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15. 주일예배 설교(사도행전 강해 28)
사도행전 16장 11-40절
해방(解放)과 감옥(監獄)
■ 해방(解放)과 자유(自由)는 같은 계열이긴 하지만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해방은 ‘무언가에 잡혀 있다 풀려난 상태’를 말합니다. 자유는 ‘무엇으로부터도 억압 받지 않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억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둘 다 같은 계열이지만, 시간상으로 보면, 해방 다음에 자유입니다. 자유는 해방으로 인해 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자유 이전에 해방에 관심을 갖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유보다는 해방에 관심을 더 갖습니다. 해방이 모든 인생의 핵심이자 해결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설명이 무슨 의미인지 본문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오늘 본문은 유럽으로 선교방향을 정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서 내딛은 첫 번째 선교지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로마의 식민도시인 빌립보에 도착하자마자 전도대상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전도는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였습니다. 루디아는 자색 옷감 장사로 여러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아직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녀를 만나게 하셨고, 그녀는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그녀 자신이 적극적으로 그녀와 그녀의 온 집안이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이 머물 처소를 제공하였습니다.
우리는 유럽의 첫 선교지에서 바울 일행이 ‘루디아’를 만난 일이 절대 단순히 읽힐 수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 출신이었습니다. 두아디라는 아시아 지역에 있는 도시이고 염색가공술이 발달한 무역의 도시입니다. 특히 두아디라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 7교회 중 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보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아디라에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졌을까요? 가장 가능성 있는 추측은 ‘루디아’입니다.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는 계속해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발전하는 염색가공을 만나야 했고, 두아디라를 왕래했을 것입니다. 더불어 친인척들이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다면 더욱이 왕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가족들을 다 세례를 받게 할 정도로 적극적인 그녀라면 친정 혹 친정과 시댁에 가서 복음을 당연히 전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이런 적극적인 수고가 아시아의 7교회 중 하나인 ‘두아디라 교회’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더불어 아시아 선교를 접어야 했던 바울에게 위로를 안기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럽으로 전환하라고 하셨기에 유럽으로 선교방향을 전환했지만, 심혈을 기울여 세웠던 아시아 선교프로젝트에 대해 아쉬움이 없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부분조차 배려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에 매달려 전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전체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하나에 집착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 이렇게 바울 일행의 유럽 첫 걸음은 순탄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루디아’에게는 환대(歡待)를 받았지만, 그 다음 전도대상자로 인해 박대(薄待)를 받았습니다.
숙소는 루디아 집으로 정해졌고, 기도는 어느 곳을 정하고 그곳으로 가 드렸습니다. 어느 날도 기도하러 숙소를 나섰습니다. 그때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몇날 며칠을 다음과 같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다.”(17절)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바울은 이를 심히 괴로워/귀찮아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맞는 말을 했는데 왜 귀찮아한 것일까요? 이는 빈정거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맞서고자 하는 귀신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참다못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8절)고 하였고, 귀신은 즉시 그녀에게서 도망쳤습니다.
귀신은 아무리 설쳐도 귀신을 뿐입니다. 아무리 설쳐도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리스도고, 우리가 아는 것은 귀신의 허망함입니다.
그리스도 덕에 여종은 온전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녀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던 주인이 분노한 것입니다. 수입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분노한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광장 법정으로 가서는 이렇게 고발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0~21절)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새번역)
의도적 오역(誤譯), 즉 복음의 왜곡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변명을 하는 주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이라고 왜곡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이 의도적으로 오역되는 현장이 곳곳에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사사화(私事化)’가 그렇습니다. 신앙의 사사화란, “신앙은 개인의 믿음과 덕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태도인데, 이는 ‘신앙의 공공성(公共性)’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신앙은 대(對)사회적 역할과 책무(責務)가 있습니다. 이는 정의와 사랑 실천과 구현입니다. 대사회적으로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약자가 사회적으로 소외당하지 않도록 사랑이 넘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정의와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대통령이든 국가든, 심지어 교회든 옳지 않다고 호통을 치고 고치는 것이 ‘신앙의 공공성’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야성(野性)’입니다.
■ 고발은 로마 사람인 주인에게 유리했고, 이스라엘 사람인 바울에게는 불리했습니다. 이곳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22~24절입니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족쇄)에 든든히 채웠더니”
완전 중죄인 취급을 한 것입니다. 졸지에 바울과 실라는 중죄인이 되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의 질문입니다. 선교방향을 유럽으로 전환하라고 하셔서 몇 번의 의문 끝에 그렇게 했습니다. 말을 잘 들었습니다. 유럽의 첫 선교지가 ‘빌립보’였습니다. 그런데 순종한 그들에게 닥친 것은 환영파티가 아닌 감옥행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러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지점을 ‘루디아’에게서 얻은 통찰을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그림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이 깊고 어두운 감옥에서 얻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일입니다. 이는 이들이 고발당했기 때문이고, 감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루디아’와 ‘간수’의 사건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해방>입니다. 이 두 사람 다 죄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또한 루디아는 종교적 전통으로부터, 간수는 정치적 관습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바울과 그 일행을 이곳 빌립보로 몰아붙이셨고, 급기야는 감옥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여주는 바울과 실라의 행동은 오히려 이들을 감옥에 몰아넣으신 하나님의 행동보다 더 의문스럽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25절) 이 행동 의문스럽지 않습니까? 이것은 소원과 탄원의 기도와 찬송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와 찬송은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이는 옥문이 열리자 당황해서 자결을 결심한 간수를 향해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28절)고 상황을 수습하는 태도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에게서 ‘해방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의 여유와 위트’를 배워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뭣이 중헌지 알고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감옥 안에서 간수와 그 가족에게 해방을 선언하실 하나님의 역사가 중요했습니다. 유럽행을 순종한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로마식민치하에서 루디아와 그 가족에게 해방을 선언하실 하나님의 역사가 중요했습니다.
‘로마’라는 거대 권력, ‘감옥’이라는 거대 공포, 이런 것들이 결코 바울과 그 일행을 구속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해방을 경험할 루디아와 그 가족, 간수와 그 가족을 만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의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 일행은 기꺼이 아시아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포기했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감옥은 그들을 가두지 못했습니다. 감옥은 오히려 바울과 실라에게 부역자(附逆者)의 역할을 한 셈입니다. 간수와 그 가족을 예수 믿게 했으니 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를 떠나면서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했고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더욱이 빌립보 관원들에게 정중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해방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국정농단의 중심 박근혜씨와 그 부역자들이 어떻게 망하는지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론을 낼 것입니다. 이는 권력이 아닌 하나님의 해방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없듯이, 상황은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을 가두는 감옥은 해방자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황하지 마십시오. 믿고 감사하십시오. 당당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