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가지 크리스마스 이야기
01. Classic Christmas - 성탄절 영화의 바이블
<멋진 인생>(왼쪽)과 1933년작 <작은 아씨들>
고전으로 불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
멋진 인생>(1946)은 이타적인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선'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마스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김없이 프랭크 카프라의 페르소나인 제임스 스튜어트가 등장한다. 평생을 타인을 위해 살았던 남자 조지 베일리(제임스 스튜어트)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수호천사를 만나면서 자신의 삶이 '멋진 인생'이었음을 깨닫는다는 내용. 스크루지의 개과천선을 담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과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은 극영화와 애니메이션, 인형극 등 여러 버전의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우리에게는 빌 머레이가 주연한 <
스크루지>(1988)가 가장 친숙할 듯. 원작에 100퍼센트 충실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새롭지도 않지만, 빌 머레이의 천진한 얼굴을 보는 재미가 있다.
소녀들의 '크리스마스 시즌 바이블'이랄 수 있는 <
작은 아씨들>도 있다. 미국 남북전쟁 시기의 네 자매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 역시,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위노나 라이더의 1994년작,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1949년작, 그리고 캐서린 헵번 주연의 1933년작. 어느 버전이든 호화 캐스팅을 자랑하지만, 가장 처음 만들어졌고 완결성도 뛰어나다고 꼽히는 1933년 작품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빙 크로스비 주연의 뮤지컬 영화 <
화이트 크리스마스>(1954)는 퇴역한 군인들과 크리스마스를 결합시켜, 센티멘털한 감성으로 버무려놓는다. 옛 용사들이 뭉쳐 군대 상관을 돕는다는 내용도 훈훈하지만, 무엇보다 그윽한 캐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감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영화다.
02. Holy Christmas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메리 크리스마스>(왼쪽)와 <크리스마스 별장>
예수의 탄생일은 종종 관계의 벽을 넘는 기적을 가져다 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
메리 크리스마스>(2005)는 가히 쓰나미급의 기적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의 접전 지대. 독일군과 연합군은 '메리 크리스마스'를 기원하며 잠깐의 휴전을 약속한다. 군인들은 총부리를 거두는 대신 적을 위해 캐롤을 연주한다. 피로 물들었던 자리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는 이들. 피도 눈물도 없던 이들이 잠시나마 평화주의자가 된 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34번가에도 기적은 일어난다. 세상에 냉소적이었던 소녀의 심장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 <
34번가의 기적>(1994)은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지 않던 소녀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족과 친구들의 소중함을 일깨운다는 내용으로, 1947년 발표된 원작 영화는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곤 사토시의 애니메이션 <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2003)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도쿄의 홈리스 세 명이 쓰레기장에서 아기를 발견하고, 아기의 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우여곡절을 겪는 내용. 불야성을 이루는 도쿄의 밤거리가 생생하다 못해 쓸쓸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세 홈리스와 아기가 맺는 연대가 감동을 준다.
크리스마스 풍경에 대한 모범 답안을 얻고 싶다면, <
크리스마스 별장>(2008)을 보는 건 어떨까. 이 영화는 '빛의 화가'로 불리는 토머스 킨케이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그가 그린 따뜻한 벽화가 냉랭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는 모습을 담았다. 취향에 따라 지루하거나 감동적인 영화로 갈릴 수 있겠지만, 목가적인 크리스마스 풍경에는 누구라도 잠시 마음이 숙연해질 것이다.
03. Funny Christmas - 다 웃자고 하는 고생
맥컬리 컬킨의 <
나 홀로 집에>(1990)는 이제 그만! 대신 198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소동극 <
크리스마스 스토리>(1983)로 시작해보자. 크리스마스 선물로 레드 라이더 카빈총을 받고 싶은 꼬마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펼쳐지며, 엄마와 아빠, 산타클로스에게까지 호소하는 소년의 조숙한 모험심이 아기자기한 웃음을 선사한다.
<
엘프>(2003)는 북극의 산타 마을에서 자란 요정, 아니 한 인간이 뉴욕에서 겪는 크리스마스 소동극이다. 귀여운 요정 코스프레를 했으나 얼굴은 결코 귀엽지 않은 윌 페렐에 적응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꾸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윌 페렐의 얼간이 같은 표정에도 달달하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팀 엘런은 <
산타클로스>(1994)에서 계획에도 없는 산타 노릇을 하느라 고생이다. 산타클로스가 뜻하지 않게 비명횡사를 한다면, 그 미션은 누구에게로 돌아갈까? 우연히 산타의 옷을 입는 사람이 임자다. <산타클로스>는 평범한 회사원에서 산타로 갑작스럽게 신분이 바뀐 남자의 황당한 체험을 통해, 산타의 근로 현장을 신나게 펼쳐놓는다.
행여나 크리스마스에 남의 집을 털 생각은 하지 말 것. 크리스마스에 범죄를 저질렀다가 무사한 사람 못 봤다. <
사랑의 금고털이>(1994)는 범죄에 성공하기는커녕, 남의 집 부부싸움에 피곤하게 휘말린 강도의 이야기다. 촌철살인의 수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주디 데이비스와 케빈 스페이시 등 탄탄한 배우들이 출동한다.
04. Romantic Christmas - 사랑하기 좋은 날
<러브 액츄얼리>(왼쪽)와 <우리, 사랑해도 되나요?>
손톱, 발톱 다 오그라드는 애정 행각도 크리스마스에는 너그러이 용서된다. 이날만큼은 전지구적으로 사랑 고백에 열을 올리는 날도 없을 테니까. 워킹 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 <
러브 액츄얼리>(2003)는 총천연색 연애담으로 빛나는 영화다. 나이와 성별, 국경을 넘어 모두들 사랑한다고 난리다. 도화지에 멋진 말을 써서 고백하지 않으면 어떠한가. 한물 간 록커 빌리(빌 나이)가 오랜 매니저를 꼭 안아주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담백한 사랑 고백이다.
<
세렌디피티>(2001)는 크리스마스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해준다고 믿는, 대담한(?) 로맨스 영화다. 각자 연인이 있던 남녀가 단 한 번 만났을 뿐인데 한눈에 꽂혔고, 7년 만에 극적으로 재회한다는 내용. 팬시 상품처럼 반짝이는 뉴욕 명소들 틈에서 꿈같은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도 모자라, 그 사람의 가족까지 모두 포섭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크리스마스 시즌. 한국적 현실이라면 <남녀탐구생활>의 '남자친구 집 방문'처럼 진땀 빼는 식사 장면이 정답이겠으나,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사랑의 작대기'가 어이없이 엇갈린 후에도 모두가 대화합을 이루는 기적이 일어난다. <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와 그 계보를 잇는 <
우리, 사랑해도 되나요?>(2005)가 대표적인 경우. <우리, 사랑해도 되나요?>의 원제는 '스톤 가족'(Family Stone)인데, 당사자끼리의 연애담을 넘어 낯선 '가족'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연대감에 집중한다. <
섹스 앤 더 시티>의 자신감 충만했던 사라 제시카 파커가 상황에 몰려 쩔쩔매는 모습도 재미있다.
05. Fantastic Christmas - 판타지 세계로 떠나요
<나니아 연대기>(왼쪽)와 <크리스마스 캐롤>
크리스마스의 신천지를 맛보기 위해서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판타지 세계를 통과하는 것이 필수다.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3D 애니메이션 <
크리스마스 캐롤>(2009)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디킨스의 익숙한 고전에 고도의 기술력을 입혔는데, 그 생생함이 무섭고 소름 끼칠 정도다. 특히 런던 거리를 재현한 도입부의 스피디한 장면에서는 현기증이 일 정도. 구두쇠 스크루지가 유령을 만나면서 개과천선하는 내용이야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짐 캐리나 게리 올드먼 같은 개성파 배우들을 퍼포먼스 캡처로 되살린 테크놀로지가 경이로울 따름이다.
일찌감치 3D 영화에 재미를 들린 로버트 저메키스의 또 다른 작품 <
폴라 익스프레스>(2004)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제격이다. 이 영화의 백미는 "크리스마스는 네 가슴 속에 있다"는 케케묵은 교훈보다 북극행 특급열차를 타는 아찔한 체험 그 자체에 있다. 코앞까지 와 닿는 열차, 금방이라도 얼굴로 뿜어낼 것 같은 증기 등은 3D 안경을 써야 만끽할 수 있을 터. 이젠 풍성한 서플먼트가 수록된 DVD 관람으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2010년 3편 개봉을 앞두고 <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2005, 2008)를 복습하는 것도 좋겠다. 원작이 지닌 구원과 부활의 메시지가 예수의 생애를 떠올리게 할뿐더러, 옷장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모험은 다시 봐도 흥미롭다. 1편과 2편 사이 흐뭇하게 성장한 4남매도 아름답지만, 하얀 마녀 '제이디스'로 분한 틸다 스윈턴의 카리스마나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훈남'으로 등극한 제임스 맥어보이를 다시 보는 재미를 놓칠 수 없다.
06. Troublesome Christmas - 하늘엔 영광, 땅엔 사고
<8명의 여인들>(왼쪽)과 <죽어도 해피엔딩>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크리스마스의 어느 저택. 눈이 소복이 쌓인 바깥 풍경이 가족간의 정을 돈독하게 해줄 것 같지만, <
8명의 여인들>(2002)에서는 살인사건 현장으로 둔갑한다. 8명의 여인들 중 가장을 살해한 범인은 누구일까? 위선과 폭로가 이어지는 가운데 천연덕스럽게 뮤지컬 한 자락을 읊어대는 여자들의 모습이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악취미를 그대로 반영한 듯하다. 파니 아르당에서부터 카트린느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등 프랑스의 걸출한 여배우들이 총출동한 것만으로도 2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
<
죽어도 해피엔딩>(2007)은 프랑스 영화 <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2001)를 리메이크한 작품인데, 나름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크리스마스 이브, 인기 많은 한 여배우의 집에서 예기치 못한 연쇄사건이 일어난다. 점입가경, 엎친 데 덮친 격. 손님까지 하나둘씩 들이닥치니 지옥이 따로 없다. 늘어가는 시체와 씨름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예지원의 코믹 연기가 압권. 그래서 결말은? 제목에 다 있다니까! '죽어도 해피엔딩'이라고.
<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에서 잭 레먼이 겪는 사건사고도 만만치 않다. 빌리 와일더 감독의 날카로운 이 풍자극에서, 잭 레먼은 직장 상사들에게 자신의 아파트를 빌려주는 회사원으로 출연한다. 아파트의 용도는 불륜. 그런데 짝사랑하던 여자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살을 기도하고, 그녀를 도와주려다 온갖 오해를 사는 등 본전도 못 건지는 상황에 놓인다. 소심한 남자가 상사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모습이 눈물겹다. 그나마 해피엔딩이라 다행이다.
07. Dark Christmas - 크리스마스 정신 따윈 필요 없어
<
다크 나이트>(2008)가 <배트맨> 시리즈의 정점을 찍은 건 분명하지만, <
배트맨 2>(1992)를 가장 매력적인 작품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다. 그건 순전히 악당 펭귄맨(대니 드비토)과 캣우먼(미셸 파이퍼) 때문. <배트맨 2>의 배경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은 고담 시티인데, 펭귄맨과 캣우먼은 애초에 크리스마스에는 관심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냄새 나는 시궁창이 익숙한 삶이기에, 완벽하게 어둠에 속한 삶이기에…. 아니, 그 이전에 팀 버튼이 창조한 고담 시티는 부패와 탐욕으로 얼룩진 곳이라, 크리스마스 정신이 스며들 틈이 없을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공허하게 반짝이는 이곳에는 착한 놈과 나쁜 놈의 이분법이 없다. 비극적인 놈과 더 비극적인 놈이 있을 뿐이다.
팀 버튼이 창조한 또 다른 세계 <
크리스마스 악몽>(1993)은 할로윈 타운과 크리스마스 타운을 넘나들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크리스마스를 탐내는 해골 인형의 산타 납치 소동이 주된 내용. 그러나 해골 인형은 크리스마스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자신은 다시 어둠의 세계로 돌아간다. 크리스마스를 끝도 없이 예찬하는 영화들에 질렸다면, 팀 버튼의 음습한 상상력이 느끼함을 해소시켜줄 듯하다.
크리스마스에 적개심을 가진 괴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
그린치>(2000)의 녹색 괴물이다. 닥터 수스의 그로테스크한 원작 동화와, 분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짐 캐리의 심술궂은 표정이 만났다. 그러나 팀 버튼 식의 음산함을 기대하지는 말 것. 감독이 '할리우드 모범생' 론 하워드 아닌가!
08. Bittersweet Christmas - 그래도 희망은 있다
산타클로스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
나쁜 산타>(2003)는 피해야 할 영화다. 이 영화는 코엔 형제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블랙 코미디인데, 영화사상 가장 변태 같고 부실한 산타클로스가 등장한다. 전과자인 빌리 밥 손튼이 흑인 난쟁이와 함께 산타클로스와 요정으로 분장해 쇼핑몰을 터는 이야기. 다정다감해야 할 산타가 아이들을 끔찍하게 싫어하고, 늘 술에 절어 있으며, 여자를 밝히기 일쑤다. 만사가 귀찮은 표정을 한 빌리 밥 손튼이 어느 소심한 어린이를 만나면서 변화를 겪는 과정이 재미있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음을 역설하면서도, 변화의 여지를 남겨놓는 영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
칠드런 오브 맨>(2006)은 엄밀히 말해 크리스마스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것, 즉 '생명의 존엄성'은 크리스마스 정신과 맞닿아 있다.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미래 세계, 한 흑인 소녀의 아기를 지키기 위한 사투가 위엄 있게 펼쳐진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 클라이브 오웬의 묵직한 연기도 영화에 힘을 실어준다.
<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1996)는 고수와 한예슬 주연의 드라마가 아니라, 상드린 베이세가 연출해 세자르상 신인상을 수상한 프랑스 영화다. 프랑스 남부의 한 농촌, 어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추위와 가난, 폭력에 힘겨워하면서 노예처럼 일한다. 생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조촐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은 이렇게 묻는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크리스마스에 내리는 눈은, 정말 기적처럼 살아갈 힘을 준다.
09. Tough Christmas - 내겐 너무 고된 휴일
브루스 윌리스가 호머 심슨처럼 시원한 대머리가 된 것은, 다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이다. 크리스마스에도 좀처럼 쉬지 못하는 사나이, 존 맥클레인. <
다이 하드>(1988)의 뉴욕 경찰 존 맥클레인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마누라와 자식에 있는 LA로 날아가자마자, 테러리스트를 소탕해야 할 임무를 맡는다. 그는 흰 러닝셔츠가 피와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죽도록 고생한 후에야 겨우 다 끝나가는 크리스마스를 맛본다. 지독한 '개고생' 끝에 남는 것은 약간의 명예와 쥐꼬리만 한 야근 수당.
<
리쎌 웨폰>(1987)의 형사 멜 깁슨도 크리스마스를 즐길 여유가 없다. 그는 은퇴를 앞둔 노형사 대니 글로버와 함께 범죄 조직 소탕 작전에 나서는데, 총격 신 곳곳에서 크리스마스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일반인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선물도 놓고 장식품도 달아놓지만, 형사에게 크리스마스 트리는 잠복 용도로나 사용된다. 그래도 시원하게 일망타진한 후 대니 글로버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만찬을 즐기니, 그나마 알찬 휴일을 보낸 셈이다.
<
킬러들의 도시>(2008)의 배경은, 원제가 'In Bruges'인 것에서 알 수 있듯 벨기에의 작은 도시 브뤼주다. 때마침 크리스마스로 이 중세풍 도시는 더욱 빛을 발하는데, 단연코 이곳은 시큰둥한 두 킬러 녀석이 있을 곳이 못 된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직 보스의 명령을 기다리는 와중에,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선량한 관광객을 희롱하거나 하릴없이 속죄하며 시간을 죽인다. 아름다운 도시와 냉혹한 킬러의 세계가 아이러니를 빚어내는 블랙 코미디. 브랜든 글리슨과 콜린 파렐 콤비의 삐걱대는 파트너십이 압권이다.
10. Bloody Christmas - 크리스마스야, 할로윈이야?
<블랙 크리스마스>(왼쪽)와 <헨젤과 그레텔>
크리스마스 시즌에 공포영화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여름이나 할로윈 시즌을 놔두고 굳이 크리스마스에 선혈 낭자한 공포영화를 개봉할 이유가 없기 때문.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임필성 감독의 <
헨젤과 그레텔>(2007)의 경우 호러가 아니라 '잔혹 판타지'라고 보는 게 더 맞다. 이 영화는 그림 형제의 동화 저변에 깔린 분노를 잔혹한 판타지로 풀어냈는데,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순수와 악마성이 공존하는 아이들의 공간을 원색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미술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미치도록 달콤해 보이는 케이크나 과자를 한동안 먹지 못할 수도 있다.
2005년 국내에서 여름에 개봉한 <
더 로드>(2003)의 배경 역시 크리스마스다. 네브라스카에 있는 나선형 구조의 도로에서 일어난 실제 실종 사건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영화는 친척집으로 향하던 한 가족이 죽음의 미로에 접어들면서 끝도 없는 악몽을 겪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에겐 조금 생소한 <
블랙 크리스마스>(1974)는 캐나다에서 많은 컬트 팬을 양산한 영화. 크리스마스에 정체 모를 살인마가 여대생들을 무차별 살해하는 내용의 슬래셔 호러다. 밥 클락 감독은 존 카펜터처럼 조심스러운 미장센과 음악으로 서스펜스를 극대화시켰다는 평가를 얻었다. 2006년에는 동명의 영화가 리메이크되었으나, 크리스마스 당일에 개봉해 기독교인들로부터 불경스럽다는 비난을 받았고 영화 자체도 졸작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