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죽음(HID)
작사 박승혁, 작곡 야운, 편곡 백이제
노래 김민경(여), 김기태(남)
붉은 석양이 한반도 분단의 선을 휘감아 돌고
그 죽음의 사선을 넘나드는 사나이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오감이 곤두서면
낙엽 밟는 소리에 살기어린 두 눈은
야수의 눈빛으로 적막한 어둠속에 빛난다
어둠 속 풀벌레 울름 소리 들려 올 때
적막을 깨고 빛 발 치듯 솟아지는 적의 총소리
생사를 건 도피 속에 목까지 차오르는
적진 속 거친 숨소리 대오는 흩어지고
조명탄 불빛은 천지 사방을 비추네
불타는 팔에 솟구치는 검붉은 피여
친구여 갈 길은 멀고 조국은 보이지 않네
조국이여 내 죽거든 님에 품에 잠들게 하소서
불타는 팔에 솟구치는 검붉은 피여
친구여 갈 길은 멀고 조국은 보이지 않네
조국이여 내 죽거든 님에 품에 잠들게 하소서 님에 품에 잠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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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공작원, HID, 비밀에 쌓여져 있는 특수부대.
군대 다녀 온 남자들의 술좌석에서 떠돌던 북파공작원들의 실체.
DMZ에서 민정경찰을 했던 사람이 자기가 직접 북파공작원을 북쪽으로 안내하였다는 말도
뻥으로만 알았는데 <돼지들>이라는 책으로 처음 북파공작원들의 실체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지금은 아예 유튜브에서는 특수임무자 출신들이 자기들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을 정도로 지금은 많이 일반인들에게 소개되었다.
빙혼은 85년도(?) 쯤에 실미도 사건을 들었다.
공군에서 근무했던 사람이 국가기밀이라고 하면서 술자리에서 들려주었던 내용은
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신기하여 열심히 들었는데
영화까지 나올 정도로 실미도 부대사건에 대한 진실은 이제 다 알고 있다.
그 시절에는 신문에서 무장공비가 인천으로 침투하여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진입하다가
영등포 인근에서 전부 사살되었다는 내용으로만 알고 있다가 정부가 진실을 숨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는 과거의 숨겨진 진실들이 많이 파헤치고 있는 중이다.
광주항쟁도 대부분 신문에서는 북한에서 파견된 고정 간첩들이 전과자 등을 부추겨
폭동을 일으켰다고 했는데 지금은 대한민국 국인들이 국민을 죽였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돈 빼 먹은 대통령은 감방에 가 있는데 광주시민 수 천 명을 죽였던 주범들은 지금도
골프도 치면서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게 나라냐?
빙혼은 진해훈련소에 있을 때 UDU를 본 적이 있었다.
머리도 길고 계급장도 없이 녹색으로 UDU라는 표시를 한 모자를 쓴 사람들을 보았다.
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관들도 아닌 사람들 같았는데 그들에게 1시간 동안 기합을 받았다.
사소한 일로 해군과 해경이 서로가 부딪혀서 패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는데
해경들만 집합시켜 기합을 받았다. 그들의 훈련 과정을 알려준다고 하면서
팔굽혀펴기 10개 5초 휴식, PT1번 20개 5초 휴식, 다시 팔굽혀펴기 10개 5초 휴식, 누워서
다리 들어올리기 10개 5초 휴식,,,이렇게 1시간 기합을 받고 그 다음날 모두가 손을 어깨 위로
들지 못할 정도로 무진장 아팠던 적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렇게 하루 8시간 이상 훈련을
몇 개월씩 받는다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인간병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돼지들이라는 책에서 북파공작원들 훈련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직접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을 정도로 고난도 훈련과정을 읽으면서 북파공작원은 그야말로 인간병기로 만들어져
북쪽에 보내지는데 가슴이 아팠던 것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포상금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그들을 사살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최근에 <불멸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그 돼지들에 나온 북파공작원이
돌아오는 과정과 똑같은 내용이 담겨 있어 더욱 더 가슴이 뭉클하였다.
1996년 강원도에 침투하였던 무장공비 중에 1명은 살아서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소문도 있다.
그 때 작전에 참가하였던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남파공작원은 일반 군인은 물론 특수부대도
그들을 상대하기 어려워 결국 북파공작원들이 투입되어 그들과 맞섰다고 한다.
신체단련을 하는 특수부대원들과 생명을 내놓고 훈련을 받아야 하는 북파공작원들과는
훈련과정이 달라 남파공작원들 상대는 북파공작원이 나서야만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터넷에서 북한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북파공작원의 수기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작전 중에 들켜서 몇 개 사단에 둘러싸여 총알이 빗발치고 동료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아닌 오히려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도망을 했다가
몇 달 동안 생식으로 버티면서 기어이 DMZ에 있는 그들만의 통로를 통해 돌아왔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작전 실패로 인하여 북파공작원이 모두 죽은 줄 알고 안내조마저 철수를 하였는데
남한의 경계를 뚫고 부대로 복귀하니 모두가 놀라워했고 그 사람은 제대 후 미국으로 건너가
살면서 자기들을 버린 한국이 너무나 미워서 다시는 한국에 안 온다고 한다.
낙엽 밟는 소리에 살기어린 두 눈은
야수의 눈빛으로 적막한 어둠속에 빛난다
어둠 속 풀벌레 울름 소리 들려 올 때
적막을 깨고 빛 발 치듯 솟아지는 적의 총소리
생사를 건 도피 속에 목까지 차오르는
적진 속 거친 숨소리 대오는 흩어지고
조명탄 불빛은 천지 사방을 비추네
훈련이 아닌 북한 땅에서 남한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상황이 그대로 담겨있다.
동료는 북한군의 총알에 죽어가고 그들을 쳐다볼 틈도 없이 정신이 없이 살기 위하여 도망을
해야 했는데 조명탄에 숨을 곳조차 마땅하지가 않은데 여기저기 침투조원들은 흩어져 버렸고
낙엽 밟는 소리에도 며칠씩 비트에 숨어 숨을 죽이면서 살아 돌아와야만 했던 북파공작원들.
언젠가 한 번 여의도에서 북파공작원들의 시위가 있었다.
그 때 어느 빌딩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는데 빙혼 정도의 조그만 키에 검은 모자를
쓰고 2명이 들어왔는데 헐,,,,묘하게 그들을 바라보니 살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 중에 인간병기들이 내색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빙혼은 잘 알고 있기에
언제나 모르는 타인들하고 절대로 부딪히지 않아서 그런지 지금까지 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김기태 씨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야수와 같은 그들의 눈빛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말로 죽기 살기가 아닌 그야말로 진짜 생존을 위한 훈련을 받아야 했던 그들.
여러 자료들을 보면 생환율이 20%가 안 된다고 한다.
국가를 위하여 죽어간 이들의 보상은 아직도 미흡할 것이다.
일제에 협조한 후손들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독립군 자손들도 거지처럼 살아가듯이
국가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는 오히려 병역기피자나 간첩으로 몰리기 일쑤였다.
이게 나라냐? 이제는 횃불을 들고 싶다.
그래서 스티브 유는 절대로 용서를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인권침해라고 주장하니 한국에 오라고 해서 국권을 침해한 죄로 사형을 시키거나
아니면 이제라도 몸도 좋으니 북파공작 훈련을 받을 것을 선택하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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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공작원 출신인 박천수(71·가명)씨의 걸음걸이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공작원 임무를 수행하던 중 입은 부상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박씨는 "그래도 나는 '행운아'다. 북한에 넘어가면 10명 중 7~8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라
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북파공작원 1만여명 중 사망이나 실종된 인원은 7726명에 이른다.
행여 살아 돌아온다 해도 사지가 멀쩡한 이들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생환한 북파공작원
대부분은 박씨와 마찬가지로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전쟁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박씨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살았다. 그러던 그에게 '운명'이 찾아온 것은 1962년 5월. 지인의 추천으로
서울의 한 호텔에 머물며 북파 공작요원을 선발하던 모집책을 만날 수 있었다.
박씨는 '3∼5년간만 일하면 3,000만원을 주겠다'는 모집책의 권유에 북파공작원이 될 것을
결심했다. 당시 화폐가치로 3,000만원이면 현재 7억~8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에게는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훈련은 입소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강원도의 험준한 산들을 지형지물 삼아 평지처럼
달릴 수 있는 산악훈련을 비롯해 불과 1m 거리를 두고 지나가는 적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감쪽같이 숨는 위장진출법, 사격, 납치, 격투술 등의 훈련이 이어졌다.
그는 "영화 '실미도'에서 나온 훈련은 비교조차 안 된다"며
"그 정도는 해병대 등 일반 부대에서도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강훈련과 함께 정신교육이 병행됐다.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다', '내가 맡은 공작임무에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다', '적지에서 죽지 말라', '첩보원은 살아 돌아와야 유공자다', '인명을
살상치 말라! 극한 상황 외에는 생명을 존중하라' 등이 주된 내용이다. 박씨는 "이런 훈련들과
정신개조를 통해 공작원은 적중침투를 위한 인간병기로 다시 태어난다"고 설명했다.
첫 임무는 북한군 장교 납치였다. 그러나 임무는 안타깝게 실패했다. 납치하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실신했던 북한군 장교를 들쳐 업는 순간 북한군 장교가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가 권총을 뽑아 드는 통에 반사적으로 그를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수차례의 북파 임무를 수행하며 '베테랑'의 꼬리표를 달았던 그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7번 째 임무를 수행하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당시 추격병들은 탈출로를
차단했고 집중사격을 가해왔다. 이때 그는 팔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고 팔과 배에서 솟구치는
출혈로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이 때 그는 훈련 때 교육 받은 대로 안전핀을 제거한 수류탄을
손에 쥔 채 남쪽으로 포복을 시작했다. 이는 적군 사격에 사망할 경우 노획물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죽는다는 것은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다만 남쪽에 남아있는 가족이
떠올랐다"는 박씨. 그러던 중 의식을 잃은 그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총상부위의 극심한
통증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곤 남쪽을 향해 포복을 계속했다. 그는 "큰 부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전했다.
그렇게 10시간여 남쪽을 향해 포복하던 그는 결국 손가락도 못 움직일 만큼 기력을 소진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나무에 기대앉았다. 이때 나무 사이로 휘날리던 태극기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즉시 입고 있던 옷가지를 벗에 온힘을 다해 흔들었다. 이를 발견한
아군은 자동화기로 무장한 부대원 10명을 군사분계선 너머로 파견해 그를 구조했다.
천신만고 끝에 구조될 수 있었지만 당시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전투복은 피에 젖어 빳빳하게
굳어 버렸고 응급 지혈한 왼팔은 옷이 빵빵 해질 만큼 부어올랐다. 복부 총상은 극심한 출혈에
응급처치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탄띠로 졸라매 출혈을 최소화 했을 뿐이다. 얼굴은
가시덩굴에 긁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특히 그의 오른 팔꿈치는 10여시간 포복으로 뼈가
하얗게 드러났다. 구조된 후 수차례의 수술이 이어졌고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
나 더 이상의 임무수행은 불가능했다. 그가 공작원이 된 지 3년째 되던 1965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약속했던 보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2003년 보상법이 통과되면서 보상과
국가유공자로서 대우를 받고 있지만, 과거엔 오랜 세월 사회의 음지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가야
만 했다.
그는 당시 대장으로부터 "국가가 요구하는 임무수행을 성공리에 마치면 최고의 훈장과 상금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7차례의 공작임무를 완수하고도 상금, 훈장은 물론 군번,
계급도 없이 귀가조치 됐다. 때문에 그는 42년간 병역기피자로 살아야만 했다. 취직도 할 수
없었다. 간신히 일자리를 찾아도 호적등본에 병역기피자로 기록돼 채용이 되지 않았다.
그는 "동지들처럼 공작임무 중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하고 탄식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60, 70년대엔 간첩으로 오인돼 경찰서에 붙잡혀 다니기 일쑤였다. 담배를 사러
갔다가도 무심코 "평양(공작 중 휴대했던 북한 담배) 하나 주시오"라고 말했다가 경찰서에
붙들려간 적도 있다. 가족의 피해도 컸다. "박천수가 간첩으로 붙잡혀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소문이 퍼져 그의 가족은 구설에 오르내려야 했다. 이 때문에 그의 가족은 이사를 세 번이나
다녀야 했다.
이렇게 애달픈 과거를 가진 북파공작원들은 지금까지도 왜곡된 소문과 시선에 고통 받고 있다.
박씨는 "영화나 소설이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알리는 데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북파공작원은 전과자나 사회적으로 문제 있는 이들이 입대를 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그는 "영화와 달리 북파 공작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전과 조회는 물론 사전에 철저한 신원확인을 거쳐야만 가능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과거 임무를 수행할 당시의 기억이다. "뒤엉킨 채 쓰러진
북한군들과 눈을 마주한 채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럴 때면 사상이나 이념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끊임없이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