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몽(崔知夢)은 처음 이름이 최총진(崔聰進)으로, 남해(南海)의 영암군(靈巖郡 :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사람이며, 원보(元甫) 최상흔(崔相昕)의 아들이다.
품성이 청렴 검소하고, 인자 온화하였으며, 총명 영민하여 학문을 좋아하였다.
대광(大匡) 현일(玄一)에게 배워서 경서와 사서를 널리 섭렵하였으며, 특히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하였다. 나이 열여덟에 태조가 그의 명성을 듣고 불러서 꿈을 점치도록 하였더니, 그가 길조임을 알고서, “반드시 삼한(三韓)을 도맡아 다스릴 것입니다.”라고 풀이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지금의 이름인 최지몽으로 바꾸고 비단 옷을 내려주었으며, 공봉(供奉)의 직에 임명하였다. 정벌할 때마다 시종하여 곁을 떠나지 않았고, 삼한을 통일한 뒤에도 궁궐 안에서 왕을 모시고 고문에 대비하였다.
혜종 2년(945) 왕규(王規)가 왕의 동생을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을 때 최지몽은 사천관(司天官)이었는데, “유성(流星)이 자미(紫微)를 침범하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뒷날 혜종이 병이 들어 신덕전(神德殿)에 거처하자, 왕규가 반란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최지몽이 점을 쳐보고는, “가까운 시기에 변란이 있을 것이니 때때로 거처를 옮기셔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정종이 왕위에 올라 왕규를 죽이고 최지몽이 사태의 기미를 은밀하게 아뢴 공로를 포상하여 노비[臧獲]와 안마(鞍馬)·은그릇을 내려 주었다.
광종 때에 왕의 귀법사(歸法寺) 행차에 호종하다가 술에 취하여 예법에 어긋난 행동을 했으므로 외걸현(隈傑縣)으로 쫓겨가, 무려 11년 동안이나 머물렀다. 경종 5년(980)에 불러 들여 대광(大匡)·내의령(內議令)·동래군후(東萊郡侯)·식읍(食邑) 1천호·주국(柱國)으로 임명하고, 은그릇·비단 이부자리·휘장·옷·말·복두(幞頭)·무소뿔 띠를 내려주었다. 하루는 최지몽이, “객성(客星)이 제좌(帝座)를 침범하였으니 주상께서는 호위병을 채근하여 예기하지 못한 사태를 대비하소서.”라고 아뢰었다. 얼마 뒤 왕승(王承)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자, 왕은 그에게 왕이 입던 옷과 금띠를 내려 주었다.
성종 원년(982), 좌집정(左執政)·수내사령(守內史令)·상주국(上柱國) 칭호를 덧붙이고,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으며, 그의 부모에게도 작위를 주었다. 3년(984)에 최지몽은 나이가 일흔여덟이므로 세 번 표문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글을 올려 굳이 사직을 요청하자, 조회에 참석하는 것을 면제해주고 내사방(內史房)에 나와서 예전과 같이 업무를 보도록 하였다. 6년(987) 최지몽이 병이 들자 성종은 의원에게 명하여 약을 내려주고 친히 행차하여 병문안하였다. 말 두 필을 귀법사와 해안사(海安寺)에 내려주고 승려 3천명에게 음식을 공양[飯僧]하여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등 모든 방법을 다해 병을 낫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여든 하나로 죽으니 부음을 듣고 왕이 몹시 슬퍼하였으며, 베 1천 필·쌀 3백 석(碩)·보리 2백 석·차 2백 각(角)·향(香) 20근을 부의로 보내고 관청에서 장례를 맡아 치르게 하였다.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추증하고 시호를 민휴(敏休)라고 하였으며, 뒤에 태사(太師)로 올려 추증하였다.
13년(994)에 경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아들은 최현동(崔玄同)·최회원(崔懷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