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다시 사해표국과
“사해표국(四海鏢局)?”
깡마른 중년인의 이마로 주름이 잡혔다. 아주 차갑고 냉혹한 인상을 지닌 이 인물은 몸에 검은 색의 헐렁한 장포를 걸치고 있다.
“예! 사천성 성도에 총국을 두고 있는 중원오대표국중 하나인데 그자들의 여러 표행중 하나가 목하 북상중입니다. 열흘전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의 경계를 넘어선 육백칠십칠대의 마차중 현재까지 확인하지 못한 백팔십오대의 마차 가운데 열두 대가 사해표국의 표행에 속해있습니다.”
깡마른 흑포중년인 앞에 한 명의 복면인이 한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하고 있다. 복면 사이로 번득이는 눈빛에 일체의 감정이 깃들어있지 않아 이자가 고도의 수련을 걸친 자객임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높직한 고개 마루다. 이곳은 사방이 확 트여있어 멀리까지 탐색이 가능하다. 고개 마루의 좌우로는 아열대성의 수목들이 가득 들어찬 밀림지대가 펼쳐져 있다. 그 밀림 사이로 난 관도가 마치 은색의 긴 뱀처럼 꾸불꾸불 이어지고 있다.
“표국의 표행이라면 녹림도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아주 요란하게 움직이는 걸로 알고 있는데.... 놈들이 그 소중한 물건을 표행에 맡겼겠느냐?”
흑포중년인의 이마가 좁혀졌다.
“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복면인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남으로부터 충고를 받으면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특히 자신의 실력에 대해 과신하고 있는 상관에게 충고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하는 만큼 위험한 일이다.
다행히 흑포중년인은 그렇게 속이 좁은 인간을 아니다.
“일리가 있다. 차라리 모든 사람의 눈에 띠는 곳에 감추는 것이 가장 좋은 위장수단이기도 하지!”
흑포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는 지금 어디 있느냐?”
“제구신마(第九神魔)께서는 해안쪽을 따라 마차들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워낙 빠르게 진행하시는 바람에 저희 풍마당(風魔堂) 형제들이 수행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복면인의 말에 흑포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홉 형제자매들 중 막내만큼 매사에 철두철미한 사람도 없지. 해안쪽은 막내가 맡았으니 믿어도 될 것이고 문제는 내륙쪽인데....!”
말을 하던 흑포중년인의 시선이 갑자기 좌측의 밀림으로 돌아갔다. 무언가를 느낀 복면인의 고개도 함께 홱 돌아갔다.
슈각!
그 직후 흑포중년인의 오른손이 휘저어졌고 그러자 그의 소매 속으로부터 한줄기 시뻘건 섬광이 뻗어나와 전광석화처럼 밀림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우지끈! 콰드드드!
요란한 폭음과 함께 좌측 밀림의 거목들이 일제히 넘어졌다. 예리한 무언가에 의해 나무들이 똑같은 높이에서 동강이 나 버린 것이다.
슈욱!
단번에 삼십장 밖까지의 나무들을 짚단처럼 넘어뜨린 그 붉은 섬광은 다시 흑포중년인의 소매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날아가고 돌아오는 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과연 밀림의 나무들을 동강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쉬익!
그와함께 무릎을 꿇고 있던 복면인의 몸이 흐릿한 그림자로 변해서 숲속으로 덮쳐갔다. 복면인의 경신술은 아주 빨라 순간적으로 장내에서 사라져버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반면 흑포중년인은 천천히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런 그의 이마가 무엇때문인지 찌푸려져 있다.
관도에서 십여장 떨어진 곳에 복면인이 허리를 숙인 채 무언가를 살피고 있다.
흑포중년인이 다가가자 복면인은 말없이 물러섰다. 복면인이 보고 있던 것은 찢어진 옷자락이었다. 검은 색의 장포 자락이 쓰러진 나무가지에 걸려있다.
“재빠른 놈이로군!”
흑포중년인의 가느다란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는 복면인과 얘기도중 누군가 숲 속에서 접근하는 것을 느꼈고 즉시 공세를 발동했었다. 그의 공격은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기쾌무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속에서 접근하던 자를 놓쳤다. 그자는 옷자락만 남기고 귀신같이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총단에 침입했던 자들중 하나가 아닐런지요?”
복면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간 일이 급해졌다. 놈들이 본교가 장악하고 있는 광동성을 빠져나간다면 그야말로 고기를 바다로 돌려보내는 격! 다른 삼십육천강(三十六天罡)에게도 급전을 보내 최대한 빨리 나머지 마차들을 확인하게 하라.”
흑포중년인이 다시 숲 밖으로 걸어나가며 말했다.
“존명!”
스슷!
복면인은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유령같이 장내에서 사라졌다.
“....!”
숲을 나선 흑포중년인도 다시 한번 자신이 무너뜨린 밀림의 폐허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내려갔다. 천천히 걷는 것 같았지만 그의 모습은 삽시에 장내에서 사라져갔다.
헌데 흑포중년인이 사라진 직후였다.
“으음! 정말 무서운 수법이로군!”
우두둑!
침중한 신음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아람드리 거목이 들썩거렸다. 이어 거목 아래에서 한 명의 청년이 불쑥 솟아올랐다. 육 척이 넘는 키에 건장한 체격을 지닌 청년인데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있다.
청년이 일어선 곳에는 아주 깊은 구덩이가 수직으로 파여있다. 청년은 흑포중년인의 공격을 받는 순간 천근추(千斤錘)의 신법으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숨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일장 가까이 지하로 숨어들 수 있는 이런 수법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청년의 머리는 출가한 중처럼 반질반질하다. 하지만 몸에 걸치고 있는 옷으로 미루어 보건데 불제자는 아니다.
“사해표국이라.... 그리운 이름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듣게 되었군!”
청년은 얼굴에 묻은 흙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중얼거렸다. 얼굴에 묻었던 흙이 대충 닦이며 청년의 본래 얼굴이 드러났다. 잘 생겼다기보다는 호방하고 진중한 얼굴이다.
바로 포대붕이었다.
불회마역으로 가서 대자비수미천강의 후반부가 적힌 금판과 모니천강주를 대비신니에게 전해준 포대붕은 발길을 서둘러 중원으로 북상했다. 지존철패를 빼앗아간 마교지존을 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자를 추격해간 독황대모 하설란 일행의 안전이 더 걱정되어서였다.
묘강에서 해안을 따라 북상하면 광동성으로 들어서게 된다. 헌데 광동성에 들어선 지 얼마 안되어 포대붕은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단의 고수들이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전 마침내 그자들의 정체를 확인하게 되었다.
“구대신마 중에서 두명이나 출동했다면 보통일은 아닌데...!”
포대붕은 밀림을 나서며 흑포중년인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기이한 수법으로 밀림의 일각을 박살낸 흑포중년인은 마교 구대신마중 한 명이었다. 그자의 수법은 아주 빠르고도 날카로워 하마터면 피하지 못할 뻔했다. 물론 성마금갑공이 한 단계 더 높아져서 치명상이야 입지 않겠지만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구대신마중 위협적이지 않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무슨 일로 마교가 다 떨치고 일어났는지 궁금하지만 지체할 여유가 없다. 우선 대모님의 종적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포대붕은 중얼거리며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음을 옮겼다. 역시 느린 것 같았지만 포대붕의 모습도 삽시에 장내에서 사라졌다.
***
저녁 무렵이다.
“물렀거라! 사해표국의 표행이시다!”
고즈녁한 저녁의 정적을 깨는 요란한 외침 소리가 있다.
광동성에서 호남성(湖南省)으로 통하는 관도를 일단의 표행이 움직이고 있다. 마차가 열 두 대, 말이 삼십여필, 사람이 칠십여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표행이다.
표차에는 넘실대는 바다와 그 위로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이 그려진 깃발이 꽂혀있다. 바로 사천성 성도에 자리한 사해표국의 표기다.
중원오대표국중 하나인 사해표국의 표행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다. 그 때문에 사해표국을 상징하는 사해욱일기(四海旭日旗)는 중원뿐만 아니라 멀리 이역변방에서도 종종 발견되곤 한다.
“물렀거라! 쉬이! 물렀거라!”
표행의 맨 앞쪽에는 땅달막한 체구의 장한이 걸어가며 연신 고함을 지르고 있다. 그는 표행의 앞길을 선도하는 쟁자수(錚子手)다. 쟁자수의 역할은 싸우는 것이 아니다. 길가는 행인들과 도처의 후미진 곳에 진을 치고 사업을 벌이는 산대왕들에게 큰 목소리로 경고를 하는 것이 쟁자수의 임무다. 당연히 쟁자수가 되려면 목소리가 남보다 월등히 커야만 한다.
“사해표국의 표행이다. 물렀거라!”
사해표국의 깃발을 든 신참 표사를 대동한 채 일행보다 멀찍이 앞쪽을 걸어가며 쟁자수는 기세 좋게 외쳤다. 비록 쟁자수에 불과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중원오대표국중 하나인 사해표국 소속이라는 자부심이 가득 차있다.
그때 관도가 한 구비 돌면서 두 개의 길이 교차하는 사거리가 나타났다.
“쉬이! 물렀거라! 사해표국의....!”
목청높여 외치던 쟁자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순간 나른하게 이동하던 표행에 아연 긴장이 감돌았다.
“무슨 일이냐 노삼?”
표사들의 손이 반사적으로 몸에 지닌 무기로 이동하고 몇 명의 말 탄 표사들이 앞쪽으로 달려왔다.
쟁자수는 말없이 앞쪽을 가리켰다.
두 개의 관도가 만나는 사거리 중앙에 한 명의 청년이 우뚝 서있는 것이 보인다. 아주 건장한 체격에 죽립을 쓴 그 청년은 한 자루의 칼과 기괴한 무기를 옆구리에 차고 있다. 길이가 한 자가 넘는 커다란 도끼날을 쇠사슬에 끼워 차고 있는 것이다.
무기를 지닌 것으로 보아 무림인임에 분명하다. 또한 청년이 은연중에 풍기는 기세가 범상하지를 않다. 청년을 자세히 바라보자니 마치 알몸으로 한 마리 호랑이를 마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표사들을 오싹 떨게 만든다.
“어느 방면의 친구이신가? 우리는 사해표국의 표사들일세!”
표사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는 상대방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은근히 사해표국의 이름을 들먹였다. 표사들 개개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흑도와 녹림도에까지 깊고 넓게 교유를 터놓고 있는 사해신창(四海神槍) 노영추(盧影追)의 노련한 처세 덕분에 사해표국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대개는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청년은 말이 없다. 그저 죽립 아래에서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표행을 찬찬히 살펴볼 뿐이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한 눈빛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찾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게 누군가? 붕(鵬)조카가 아닌가?”
뒤쪽을 경계하던 표사들 중에서 한 명의 노인이 앞으로 달려나오며 반갑게 외쳤다. 육십줄에 접어든 평범하게 생긴 노인이다. 그는 바로 사해표국의 여러 표두들 중에서도 가장 고참인 십면수(十面手) 장대일이다.
청년은 장표두가 자신을 조카라고 부르자 움찔했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적당히 호응했다.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숙부님?”
청년은 쓰고 있던 죽립을 벗으며 장표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는 포대붕이다. 독황대모 하설란의 종적을 찾기 위해 서둘러 북상하던 그는 우연찮게 천천히 움직이던 사해표국 일행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길을 가다가 사해표국의 표행이라는 소리를 듣고 혹시나 했는데 이런 곳에서 숙부님을 뵙게 되었군요!”
포대붕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장표두에게 인사를 했다. 장표두는 천애고독한 몸인 그에게는 사부나 다름없는 소중한 사람이다. 비록 사귄 기간은 한달 남짓밖에 안되지만 장표두로부터 강호에서 살아가는 데 요긴한 여러 가지를 배웠었다.
“허허! 이런 곳에서 조카를 만나게 되다니... 이렇게 반가울 데가....!”
장표두는 포대붕의 손을 와락 잡으며 기뻐했다. 포대붕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과의 재회를 기뻐한다는 것을 느끼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고무친인 자신을 이렇게 반갑게 맞아줄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갑자기 나타나 길을 막아선 호랑이같은 작자가 장표두의 친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표행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일거에 사라졌다.
“자! 자! 이리 오게! 이번 표행에 함께 나선 식구들을 소개해주겠네!”
장표두는 포대붕의 손을 이끌고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표사들 중에는 포대붕이 알고 있는 얼굴들도 여럿 끼어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포대붕을 알아보지 못했다. 무리도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일년 반전, 사해표국에 표사로 취직했을 때 포대붕은 깡마른 몰골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건장해진데다가 수염은 물론이고 머리에도 털 한올 나있지 않은 대머리가 되어있다. 그의 모습이 너무 크게 변해 알아볼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오히려 한 눈에 포대붕을 알아본 장표두가 특별한 경우다.
장표두는 포대붕을 자신의 죽은 형의 아들인 장일붕(張一鵬)이며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어느 기인의 제자라고 소개했다. 표사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장표두의 말을 믿고 포대붕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 조카도 중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하네. 우리 표행에 동행시켰으면 하는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포대붕을 소개시킨 후 장표두가 동료 표사들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장노대의 조카라면 믿을만 하지요!”
“허허! 잘 부탁하네! 세외기인의 제자시라니 혹시 흉악한 놈들을 만나더라도 안심해도 되겠구먼!”
표사들은 모두 포대붕의 합류를 환영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누구 마음대로 표행에 외인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죠?”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표사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포대붕이 돌아보니 표행의 뒤쪽에서 한 명의 청년이 말을 몰아 표사들이 몰려있는 앞쪽으로 다가왔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에 얼굴이 관옥같이 해맑고 준수한 청년이다. 천하제일미남이라고 알려졌던 옥면태세 신도풍을 무색케 하는 잘생긴 얼굴이다.
포대붕은 순간적으로 이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는 금방 떠올릴 수가 없었다.
“소국주(少局主)! 이 늙은 것이 오랜만에 조카를 만난 것이니 편의를 봐주시구려!”
장표두가 청년에게 굽신거리며 부탁했다.
소국주라는 말을 들은 포대붕은 그제서야 이 준수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청년은 사내가 아니다. 그는, 아니 그녀는 바로 사해신창 노영추의 막내딸인 노경주(盧鏡珠)였다. 예쁘지만 제멋대로이고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아가씨가 남장(男裝)을 하고 표행에 동참한 것이다.
포대붕이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자 노경주는 발끈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아무리 표국주의 딸이고 명목상 이번 표행의 책임자라고는 하나 장표두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다. 실질적으로 이번 표행을 이끌고 있는 것은 여러 표두들 중에서도 최고참인 장표두이기 때문이다.
“장표두의 부탁이니 들어주도록 하죠. 하지만 만에 하나 불상사가 생긴다면 장표두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해요!”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쌀쌀맞은 노경주의 말에 장표두는 연신 굽신거렸다.
“흥!”
한 번 더 노지심같이 흉악하게 생긴 대머리 사내놈을 쳐다본 노경주는 코웃음을 날리고는 다시 표행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역시 곱상하게 생긴 두 명의 청년이 말을 타고 있다. 포대붕은 한눈에 그 곱상한 청년들도 사실은 남장한 여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노경주의 친구거나 시녀들일 것이다.
“자넬 조카라고 둘러댄 이유를 이제 알겠지?”
장표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달리 까탈스러운 성격인데다가 신경이 곤두서있는 노경주가 자기네 표국에 취직했다가 무단히 이탈한 포대붕을 용납할 리가 없다.
“근심이 많으시겠습니다!”
포대붕은 장표두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웃었다.
“말도 말게!”
장표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실연(失戀)을 한 막내아가씨가 기분 전환한답시고 표행에 따라나섰지 뭔가? 지난 한달동안 저 철부지에게 시달린 생각을 하면 진저리가 쳐지네!”
장표두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장표두의 얼굴이 많이 안되어 보인다. 아마도 철없고 까탈스러운 국주의 막내딸 때문에 속이 까맣게 타는 일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표행을 무슨 소풍으로 생각하는지 원... 친구들을 끌어들인 것까지는 좋은데 산대왕들과의 협상에도 끼어들어 판을 깰 뻔한 게 부지기수라네!”
장표두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예쁘장한 노경주의 동행들은 포대붕의 예상대로 남장을 한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아마도 성도 내에서 제법 한다는 집안의 아가씨들이 분명하다. 규방에만 갇혀지내던 그녀들에게는 이번 표행의 경험이 두고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실연이라니요? 아가씨가 사귀는 남자가 있었습니까?”
포대붕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옥면태세 신도풍이란 놈 있지 않은가? 그 기생호라비같은 놈에게 마음을 빼앗겨 상사병에 걸린 처자가 한둘이 아니고 아가씨도 그 중 하나지!”
장표두는 쓴웃음을 지었다.
옥면태세 신도풍이 사천당문에 죽을죄를 짓고 축출되었음은 강호무림이 다 아는 사실이다. 사천당문은 신도풍이 당씨일족의 제일공적임을 선언했고 만일 그를 비호하는 자나 세력이 있을 시는 역시 당문의 적이 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그 바람에 옥면태세 신도풍은 드넓은 강호의 어디에도 발을 붙일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그자는 본가인 모산 신장궁으로부터도 출적(出籍)을 당하고 말았다.
신도풍의 몰락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신도풍이 장인인 천수나한 당천종을 암살한 범인이라고 알려지자 누구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사해신창 노영추의 장중주(掌中珠)인 노경주가 신도풍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은 일찍부터 성도 일대에 파다했었다. 실제로 노경주가 신도풍과 어디까지 갔는지는 모르지만 신도풍의 몰락으로 그녀가 받은 충격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한동안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식음을 전폐했던 그녀는 어느날 느닷없이 아버지를 졸라 표행 길에 나섰다. 아미파에 제자로 들어가 몇년동안 검법을 배우기도 했던 그녀는 본격적으로 무림인이 되어 실연의 상처를 잊어볼 생각을 한 것이다.
사해신창의 입장에서는 딸이 식음을 전폐하는 것보다 무언가에 의욕을 보이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해서 두 말없이 그녀에게 표행을 맡겼다.
그래도 근심이 되는 바가 있어 사해신창은 당시 표국 내에 머물고 있던 표두들을 모조리 딸에게 딸려보냈다. 평소라면 표두 한 명이 대여섯명의 표사들을 거느리고 맡아도 될 소소한 표행에 표두 일곱명과 표사 삼십명이 동원된 것이다. 마부와 일꾼들까지 합치면 육십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표행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표행이다. 하지만 귀여운 막내딸의 기분전환을 위해서 사해신창은 이번의 출혈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별 것 아닌 표물을 운송해갔던 광서성 부남(扶南)에서 큼직한 건수를 건졌다는 점이다. 부남의 호상(豪商) 부고신(扶古臣)이란 인물이 마차 열 대 분의 특산물과 귀중품을 항주(杭洲)까지 운송해달라고 부탁해온 것이다. 최종 목적지는 북경(北京)이지만 항주까지만 육로로 보내면 그곳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대운하를 이용하여 옮길 것이라고 했다.
부고신의 표물만 무사히 옮기면 철부지 아가씨의 기분전환에 들어간 비용을 뽑고도 남는다. 해서 장표두는 원래 부남에서 맡기로 한 표물은 다른 군소표국에 넘겨주고 부고신의 표물을 옮기게 되었다.
“갑자기 이런 큰 표물을 맡게 되는 일이 자주 있습니까?”
포대붕은 열두 대의 마차들을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마교가 총출동해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 때문이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흔한 일도 아니지. 보표(保鏢)를 원하는 의뢰라는 게 갑자기 생기는 경우는 드물거든.”
장표두의 주름진 얼굴에도 언듯 긴장의 표정이 지나갔다. 그의 경험상 정체가 모호한 표물에는 항시 예기치 않은 위험이 뒤따르곤 했다.
광서성 부남에 부고신이라는 호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부고신이 정말 화주(貨主)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의뢰인들이 너무 서둘렀고 그들이 제시한 어머어마한 보표 대가에 흥분한 노경주가 덜컥 계약을 해버린 때문이다. 장표두 등은 도리 없이 표물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마차를 모는 마부들은 모두 부고신 측에서 딸려보낸 사람들이네. 뿐만 아니라 두 명의 까탈스러운 감독까지 따라왔지!”
장표두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열두 대의 마차 중 열대는 부고신의 표물이고 한 대에는 사해표국 사람들의 일용품이 실려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대는 사람이 타는 마차다. 그 마차에 부고신을 대신해서 표물과 동행한 감독 두 명이 타고 있다.
포대붕은 지나가는 눈길로 마차를 모는 마부들을 살펴보았다. 사해표국 소속의 마차 한 대를 제외한 열 한 대의 마차를 모는 마부들도 겉보기에는 모두 평범하다. 특별히 체격이 건장한 것도 아니고 눈빛이 형형하거나 태양혈이 불끈 솟아있지도 않다. 어느 모로 보나 그저 마부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포대붕은 그들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딱히 무어라고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일정 수준에 이른 고수만이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다.
포대붕이 지나가는 눈길로 마차들을 쓸어볼 때 맨 뒤에서 따라오던 인승(人乘)용의 마차 휘장이 잠깐 열렸다가 닫혔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포대붕은 그 마차 안에 두 명의 노인이 타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깡마른 체격의 노파와 땅딸막한 몸에 살이 투실투실하게 찐 노인이다.
두 노인과 포대붕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 순간 포대붕은 동공이 파열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충격을 받았다. 어둑한 마차 안에서 두 노인의 시선이 마치 그믐날 밤에 피워놓은 모닥불처럼 강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휘장은 곧 닫혔고 포대붕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챌까봐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이상하다. 어쩌면 이 표행에 마교의 무리들이 노리는 물건이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포대붕은 자신도 모르게 검미를 찌푸렸다.
그런 포대붕의 표정을 슬쩍 살핀 장표두가 나직히 말했다.
“노부도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네!”
과연 표사 일로 잔뼈가 굵은 사람답게 장표두 역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포대붕의 우려와는 달리 그 후 사흘동안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 군데인가 녹림 산채 근처를 지났지만 노련한 장표두의 대응 덕분에 매끄럽게 일이 처리되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표행의 생리에 대해 알게 된 노경주도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포대붕은 그동안 표사들과 친해졌고 노경주의 친구인 두 남장여인들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황보민(皇甫珉)!
그녀는 성도에 본점을 두고 있는 이도전장(二渡錢場)의 천금이다. 사천성 뿐만 아니라 중원 각지에 백여개의 지점을 두고 있는 이도전장은 천하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전장이다.
황보민은 그 이도전장의 주인인 재신(財神) 황보충(皇甫忠)의 셋째 딸이다. 그리 빼어난 미녀도 아니고 비만하게 보일 정도로 살이 투실투실 쪄서 날씬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착하고 수더분한 인상을 준다.
-주금하(朱金霞)!
사천성 성주 주대환(朱大環)의 장녀인 그녀는 노경주에 못지 않은 미모를 지녔다. 하지만 미모뿐만 아니라 쌀쌀맞고 도도한 것도 노경주에 못지 않아 그리 호감이 가는 여자는 아니다.
관부에 속한 고수들에게 몇 가지 무공을 익힌 주금하는 자신의 실력이 아주 대단한 줄 알고 있다. 사실 그녀의 무공이란 것은 포대붕은 고사하고 표사들조차도 실소를 금하지 못하는 치졸한 수준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사천성 성주의 딸에게 미움을 사봐야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세 여인들 중에서 그나마 표사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황보민이다. 그렇게 붙임성이 있는 성격은 아니지만 예의 바르고 착해서 설령 상대가 일꾼이라고 해도 꼬박 꼬박 존대를 한다.
포대붕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그녀가 처음이다. 노경주와 주금하가 대머리인 데다가 무뚝뚝하게 생긴 포대붕에게 눈꼽만큼도 호감을 보이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황보민은 기회 날 때마다 포대붕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고 포대붕도 그런 그녀가 그리 싫지 않아 말상대가 되어주었다.
대화를 거듭함에 따라 황보민은 포대붕에게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어갔다. 무뚝뚝한 듯이 보이지만 포대붕의 내면에 부드러운 심성과 타인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가득한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남장을 한 세 여자들 외에 포대붕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열대의 마차에 실린 표물과 표행의 감독을 위해 따라온 두 노인의 존재였다. 두 노인은 하루종일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식사도 마차로 가져오게 해서 먹었다. 그들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은 밤이 되어 객잔에 도착했을 때뿐이다.
표물과 두 노인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평범한 표행이었다.
지루할 수도 있으나 포대붕은 자신이 어느덧 이런 표행을 좋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거칠지만 순박한 표사들과 마음을 터놓고 어울리는 것이 좋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 풍광과 가보지 못한 낮선 곳에 대한 기대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두 달 가까이 운남과 묘강에서 겪었던 쉴 틈 없이 계속된 격변으로부터 벗어나 오랜만에 맛보는 평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포대붕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평온함이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폭풍이 몰아닥치기 직전의 고요에 불과하다.
그리고 포대붕의 그같은 예감은 생각보다 더 빨리 사실로 다가왔다.
다시 한번 밤이 찾아왔다.
이곳은 광동성과 호남성의 경계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이제 하루만 더 가면 호남성에 접어들게 된다.
해질 무렵에 마을에 들어선 사해표국 일행은 미리 사람을 보내 예약을 해놓은 객잔에 짐을 풀었다.
객잔에 도착했다고 해서 금방 쉴 수 있는 게 아니다. 표물을 실은 마차들을 창고에 집어넣어야하고 지친 말들을 씻기고 먹여야 한다. 그런 후에야 사람들도 씻고 먹을 수 있다.
그럭저럭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대개 자정이 다 되어 있곤 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잠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교대로 일어나 말과 표물들을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포대붕도 다른 표사들과 똑같이 일을 했다. 말과 마차들을 보살피고 밤에는 불침번도 섰다. 일행 중에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세 남장 여걸(?)들과 두 노인이다. 여자들은 객잔에 닿자 마자 씻고 치장하느라 바빴고 두 노인도 한 번 방에 들어가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
포대붕은 번쩍 눈을 떴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방안이 칠흑같이 어둡다.
눈을 뜬 포대붕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의 침대에서는 세 명의 젊은 표사들이 곤하게 잠들어 있다.
침대에서 소리 없이 내려서는 포대붕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횃불처럼 번뜩였다. 무언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보통 사람은 들을 수 없는 그 소리가 포대붕을 잠에서 깨운 것이다.
포대붕은 조심조심 창문을 열었다. 달은 없지만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빛 덕분에 방밖이 방 안쪽 보다 더 밝다.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띄운 포대붕은 열려진 창문 밖으로 날아나갔다. 객잔은 어둠과 적막에 쌓여있다. 가끔 잠결에 투레질하는 말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스슷!
포대붕은 곧장 창고로 날아갔다. 변고가 생겼다면 그곳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포대붕은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고 앞에는 세 명의 장한이 쓰러져 있다. 두 명은 사해표국의 표사고 한 명은 마차를 몰던 마부다. 번을 서던 그들이 누군가에게 암산을 당했다. 포대붕이 잠결에 들었던 것은 그들이 바닥에 쓰러지면서 낸 소리였다.
다행히 세 사람 모두 죽지는 않았다. 누군가 나뭇잎을 날려 세 사람의 혼혈을 짚었던 것이다. 두 명의 표사야 그렇다고 쳐도 마부는 태양혈을 감출 정도의 일류고수다. 그런 마부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적엽상인(摘葉傷人)의 수법을 쓴 것은 예사 솜씨가 아니다.
(구대신마가 직접 온 것일까?)
포대붕은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창고를 바라보았다. 그의 예민한 청력은 창고 안에서 무언가를 뒤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감지한 상태였다.
스읏!
포대붕은 소리 없이 몸을 날려 창고의 지붕으로 날아올라갔다. 창고에 마차를 넣을 때 통풍구가 있었음을 보아두었었다.
비좁은 통풍구였지만 들어가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통풍구를 통해 창고 안으로 들어간 포대붕은 대들보 위에 은신한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넓직한 창고 안에 열 두 대의 마차가 빼곡히 들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마차들 사이로 하나의 그림자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휘감은 야행인이다. 만일 그자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면 어둠과 동화되어 쉽사리 찾아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자로군!)
포대붕의 눈이 번득였다. 그는 저 야행인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바로 일전 고개 마루에서 구대신마중 한 명에게 보고를 하던 그 복면인이다. 그자의 신분이 마교의 풍마당 당주였던 것으로 포대붕은 기억해내었다.
포대붕은 잠시 야행인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열두 대의 마차중 절반 넘게 이미 뒤져진 상태였다. 마차에 실려있던 표물들의 포장이 뜯긴 사이로 각가지 진귀한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북경으로 보내는 특산품과 귀중품이라는 의뢰인들의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다.
포대붕이 보고 있는 동안에 야행인은 또 한 대의 마차를 뒤졌다. 하지만 찾고 있는 물건을 찾지 못한 듯 실망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나왔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야행인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놓인 마차에 닿았다. 바로 감독으로 따라나선 두 노인이 타고 다니는 인승용의 마차다.
야행인은 그 마차로 다가가 휘장을 젖혔다.
하지만 마차 안은 텅 비어있다. 그저 두 장의 방석만이 덩그라니 놓여있을 뿐이다.
야행인은 고개를 저으며 마차의 휘장을 다시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직후 야행인의 눈이 갑자기 번뜩 빛을 발했다. 이어 그는 마차의 바닥에 깔린 두터운 널을 움켜쥐었다.
우둑!
야행인이 힘을 주자 마차 바닥의 널이 그대로 뜯겨 나갔다. 그리고 뜯겨 나간 널 안쪽에서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제법 넓고 깊은 그 공간에는 검은 색의 목관(木棺)이 하나 들어있다.
야행인은 회심의 눈빛을 지으며 목관에 손바닥을 붙였다.
목관은 마치 자석에 달라붙은 쇠붙이처럼 야행인의 손바닥에 달라붙었으며 이어 그가 이끄는 대로 떠올라 마차 밖으로 나왔다.
조심스럽게 목관을 마차 밖의 바닥에 내려놓은 야행인은 목관의 뚜껑을 열었다.
덜컹!
낮으막한 소음과 함께 목관의 뚜껑이 열렸다.
포대붕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대들보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목관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음순간 포대붕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목관 속에 든 물건은 너무도 뜻밖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자!
한 명의 여자가 목관 속에 반듯이 누워있다.
나이는 마흔 살 정도, 아주 아름다우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기품과 위엄을 지닌 여인이다. 이 여인의 몸에는 속이 훤히 내비치는 얇은 나삼만이 걸쳐져 있다. 그 바람에 너무도 완숙하고 관능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적당한 크기인 젖가슴은 어린 소녀처럼 단단한 탄력을 지니고 있고 아랫배와 허리에는 군살이 전혀 붙어있지 않다.
다리는 조각인 듯 미끈하고 허벅지에는 탄력이 넘친다. 특이한 점은 허벅지 사이의 구릉 지대에 방초가 전혀 나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여인의 몸에는 털이 전혀 없다. 머리카락도 없고 눈썹도 없다.
그 바람에 이 여인이 진짜 살아있는 여자인지 아니면 대리석이나 백옥으로 정교하게 각은 조각품인지 잘 구분이 가지를 않는다.
인간같기도 하고 조각품 같기도 한 이 무모(無毛)의 여인은 한 자루 검은 빛이 도는 피리를 두 손으로 꼬옥 쥐어 가슴에 잇댄 채 고요히 눈을 감고 있다.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하여 눈을 떼기 힘든 자태다.
포대붕이 놀라 보고 있는 사이에 야행인은 여인의 알몸을 목관 속에서 끌어냈다. 목관 속에서 일어서는 여인은 나무토막같이 뻣뻣한 경직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한 층 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고 조각품같이 보인다.
야행인은 무모의 여인의 등과 허벅지를 두 팔로 바쳐들고 창고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야행인은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런 그자의 눈에 건장한 대머리 청년이 자신의 등뒤에 유령같이 서있는 것이 들어왔다. 물론 그 대머리 청년은 포대붕이다.
포대붕을 발견한 야행인은 그야말로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그자가 놀란 것은 찰라의 순간에 불과했다.
스파앗!
야행인은 여인을 안은 채 벼락같이 뒤로 날아갔다. 창고의 입구가 있는 쪽이다.
하지만 야행인은 자신이 오늘 지금것 상대해본 적이 없는 강적을 만났음을 실감해야만 했다. 벼락같이 물러섰지만 포대붕과의 거리는 전혀 넓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포대붕은 야행인에 못지 않은 속도로 몸을 움직여 그자를 따라붙었다. 그러면서 양손을 확 내밀어 야행인을 낚아채 갔는데 야행인이 눈에는 순간적으로 포대붕의 손가락이 길다란 촉수처럼 변해 자신을 휘감아 오는 듯이 보였다. 바로 획룡팔해의 제일식인 십지나룡(十指拿龍)이다.
길게 늘어난 포대붕의 손가락 열 개가 야행인이 열 군데 중혈을 동시에 노리며 뻗어나갔다. 순간 야행인은 온몸에 마비 증상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공격이 몸에 닿기도 전에 마비증상이 일어나는 이런 기괴한 수법은 온갖 요상한 마공이 판을 치는 마교 내에도 없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도 없다.
휘익!
야행인은 들고 있던 무모의 여인을 다급히 포대붕에게 집어던졌다. 자신보다 더 강한 것이 분명한 적을 상대하면서 그녀를 안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무모의 여인이 날아들자 포대붕은 어쩔 수 없이 야행인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그녀를 받아 안아야만 했다. 여인의 몸은 매끄럽지만 차갑고 단단하다. 포대붕은 순간적으로 이 무모의 여인이 정말 조각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대붕이 여인을 받아 안기 위해 공격을 거둔 순간이다.
쉬익!
야행인이 득달같이 포대붕에게 달려들었다. 그자가 달려드는 속도는 무모의 여인이 던져진 속도와 똑같아서 포대붕으로서도 미처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야행인의 손에는 어느틈엔지 날카로운 비수가 들려있었고 그 비수는 그대로 포대붕의 아랫배를 찔러버렸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치명적인 일격이다.
야행인의 눈가로 득의의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자의 득의는 너무도 빨리 사라져야만 했다.
카아아앙!
쇳소리가 나며 비수가 부러져 버렸다. 금석을 흙 베듯 하는 날카로운 비수건만 포대붕의 아랫배를 찌르는 순간 마치 유리로 된칼로 철벽을 찌른 듯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럴 수가....!)
찢어져라 두 눈을 부릅뜨면서 야행인은 다급히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암격이 실패한 이상 위험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야행인으로서는 사력을 다한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퍼엉!
물러서려는 그자의 가슴팍에 강력한 일격이 가해졌다. 포대붕이 손을 내밀어 격공장(隔空掌)을 한 대 갈겨버린 것이다.
야행인은 가슴이 능충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받고 나뒹굴었다. 몇 개인가 늑골이 부러졌는지 아찔한 격통이 가슴에서 온몸으로 번져간다.
하지만 그자는 신음 소리 한마디 내지 않고 벌덕 일어섰다. 과연 고도의 수련을 거친 자객다운 반응이다.
“그 인내심을 칭찬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유감이로군!”
포대붕은 무모의 여인을 조심스럽게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여자가 누구고 무엇 때문에 노리는지 실토하든지 오늘 이곳에 뼈를 묻던지 선택을 하라!”
포대붕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지만 야행인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포대붕의 말이 거역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무적의 능력을 지닌 구대신마를 오랫동안 보필하면서도 이렇게 압도당한 적은 없다. 어쩌면 이자가 구대신마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야행인이 뇌리를 스친다.
억지로 저항할 자세를 취하면서도 야행인의 눈빛은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달아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내가 결례를 한 것 같군!”
야행인이 결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본 포대붕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상대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때문이다.
다정독왕 1부는 모두 읽었는데 2부는 언제쯤 나올까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호남성, 호북성은 청나라때 지명 입니다. 명나라때는 호광성 이라고 불렸습니다. 무협지 에서 나오는 지명이 가장 많이 틀리는 것중 하나 입니다. 그리고 신강성 新疆省 은 청나라 건륭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자신이 넓힌 새로운 강토라는 뜻 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황보민.주금하는 다정독왕의 내용에는 없던 인물들인데 ...
감사히 잘 읽었읍니다.
자객훈련이제대로된자였나보군
잘봅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나게 잘 읽어요,
잘 보고갑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즐독...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ㅈㄷ
감사 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