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는 졸기(卒記)라고 부르는 부분이 있다. 대개 “아무개 졸(卒)”이라고 쓴 후에 사관이 망자에 대한 세간의 혹은 자신의 평가를 서술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망자가 살았을 적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 죽음에 대한 호칭이 달랐다. 대부(大夫), 즉 비교적 높은 관직을 지낸 인물의 죽음을 ‘졸’이라고 불렀는데, 꼭 대부가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그 정도 지위에 있던 사람들의 졸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가 실릴 정도면 대단히 출세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졸기의 인물평은 대체로 무척 박하다. 드물게 후한 평가를 받은 인물들도 있다.
1) 여산 부원군 송거신의 졸기 --- 세종 29년(1447년) 5월 14일
여산 부원군(礪山府院君) 송거신(宋居信)이 죽었다. 거신(居信)은 여산군(礪山郡) 사람으로 전법 판서(典法判書) 송첨(宋詹)의 아들이었다. 처음에 별장(別將)에 보직(補職)되었다가 여러 번 옮겨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태종(太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왕후의 척속(戚屬)으로서 대우가 심히 두터웠고, 무릇 출입할 때면 반드시 더불어 함께 하였다. 하루는 태종(太宗)이 서산(西山)에서 사냥할 때에 거신(居信)이 김덕생(金德生)으로 더불어 따라갔는데, 별안간 표범이 뛰어 나오므로 태종(太宗)이 활로 쏜즉 표범이 왈칵 성을 내어 타고 계신 말에게 덤벼들어 위태한 형세가 심히 급박하였는데, 거신(居信)이 말을 채찍쳐 앞으로 달려간즉 표범이 태종을 놓고 쫓아오는 것을 덕생(德生)이 뒤쫓아 쏘아 죽였었다. 그 뒤 즉위할 때 그 공을 가상이 여겨 익대 좌명 공신(翊戴佐命功臣)의 칭호(稱號)를 내리고, 군기 소감(軍器少監)을 주었고, 임오년에는 내자 소경(內資少卿)으로 고치어 사복 부정(司僕副正)에 옮기고, 계미년에 호용 순위사 대호군(虎勇巡衛司大護軍)을 배명하였다가, 이듬해 상호군(上護軍)을 더하였고, 병술년에 우군 첨총제(右軍僉摠制)를 배명하였다가 조금 후에 여양군(礪良君)을 봉하고, 추충(推忠)의 칭호(稱號)를 추가하여 주었고, 경인년에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배명하고, 여러번 옮겨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으며, 병오년에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錄大夫)로 여산 부원군(礪山府院君)을 봉하고, 을묘년에 또 대광(大匡)을 가자(加資)하고, 기미년에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거신은 수한(壽限)과 작위(爵位)가 이미 지극하고 은사로 받은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성품이 질박(質樸)하고 정직하며, 살림살이를 꾀하지 아니하고 항상 매사냥으로써 스스로 즐기다가 나이가 79세에 세상을 마치었다. 2일 동안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조문·부의·장례·제례를 의식대로 하고 시호(諡號)를 충정(忠靖)이라 하니, 위기에 처하여 윗사람을 받듦을 충(忠)이라 하고, 너그럽게 낙천(樂天)하여 곱게 종신(終身)함을 정(靖)이라 한다. 아들은 송기(宋頎)인데 먼저 죽었다.
○礪山府院君 宋居信卒。 居信, 礪山郡人, 典法判書詹之子。 始補別將, 累遷至護軍。 太宗在潛邸, 以王后戚屬, 待遇甚厚, 凡出入, 必與之偕。 一日, 太宗獵于西山, 居信與金德生從行。 忽有豹突出, 太宗射之, 豹忽怒, 攀所御馬, 禍甚急, 居信躍馬而過, 豹釋而追之, 德生從後殪之。 及卽位, 嘉其功, 賜翊戴佐命功臣號, 授軍少監。 壬午, 改內資少卿, 移司僕副正, 癸未, 拜虎勇巡衛司大護軍, 明年, 加上護軍, 丙戌, 拜右軍僉摠制, 尋封礪良君, 加賜推忠之號。 庚寅, 拜右軍同知摠制, 累遷判右軍都摠制府事, 丙午, 輔國崇祿、礪山府院君, 乙卯, 又加大匡, 己未, 賜几杖。 居信壽考, 祿位旣極, 恩賚無算。 性質直, 不營生産, 常以鷹犬自娛, 年七十九而卒。 輟朝二日, 弔賻葬祭如儀。 諡忠靖, 危身奉上忠, 寬樂令終靖。 子頎, 先卒。
2) 여성군 송문림의 졸기 --- 성종 7년(1476년) 9월 6일
여성군(礪城君) 송문림(宋文琳)이 졸(卒)하니, ①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전례와 같이 하였다. 송문림은 여산인(礪山人)으로, 처음에는 가문의 음덕(蔭德)으로 경덕궁(敬德宮) 궁지기[宮直]에 보직(補職)되었는데, 여러 번 옮겨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이르렀었다. ②경태(景泰) 정축년(1457. 세조 3년)에 문과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지사간(知司諫)·사헌 집의(司憲執義)를 역임하고, ③천순(天順) 신사년(1461. 세조 7년)에 병조 지사(兵曹知事)에 제수되었다가 참의(參議)로 승직(陞職)되었다. 계미년(1463. 세조 9년)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승직되었고, 갑신년(1464. 세조 10년) 에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옮겼다가 병술년(1466. 세조 12년)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외직으로 나아가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 그리고 정해년(1467. 세조 13년)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다가 기축년(1469. 예종 원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겼다. 예종(睿宗)이 승하(昇遐)하자 시호를 청하는 일로 중국에 갔다가 주문(奏聞)을 청허(聽許)받고 돌아와서 논밭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경인년(1470. 성종 원년)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제수되었고, 신묘년(1471. 성종 2년)에는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으며,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계(陞階)되었다. 임진년(1472. 성종 3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고,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계되고, 봉군(封君)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6세였다. 시호(諡號)를 공무(恭武)라 하였는데, 일을 집행함에 견고(堅固)한 것을 ‘공(恭)’이라 하고, 굳고 세차고 사리에 곧은 것을 ‘무(武)’라고 한다. 사람됨이 강개(慷慨)하여 이르는 데마다 명성(名聲)과 공적(功績)이 있었다.
① 철조(輟朝) : 조회를 정지하는 것.
② 경태(景泰) : 명(明)나라 경종(景宗)의 연호.
③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礪城君 宋文琳卒, 輟朝、弔祭、禮葬如例。 文琳, 礪山人, 初以門蔭補敬德宮直, 累遷至戶曹佐郞。 景泰丁丑中文科別試, 歷知司諫、司憲執義, 天順辛巳, 拜兵曹知事, 陞參議。 癸未, 陞嘉善全羅監司, 甲申, 遷兵曹參判, 丙戌, 拜禮曹參判, 出爲忠淸監司。 丁亥, 拜司諫院大司諫, 己丑, 轉司憲府大司憲。 睿宗昇遐, 以請諡事赴京, 奏準賜田民。 庚寅, 拜戶曹參判, 辛卯, 賜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號, 封礪城君, 階嘉靖。 壬辰, 爲吏曹參判, 陞資憲封君。 至是卒, 年六十六。 諡恭武, 執事堅固恭, 剛强直理武。 爲人慷慨, 所至皆有聲績。
3) 장령 송호의의 졸기---중종 9년(1514년) 8월 6일
장령(掌令) 송호의(宋好義)가 졸(卒)하였다. 사람됨이 독신(篤信) 순정(純正)하여 지조(志操)를 지킴이 확고했으며, 일에 따라 조처(措處)함이 매양 옛 사람의 법도를 따랐다. 여러 번 대부(臺府)에 들어가서 당시의 재상에게 거슬리는 바가 많았으며, 군수(郡守)로 있는 정침(鄭沈)이라는 자가 집을 지으매 참람하게 궁궐(宮闕)과 같으므로 호의가 지평(持平)이 되어 그 죄를 탄핵하며 헐어 버리고야 마니, 악을 미워함이 이와 같았다. 사귄 벗이 모두 한 때의 명류(名流)로 죽던 날 거마(車馬)가 문을 메웠다.
○掌令宋好義卒。 爲人篤信純正, 執守牢確, 應事施措, 動遵古人。 累入臺府, 多忤時宰。 有郡守鄭沈者, 治第僭擬宮闕, 好義爲持平, 擧劾其罪, 毁撤乃已, 其疾惡如是。 執友皆一時名流, 死之日, 車馬塡門。
◉ 송호의(宋好義) (?~1514)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지평(持平)ㆍ장령(掌令)을 역임하였으며, 이극돈(李克墩)의 추탈(追奪)을 주장하는 등 성품이 강직하였음.
4) 여원 부원군 송일의 졸기---중종 15년(1520년) 1월 6일
여원 부원군(礪原府院君) 송일(宋軼)이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송일(宋軼)은 성품이 비록 관후(寬厚)하였으나 평소에 청렴하지 못하였는데, 이 때문에 논박 받아 재상에서 파면되었다.
또 사신은 논한다. 송일은 성품이 엄준(嚴峻)하여 기염(氣焰)이 있었다. 젊어서는 가난하였는데 귀하게 되자 제택(第宅)을 대대적으로 건립하였으므로 자못 물론(物論)이 있었다.
○礪原府院君 宋軼卒。
【①史臣曰: "軼性雖寬厚, 居家不廉, 以此被論罷相。"】
【又曰: "性嚴峻有氣焰。 少貧及貴, 大起第宅, 頗有物論。"】
① 사신(史臣) : 예전에, 사초를 쓰는 신하를 이르던 말.
5) 지중추부사 송천희의 졸기---중종 15년(1520년) 1월 18일
지중추부사 송천희(宋千喜)가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송천희(宋千喜)는 자품과 외모가 단정하고 수려하였고 기도(氣度)가 비범하였으며, 강개하여 포용(包容)하는 도량은 작았으나 나라 일에 마음을 다하여 알고서는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영남(嶺南)에 감사로 나아갔었는데 지금까지 어진 감사라고 일컬어오고 있으며, 성격도 엄숙하여 문하에 사알(私謁)이 없었으므로 물론(物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丁未/知中樞府事宋千喜卒。
【史臣曰: "千喜資貌端麗, 氣度豪邁, 慷慨少容量。 盡心國事, 知無不爲, 嘗按嶺南, 至今稱爲賢監司。 性又嚴肅, 門無私謁, 物論多之。"】
6) 이조 판서 송세형의 졸기---명종 8년(1553년) 윤3월 11일
이조 판서 宋世珩이 졸(卒)하니 석강(夕講)을 정지하라고 명하고 이어 전교하였다.
"국가의 중신이 뜻밖에 죽었으니 어찌 이처럼 경악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①별치부(別致賻)와 예장(禮葬)에 대한 전례(前例)를 자세히 상고하여 아뢰라."
사신은 논한다. 송세형은 세속에 붙좇고 권세에 붙기를 잘하여 권간을 아첨하여 섬기고 ②궁액(宮掖)에 붙기까지 하였으니 ③비부(鄙夫)다. 그가 익명서를 바쳐 큰 옥사를 일으킨 것이 괴이할 것 없다.
○吏曹判書宋世珩卒。 命停夕講, 仍傳曰: "國家重臣, 不意至此。 安有如此驚愕之事乎? 別致賻及禮葬前例, 詳考以啓。"
【史臣曰: "世珩善趨時附勢, 諂事權姦, 至於攀緣宮掖, 鄙夫也已。 其進匿名書, 以起大獄, 無足怪者。"】
① 별치부 : 조선시대에 3품 이하의 측근 신하가 죽었을 때 임금이 별도로 내리는 부의(賻儀).
② 궁액(宮掖) : 궁중의 하인.
③ 비부 : 마음씨가 더럽고 못된 남자.
7) 여성군 송인의 졸기---선조 17년(1584년) 7월 1일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졸하였다. 송인의 자는 명중(明仲)이고 호는 이암(頤庵)인데 영의정 송일(宋軼)의 손자이다. 중종의 세째 딸 정순 옹주(貞順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송일의 훈공을 물려받아 봉군(封君)되었다. 송인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순수하고 겸손하고 근실하였으며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다. 계모를 지성으로 섬겨 효도로 이름났다. 거상(居喪) 때에 잘 견디지 못할까 미리 걱정하여 평상시에 하루 걸러 담박한 음식을 먹었다. 놋쇠 그릇으로 요강을 만들지 않았는데, 이는 뒷날 망가져 사람들의 음식 그릇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젊어서부터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예학(禮學)에 익숙하여 명유 이황·이이 등과 강론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해서(楷書)를 잘 써서 한 시대의 으뜸이었는데, 공사간의 금석문(金石文)은 모두 그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풍채가 빼어난데다 예절에 익숙하였으므로 대신 노수신 등이 매양 송인이라면 파격적으로 종백(宗伯)을 삼거나 문형(文衡)을 맡길 만하다고 평하였다. 그래서 조사(詔使)가 올 적에는 영위사(迎慰使)로 삼기를 계청하였으니, 그로부터 의빈(儀賓)중에 문장이 뛰어난 사람이면 영위사가 될 수 있었는데, 송인의 이름이 항상 종척(宗戚) 중에 으뜸으로 꼽혔다.
이때에 죽었는데 향년은 69세이고 시호를 문단(文端)이라 하였다.
○朔乙亥/礪城君 宋寅卒。 寅字明仲, 號頣庵。 領議政軼之孫, 尙中宗第三女貞順翁主, 襲軼勳嫡封君。 寅爲人端粹謙謹, 處華腴如寒素。 事繼母以孝聞。 預憂居喪不勝, 嘗間日淡食, 不以銅鍮爲溲器, 慮後日破爲人飮食器也。 自少通經服禮, 與名儒李滉、李珥等講論。 工於文辭, 楷法冠一時, 公私金石之文皆屬筆。 儀采丰秀, 禮節閑習。 大臣盧守愼等每論, 寅可破格爲宗伯、典文衡, 詔使之來, 啓請爲迎慰使。 自是儀賓有文翰人, 通得爲迎慰使, 而寅之名, 常爲宗戚之首。 至是卒, 年六十九。 追謚文端。
8) 이조 참판 송광연의 졸기---숙종 21년(1695년) 6월 9일
전(前) 이조 참판(吏曹參判) 송광연(宋光淵)이 졸(卒)하였다. 송광연은 성질이 순실(淳實)하고 용의(容儀)가 방후(龐厚 : 매우 크고 침착함)하였다. 비록 그 재간과 언론은 그다지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으나, 능히 평온하고 조용하며 스스로 지조를 지켜 진취(進取)에 급급하지 않았다. ①갑술년(1694 숙종 20년) 에 서문중(徐文重) 등이 돈녕부(敦寧府)의 모임을 갖자, 편지를 띄워 준엄하게 꾸짖으니, 공론이 이 일을 장하게 여겼다.
○前吏曹參判宋光淵卒。 光淵性質淳實, 容儀龐厚。 雖其幹局言議無可稱, 而然能恬靜自守, 不汲汲於進取。甲戌徐文重等敦府之會, 移書峻責, 公論以是多之。
① 장씨의 왕후 새수를 거두고 희빈의 옛 작호를 내려 주게 하다
숙종 20년(1694년) 4월 12일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국운(國運)이 안태(安泰)를 회복하여 중곤(中壼 : 중전(中殿) 인현왕후)이 복위하였으니,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장씨(張氏 : 장희빈))의 왕후 새수(王后璽綬 : 옥쇄)를 거두고, 이어서 희빈(禧嬪)의 옛 작호를 내려 주고 세자(世子)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禮)는 폐(廢)하지 않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앞으로 있을 ㉠책례(冊禮) 때에 으레 고묘(告廟)하고 반교(頒敎)하는 예가 있겠으나, 지금 곤위(壼位)를 회복하고 폐치(廢置)한 일은 먼저 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일이 있으면 고하는 의리이다. 해조(該曹)를 시켜 거행하되 고묘문(告廟文) 가운데에 충언(忠言)을 살피지 못하고 양좌(良佐)를 잘못 의심한 뜻으로 말을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그래서 서문중(徐文重) 등이 상소하여 간쟁(諫爭)하려고, 박태상(朴泰尙) 등 여러 사람과 대궐 밖 돈녕부(敦寧府)에 모여 송광연(宋光淵)에게 글을 보내어 그가 오도록 요구하며 ‘9년·6년과,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는 것은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한가?’ 하였는데, 대개 중궁(中宮)이 어위(御位)한 것과 장씨(張氏)가 왕비로 있던 것은 세월이 오래고 짧은 차이가 있기는 하나 왕세자가 있으므로 장씨가 도리어 중하다는 뜻이다. 송광연이 답하기를, ‘장씨를 위하여 절의(節義)를 세우는 것은 그대들만이 하라.’ 하였고 또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서문중 등이 드디어 그만두고 돌아갔다. 아아, 세도(世道)가 떨어지고 의리가 어두워져서, 뒷날의 화복(禍福)만을 생각하고 윤리를 지키는 항성(恒性)을 아주 잃어, ㉡재집(宰執) 사이에서도 이런 ㉢거조(擧措)가 있게 되었으니, 3백 년 예의의 나라가 아! 위태롭구나.
㉠ 책례(冊禮) : 조선시대에 상왕, 대비 ·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 왕세제 · 왕세제빈 · 왕세손 · 왕세손빈, 부마 등을 책봉하던 국가의례.
㉡ 재집(宰執) : 임금을 돕고 모든 관원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아보던 이품 이상의 벼슬. 또는 그 벼슬에 있던 벼슬아치.
㉢거조(擧措) : 큰일을 저지르는 것.
9) 호조 판서 송진명의 졸기---영조 14년(1738년) 8월 1일
호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졸(卒)하였다. 송진명은 송인명(宋寅明)의 종형(從兄)으로, 조정(調停)하는 논의를 잘했기 때문에 신임 받았고, 재주와 학문이 넉넉했으나, 다만 세리(勢利)에 태연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戶曹判書宋眞明卒。 眞明, 寅明之從兄也。 以調停之論, 被倚任, 優於才學, 而但不能恬於勢利, 人多短之
10) 좌의정 송인명의 졸기---영조 22년(1746년) 8월 11일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졸(卒)하니, 임금이 애도하는 하교를 내리고 ①치부(致賻)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송인명은 사리 판단이 빠르고 권모가 많아서 ②춘방(春坊)에서부터 임금에게 ③지우(知遇)를 받았고, 조문명(趙文命)과 더불어 탕평론(蕩平論)을 극력 주장하였고, 노론·소론 중 ④언의(言議)가 평완(平緩)한 자를 취하여 조정에 등용하여 조정(調停)의 계책을 삼으니, 임금이 드디어 깊이 신임하고 ⑤권병(權柄)의 자리에 중용하였다. 20년의 오랜 세월 동안 세도(世道)가 갈수록 타락하면서 자중 자애하는 선비들은 모두 뒷걸음질 치며 물러가 버리고 말았는데, 경신년(1740 영조 16년) 이후 국시(國是)가 조금 정착되자 이에 송인명이 시세(時勢)를 조금 내다보고서 옛 투식을 변혁하고자 선비들을 끌어다 쓰려고 하였으나, 조현명이 고집을 세워 이를 따르지 않으니, 당시 ‘조송 이론(趙宋異論)’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끌어다 쓰려고 한 것은 역시 일시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였지, 참으로 선비들을 아껴서 그랬던 것은 아니였다."
○左議政宋寅明卒, 上下敎悼傷, 致賻如例。
【史臣曰】
寅明機警多權略, 自春坊受知於上, 與趙文命力主蕩平之論, 取老、少論中言議平緩者, 引進於朝, 以爲調停之計, 上遂深信而柄用之。 至二十年之久, 而世道益下, 士類之自好者, 皆逡巡屛退, 而庚申以後, 國是稍定, 於是寅明揣知時勢, 欲變舊套, 汲用士類, 趙顯命執不從, 時有趙宋異論之語。 然其欲汲用者, 亦一時自爲之地, 非眞愛士類而然也。
① 치부(致賻) : 예전에, 임금이 신하가 죽었을 때 부조를 보내던 일.
② 춘방(春坊) :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 세자시강원.
③ 지우(知遇) : 남이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을 알고 잘 대우함.
④ 언의(言議) : 이러니저러니 하는 소문.
⑤ 권병(權柄) : 권력으로 사람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힘. 또는 그런 지위나 신분
죽음/표현
황제 | 붕(崩) | 제후 | 훙(薨) | 대부(大夫) | 졸(卒) |
선비[士] 4품 미만 관리 | 불록(不祿) | 불교 | 열반(涅槃), 입적(入寂) | 기독교 | 소천(召天) |
가톨릭 | 선종(善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