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중리-2
비중리(飛中里)
【위치】
비중리(飛中里)는 읍의 북단부에 위치하며, 68세대에 남자 88명․여자 92명으로 모두 180명이다. 동은 저곡리(楮谷里), 서는 세교리(細橋里), 남은 비상리(飛上里), 북은 북이면 선암리(仙岩里)에 접해 있다. 비중리는 구녀산(九女山, 484m) 북서쪽에 발달한 준평원 마을로, 북쪽은 북이면(北二面)과 접하면서 영하천(靈下川) 유역에 곡저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영하천은 우산리 97번지에서 발원하여 비중리 201-1번지에 이르는 2.3km의 소하천이다. 비중리의 중심 마을은 양지편이고, 양지편 북쪽에 행정이, 행정 북쪽에 선돌거리[입석가]가 있다. 또한 양지편과 행정 동쪽 비상․비중리 땅에 내수문화마을이 있다.
내수리-초정리 지방도외에 내수리에서 비중리와 비상리를 거쳐 저곡리와 인평리로 가는 시내버스 노선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연혁】
비중리는 본래 청주군(淸州郡) 산외일면(山外一面) 지역으로, 비홍리(飛鴻里) 중 가운데에 해당하므로 비중리로 불렸다. 영조 후반(1750~1776)에는 비홍리와 관청암리(官廳巖里)로 되어 있었으나, 정조 13년(1789)에 비홍리가 비홍상리(飛鴻上里)와 비홍중리(飛鴻中里)로 분리되었다가, 헌종 11년(1845)에 다시 통합되어 비홍리로 환원되어 고종대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고종 8년(1871)에 저곡리(楮谷里)가 새로 이루어졌다. 1910년 경술국치 직전 비홍리가 비상리(飛上里)․비중리(飛中里)․비하리(飛下里)로, 관청암리가 관동촌리(官東村里)와․관암리(官岩里)로 다시 분리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저곡리 일부를 저곡리와 비상리로, 비상리․비중리 일부를 비상리로, 관동촌리 일부를 비중리로, 관암리 일부를 세교리(細橋里)로 넘겨 주고, 비중리(飛中里)라 하여 북일면(北一面)에 편입되었다. 북일면은 2000년에 내수읍(內秀邑)으로 승격되었다.
(1) 양지편(陽地-)
‘양지편’은 비중리의 중심 마을이다. ‘양지편’은 양지쪽에 조성된 마을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양지편을 비롯한 비중리는 안정나씨(安定羅氏)의 세거지이다. 안정나씨는 공민왕 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오르고, 공민왕 19년(경술년 1370) 공을 세워 안정백(安定伯)이 되었으며, 다시 안주군(安州君)에 봉해진 나천서(羅天瑞)를 시조로 삼는다. 공의 5대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충정공(忠貞公) 나사종(羅嗣宗: 세종 22년 庚申 1440~成宗 22년 辛亥 1491)이 이 마을에 이거한 이래, 현재 공의 18대손까지 세거하고 있다. ‘비홍(飛鴻)’이란 제목으로 시심(詩心)을 폈던 이 마을 출신 시인에 나기창이 있다.1)
비홍(飛鴻)
화강(華崗)
비홍 고을 이름은
기러기가 많이 날아서인가
모양이 그처럼 생겨서인가
구백여 년 전 동파거사
허허론 마음처럼
눈 진흙 위에 발자국 남겨서인가
홍계(鴻溪) 홍파(鴻坡) 홍포(鴻浦)
홍북(鴻北) 홍양(鴻陽) 홍정(鴻庭)
선인(先人)의 자취가 아득한데
머물던 기러기들은
북에서 온 것은 아니로되
모두 북망산(北邙山)으로 갔구나
뉘 또한 천 년 후
희미한 발자국 보고
화강(華崗)이 어디로 갔나 알아볼까
비상(飛上)하는 기러기
아는 듯 모르는 듯
대답이 없다
1) 나기창 시인은 호가 화강(華崗)으로, 현재 충북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4년 가을, 계간지 『미네르바』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 엉고개
‘엉고개’는 양지편에서 화양들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이다. 지금의 길이 닦여 있다. 예전에는 부근에 성황당이 있었다. ‘엉고개’는 ‘엉’과 ‘고개’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엉’은 두 가지로 다르게 해석된다. 첫째는, ‘엉’을 ‘낭떠러지’의 방언형 ‘엉’으로 보는 견해이다. 따라서 ‘엉고개’는 ‘낭떠러지가 있는 고개’가 된다. 둘째는, ‘엉’을 ‘어은’의 변화형으로 보는 견해이다. ‘어은고개’에서 ‘ㅡ’가 생략되어 ‘언고개’로, ‘언고개’가 연구개음화에 의해 ‘엉고개’로 될 수 있다. 그런데 ‘어은’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어은골’이 대부분 ‘은골’과 함께 쓰임을 볼 때, ‘엉고개’ 또한 ‘은고개’와 대응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엉고개’는 ‘숨은 고개’로 해석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엉고개’는 그 자체를 원형으로 보아 ‘낭떠러지가 있는 고개’로 볼 수도 있고, ‘어은고개’의 변화형으로 보아 ‘숨은 고개’로 볼 수도 있다.
○ 느티나무고개
‘느티나무고개’는 양지편 홍양사 옆에서 역재들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에는 과거 매우 오래 묵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20여 년 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그 자리에 느티나무를 다시 심어 놓았다.
○ 영하천(靈下川)/벌말내
‘영하천’은 우산리 97번지 인평저수지에서 발원하여 비중리 201-1번지 우산교 부근에 이르는 2.3km의 소하천이다. ‘영하천’은 영하리에 기대어 붙은 이름이다. 이 내는 양지편 복동쪽 벌말을 흘러 우산교 근방에서 초정천과 합류한다. 이 내는 달리 ‘벌말내’로도 불리는데, 이는 벌말을 통해 흐르기에 붙은 이름이다.
○ 벌말
‘영하천’은 하류에 형성된 들로, 동쪽으로는 개와대들이 이어진다. ‘벌말’은 ‘벌’과 ‘말’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벌’은 ‘벌판’을, ‘말’은 ‘마을’을 뜻한다. 따라서 ‘벌말’은 ‘벌판에 형성된 마을’로 해석된다. 그런데 본 예 ‘벌말’은 마을 이름이 아닌, 들 이름으로 쓰였다. ‘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구성1리 ‘웃말’을 참조하기 바란다.
○ 마다리들
‘마다리들’은 서쪽, 내수문화마을 북동쪽에 이어진 들이다. ‘마다리들’은 ‘마다리’와 ‘들’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마다리’는 다시 ‘마’와 ‘다리’로 나뉜다. ‘마’는 ‘마(馬)’로 ‘말’을 뜻한다. ‘말’은 ‘말개’․‘말거리’․‘말고개’․‘말골’․‘말굴’․‘말마루’․‘말둠벙’․‘말미’․‘말바우’․‘말배미’․‘말우물’․‘말재’․‘말터’ 등에서 흔히 발견되는 전부요소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말[馬]’과 관련된 유래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국에서 발견되는 모든 ‘말’계 지명들이 ‘말’과 관련될 수는 없다. 여기서 ‘말-’은 접두사로, ‘일부 명사에 붙어 큰 것임을 나타내는 말’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말-’은 ‘말거미’․‘말냉이’․‘말다래’․‘말매미’․‘말벌’․‘말조개’ 등 지명외에도 쓰여 큰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리’는 ‘들’의 변화형이다. 지명에서 ‘들’은 ‘달’․‘덜’․‘돌’․‘뜰’․‘틀’ 등으로 나타나는데, ‘달’에 접미사 ‘-이’가 붙어 ‘다리’로도 실현된다. 그렇다면 ‘마다리’는 ‘큰 들’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다리들’은 여기에 다시 ‘들’이 붙은 어형이니, ‘들’이 유의중복된 어형이다. ‘마디리들’의 뜻은 ‘마다리’와 같이 ‘큰 들’이다.
○ 뱅경재
‘뱅경재’는 비상초등학교 뒤에서 마다리들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이다. ‘뱅경재’는 ‘뱅경’과 ‘재’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뱅경’이 쓰인 지명은 전국에서 본 예뿐이다. 따라서 어원 파악이 매우 어렵다. 다만 ‘뱅경’의 ‘뱅’은 ‘뱀’과 관련될 가능성이 크다. ‘뱀’이 ‘경’의 ‘ㄱ’ 영향으로 연구개음화를 일으켜 ‘뱅’으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뱅경재’는 ‘뱀’과 관련된 고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 화양들(華陽-)
‘화양들’은 통뫼들 북쪽에 이어진 들이다. ‘화양들’은 ‘화양’과 ‘들’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화양’이 붙은 지명이 많은데, 대부분 ‘아름답고 볕이 좋은 곳’으로 설명한다. 이는 ‘화양’을 한자어 ‘화양(華陽)’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따라서 ‘화양들’은 ‘아름답고 볕이 좋은 들’로 해석된다.
○ 화양방죽(華陽-)
‘화양방죽’은 화양들을 적시던 방죽이다. ‘화양방죽’은 화양들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논으로 개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 구렛들
‘구렛들’은 통뫼들 북쪽에 이어진 들이다. 깊숙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구렛들’은 ‘구레’와 ‘들’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결합된 어형이다. ‘구레’는 ‘구렁’과 같은 말로, ‘낮아서 물이 늘 괴어 있는 땅바닥’을 말한다. 이 ‘구레’나 ‘구렁’은 들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데, 때에 따라서는 ‘들’을 덧붙여 ‘구렛들’ 또는 ‘구렁들’로도 쓰인다. 따라서 ‘구렛들’은 ‘낮아서 물이 늘 괴어 있는 들’로 해석된다.
○ 비중리마을회관(飛中里-會館)
‘비중리마을회관’은 비중리 96-1번지에 소재하는 회관으로, 1993년에 완공되었다.
(2) 행정(杏亭)
‘행정’은 양지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행정’은 오래 묵은 은행나무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 은행나무(銀杏-)
‘은행나무’는 수령을 알 수 없는 거목이다. 암수 두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수은행나무는 암은행나무에 비해 배 이상으로 굵다. 수은행나무에 원인 모를 화재가 난 적이 있으나, 다시 소생하여 지금도 암은행나무에 열매를 맺게 해 준다. 마을 이름도 이 은행나무에 기인해 붙은 것이다.
○ 통뫼(桶-)/동그락산(-山)
‘통뫼’는 행정 서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산이다. ‘통뫼’는 ‘통’과 ‘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통’은 ‘통(桶)’으로, ‘어떤 물질을 담을 수 있도록 나무․금속․플라스틱 등으로 깊이가 있게 만든 물건’을 뜻한다. ‘뫼’는 ‘산(山)’을 뜻한다. 따라서 ‘통미’는 ‘통을 엎어 놓은 듯 동그렇게 생긴 산’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 산은 달리 ‘동그락산’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산 모양이 동그랗게 생겨 붙인 이름이다.
○ 통뫼들(桶-)
‘통뫼들’은 통뫼 근방에 형성된 들이다. ‘통뫼들’은 이 들이 통뫼 부근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 개방죽
‘개방죽’은 통뫼들에 있던 조그마한 방죽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방죽’은 ‘개’와 ‘방죽’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개’는 ‘물이 드나드는 곳’을, ‘방죽’은 ‘물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쌓은 둑’을 말한다. 따라서 ‘개방죽’은 ‘물이 드나드는 곳 가까이에 있는 방죽’으로 해석된다. 이 방죽은 역재개울 가에 있는데, 이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3) 선돌거리/입석가(立石街)
‘선돌거리’는 행정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삼국 시대 절터가 남아 있다. 이 절터의 느티나무 주변에는 와편(瓦片)이 산재하고, 거대한 바위더미로 된 구릉지(丘陵地)에는 일광삼존석불(一光三尊石佛)과 석불입상(石佛立像) 및 광배(光背)가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 일광삼존석불과 석불입상을 쉽게 선돌이라 부르는데, 이 때문에 붙은 이름이 ‘선돌거리’이고 이를 한자화한 것이 ‘입석가(立石街)’이다. 현재 선돌거리 가운데로 내수리-초정리 도로가 넓게 놓여 있다. 따라서 길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이면(北二面) 건재 선돌거리’이고, 남쪽은 ‘내수읍(內秀邑) 비중리(飛中里) 선돌거리’이다.
○ 돌바위
‘돌바위’는 비중리 삼존불상 옆에 있는 큰 바위이다. 돌바위는 '돌'과 ‘바위’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돌’은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돌’을 ‘돌[石]’로 보아, ‘돌바위’를 유의중복형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는 좀 어색해 보인다. 둘째는 ‘돌’을 ‘도랑’으로 보아, ‘돌바위’를 ‘도랑가에 있는 바위’로 보는 견해이다. ‘도랑’의 중세국어는 ‘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바위 옆에는 마을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이 있다. 셋째는 ‘돌’을 ‘들’의 변화형으로 보아, ‘돌바위’를 ‘들에 있는 바위’로 보는 견해이다. 지명에서 ‘들’은 ‘달’․‘덜’․‘돌’․‘뜰’․‘틀’ 등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 메주고개
‘메주고개’는 현재 농협초정식품 옆의 고개이다. 과거 이 고개를 넘어 세교리 신장터로 가곤 했으나, 지금은 내수리-초정리 지방도가 닦여 있다. 전언에 의하면, 예전에 반란을 일으킨 역적들을 관군들이 이 고개에서 메주 밟듯 밟아 죽였다 한다. 전국적으로 ‘메주’는 ‘메주고개’를 비롯하여, ‘메주가마터’․‘메주개’․‘메주골’․‘메주논’․‘메주매기’․‘메주바우’․‘메주배미’에서와 같이 전부요소로 자주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메주처럼 생겼다’거나 ‘메주장사가 살았다’는 유래담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메주 모양의 고개’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추정하건대, 이 고개는 세교리 장터에 이르는 고개이니, 메주장사들이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붙은 지명이 아닌가 한다.
○ 메주고개산(-山)
‘메주고개산’는 현재 농협초정식품이 들어 앉은, 나지막한 산이다. ‘메주고개산’은 메주고개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이 산 밑으로는 역재들이 이어진다.
○ 역재들(驛-)
‘역재들’은 메주고개산 서쪽에 이어지는 넓은 들이다. ‘역재들’은 ‘역재’와 ‘들’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역재’는 지역에 따라서는 ‘역티’와 함께 쓰이기도 하는 바, ‘역 부근에 있는 고개’로 이해된다. 따라서 ‘역재들’은 ‘역 부근 고개에 있는 들’로 풀 수 있다. ‘역(驛)’은 ‘나라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공무로 다니던 관리들에게 말과 숙소를 제공하며, 사신을 영접하던 일종의 교통 통신 기관’을 말한다.
○ 역재개울(驛-)
‘역재도랑’은 역재들을 적시는 긴 도랑이다. ‘역재개울’은 역재들을 적시기에 붙은 이름이다. 이 내는 비홍저수지에서 발원하여 비중교까지 이어지는데, 전에는 이곳에 풀이 무성하여 소 꼴밭으로 이용되던 곳이다.
○ 비홍교(飛鴻橋)
‘비홍교’는 역재개울 중간에 있는 다리이다. ‘비홍교’는 과거 마을 이름 비홍리에 기대어 붙은 이름이다.
○ 비중교(飛中橋)
‘비중교’는 내수리-초정리 도로에 있는 다리이다. ‘비중교’는 비중리에 기대어 붙은 이름이다.
이 다리는 1974년 6월 20일에 완공되었는데, 역재개울 물이 비중교를 지나 석화천에 합류한다. 바로 옆 석화천에는 2000년 7월 29일에 완공된 석화교(石花橋)가 있다.
○ 갱변재
‘갱변재’는 역재도랑을 따라 이어진 긴 등성이이다. 과거에는 풀이 많아 소에게 꼴을 뜯기던 곳이나 지금은 길로 개발되었다. ‘갱변재’는 ‘강변재’의 변화형이다. ‘강변재’는 ‘강변’과 ‘재’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강변’은 ‘강변(江邊)’으로 ‘강 변두리’를 뜻한다. 따라서 ‘갱변재’는 ‘강 변두리에 있는 고개’로 해석된다. ‘갱변재’는 이 등성이가 역재도랑 변두리에 조성되어 붙은 이름이다.
(4) 내수문화마을(內秀文化-)
‘내수문화마을’은 1997년 10월 1일~1999년 5월 9일에 청원군에서 발주한 마을이다. 조성 면적은 62.652㎡로, 모두 72호 건축 계획으로 분양되었다.
○ 국계서원(菊溪書院)
‘국계서원’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눌재(訥齋) 박증영(朴增榮)․백음(栢陰) 변경복(卞景福)․이유당(怡愉堂) 이덕수(李德洙)․농계(聾溪) 이수언(李秀彦) 4현(四賢)을 배향한 서원으로, 비중리 165-2번지에 있다. 국계서원은 본래 국동리(菊洞里)에 건립되었는데, 숙종 27년(1701)에 착공하여 숙종 30년(1704)에 준공되었다. 향사(享祀)를 계속하던 중 고종 8년(1871)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것을 1960년 백음의 후손 변영설 씨가 배향된 4현의 후손들과 상의하여 사재(私財)로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 홍양사(鴻陽祠)
‘홍양사’는 안정나씨(安定羅氏) 일문(一門)의 충절, 효행, 학덕이 역사상 뚜렷한 나천서(羅天瑞)․나사종(羅嗣宗)․나식(羅湜)․나숙(羅淑)․나만갑(羅萬甲)․나양좌(羅良佐) 여섯 분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비중리 110-1, 110~3, 110-4번지에 있다. 1970년 나씨종친회에서 발의되어 경향 유지들의 찬동으로 받아 1978년까지 3차례 국비 보조와 3차례 도․군비 보조를 받아 완성하였다. 특히 경내에 있는 충신문(忠臣門)과 삼세충효문(三世忠孝門)은 1977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후손 및 지방인의 충효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 비중리삼존불상(飛中里三尊佛像)
‘비중리삼존불상’은 비중리 절터에서 발견된 석조일광삼존불상(石造一光三尊佛像)이다. 하나의 광배(光背) 안에 3구(三軀)의 불상을 함께 부조(浮彫)한 것으로, 현재 이 불상은 4조각으로 파손된 것을 복원하여 놓았다. 본존(本尊)의 몸통과 머리 부분이 분리되고 우협시보살상(右脇侍菩薩像)이 떨어져 나간 것을 수습하여 접합하였으나 좌협시보살상(左脇侍菩薩像)은 아직 찾지 못하였다. 이 불상은 삼국시대인 6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이라는 데 학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으나, 고구려․백제․신라 가운데 어느 소속인지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신라 불상으로 보는 설이 역사지리적인 환경이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1978년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1982년 12월 17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비중리삼존불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유적’을 참조하기 바란다.
첫댓글 황제 고향입니다
ㅠㅠㅠ 나~다음달에 집에갈겨!
오거든 연락해 황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