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개는 주인이 바깥에서 자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개는 주인의 옷을 물고 필사적으로 흔들어댔지만 주인은 죽은 듯이 움직일 줄 몰랐다. 혀로 얼굴을 핥고 꼬리로 코를 간지려도 주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개는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이르니 마침 마당에 큰 아들이 서 있었다. 개는 막무가내로 주인 아들의 바지가랑이를 물고 밖으로 끌고 갔다. 드디어 노인이 쓰러진 곳까지 주인 아들을 끌어 오는데 성공했다. 한참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던 주인 아들은 개의 영리한 행동에 탄복하고, 언 땅에 쓰러져 체온이 식어가는 아버지를 부리나케 업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노인을 아랫목에 눕혔을 때, 아들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랫목에 한참 누워있던 노인은 비로소 눈을 뜨고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물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노인의 동사(凍死)를 면한 것이 개의 기지(機智)로 말미암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뒤 개는 주인 식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지냈음은 쉬이 짐작이 갈 것이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개도 나이가 많아 늙어 죽게 되었다. 주인집에서는 마치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퍼했고, 개 무덤까지 만들었다. 무덤뿐 만 아니라, 유곡(幽谷)의 이 의구(義狗)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으로 승화되어 기림을 받게 되었다. 의구를 서낭신으로 모신 서낭당은 유곡 말목고개에 세워졌다.
지금도 유곡 마본마을에서는 음력 정월대보름에 의구를 서낭신으로 모신 이 서낭당에서 치성을 드리며, 정월부터 사월까지 보신탕을 먹지 않는 불문율을 지키고 있다.
이 서낭당을 세우고부터는 마을에 도둑이 들지 않아 개서낭의 영험이 있다고 주민들은 놀라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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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낭당은 대개 호젓한 오솔길 옆이나 외진 곳에 있는 많은 서낭당과 달리 큰 대로 옆에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서낭당은 말목고개에서 현재의 이곳으로 1908년에 옮겨졌으며, 서낭당 큰 느티나무는 그 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1970년대 초, 유곡리 세 군데 서낭당이 동시에 불이 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때 이 서낭당도 반소(半燒)되어, 1986년 7월 25일에 이를 완전히 철거해 내고 서낭당신위(城隍堂神位)라고 비석을 세워 당집을 대신해 오다가, 2006년 경 마을에서 서낭당을 다시 세우기로 하고, 이 마을 목수를 중건 도편수로 정해 이 마을에서 구한 목재로 현재의 서낭당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마본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치성을 드리고 있다고 한다.
※이 전설은 김시종 시인이 1989년 백화문학 16집에 발표한 것으로, 2011년 6월 26일 고성환 시인이 현장을 답사, 현지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옮긴 것이다.
출처:http://mgmaeil.com/detail.php?number=916&thread=26 (문경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