단다. 화자는 새를 통한 비유로 인간의 부부에 대한 지조를 깊이 깨닫게 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기쁨도 슬픔도 언행으로 표현한다. 혹, 짝을 잃으면 외로움 때문에 혹은 그리움 때문에 대부분 빈자리를 채우려 노력한다. 그러나 말 못하는 기러기는 짝을 잃어 괴롭고 외로워도 그리고 힘겨워도 생애에 위기를 온몸으로 극복하면서 홀로 지낸다고 한다.
<반쪽 사랑>중에서
선비 새 문조는 같이 살던 짝이 죽으면 나머지 새도 시름시름 앓다가 곧 따라 죽는다 한다하여 사람들은 혼자서는 못 사는 새라고도 하며 정절을 지키는 새라고도 한다. 정절(貞節)이란 그야 말로 곧은 신념이다. 같은 맥락으로 절대 굽히거나 바꾸지 않는 강직한 태도를 가진 사람을 두고 대나무 같은 사람이라 하지 않던가.
<피안의 사랑> 중에서
<반쪽 사랑><피안의 사랑>은 글에서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를 생각나게 한다.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가 되게 해 주고(上天願作比翼鳥), 땅에선 두 뿌리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在地願爲連理枝) 고 하였듯이 부부는 누구나 이런 사랑을 원함에 불사조 같은 사랑이 되기를 교훈한다 .
화자는 현사회의 부부간의 사랑을 지킬줄도 모르는 정절을 꼬집기라도 하듯이 기러기와 문조로 은유화한 문장으로 사랑의 의미를 형상화하여 놓았다. 대쪽같은 선비정신 외로워도 참고견디는 짝잃은 기러기, 금조 같은 정절의 문화를 다시금 돌이키게 하여주고 있다.
끝을 맺으며
임현택 수필가는 문장의 표현과 서정적인 묘사가 형승(形勝)하다. 남다른 문필력으로 정감을 주며 깊은 사유를 담아내고 있음이 돋보인다.
특히 사물을 바라보며 이끌어가는 여성다운 인식의 형상화가 감칠맛을 내고 있다.
작품마다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글속에 빠져 들게 하고 잊혀져가는 추억을 섬세하게 살려내어 환유의 문장들로 감동을 준다.
어딘가 모르게 아쉬운 듯 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주제를 엮어가는 거치른 매듭이 또한 새롭다.
첫댓글 교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교수님 서평으로 인하여 더 빛나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기다려 지는 책 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거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에 교수님 서평으로 더욱 빛나는 책이 될것 같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