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16차시 합평자료(6월 24일 용)
1. want와 like /남경수5
1 남들이 가진 게 부러워 보여도 실제로 내가 경험해보면 즐겁지 않은 게 있다. 그건 가질 수 없어서 갖고 싶었던 것이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2 want는 나만 안 가지고 있을 때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거나 기억하거나 떠올려지는 게 아니라 남과 비교할 때 쓰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풍선을 가지지 못했을 때 풍선을 가진 사람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지만 그런 사람을 안 보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like는 그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거나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원했지만 좋아하지 않으면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 없다.
3 우리는 뭔가를 잃었을 때만 그 존재를 깨닫는다. 가지고 있을 때는 절대로 느끼지 못한다. 잃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4 직장을 1년간 쉰 적이 있었다. 건강도 좋지 않았고 쉼 없이 달려 온 인생에 안식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직장 생활하며 못 해 본 것들을 실컷 하리라. 평일에 경주나 해운대에 놀러 가보기, 오전에 대공원 걷기, 이웃 아줌마들과 수다 떨기, 집안 살림 잘하기 등 직장 생활하며 늘 마음 한 구석에 부러움과 아쉬움으로 남아 있던 것들이었다.
5 화창한 봄날이나 은행잎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에는 출근하다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이 참 많았다. 싱그러운 아침에 커피 한 잔 들고 여유로운 공원 걷기는 내 로망이었다.
6 처음에 한두 번 정도는 정말 좋았다. 주말에 늘 북적이는 시간에 올 수 있었던 곳을 주중에 가니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 이런 게 사는 거지 ’ 커피도 마시고 길도 걷고 햇빛은 찬란하게 빛나고, 바다는 한없이 푸르렀다.
7 그런데 웬걸 두세 번 하고 나니 재미가 없어졌다. 1년에 몇 번 안 하던 쇼핑을 여러 번이나 했는데 더 피곤했다. 이야기는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슬슬 시간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오전에 대공원이나 태화강 걷기도 처음엔 신이 났지만 곧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집안 살림도 직장 다닐 때랑 별반 차이가 없었다. 실내 장식도 그저 깔끔하게 비어 있는 공간이 더 좋고 꾸미거나 장식하는 것은 내 성향상 맞지 않았다. 장아찌류 몇 개 담고 물김치에 도전한 거 외에는. 이웃 아줌마들과의 수다도 점점 시계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8 어학 공부나 음악 감상 같은 취미생활도 재미는 있었지만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참여할 때는 즐거웠으나 안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9 아이한테 더 신경 써야지 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아들은 엄마가 그때 집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학교 갔다가 학원 갔다 오면 엄마가 집에 있는 상황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10그때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사회생활을 좋아하는 인간이고 의미 있는 일을 좋아하는지를. 늘 피곤하다, 힘들다, 여유가 없다고 불평불만을 했었는데 그렇게 살아야 행복한 인간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집안일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는 것도, 먹는 것 하나만 챙기고 다른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효율적인 삶을 추구하는 게 나였다.
11)12월쯤 되니까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호떡을 구워 팔더라도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 집에서 살림만 하고 살 팔자는 못 되는 거였다. 그건 내 것이 아닌 것이다. 단지, 그런 삶을 부러워한 것이었지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오랜 시간 직장인의 삶을 살아서, 그 습관이 몸에 붙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게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12다음 해 복직하면서 얼마나 직장 생활이 행복해졌는지 모른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원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바쁘고 힘든 상황을 견뎌내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다. 단지 좀 힘들다고 징징대기는 한다.
2.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백복순 3)
1.엄마 나이 마흔여섯에 내가 태어났다. 엄마와 아버지의 나이 차이는 열한 살이나 된다. 가끔 연예인들의 늦둥이 출산 뉴스를 제외하면, 여태까지 나만큼 늦은 늦둥이는 보질 못했다.
2.우리 엄마는 유난히 아들을 좋아했다. 먼저 아들 둘을 낳고 내리 딸 넷을 낳았는데, 둘째 오빠가 다 커서 사고로 떠난 후 기어이 오빠와 스무 살 차이 나는 나를 낳았다. 애석하게도 또 딸이었다. 그 나이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낳았는데 딸이라 속상하셨겠지만, 어린 시절 내내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부모님을 둔 나의 속상함도 만만치 않았다.
3.이름이라도 좀 무난하게 지으시던가..
할아버지 같으신 아버지는 내 이름을 “백복순”으로 지었다. 뜻을 따지면 이보다 좋은 이름이 있을까 싶지만, 이름을 얘기할 때면 언제나 자신이 없었다. 아들과 딸의 차별이 하늘과 땅만큼 큰 시골 마을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딸은 배움이 적을수록 좋았고, 그저 시집만 잘 가면 된다 생각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손녀 같은 어린 딸의 이름을 이렇게 막 지어셨나보다 하고 생각할때도 있었다.
4. 내가 열네 살 때 엄마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결혼이 임박한 넷째언니와 지냈는데, 아버지는 내가 집에서 가까운 상고에 진학하여 계속 시골에 같이 살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 원서에 아버지 도장을 몰래 찍어서 제출했고, 화가 나서 못참으신 일흔네 살 아버지는 고운 한복에 회색 두루마기, 하얀 중절모를 쓰고 읍내 중학교에 찾아오셨다. 담임선생님도 아닌 교감 선생님을 직접 만나서 인문계 공부를 시킬 형편이 안 되니 원서를 취소해 달라는 이유다...
5.내 고집대로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얼마지 않아 넷째언니가 시집을 갔다, 자취하면서 주말마다 시골집에 가서 아버지 식사, 빨래를 책임지는 나를 볼모로 아버지는 오빠 집으로 거처를 옮기길 거부하셨다. 내가 울산으로 대학진학을 하고 나서야 오빠 집으로 오셔서, 81세까지 아주 단정하시고, 깔끔하신 모습으로 사시다 돌아가셨다.
6.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에 얌전히 있다가 시집이나 잘 가길 원하셨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늦둥이 딸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밝혀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
7.촌스러운 것 둘째치더라도 성과 이름을 합쳐 부르려면 여간 단단히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직장에서 매번 걸려온 전화마다 이름을 밝힐 때는 또박또박 한글자씩 몇번씩 말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머리 밑이 뜨끈해진다. 그래봤자 한번에 알아듣고 성과 이름을 붙여서 똑바로 불러주는 경우는 드물다.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크게 난처했던 기억이 없었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이름에 대한 그런 화끈거림이 자주 발동됐다.
8. 그래서 나는 신규직원 명단이 게시되면 유심히 본다.
작년 이맘때 명단에서 “복스럼”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한숨이 나왔다. 내 이름처럼 촌스럽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예사롭지도 않았다.
그 직원이 이름을 밝힐때마다 겪는 난처함을 누구보다도 난 잘 알기 때문이다.
복스럼이라는 직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복소윤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말았다.
9.예전에는 우리 6남매가 모이면 언제나 너무나 일찍 안타깝게 돌아가신 엄마얘기를 많이 했는데, 차츰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버지로 바뀌었다. 매사에 정확했고, 물 한 방울, 쌀 한 톨에도 그냥 지나침이 없었으며, 특히나 자식들을 혼낼때 쓰는 풍자적인 화법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10.젊으실 때는 서울에서 일을 하시다가 쉰이 넘으셔서 고향에 오셔서, 마을 대소사에는 항상 중심에 서 계셨던 아버지다. 진짜 노인이 되시고는 군 전체 경로회장을 하시면서, 예산을 지원받아 경로당을 새로 지으실 만큼 이치에 밝으시고 현명하신 아버지셨다.
11.그런 아버지가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늦둥이 막내딸이 태어났을 때, 어떤 마음으로 이름을 짓고, 어떤 마음으로 키웠을까..혹시 아버지도 나처럼 당황하진 않았을까...
어쩌면, 내 늙은 아버지는 너무나도 늦은 막내딸과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없다는 예감으로, 평생 그저 복많이 받고 순하게 살아가기를 이름 석자에 담았을 수도 있다.
12.길을 걷다가 자그마한 체구에 깔끔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어르신을 마주치면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 엄마와는 또 다른 그리움이다. 세련미나 우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내 이름이지만, 예전도, 지금도, 앞으로도 개명하지 않는 마음과 비슷하다.
3. 여름 가방/김옥수4
1)초여름 어느 날, 평소보다 이른 점심을 먹고 어머님은 1층, 나는 이층에서 독서 중이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2)“국제시장 안 갈래?”
3)“뭐 살라꼬?”
4)“딱히 살 건 없는데, 여름 옷 구경도 하고 함 가보자.”
5)시계를 보니 4시간 정도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아들이 유치원에서 귀가할 때 어머님이 마중을 나가주시기만 하면. 친구 집에서 광복동까지 20분, 나는 걸어가도 10분, 지금 바로 준비해서 나가면 되겠다.
6)“알았다. 1시, 미화당 앞에서 보자.”
7)바로 아래층으로 갔다.
8)“어무이, 보수동 사는 친구가 지금 국제시장 간다꼬 같이 가자네예. 3시에 ‘양이’만 받아주시면 돼예.”
9)“뭐 살 꺼 있나?”
10)“여름 가방이 없어서예.”
11)어머님은 돋보기 위로 나를 올려다보시며, 물었다.
12)“와, 가방이 덥다 카더나?”
13)잠시 할 말을 잊었다.
14)“아무래도 여름에 가죽가방은 좀 더버 보인다 아입니꺼.”
15)“퍼뜩 온나.”
16)귀가하는 내 양손에는 반찬거리와 국제시장 옆 깡통시장에서만 살 수 있는 과자가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날 이후, 예쁜 여름가방이 눈에 띌 때마다 “와, 가방이 덥다 카더나?”하시던 어머님이 생각나 웃음이 난다.
17)지금도 여름가방이 없다.
4. 무말랭이와 패션쇼/이명조3
일요일 아침이다. 햇살이 사택 창문을 뚫고 들어 와 있다.
오늘은 뭘 할까? 어디로 갈까? 11월 말의 작은 시골 학교 교정은 수확 끝낸 논바닥처럼 심심하다.
‘그래 상주시내에 가자. 오랜만에 도서관에도 가고, 선크림도 사고, 사과도 사고, 시 금치도 사야겠다.’
작정을 하고 나니 갑자기 바빠졌다. 급히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세수를 했다. 그리고 먹다 남은 미역국 데워 식은 밥 말아먹고 버스시간에 맞춰 막 집을 나서려는데
‘아! 수진이 무우말랭이!’라는 생각이.다시 발길을 돌려 부엌으로 가서 크고 검은 비닐에 싸인 무우말랭이를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무우를 굵게 채 썰어 실에 꿴 것이었다. 말려 무말랭이반찬으로 먹으라고 며칠 전 학예발표회 전날 수진이가 갖다 준 것이다. 그 동안 정신없이 바빠서 그냥 부엌 한구석에 쳐 박아 놓았다. 마당 빨랫줄을 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볕에 말려야 되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학예회 때 수진이 어머니가 그녀의 딸과 꼭 닮은 수줍은 미소를 얼굴에 그리며
“저! 우리 수진이가요 우리 집에서 무말랭이 할라꼬 동네아지매들이 모여 함께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선생님 드린다며 한뜸한뜸 무시조각을 실에 끼데예. 누가 손에 쥐가 나면서까지 그래 길게 길게 무시타레를 만드라꼬 시킸능교! 부끄럽지도 않은 지 그걸 들고 학교에 가능기라요.” 하며 누가 볼세라 교실 구석에 슬쩍 두고 갔다.
빨랫줄에 널어보니 길이가 10m는 더 되어 보였다. 골고루 마르고 빨랫줄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 긴 무우채 타레를 빨랫줄에 칭칭 감았다. 서로 겹치지 않게 펴서 군데군데 빨래집게까지 집어놓고 대문을 나왔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가는 상주행 버스 안에서 문득 유난히 무말랭이반찬을 좋아하는 둘째 아들 녀석이 떠올랐다. 그 녀석만 생각하면 언제나 내 얼굴엔 까닭 모를 미소가 피어오른다. 며칠 전 학예회를 무사히 치른 안도감과 함께 두 개의 출연작품 중 한 종목인 패션쇼를 성공리에 끝나게 해준 아들 생각이 나며 무척 보고 싶었다.
사실 학생이라야 고작 전교 94명인 이 시골 학교에서는 학예회란 행사가 교사에게 실로 큰 부담이었다. 특히 23년을 놀다가 54살에 늦은 복직으로 실력도 경력도 부족한 나에게는 정말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작년에는 지난 날 울산에서 같이 근무했던 김선생이 손수 비디오 촬영한 자료를 보내 주어서 무용도 했는데, 올해 또 부탁할 염치도 없고 해서, 궁리 끝에 일본 동경에서 자칭 근로 장학생노릇을 한다며, 패션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에게 급히 S. O. S.를 쳤다.
그 후 두 번에 걸친 아들의 편지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용기를 주었다.
“패션쇼를 한다.... ᄋ_ᄋ; 제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패션쇼 이야기를 하자면
컨셉은 by myself 이구요. 홀로 뭐..이런 뜻이고요. 거기에 기승전결이 있어요.
첨에는 음악이 빠르다가 중간은 느린 음악으로 약간 음악이 빨라지다가 마지막은 항 상 패션쇼가 그렇듯이 웨딩으로 끝나고요. 컨셉별로 그룹 나눈 뒤에 애들한테 디자 인화 받고, 옷 받고, 무대 만들고 등등.
어머니가 계획하는 패션쇼는 일단 애들이 나오니깐 더 재미나게 할 방법도 많을 꺼 같아요. 방금 말한 형식으로, 막내라는 컨셉이라면, 언니에게 옷을 물려받는다. 그 래서 옷이 다 크다. 어깨선이 하나도 안 맞고, 그런 식으로 등등... .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 라는 컨셉이라 해도, 옷은 약간 크게 되거나, 아니면 화동초니까 화동의 아이들이라는 컨셉으로 상주 화동의 아이들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온다거나, 산길옆 야생화을 들고 나온다거나, 저는 담백한 모습으로 했으면 좋겠는데요. 애들이 옷을 만들 수는 없는거구, 으음! 있는 옷으로 해야 한다면, 무언가 재미를 부여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그리고 제가 복장과 쪽이 아니라서, 옷을 만들거나 옷에 관한 소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아님 옷에 무언가를 붙 인다? 희노애락을 표현한다? 희라면 바다, 들판, 파란색, 하늘색, 아님 애들의 옷에 낙엽이나 꽃이나 열매를 붙인다? 아! 일단 자유 연상을 계속 해 봐야겠어요. 그리고 어머니도 지금 상황같은 거 메일로 보내주세요.”
그리고 두 번째 편지 내용
“저예요 재밌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좋은데요 잘 될 꺼 같아요 빠른 시일 내로 저도 패션쇼에 쓸 음악 CD로 구워서 보내드릴께요 그리고 늦둥이 막내라서 오히려 정말 비싼 옷도 입는 그런 아이도 중간에 하나씩 있으면 재미있을 꺼 같아요. 이런 것도요 위에 줄줄이 낳은 딸 일곱에 겨우 얻은 아들! 그리고 시대적인 차이를 좀 두 어도 괜찮을 꺼 같고요 그 옛날 가난했던 시절 물려입던 옷들은 많이 컸잖아요? 나 중에 또 매일 쓸게요~ᄏ”
아들의 조언대로 패션쇼 컨셉을 ‘막내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로 정했다. 우선 무대도 패션쇼하기 불편하고, 조명도 없고, 여기는 아무래도 시골이라 막상 컨셉에 맞는 옷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웨딩 컨셉에 필요한 턱시도나 드레스도 백화점도 아동양복점도 없는 시골 상주라 구하기도 어려워 생략하고, 그냥 계절별로 造花를 사서 붙이거나 손에 들게 했다. 그리고 구 시대 이미지도 필요해서 근처 귀촌한 예비부부를 찾아 계량 한복도 빌렸다. 일본에 있는 아들이 보낸 CD로 배경음악도 준비했다. 그러나 준비할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소품. 즉 스카프, 머플러, 모자, 신발, 머리핀, 목거리 등을 누구에게 어떻게 사용하 여 빛을 낼 것인가?’ 하는 걱정도 일었다.
무엇보다 임시로 꾸민 급식소 무대라, 패션쇼하기에는 폭은 넓고 행진할 길이는 짧았다. 그래서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와 무대 중앙 관중석 바로 앞에서 시간을 좀 끌며 각자 재미있는 모션을 하나씩 연출하여 포인트를 잡기로 아이디어를 내보았다. 그리고 한 번은 그냥 모션만 취하며 걷고, 또 한 번은 부채나 계절에 맞는 갖가지 꽃 또는 복주머니들을 들고 왕복으로 걷기로 하였다. 남학생은 그런 대로 복주머니를 돌린다거나 게다리 춤을 춘다는 둥 곧잘 하는데, 여학생들이 수줍어해서 모션이 취해지지 않아 어색했다. 그러나 수 십 번의 반복 연습 끝에 나름대로 귀엽고 자연스러워졌다. 드디어 학예회 당일 프로그램 순서에, 우리 반이 첫 인사 다음 바로 이어 진행되었다. 그래서 더욱 긴장되었다. 그러나 염려와는 달리 다들 음악에 맞춰 씩씩하게 걸으며 나름 잘 해 내었다.
나중에 리베라소년합창단의 상투스란 곡이 신비스럽게 은은히 흘러나오며, 히든카드로 숨겨 논 네 쌍의 꼬마 신랑신부가 서로 팔짱을 끼고 한복, 양복, 다소 코믹하게 걸친 농군복, 빨간 모자와 발랄한 평상복으로 폼 나게 차려입고서 서서히 무대에 등장하자 학부모들은 모두 크게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야말로 인기가 짱이었다. 게다가 우리 반 학부모들은 전원 다 참석했으니 더욱 성원이 대단했다. 사진도 찍고 심지어 비디오 촬영도 하는 열성파 엄마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학년의 공연도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왔다. 특히 ‘이것이 인생이다’와 ‘엉터리 병원’이란 연극은, 모두 배를 잡고 웃기도하고, 유치원의 ‘아기공룡둘리’와 일학년 ‘꼭두각시’무용은 아이들의 실수가 귀엽고 재미있어 박수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다른 프로들 모두 베테랑 교사답게 잘 꾸려서 훌륭했다. 50대 복직 노교사인 나는 새삼스레 그들이 부러웠다.
나는 이 패션쇼를 준비하면서 근 30년 전 새네기 교사 생활하던 풋풋한 시절로 되돌아간 듯 참으로 가슴 설레었다. 또한 우리 반 아이들이 반짝이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쇼 음악 멜로디를 외워 흥얼거리며 따라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 벅차기도 했다. 그리고 게 중의 몇몇 여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코디를 해서 옷은 물론 모자, 스카프, 장식품들을 서로서로 안배해서 교사인 나보다 더 감각 있게 서로를 꾸미곤 했다.
그리고 어느 책에선가 본 하루끼의 독백처럼 "나를 위한 모닥불을 찾아 낼 수 있다. 어떤 때는 그것이 아담하고 친밀한 모닥불이고, 어떤 때는 하늘을 찌를 듯이 거대하게 넘실대는 화톳불이다. 그리고 나는 다양한 형태의 모닥불 앞에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라는 글이 생각났다.
수진이가 정성껏 실에 꿰어 준 무말랭이로 만든 반찬을 맛있게 먹을 아들생각도 곁들이니 어느 새 덜덜거리는 상주행 버스가 추풍령보다도 높다는 신의터 재를 넘고 있었다.
5. . 쑥 뿌리를 뽑으며 / 박명화2
1. 자원봉사 하러 간 곳에서 화단의 잡초를 제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잔디를 심어 놓았지만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하여 다른 꽃을 심는다고 하였다. 별로 풀이 많지 않아 보여 수월하게 끝낼 것으로 예상하였다.
2. 화단이 높고 비탈져서 발을 디디기가 불편하였다. 일 의자를 다리에 끼고 앉아 호미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돌과 자갈은 골라내어서 화단 끝으로 던져 모았다. 드문드문 나 있는 잔디는 호미를 깊이 넣어 파내어 위쪽으로 던져 놓았다. 다른 곳으로 옮겨 심을 것이라 하였다. 잔디와 비슷하게 생긴 잡초는 수월하게 뽑혔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쑥이었다.
3. 쑥을 맛있게 먹은 경험만 있었지 쑥을 뽑아 버리는 일은 처음이라 잠시 머뭇거렸다. 해마다 봄이 되면 쑥을 캐는 것으로 봄맞이를 하며 행복해하던 나였다. 작년에 쑥을 캐던 자리를 기억해 놓았다 찾아가면 어김없이 새파란 쑥이 나를 반겨주었다. 쑥의 강한 생명력이 내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4. 이렇게 쑥을 캐며 행복해하고 힘을 얻던 내가 쑥을 제거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수밖에.
5. 애기 손가락만한 쑥을 잡고 살살 흔들며 뿌리를 빼보았다. 깔끔하게 뿌리가 뽑히지 않고 중간에 뚝 끊겨 버렸다. ‘허, 이것 봐라‘ 하면서 호미로 남아 있는 뿌리를 마구 파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땅위에 보인 것은 쑥 하나였는데 땅 밑에는 촘촘히 얽혀 있는 뿌리가 버티고 있었다. 순간 ’오늘 작업이 많이 힘들겠군.‘ 하는 생각과 함께 나의 머리를 스치는 한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쑥대밭‘이라는 말이었다.
6. '태풍으로 어느 지역이 쑥대밭이 되었다.’ 처럼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쓰던 표현이 아니던가. 이제야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깨달았다. 얽히고설킨 쑥 뿌리는 깊게 또 아주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촘촘하게 뿌리가 얽혀 있어 그 위에 다른 작물을 심어도 제대로 뿌리내릴 수 없을 것이 충분히 짐작되었다.
7. 시골에서 자랐고 부모님도 농사를 지었지만 쑥이 농사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뿌리가 완벽하게 없어지지 않는 한 다음해 봄이 되면 어김없이 고개를 내미는 쑥의 뿌리 깊은 생명력이 농부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될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8. 어떤 사람들은 쑥이라는 식물을 몸에도 좋고 맛있는 먹거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쑥 때문에 농사를 망치게 된 농부나 정원에서 파내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결코 반갑지 않은 성가신 문제가 된다. 여태까지 나는 쑥이 모두에게 반가운 봄 손님으로 환영받는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텃밭이나 정원에 난 쑥 뿌리를 파내어야 할 입장이었다면 나의 생각은 분명 달랐으리라.
9. 사람은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보다. 화단에서 쑥 뿌리를 없애는 일을 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쑥이라는 식물의 한 쪽 면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쑥 뿌리를 뽑으며 깨달았다.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참 좁구나. 내가 보고 싶은 쪽만 보고 살아 왔구나.’ 라고. 또한 내 눈으로 보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첫댓글 * 6월 24일 수업은,
문학관 특강이 2-4시에 계획되어 있어
수필과 시수업이 각각 1시간씩 단축됩니다.
1시간 동안 6편의 습작품을 다 다룰 수 없어
간단히 요점만 정리하고
첨삭자료를 배부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됨을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