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울과 암사동에 구석기부터 원주민들이 세거
첫째, 고대 중랑천변의 면목동 유적에 보듯이 서울 지역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이미 인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강동구 암사동, 송파구 가락동, 강남구 역삼동과 성동구 응봉 등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지표에서 발견되었다. 이어 한강 유역의 신석기 유적은 지금까지 140여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 서울지역의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정식 발굴된 암사동 유적은 그 인근의 미사리 유적과 함께 주목을 끈다.
암사동 유적은 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다.
이 유적은 한강변 사질퇴적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20여 채의 움집터와 그 부속시설이 확인되었다.
그 연대는 기원전 3천~4천년으로 지금부터 5천~6천년 전의 유적으로 알려졌다.
신석기문화를 이어 기원전 10세기경 청동기문화가 전개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청동기문화는 무문토기(민토기)와 함께 전개되었으며, 이들 무문토기 인들은 처음으로 청동기를 사용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직접조상으로 확인되고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유역에 청동기문화가 발달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체로 기원전 7세기 이전에 성립하여 기원전 3세기 말 내지 기원전 2세기 초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강 유역의 무문토기는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먼저 한반도 동북지방과 서북지방의 직접적인 무문토기 문화의 유입기와 이들 양 지역 문화의 혼합기, 그리고 자체적인 독특한 문화의 성립기로 구분된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서울 지방의 청동기유적은 역삼동 움집터(매봉터널위), 가락동 움집터, 가락동 4·5호 움집터, 응봉 유적, 아차산 유적 등이 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로 고인돌[支石墓]과 석관묘(石棺墓)를 들 수 있다. 고인돌은 군장(君長)의 무덤으로 보여지는데, 그 형식으로는 탁자식(卓子式)과 개석식(蓋石式, 碁盤式)이 있으며, 경계 표지나 신앙의 대상이던 입석(立石)과 함께 거석문화(巨石文化)로 알려져 있다.
서울지역에서는 정릉동·양재동·개포동·원지동·고척동 등지에 개석식 고인돌이 흩어져 있었으나,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도시개발에 따라 유적으로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다.
한편 한강 유역에서 조사 보고된 집자리는 강안(江岸) 대지(臺地)에 위치한 미사리·신매리 움집터 등의 10여개의 유적이 있으나 대부분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구릉지대나 산의 경사면(傾斜面)에 위치하고 있다 하더라도, 주위의 하천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 같은 사실은 생활용수와 본격적으로 성행된 잡곡 농경, 벼농사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나아가 농경의 발전과 금속기(金屬器)의 사용은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 왔고, 잉여생산물의 분배과정에서 원시공산체(原始共産體) 사회의 평등사회는 붕괴되고, 최초의 계급이 발생하였다.
즉 사유재산제에 따른 재산상의 빈부 차이 및 정복전쟁을 통한 지배 피지배계급이 형성되고, 부(富)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등장함으로써 정치조직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군장사회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3세기말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는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전래되어 각 지역에서 성읍국가(城邑國家)가 성립되고, 그 중 일부는 연맹왕국(聯盟王國)으로 발전하였다.
즉 북방에서는 고조선·부여·고구려가 정치조직으로 발전하였고, 한강 유역 이남에서는 진국(辰國)과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사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들 상호간에는 시간차를 가지면서 정복전쟁이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형성되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은 백제였다. 백제는 부여족(扶餘族)의 이동과 분파 과정에서 형성된 부여계 유이민(流移民) 집단이 남하(南下)하여 한강 유역에 정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림] 부여계 유이민들이 소서녀와 온조를 앞서워 암사마을 한강변에 풍남토서 정착 모습
이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인 온조계(溫祚系)로 대표되는 유이민 집단은 마한 등 인근 정치세력과 서로 싸우면서 연맹체를 형성하고 발전해 나갔다.
이들은 농경정착생활에 적합한 한강의 자연환경을 충분히 활용하여 생산 면에서 풍족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선 통치술과 우세한 생산도구를 바탕으로 주위세력을 압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백제의 정착은 한강 유역에 흩어져 있는 백제토성이나 고분(古墳)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역시 이 부근에서 발굴된 철기문화의 유물과 농경생활의 흔적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한편 기원전 18년 온조가 도읍(都邑)한 위례성(慰禮城)이나 한성(漢城) 등에 대해서는 서울·광주(廣州)·직산(稷山)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각각의 의견들이 있다.
그런데 이 위례성은 기록을 통해 볼 때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으로 구분되는데, 하북위례성은 북한산 동쪽 기슭으로 미아리·수유리 일대로 보는 견해와 세검정·평창동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하남위례성은 한강 남쪽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 속칭 '고골'이나 '교촌(校村)'으로 비정하기도 하며, 서울특별시 송파구 및 강동구 일대를 주목하기도 한다.
근래에 백제시대의 유적 발굴을 통하여 문헌 기록의 신뢰도를 한층 높여 주고 있는데, 송파구 일대의 석촌동 적석총(積石塚) 발굴, 풍납동 토성의 발굴, 그리고 양평군 문호리·양수리, 남양주군 금남리 적석총 유적 발굴을 통하여 고구려 유이민 집단이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특히 2002년 이후 풍납동 토성의 발굴 성과에 따라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이곳에 비정하기도 한다.위례성이라 칭한 도읍지는 하북·하남으로 이원화(二元化)되었으며, 이는 시간적으로 선후(先後)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구체적으로 도성의 위치가 정확히 어느 곳인가는 현재까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오늘날의 서울 인근지방이었던 것이라는 주장에는 이의가 없다.
이러한 도읍지로서의 서울 지역은 삼국의 각축장(角逐場)이 되어 백제가 패배하여 웅주(熊州)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점차 도읍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즉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은 백제를 침공하여 한강 이북 58성(城) 700촌(村)을 취하여 백제 아신왕을 굴복시켰으며, 뒤이어 장수왕은 475년에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 수도인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전사(戰死)시켰다. 뿐만 아니라 태후 왕자들이 고구려 군사들에게 몰살당하고 포로로 8천여 명이 끌려갔다.
이에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기니 한성의 궁궐·왕묘 터·주요 사찰 등은 황폐하게 되었으며, 특히 이곳 백제 인민은 포로로 끌려가거나 혹은 남은 왕실과 지배귀족을 따라 남하(南下)하였을 것이니, 이곳은 도읍으로의 면모를 완전히 잃어버렸을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동성왕 21년(499) 가뭄에 따른 기근으로 한산(漢山) 백성 2천여 명이 고구려에 망명하니, 이 지역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빚어졌다 하겠다.
그리고 한강 유역 한성을 차지한 고구려는 77년간 이곳을 통치하면서 전방(前方) 전초기지(前哨基地)로서 북한산군(北漢山郡) 소속의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이곳은 통치주체가 바뀜에 따라 도성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전방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나제(羅濟)연합군이 결성되어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자 하는 전쟁이 계속되고, 급기야 신라 진흥왕이 백제가 수복한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옛 한성지역은 도읍지로서의 지위를 찾지 못하고 신라의 서북 변방지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어 신라는 진흥왕에 의해 553년 이곳에 군사적 개척지로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이어 남천주(南川州), 다시 북한산주 등을 설치하였는데, 이들 주(州)의 치소(治所)는 이천(利川)·광주(廣州) 등으로 백제의 한성보다 남쪽에 위치하였다. 이는 아직 한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남쪽에서는 백제의 신라 침공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7세기 초까지 삼국 간의 전쟁 상황이 계속되면서, 결과적으로는 백제 한성 지역의 도시 기능의 마비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삼국시대에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강 하류유역은 이 지역의 경략(經略) 여부에 따라 각국의 흥망성쇠가 결정되었다는 필연성을 가짐으로써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우선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백제 초기의 도읍지였다는 점 이외에 삼국 간의 군사적 쟁패지(爭覇地) 또는 삼국 통일의 완수를 위한 당나라 군사 축출의 최후 거점이었다는 데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또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남북 문화권의 경계지로서, 그리고 중국 문화와의 접촉지로서 새로운 문화 개발의 전초지(前哨地)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러한 삼국의 각축 과정에서 한강 유역의 서울 지방은 백제 도읍지로서의 인물과 시설이 거의 피폐된 듯 하며, 풍납동 토성·몽촌토성·방이동 고분군·석촌동 고분군·아차산성·사당동 백제요지(百濟窯址) 등의 일부 유적이 남아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관련하여 아차산성의 고구려 보루 구조와 출토된 토기가 남아 있고,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장의사지 당간지주와 장한성·호암산성 등 한강변 산성 체제를 볼 수 있다.
그 후 685년 신라 신문왕이 통일된 국가를 9주(州) 5소경(小京)으로 나누어 정하고, 서울 지방을 포함한 주를 한산주(漢山州)라 하고, 그 치소를 광주(廣州)에 둠으로써 민정(民政) 조직을 갖추었는데, 그 이전에는 군사적 성격이 짙은 전략기지로 기능하였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후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7)한주(漢州)로 고쳐지고, 지금의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는 등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으며, 한양군의 영현(領縣)으로 황양현(荒讓縣, 豊壤)과 우왕현(遇王縣, 幸州)이 있어 이를 관할하였다.
이로써 서울 지방은 도읍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지방 군현의 하나로 지방관이 관할하는 지방 행정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들어 통치체제가 문란해지고, 지방에서는 각기 유력 세력들이 장군(將軍)·성주(城主)를 칭하면서 독자세력을 구축하는 시대상황이 전개되자, 이곳 서울 지방도 신라의 직접적인 통치권에서 벗어난 것 같다.
이미 이곳은 822년(헌덕왕 14)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의 세력권에 편입되기도 하였으며, 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또한 반란을 일으켜 이 지방을 도읍지로 정하고자 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자 신라 통치영역에 있던 서울 지방은 태봉(泰封)의 궁예가 왕건으로 하여금 양주·견주(見州) 등을 공략하게 함으로써 이곳은 궁예의 세력권에 편제되었다.
즉 고려시대 이전까지의 서울 지방은 그 지역적 특성으로 백제 때의 위례성 등 도읍지가 되어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경험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2세기가 넘게 전쟁의 중심지가 됨으로써 철저하게 도시 기능이 파괴되어 황폐화의 길을 걸었고, 따라서 이곳에는 그후 호족(豪族) 등 지역 중심세력이 성장하지 못하는 인문지리(人文地理)적 환경으로 전락되어, 그 도읍지로서의 경험이 다음 시대로 잇지 못했던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그 예로 후백제의 견훤이 나주(羅州)를 통하여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자 그를 상부(尙父)로 모시고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주고 있는데, 이는 양주가 태조 왕건 정권의 직할지(直轄地)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경종 원년에 전시과(田柴科)를 처음 시행할 때 전시과 지급 대상지역에 양주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이때까지 양주 지방에는 기득권을 가진 지방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반면에 서울 인근 광주(廣州), 금주(衿州), 파주(坡州), 이천(利川), 공암(孔巖) 등에는 호족의 성격을 띤 지방세력들이 웅거하였다.
둘째, 고려시대 서울 지방은 국초에는 양주(楊州),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양주지방이 중앙정부에 의해 직접적인 지방통치체제로 편제된 것은 983년(성종 2)으로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고 지방관(地方官)을 파견함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광종 때 왕권강화책으로 왕실의 안정을 기하고 호족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지방에 대한 직접통치가 가능해졌다. 이어 경종 때 전시과를 실시하면서 양주를 비롯한 전시과 대상지역을 선정함으로써 지방관을 파견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향리제도(鄕吏制度)를 개정하고 지방관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067년(문종 21) 양주에 서경(西京)동경(東京)과 더불어 삼경(三京)의 하나인 남경(南京)이 설치되었다. 그 설치 동기는 정치·경제·군사적인 중요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그보다 지리도참사상(地理圖讖思想)에 근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지방행정상 한강의 북부지방은 남경이, 남부지방은 광주목(廣州牧)이 관할하였다. 그러나 도참사상에 따른 길조(吉兆)가 나타나지 않자 남경은 곧 폐지되었다가 숙종 때 다시 재건되고 궁궐이 신축되었다.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고 남경의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하였는데, 이때 보고된 곳은 지금 서울 동대문 밖의 노원(蘆原), 도봉산 아래의 해촌(海村) 방면, 한강 연안의 용산 방면, 면악(面岳) 남쪽인 지금의 경복궁 부근이었으며, 그 중 면악 남쪽이 우선으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숙종 때 재건된 남경은 충렬왕 말기까지 약 2세기간 지속되었다. 즉 숙종에 이어 예종·인종·의종의 계속적인 남경 행차가 있었으며, 고종 때 강도(江都)로 피난 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의(御衣)를 남경 가궐(假闕)에 안치시키기도 하였다.
1308년(충렬왕 34) 즉위한 충선왕은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개편하였는데, 이때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개편하면서 삼경제는 폐지되었다. 이때 한양부는 고양(高陽)·양주·포천(抱川) 등 현재의 한강 이북 서울 지방과 그 주변 일대만 관할하였으며, 왕의 순주(巡駐)와 어의 안치 등은 사라지고 개경(開京)과 가깝기 때문에 국왕의 유행(遊幸)과 사냥터가 되었다. 그 예로 충숙왕은 1317년(충숙왕 4)에 한양에 가서 사냥하고, 1325년(충숙왕 12)에는 조국공주(曹國公主)와 더불어 유행하여 용산행궁(龍山行宮)에서 용산원자(龍山元子)를 낳았다. 이렇듯 한양부는 남경 때의 국가 기업(基業) 융성을 위한 순행처(巡幸處)가 아니라 단순 휴양지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 원(元)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대두되면서 한양부는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공민왕의 배원(排元)정책에 따른 관제(官制)의 환원으로서의 남경의 부활과 남경 천도(遷都)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남경으로 환원은 치폐(置廢)를 거듭하고, 남경 천도는 당시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지만, 한강 유역의 서울 지방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된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우왕 9년의 한양 천도 5개월, 1390년(공양왕 2)의 한양천도 5개월 등 실질적인 한양 천도는 조선왕조와 연계시켜 볼 때, 이미 풍수지리적으로나 군사 사회경제적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점이라 하겠다.
오늘날 살펴볼 수 있는 고려시대의 문화유적으로는 북한산 승가사의 마애불과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문수사,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진관사(신혈사 유적), 중흥사지, 태고사 원증국사탑과 탑비 등을 볼 수 있다.
또 유지(遺址)로 고려 남경 궁궐지, 한양부 향교(鄕校)와 성황당 터 등이 있다.
교통시설로 영서역·노원역·청파역의 역참(驛站)과 사평나루가 있으며, 정자로는 용산호(龍山湖)의 추흥정과 반송정이 있었으며, 강감찬의 낙성대가 복원되어 있고, 그 삼층석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한종유의 저자도(楮子島) 풍류(風流)가 전한다.
셋째, 조선1394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한양은 500년간 조선왕조의 도읍지가 되었다. 이듬해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한성부를 5부 52방으로 구획하였으며 점차 도시시설을 마련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어나갔다.
한양 천도의 배경으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영향과 신왕조 창건 과정에서의 고려 왕실과 구 귀족세력의 저항으로부터의 탈피를 들고 있으며, 나아가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의 인문지리적 위치와 풍수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서울 지역은 산과 하천의 배치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吉地)에 해당하며 우리나라 전체로 볼 때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또 수륙교통이 편리하며 군사적 방어에도 유리하여 조선시대 서울로 정해진 이래 일국의 수도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서울의 산수를 보면 진산(鎭山, 祖山)인 북한산에서 주산(主山)인 북악산(백악)에 연결되며, 응봉과 낙산이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인왕산이 우백호(右白虎)가 되며, 목멱산은 안산(案山)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중앙에 내수(內水)인 청계천이 흘러 한천(漢川)주에 합류되어 외수(外水)인 한강에 유입된다.
이렇게 하천이 분지를 빠져 나가는 수가(水口)가 산에 둘러싸여 밖에서 볼 수 없는 형국을 풍수에서 이상적인 산수의 배치로 보고 있다.
이러한 명당자리에 조선왕조의 궁궐·종묘·사직단·관아·문묘 등 국가를 상징하는 주요 건물들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특히 세종 때는 한성의 주산이 창덕궁의 뒷산인 북산 즉 응봉이어야 하며, 따라서 정궁의 명당자리는 창덕궁 자리보다 약간 서쪽인 향교동(鄕校洞)으로 뻗은 산줄기에 딸린 승문원 자리라는 풍수지리설이 대두되어, 향교동 일대가 주목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조선시대 서울은 조운(漕運)이 통하고 도로가 균등하며, 배와 수레교통이 좋아 주민들의 생활이 편하여 도읍으로서의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동남쪽을 제외하면 모두 좁은 고개를 통해야만 들어올 수 있어 군사적 방어에도 유리한 곳이었다.
한양 정도(定都) 당시 수도의 도시 구상은 자연지리 및 풍수지리 조건에 따른 성터[城基]와 성문(城門)의 결정, 그리고 궁궐·종묘·사직단·문묘·관아·시전 등 주요 시설의 입지와 수계(水系)를 이용한 도로망의 결정으로 규정되었다. 성곽(城郭)의 위치는 도읍지 선정 때부터 고려된 것으로 풍수지리상의 주산인 백악을 현무(玄武)로, 안산인 목멱산을 주작(朱雀)으로, 서산인 인왕산을 백호(白虎)로, 동산인 낙타산을 청룡(靑龍)으로 한 내사산을 연결하는 약 18㎞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성문의 위치는 방위와 자연지세 풍수지리 도로와의 연결을 고려하여 8방위 원칙에 따랐다.
그리고 궁궐·종묘·사직·문묘·시전 등 중요 시설의 입지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혈처(明堂穴處)와 『주례(周禮)』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의 관례인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랐다.
주산인 백악을 배산(背山)으로 주 궁궐인 경복궁을 북쪽에 입지시키고,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좌측의 부주산(副主山)인 응봉을 배경으로 한 산줄기 흐름의 남단에 종묘 터를 잡고, 우측의 인왕산 동남쪽 산줄기 끝에 동쪽에 사단(社壇), 서쪽에 직단(稷壇)의 사직단을 건립하였다. 또 응봉 동쪽 기슭에 문묘와 성균관의 터를 잡았다.전조후시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광화문 앞 도로 양측에 의정부·육조·한성부·기로소·사헌부 등 정부 관아를 배치하였고, 정도 후 경복궁 후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에 일시 장시(場市)를 개설하여 왕실과 관아 및 도성 주민에게 일용품을 공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무문 밖의 장시는 신도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태종 때에 이르러 종로 간선도로에 시전(市廛) 터를 잡아서 도시의 활동 축을 삼았다. 그리고 경복궁의 좌우와 종로 남쪽에 주민들의 주거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한양도성 내의 물줄기는 도시의 골격 형성, 즉 도로망 구성과 중요 시설의 입지 선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5부제(五部制) 행정구역과도 관련된다.
즉 경복궁과 중앙관아의 연결을 위한 상징가로축으로 황토현(黃土峴, 광화문사거리)에서 광화문까지의 대로(大路)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청계천이 동서로 흐르기 때문에 청계천 북쪽으로 이와 나란히 황토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흥인문(興仁門)까지, 서쪽으로 돈의문(敦義門)까지 연결하는 동서관통로(종로)를 설정하였다.
이는 도성의 반을 가르는 횡선이 되었고, 시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활동축을 동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崇禮門)에서 대광통교(大廣通橋)까지 대로를 연결하여 주 진입로를 설정하였다.
이상의 네 축을 골격으로 나머지 성문과 주요 도시시설과의 연결 및 5부제의 행정구역 경계를 따라 중로(中路)와 소로(小路)를 설정하였다.
한 예로 중부의 구역은 육조거리와 청계천, 그리고 이현(梨峴)을 거쳐 창덕궁 돈화문으로 빠지는 거리와 경복궁에서 종묘까지의 거리 안으로 하였다.
이러한 도시시설이 갖추어지기 전 천도 당시 한양에는 옛 남경의 시설이 거의 없었다. 왕실과 정부 일행이 1394년 10월 28일한양에 도착하여서는 고려시대 한양부의 객사(客舍)에 임시 왕궁을 정하고, 관아(官衙)와 관리 역시 민호(民戶)를 점유하여 임시 거처하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양 천도 당시에는 이미 고려 숙종 9년(1104)에 개창된 남경 이궁(離宮)의 연흥전(延興殿)이나 한양부 관아 등의 건물은 이미 붕괴되었거나 쇠락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새 도읍의 새 궁궐지는 고려 숙종 때 남경 이궁인 연흥전 등 옛 궁전이 있던 곳을 피하여, 그 바로 남쪽에 해산(亥山, 서북악인 白嶽)을 주산으로 하여 임좌병향(壬坐丙向)주 03)으로 정하니, '국면이 평탄하고 넓으며 전방의 산이 모두 앞에서 조회(朝會)하여 읍(揖)하는 것과 같았다'는 기록을 볼 때, 새 도읍지의 궁궐은 고려시대의 남경 궁궐터와 관련하여 조금 넓은 곳을 찾아 앞으로 나와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성부의 청사는 한양 천도 후 경복궁과 각 관아와 함께 육조거리에 건축되었는데, 그 위치는 의정부(議政府)와 이조(吏曹)의 남쪽이며, 호조(戶曹)의 북쪽인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고려 후기 한양부의 성황당이 있었던 곳으로, 처음 건축할 때 성황당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태종 6년(1406) 6월에 예조(禮曹)의 계청으로 전에 있던 부근에 다시 성황당을 봉사(奉祠)하였다. 여기서 성황당은 해당 고을과 관아의 수호신으로 관아 안에 혹은 산성 가까이에 위치하여 봉사하는 곳이었으므로, 조선왕조의 수부(首府)인 한성부도 고려의 한양부가 있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 한양부의 지방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한성부 중부 경행방(慶幸坊)의 교동(校洞, 향교동) 즉 오늘날의 종로구 경운동 일대에 위치하였었는데, 그 동쪽에 창덕궁과 종묘가 자리 잡고, 그 외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과 대학인 성균관(成均館) 및 문묘(文廟) 등 문한(文翰)과 교육기관이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한양 천도는 바로 궁궐 지방관아 교육기관 등에 있어서 고려 중기 남경의 전통과 후기의 한양부 전통을 이어서 확장한 규모의 도읍으로 건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 서울에 전하는 조선시대의 문화유적은 위에서 열거한 한성부의 도시 시설이 대부분을 이룬다. 이는 정치·경제·사회·문화·대외관계의 중심시설로서 도성 내외에 기능별로 분포되어 있다. 즉 도성과 성곽 내의 5대 궁궐 및 종묘·사직단·문묘·육조거리의 관아 시설과 목멱신사·백악신사·원구단 등의 구성은 조선의 통치이념과 정치행위 및 시행기관으로 기능하였다. 또 시전(市廛)을 형성하여 경제 유통을 관장하게 하고, 도성의 관방과 치안을 위한 군영(軍營)이 설치되었고, 외교관계 시설인 태평관·북평관·동평관 등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팔도로 뻗어나가는 교통·통신시설 및 군량미와 관리들의 녹봉(祿俸)을 지급하던 각종 창고, 왕족의 원찰(願刹), 사대부들의 거주공간과 사당 및 정자 등 풍류생활 터 등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15세기 초 1428년(세종 10)의 한성부 도성 안의 인구는 10만 3328명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왕실 및 양반관료와 그 가족들, 군역에 복무하는 군인들, 각종 관청에 사역되는 관노비와 사노비, 공장·상인들이었다.
그리고 성저십리 지역은 대부분 농경지역이였다. 따라서 당시 한성부는 정치·행정중심의 소비도시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조선왕조는 태평성대의 영화를 누리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뒤이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이 심한 병화의 재난을 입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수도 한성부의 피해가 막대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문묘 등 개국 이후 건설된 수도의 모든 시설이 거의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이후 광해군 연간의 대규모 중건공사로 도읍지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1624년(인조 2)이괄(李适)의 난과 정묘·병자호란으로 한성부는 청군(淸軍)의 약탈·방화 등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조선왕조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왕조는 외침의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대동법 실시, 균역법 시행(1750), 공장안(工匠案)의 폐지 등 일련의 사회·경제 개혁을 통하여 정치·행정도시에서 상공업도시로 발전을 꾀하였다.
성안에는 종루(鐘樓)·이현(梨峴)·칠패(七牌)의 3대 시전을 중심으로 상품 교역이 활발해졌다. 또한 경강상인(京江商人)의 활약은 상업자본의 형성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양상을 나타내었다. 즉 경강상인은 운수업과 상업활동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그들은 자본의 축적을 통하여 18·19세기 자본주의 맹아(萌芽)를 잉태시킨 시대변혁의 주인공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주로 용산·마포·서강·동작·두모포·송파 등지를 중심무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행사하던 운종가(雲從街) 일대의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한 시전(市廛) 어용상인들과 대항하였으며,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 이후에 시전상인을 능가하여 서울의 상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이러한 한성부의 도시적 성격 및 양상은 19세기 중엽 한성부의 인구 증가로 나타났으며, 대체로 조선 초기의 2배에 이르는 20만 3901명(1835)으로 늘어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한편 19세기 초 외척정치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본거지인 인왕산 아래 청운동 일대는 우대라 불리면서 권문세가들의 주거공간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넷째, 근대19세기 후기에 들어 서울은 흥선대원군의 등장과 더불어 내정개혁을 통한 왕권강화정책이 시행되어 경복궁이 복원되고, 운현궁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대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과 대응하며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고종 초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楊花津)까지 올라왔고, 급기야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다. 1871년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에 의해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고,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한강을 통해 제국주의 세력이 한양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경부터 용산 일대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마포구 당인동 일대에 중국 세력이 진출하면서 처음에는 개시장(開市場)을 통한 경제침투가 시작되더니, 급기야 제국주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는 개시장이 설치되고, 사람의 통행을 위해 1888년 한강에 증기선이 취항하였으며, 1900년대에는 전차와 철도가 놓이고, 한강에 철교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종의 친정에 따라 개화정책이 추진되었으며 이후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정치집단의 갈등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였다. 이후 일제와 청나라의 간섭과 침탈과정에서 갑오개혁, 갑오농민운동, 을미사변, 아관파천을 겪고,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경운궁 중건을 시작으로 광무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그러나 일제를 선봉으로 제국주의 열강세력의 침탈과 이들에 의해 강요된 파행적인 교역·교통·산업 등의 변화는 결국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하게 하였다. 이러한 형세와 병행해 새로운 근대적 시설인 철도·전차·전신·전화 등의 설비가 시작되고, 서양식 학교·병원이 설치되었으며, 수도(水道)의 급수가 개시되었다.
1906년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군대해산에 이르자 이에 저항하여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1910년 일제 강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 예하의 지방행정단위로 전락하였다. 경성부에는 총독부 이외에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조선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식민지 침탈기관이 설치되었고, 경인선(京仁線)·경부선(京釜線)·경의선(京義線)·경원선(京元線) 등의 철도망을 통하여 경제적 침탈과 군수품의 수송을 꾀하였다. 아울러 일제에 의해 영등포 지역이 공업화되면서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되었고, 점차 노량진 일대가 서울권에 편입되어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 지역이 새로운 도심권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편 내선일체를 내세운 동화정책(同化政策)의 일환으로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해 의학·상업·공업·광업 등의 각종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태평양전쟁을 전후해서는 남산 중턱에 있는 조선신궁(朝鮮神宮) 등이 설치되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창씨개명과 한글 사용 금지 등으로 민족문화를 말살하고자 하였다. 이때 한국인들은 주로 청계천 북쪽의 종로를 중심으로 한 북촌에 주로 살았고 일본인들은 대부분이 남산 북쪽 사면의 남촌과 용산에 주로 거주하였다. 특히 용산 지역은 조선군사령부 등 군사시설이 집결되어 있었다.
다섯째, 1945년 광복 후 서울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시행하였다. 서울은 1946년 9월 28일 경기도의 관할에서 벗어나 도와 같은 수준의 서울시로 승격되고, 8개구를 관할하였으며, 과거의 일본식 지명과 행정구역을 한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에 따라 수도의 지위를 재확인하였으며,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으며 당시 서울 인구는 140만 명이었다.
서울은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폐허화되었으나 1953년 휴전협정의 체결과 함께 수도로서의 기능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 성북구의 설치와 1963년의 서울 시역(市域) 확대로 인하여 서울특별시는 명실공히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강북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1962년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제정으로 서울특별시는 국무총리의 직속기구가 되었으며, 점차 중앙정부의 감독에서 벗어나 자치적인 도시정부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1991년 자치정부가 성립되었으며 아울러 1995년에는 25개 구청의 기초자치단체를 거느리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한강개발이 추진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시세(市勢)를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균형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1970년대 들어 급증하는 도시 행정의 수요를 타개하기 위해 한강이남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다. 이어 1986년에 아시아경기대회가 개최되고, 1988년에는 한강변 잠실 지역에서 인류의 최대 축제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2002년에는 월드컵 축구경기대회를 열게 되어 세계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다.
한민족의 웅비하는 모습을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의 역사·지리적인 가치는 한민족의 역사 중심이자 상징인 것이다.
유물·유적서울은 구석기와 신석기시대 이래로 백제 초기의 도읍지인 위례성, 고구려의 남평양, 신라의 한산주, 고려의 남경, 조선의 수도인 한성 등 2,000여 년의 긴 도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읍지로서 각지에 많은 유적과 유물이 분포되어 있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면목동 유적과 지표유적 등이 분포되어 있으며,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암사동 유적이 있어 인근의 미사리 유적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사유적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역삼동 주거지가 발굴 조사되었으며 주거공간과 도구창고의 연립형 형태임이 확인되었다.
그 외 명일·가락동 유적에서도 가락식 토기 등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었고, 원지·우면동에서는 고인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백제·고구려·신라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석촌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과 성곽 등 다양한 흔적을 남겨놓았으며, 고려시대의 불교유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궁궐·도성·종묘·사직·왕릉 등 국가상징의 유적 유물이 다양하게 남아 있으며, 대한제국 이후 건립된 근대건축 유물도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유적·유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건조물로서 궁궐·관아 유적으로 경복궁, 경복궁 근정전·경회루·인정전·자경전·자경전 십장생 굴뚝·아미산 굴뚝·근정문 및 행각·동십자각, 창덕궁(후원 포함), 창덕궁 인정전·돈화문·인정문·선정전·희정당·대조전·구 선원전, 창경궁, 창경궁 명정전·홍화문·명정전 동회랑 및 명정문·옥천교·통명전, 덕수궁(경운궁),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함녕전, 경희궁지, 흥화문·숭정전, 우정총국, 종친부, 삼군부 청헌당·총무당, 미국공사관, 양천향교 등이 있다.
그리고 단·묘·사 유적으로 종묘와 종묘 정전·영녕전, 서울 문묘, 서울 동묘, 서울 사직단 정문, 선잠단지, 서울 사직단, 서울 문묘 일원, 육상궁, 원구단, 선농단, 지덕사 부묘소, 청권사 부묘소, 선희궁지 등이 있다.
성곽 유적으로 서울 한양도성, 서울 숭례문, 서울 흥인지문, 풍납동 토성, 북한산성, 아차산성, 몽촌토성, 한우물 및 주변 산성지, 양천고성지, 홍지문과 탕춘대성 등이 있다. 주거·누정으로 운현궁·용양봉저정·봉황각·석파정·이화장·침류각·세검정·안국동윤보선가 등이 있다.
그리고 기타 유적지·명승으로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함춘원지, 사당동 백제요지, 구 서울구치소, 효창공원, 탑골공원, 성락원, 양화나루·잠두봉 유적, 낙성대, 정업원구기, 어정, 낙성대유지, 무악동 봉수대지, 남산 봉수대지, 아차산 봉수대지, 수표, 독립문, 영은문 주초, 살곶이 다리, 수표교 등이 있다. 근대건축으로는 구 대한의원 본관, 약현성당, 구 러시아 공사관, 구 벨기에 영사관,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 정동교회, 명동성당, 연세대학교 스팀슨관·언더우드관·아펜젤러관, 구 서울대학교 본관, 구 공업전습소 본관, 한국은행 본관, 중앙고등학교 본관·서관·동관, 서울역사, 고려대학교 본관·중앙도서관, 서울 성공회성당, 천도교 중앙대교당, 번사창, 중명전, 구 제일은행 본점,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경교장, 승동교회, 동아일보 사옥, 배재학당 동관 등이 있다. 이 중 창덕궁과 종묘 일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전적으로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세계기록문화유산을 비롯하여 동국정운, 고려말 화령부 호적관련고문서, 비변사등록,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제왕운기, 대동여지도, 수선전도 목판, 근사록, 백범일지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회화작품으로는 독서당계회도, 이길룡필 남지기로회도, 호조랑관계회도, 정선필 육상묘도, 이색초상, 목장지도, 흥선대원군 초상 등이 있으며, 서예작품으로도 안중근의사 유묵 일체와 김정희유묵 예서대련, 봉은사 김정희서 판전현판 등 많은 작품이 있다.
그리고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청화백자 매조죽문 항아리, 청자 투각고리문 의자 등 각종 청자와 백제 및 여러 형태와 기능을 가진 다양한 도가기가 주로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각종 사설박물관과 개인소장으로 되어 있다. 그 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와 삼전도비,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등 각종 기념비와 신도비 및 암각글씨 등이 산포되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봉은사 선불당 등 사찰건물과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 등 불상, 조계사 대웅전후불탱화 등 불화, 원각사지 십층석탑 등 불탑,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 대원각사비 등 탑비,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등 석등, 장의사지 당간지주 등이 있으며, 그 외 동종·사리유물·금고·향로·목각탱 등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아울러 상지은니묘법연화경 등 150여 종의 불경이 여러 소장자들에 의해 보존되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서울 재동의 백송, 서울 수송동의 백송,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 한강의 황쏘가리, 창덕궁의 향나무, 서울 용두동 선농단의 향나무, 창덕궁의 다래나무, 삼청동의 등나무, 삼청동의 측백나무, 서울 신림동의 굴참나무 등이 있으며, 잠실 뽕나무·화양동 느티나무·손기정 월계관기념수 등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로 지정된 서울특별시지정보호수이다.
그리고 과학기기로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창경궁 자격루, 혼천시계, 금영 측우기·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신법 지평일구·간평일구·혼개일구·대구 선화당 측우대·창덕궁 측우대·앙부일구·창덕궁 풍기대·경복궁 풍기대·창경궁 관천대·관상감 관천대 등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교육·문화서울은 한국교육 발전의 중심지로서 한국교육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의 교육·문화 발전은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서울이 민족문화사의 중심이 되었던 조선시대 이후 가속화되었다.
조선시대 서울의 교육기관으로는 성균관(成均館)·4부학당(四部學堂)·잡학(雜學)이 있었다. 성균관은 고구려의 태학(太學), 통일신라시대의 국학(國學)의 전통을 이어 고려시대에 국자감(國子監)·성균감(成均監)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말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조선왕조가 이를 계승하였다.
1394년(태조 3) 10월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성 자하동에 있던 성균관을 한양 숭교방(崇敎坊)로 옮겼다. 성균관에는 유학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재(東齋)·서재(西齋),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 등이 있었다.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상당한 정도의 자유가 보장되었는데, 이를테면 국가정책에 실정이 있거나 명륜풍교(明倫風敎)에 해가 될 만한 일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유소(儒疏)로써 탄핵도 하였다. 만일 이 유소에 대해 국가가 보복을 하면 학교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권당(捲堂), 기숙사에서 모두 나가는 공재(空齋), 성균관을 나와버리는 공관(空館) 등을 단행해 대항했는데, 이는 현대의 동맹휴학과도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