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와 문화 II
◎프랑스혁명이후 제국주의이전까지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의 원인에 대하여 원인(遠因)으로는 먼저, 앙시엥 레짐의 모순을 들 수 있다. 그 모순은 첫째로 정치적인 면에서 봉건적인 제도와 근대적인 제도가 혼재하여 일으킨 혼란을 들 수 있고 둘째로 경제적으로는 토지 소유의 심한 불균형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은 신분제와 관계가 있는데 인구의 2%를 차지하는 특권 계층 즉, 승려와 귀족이 전체 토지의 40%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98%의 평민들이 60%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균형은 소수의 부유한 특권 계층은 면세 특권을 지니고 있었는데 비해 모든 국가의 비용은 가난한 평민이 부담하는 조세 제도의 모순이 첨가됨에 따라 특권 계층과 평민 사이의 불균형은 더욱 심화 되어갔다.
세 번째로 사회적인 원인으로 신분제의 다양성과 모순을 들 수 있다. 당시의 신분은 크게 승려와 귀족 그리고, 평민으로 구분되지만 각 신분 내부에도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즉, 같은 승려라 하더라도 상층과 하층으로 나누어져 상층의 경우는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하였으나 하층의 승려는 오히여 평민에 가까운 생활을 함으로써 그 차이가 심하였다. 그리고, 귀족 중에도 대귀족과 몰락 귀족으로 나뉘어져서 몰락 귀족의 경우는 하층 승려와 마찬가지로 평민과 이해 관계를 같이 하였다. 또한 평민도 가장 어려운 생활을 하는 일반 평민이 있는 반면에 특권 계급과 유사한 생활을 하는 부르조아층도 있었다.
네 번째, 사상적인 원인으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즉, 이 시기에는 볼테르와 루소 등의 계몽 사상이 등장하여 비판 정신과 합리주의 사상, 진보 사상을 전파하였으며 존 로크 등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이론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경제 사상면에서 국가 통제가 강했던 중상주의에 반대해 중농주의 사상이 나타나고 이것이 자유 경제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마지막 원인으로는 새로운 계급 즉, 중산층이 등장한 것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상층의 부르조아지와 하층의 소규모 수공업자 즉,'상큐롯(Sans-Cullotes)'을 나누어진다.
혁명을 촉발시킨 근인(近因)으로는 먼저, 국민 대다수의 누적된 불평 불만과 루이 16세 시기의 4대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 지원으로 인한 재정 파탄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는 1778년 이래의 흉작으로 인한 식량 위기를 들 수 있는데 이 시기 이전까지의 농민의 생활 수준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의 기대치에 현실이 뒤따르지 못 할 때 혁명이 발생한다는 현대의 혁명 이론으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왕은 3부회를 소집하게 되는데 이 의회에 참석한 귀족들로부터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게 된다.
혁명의 전개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787년에 왕은 귀족과 성직자로 이루어진 친왕파의 인물 145명으로서 '명사회'를 소집한다. 이 명사회의 주도 인물은 Turgot, Necker, Calonne등인데 이들은 은행가들로써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평등 과세 등의 조세 개혁안을 제출하나 실패한다. 그리고, 고등 법원을 중심으로 왕정에 대한 비판의 분위기가 생기고 이것은 삼부회의 소집 요구로 이어진다. 이 삼부회 소집 요구는 앞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 즉,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으로서 의의를 지니는데 이것을 귀족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때의 삼부회 개최 요구는 귀족들이 왕에 대항해서 왕권을 축소시키고 과거에 자신들이 누렸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1789년에 삼부회가 개최되면서 이 삼부회의 조직 구성은 Necker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특권 신분 보다 평민 신분의 의원 수가 더 많은 특징을 지닌다. 즉, 제 1신분인 승려가 285명, 제 2신분인 귀족이 308명으로 구성되어 총 593명의 특권 신분이 있는데 비해 1214명의 총 의원들 중 621명의 제 3신분 즉,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신분간에 표결 방법에 대한 대립이 일어나게 된다. 즉, 과거의 삼부회는 3 신분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모여 각 부별로 의결하고 그 결과로 전체 의사를 결정하였으나 이제 숫자가 많아진 평민들은 전부 한 자리에 모여서 동등한 투표권으로서 사안을 결정짓자는 두수제(頭數制)를 주장하였고 이에 반대한 귀족들은 종래의 부별제(部別制)를 고수 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이처럼 표결 방법의 문제로 1 2 신분과 3신분이 대립하는 과정 속에서 제 3 신분이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3신분의 등장은 당시 발간된 팜플렛1)에서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다.'라고 표현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삼부회 내에서의 타협이 점점 불가능해지자 제 3신분의 의원들은 Mirabeau와 Bailly를 중심으로 일부 불만을 가진 귀족과 승려도 참여한 가운데 그들만의 의회를 구성하는데 이것이 '국민 의회'이다. 이러한 평민 의원들의 행동에 대해 왕이 탄압의 기미를 보이자 이들은 귀족과 국왕의 탄압에 대해 끝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테니스 코트의 맹세'를 한다. 그리고, 이 단계의 혁명을 부르조아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평민 의원들이 이러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파리 시민들은 특히, 상큐롯층을 중심으로 봉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Demoulins 같은 이는 무장 봉기도 주장하게 되는데 봉기 군중은 그들이 당면한 무기와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두 가지가 풍부할 것이라 판단되고 또, 많은 계몽사상가들이 정치범으로 갇혀 있다고 알려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게 된다. 이것이 1789년 7월 14일의 일로서 프랑스 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군중들에게 그들이 바라던 어떤 것도 충족시켜주지 못 했으나 절대주의의 상징인 바스티유가 함락된 것은 절대 왕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전국적인 농민 폭동의 발생으로 이어지는데 농민들은 자치위원회(Commune)와 민병대를 조직하여 영주의 저택을 습격하는 등 과격한 모습을 보여 전국적으로 '대공포(Grande pear)'가 확산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민 의회는 6월 27일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제헌 의회'로 개편하고 그 이전인 6월 17일에는 프랑스의 삼색기를 제정하는데 삼색중의 백색은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고 청 적색은 파리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8월 4일에 봉건적 특권들을 폐지하는 조치들을 취하게 되고 8월 26일에는 '인권선언'을 채택한다. 봉건 잔재를 타도하기 위해 실시된 봉건적 특권의 폐지 조치는 영주에 대한 부역과 영주 재판권을 폐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봉건 지대는 철폐하지 않아 불철저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 봉건 지대의 철폐는 로베스피에르에 이르러 이루어진다.
1789년 8월 26일에 채택된 인권 선언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의 선언'이라는 제목을 가지는데 인류 역사상 인간의 권리를 가장 존엄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이것은 또한 앙시엥 레짐에 대한 사망 진단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선언을 통해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을 제시한 의의를 지닌다. 이 선언은 영국의 혁명 사상과 미국의 독립 선언 그리고, 계몽 사상가들 특히, 루소의 「민약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선언의 제 1조에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하고 사회의 목적은 공동의 행복에 있으며 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인간의 천부적 불변의 권리를 유지하는데 있고 그 권리는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 반항하는 권리라고 명시하였다. 또한 이 선언에서는 모든 주권의 원리는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천명하였고 자유는 타인의 권리에 개입하지 않는 한에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 자유의 한계는 법으로 규정한다고 밝혔다. 소유권은 신성 불가침의 권리라고 또한 이 선언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도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10월 5일에는 '10월 폭동'이 일어나는데 봉기한 파리 시민들은 베르사이유궁으로 가서 왕 루이 16세를 파리 시내로 데려온다. 그리고, 이 시기에 Jacobin 수도원에서 전체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 결사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Jacobin Club의 효시이고 최초로 나타난 정당이라 할 수 있다. 혁명기에 프랑스에 나타났던 정파들은 크게 4개가 있는데 먼저, 초기에 다수를 점유했으며 상층 계급의 친왕당파적 성격을 가진 평원파(Feuillant)가 있고 온건한 지롱드현 출신인사가 주를 이룬 지롱드파(Girond), 혁명을 주도한 자코벵파로서 과격한 혁명 부르조아지로 구성된 산악파(Montagnarl) 그리고, 도시의 숙련 수공업자들로 구성된 상큐롯층이 있었다. 최초는 페이앙파가 정권을 차지했고 다음으로 지롱드파가 권력을 장악하나 이들은 온건적인 성격으로 인래 비판을 받고 곧 물러라게 되고 산악파가 권력을 잡아 상큐롯과 연합하여 귀족에 대항하는 공포 정치를 실행하였다.
1790년에는 '성직자 민사 기본법(Civil Constitution of Clergy)'이 제정되어 성직자에 대한 선출과 임명 그리고, 봉급 지급 등을 국가가 모두 장악하게 되자 교황이 이것에 대해 분개하여 혁명 정부와 대립하게 된다. 1791년에 국민 의회는 봉건 제도에 대해 개편을 시도하는데 종래에 불균형하게 정해진 '주(州, Province)'를 해체하고 전국을 83개의 '현(縣, Departmente)'으로 개편한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6월에 루이 16세는 왕비의 권유에 따라 오스트리아로 도피하여 혁명 세력을 진압할 원조를 요청할 계획을 세우고 변복한 후 오스트리아로 도피하다가 Varenne에서 체포된다. 그래서 루이 16세에 대한 처리 문제가 제기되고 이 문제를 통해 각 정파는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보수 반동적인 다수파인 페이앙파는 왕정의 유지를 주장하는데 비해 자코벵파는 왕정의 폐지를 조장한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페이앙파가 집권을 하게 되자 민중들은 과격한 왕정 폐지 운동을 벌인다. 이러한 민중들의 왕정 폐지와 공화제 청원 운동에 대해 정부는 미국 독립 전쟁에 참가했던 장군 La Fayette의 지휘하에 국민 방위군을 투입하여 민중 학살으로 민중들의 격앙된 분위기를 억누르려 하나 이 사건으로 민중들은 더욱 과격화하는 양상을 띠었다.
1791년 9월에 최초의 헌법인 '1791년 헌법'이 제정되는제 이 헌법에서는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어 부르조자이와 귀족들이 타협한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헌법에서는 '재산 선거 자격제'를 규정하였는데 이 제도는 재산을 가진 세금납부자를 능동 시민으로 규정하고 재산이 없이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시민을 수동 시민으로 규정하여 능동 시민에게만 선거권을 주었다. 헌법이 제정된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구성되었던 제헌 의회는 해산을 하고 1791년 10월에 '입법 의회'를 구성하였다.
이 의회는 745명의 '초선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서 '초선'이라고 하는 의미는 그 이전의 제헌 의회의 경우는 선거 없이 국민 의회의 의원들 중에서 자격자를 임명한 것이므로 이 입법 의회의 의원들은 능동 시민들의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를 통한 초선 의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 입법 의회는 왕권과 타협한 부르조아 의회였는데 이에 반대해 과격파인 Murat를 주도자로하여 자치위원회의 확대된 형태라 할 수 있는 '민중 협회'가 등장한다.
1792년이 되면서 프랑스의 혁명적인 정세에 불안을 느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도전 해 오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페이앙파 정부는 외국과의 전쟁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임에 따라 이들을 타도하고 지롱드파가 집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집권과 함께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하지만 전쟁에서는 패하게 되어 파리와 전국에서 의용군들이 봉기하였는데 이 때 마르세이유 출산들이 부른 '라 마르세이즈'는 오늘날 프랑스의 국가로 불리워지고 있다.
8월 10일에 민중들에 의한 제 2혁명이 발생하여 왕이 있던 튀르리 궁전을 습격하고 왕은 의회로 피신한다. 이에 의회는 왕정 폐지와 왕권의정지를 선언하는데 이것은 곧 1791년 헌법의 정지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입법 의회도 해산 된다. 9월 2일에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는데 이것을 '국민 공회'라 한다. 이 국민 공회는 최초로 보통 선거에 의해 750명의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법률가들이었고 이 선거에서 실제로 투표자는 총선거권자의 10%에 불과한 것이었다. 새 의회의 구성과 함께 9월에는 Danton의 주도하에 반혁명파 1200명이 학살되는 9월 학살이 있었고 9월 22일에는 제 1 공화정을 선포하고 이 날을 기점으로 혁명력을 선포하였다.
1793년 1월 21일에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오스트리아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 등에 의해 제 1차 반불(反佛)동맹이 결성되고 반혁명 복고적 반란으로 Vendee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롱드파가 외국의 위협에 대해 열세를 취하자 이들을 축출하고 산악파 즉,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하는 자코벵파가 집권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부르조아 혁명이 관철 되었다 할 수 있다. 6월 24일에는 인민 주권, 보통 선거, 자유등이 보장 되는 제 1공화정 헌법이 제정되는데 이 헌법의 실시는 내란으로 인한 위기를 구실로하여 그 실시가 유보되었다.
10월 10일에 혁명 정부가 구성되어 다음해 7월까지 존속하게 되는데 이 정부는 비헌법적인 공토정치 시대의 변칙 정부로서 그 중심 기관으로는 12명으로 구성된 '공안위원회'가 있었다. 이 공안위원회는 일종의 공동독재체제라 할 수도 있는데 그들은 민족주의와 애국심, 정의감이 풍부한 인사들로서 지도자는 로베스피에르이고 산악파와 상큐롯을 그 중심세력으로 하였다. 혁명 정부가 이상으로 내세운 것은 도덕 공화국인데 여기서 '도덕'은 루소가 {민약론}에서 말한 원칙을 가리킨다. 그리고, 판사 16명과 배심원 60명으로 구성된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이 혁명 재판소애서는 국민 징발과 반혁명분자의 처형 등을 행하여 1년 동안 4만여명이 처형되었다.
또한, 혁명 정부는 물가 최고 가격제를 도입하고 영주권(領主權)을 무조건 폐지하여 프랑스 농민들은 작으나마 최초로 자기 땅을 가진 '분할지 농민'이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과도한 공포 정치에 모든 국민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이 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794년 7월 27일에 Termidore 쿠테타가 일어나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들은 그를 체포하고 그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을 숙청하였으며 자신들의 파가 아닌 사람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두 숙청하였다.
1795년에는 공포 정치가 종식되고 최초의 입헌 공화국헌법이 제정되는데 쿠테타 후에도 국민 공회가 그대로 존재하여 이 시기의 의회를 'Termidor 공회'라 하기도 한다. 새 정부에서는 집권한 부르조아지의 의도에 따라 '새로 구성되는 의회는 반드시 직전 의회 의원의 2/3가 의원으로 참가하여야 한다.'는 '2/3법'이 제정되었으며 정부 조직은 내무 외무 군무 사법 재무를 각각 담당하는 5인의 집정관으로 구성된 '도독 정부'의 모습을 보였다. 10월 달에는 왕당파의 반란이 있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제 2차 반불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를 위협하자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폴레옹을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총재정부시대
최초로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이후 혁명 정부의 주도권을 가졌던 지롱드당은 국내, 외로부터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1793년이 지나면 급진적인 자코벵당에게 그 권력을 넘겨주게 된다. 국왕의 처형을 계기로 도시 민중들의 지지를 얻은 자코벵당은 공안위원회(Comite' de salut Public)와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수많은 왕당파 혐의자들을 체포, 심문하고 그들을 사형에 처하는 이른바 공포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불동맹의 위협에 대항에 이들은 전국민에 대한 소집령을 내리고 이를 바탕으로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훌륭하게 대처해낸다.
그래서, 1794년 봄에 이르면 프랑스는 국내, 국외적으로 안정을 찾게 된다. 하지만, 공안위원회를 장악한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를 정치적 도구로 삼아 공포정치를 계속하였으며 같은 자코벵당 내에서도 에베르(He'bert), 당통(Danton) 등의 일파를 처형하고 독재정치를 수립하였다. 그는 미온적인 공화주의자들을 숙청하고 모든 시민들이 도덕적이고 깨끗한 '덕(德)의 공화국'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러한 광신적이고 이상적인 신념에 무관심하였고 공안위원회의 위원들까지도 이것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되어 드디어, 국민공회에서는 신임을 잃은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고 처형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 테르미도르 9일이었으며 그로부터 다시 반동체제가 성립되고 혁명은 부르조아지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이 이른바 '테르미도르(Thermidor, 熱月)의 반동'이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지휘한 사람들 중의 다수는 전에는 자코벵파였는데 이들은 혁명재판소를 해산하고 생존하고 있는 지롱드파의 의원들을 불러들여 국민공회내의 옛 의석을 다시 차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테르미도르의 지휘자들은 공포정치 시대의 경제입법을 폐지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켰고 국민공회가 해산되고 이어서 등장한 새 의회에서 국민공회의원들의 2/3가 다시 의석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결정하자 이에 분격한 시민들이 폭동(Vende'maire, 포도월의 폭동)을 일으키지만 나폴레옹의 활약으로 이것은 곧 진압된다.
테르미도르 반동은 국민공회가 1795년에 헌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끝이 났는데 그 지도자들은 공화국을 유지하고 이와 동시에 유산계급의 우세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1795년의 헌법은 국민의 25%에 달하는 극빈자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았고 공직에 입후보하는 사람들은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규정하였다. 또한, 입법의회로서는 양원제를 수립하였는데 하나는 '오백인회'이며 다른 하나는 '원로원'이었고, 국민공회가 결정한 정부설치령에 따라 5명의 총재(總裁)으로 구성된 행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오백인회가 지명권을 갖고 원로원이 선출하였다.
이 1795년의 헌법은 프랑스의 영속적 정부를 마련해주려는 노력의 표시였는데 양원은 고대 아테네의 아레오파구스(Areopagus)와 오백인회를 모형으로 한 것이므로 부분적으로는 고전적 전례를 따른 것이었고, 1787년의 미국헌법과 1791년의 프랑스 헌법등도 따랐다. 권력의 분립을 구현하였지만 동시에 문벌보다는 재산상의 귀족을 인정한 이 헌법은 1793년 헌법에서 실행이 유보된 정치적 민주주의를 포기함으로써 그리고, 1791년 헌법에서의 제한선거제로 돌아감으로써 혁명의 가장 치열한 국면은 지나갔음을 보여주었다.
1795년에 집권한 총재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하였으며 항상 입법의원과 충돌하여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 되었다. 총재들과 의원들은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정치적 균형을 바꾸기 위해 시간을 소모했고 그 결과 서로 헌법의 정신을 침해하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경제문제에 치중하였는데 영국에 대한 전쟁의 방법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실업가에 대한 양보로서 고율의 보호관세를 부과하였다. 또, 실업계의 세력에 호응하여 당시로는 거의 무가치하게 된 아시냐 지폐를 회수하였는데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재정적 혼란을 자극하게 된다. 이와 같이 당시 프랑스의 경제 사정은 악화되고 있었으나 반면에 대외적으로는 나폴레옹의 활약으로 이루어진 비인조약으로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내에서의 프랑스의 위치를 굳게 만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오지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총통정부가 몰락하는 원인이 있었다. 전쟁의 지속은 총통정부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였고 얼마 가지 않아 프랑스의 모든 정파는 군대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받으려고 책략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브뤼메르(Brumaire霧月)의 무혈정변이며 나폴레옹의 독재정치였다.
나폴레옹의 등장
1795년에 성립된 도독정부는 5인 도독의 합의제에 입각한 정부이므로 긴박한 상황에 대해서는 무능함을 드러내게 되어 이 무능함에 대해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에 부응하는 인물이 나폴레옹이었다. 칼라일(CARLYLE)이 주창한 영웅 사관에 의하면 영웅이란 보통 사람이 가지지 못 하는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보통 사람이 이루기 어려운 일을 이룬 사람을 말하는데 나폴레옹도 칼라일이 말한 영웅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령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있던 20세때 프랑스 혁명을 맞이한다. 그는 군사적인 천재였으며 타고난 노력가였고 폭력을 사랑했으며 명예욕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초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지 못 하고 있다가 1793년에 툴롱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진압하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 때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가 되었다가 테르미돌 반란 후에 투옥이 되기도 했는데 1795년에 재차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 하는 과정에서 재등용되어 1796-7년에는 이탈리아쪽에서 침공하는 오스트리아군에 대항하는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군대는 셋으로 나누어 1군과 2군은 명망이 있는 장군들이 사령관을 맡았던 것에 비해 약관의 나이인 나폴레옹이 3군 사령관을 맡게 되어 노장들의 불만도 있었으나 그는 1, 2군 사령관이 모두 패배한데 반해 그만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이처럼 나폴레옹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테르미돌 도독 정부는 나폴레옹의 세력을 국외로 돌리고 그의 힘을 이용하여 영국의 오리엔트 식민지를 점령하려는 두 가지 목적하에 이집트 원정을 명령한다. 나폴레옹의 저지에 실패한 넬슨 제독은 대신에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프랑스 선박들을 격침시켜 나폴레옹은 육지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로 돌아갈 길이 막힌 채 이집트에 고립되게 된다. 그래서, 1799년 1월에 프랑스 정부는 비밀리에 선박을 보내 나폴레옹은 단신으로 프랑스에 돌아오게 된다.
프랑스에 돌아온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에 부르조아층과 연합하여 Brumaire 쿠테타를 일으켜3명의 통령(Consule)으로 구성된 통령정부를 탄생시킨다. 이때의 3명의 통령은 나폴레옹과 탈레랑(Talleyrand) 그리고, Abee Sieyse 였다. 또한, 1804년에는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프랑스 제 1 제정이 시작되었다. 이 쿠테타는 나폴레옹의 군사력과 부유한 부르조아층의 금력이 결합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과연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을 계승한 사람인가 아니면 프랑스 혁명의 중단자인가 하는 문제가 학자들 사이에서 대립되었다.
이상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본 프랑스 혁명의 성격에 대해서는 먼저, 프랑스 혁명은 부르조아 혁명의 전형으로써 근대 시민 사회 성립의 이정표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프랑스 혁명이 가진 세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프랑스 혁명은 부르조아 혁명의 원리를 철저히 실행하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 측면을 보고 판단한 것이지 혁명의 주도자가 부르조아인가 아닌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프랑스 혁명은 절대주의 사회의 기반을 무너뜨렸고 부르조아지의 권력 기구를 확립하고 자본주의적 제관계를 수립했으며 분할지 농민을 탄생시켰다는 점 등에서 위에서와 같은 규정이 가능한 것이다. 셋째로 프랑스 혁명은 상큐롯아래 농민 혁명의 원리를 실현하여 민주주의 발전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프랑스 혁명은 귀족 혁명, 도시 민중 혁명, 부르조아 혁명 등의 이질적인 혁명들이 같이 나타난 복합적인 혁명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나폴레옹 시대
1799년부터 1814년까지의 나폴레옹 시대는 크게 두 시기로 양분되는데 1799년에서 1804년 사이의 공화정 시기와 1804년에서 1814년사이의 제정시대가 그것이다. 먼저, 첫 번째의 시기는 나폴레옹이 제 1 통령(Le Premier Consul)으로서 혁명의 성과를 부분적으로 보존하면서 프랑스의 군사 및 정치를 강화한 시기이고 두 번째 시기는 정치체제를 주로 군사력으로 유지하면서 전쟁, 정복, 합병 등의 수단에 의해 프랑스 혁명 정신을 유럽 각국에 전파한 시기이다.
코르시카 출신의 하급 장교 나폴레옹이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1795년의 반란(Vende'mair 의 폭동)을 진압함으로서 였는데 그 후 그는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그의 나이로 볼 때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그는 훌륭하게 임무를 마치고 이어서 이집트 원정을 단행한다. 그러나, 1799년에 총재정부의 부능함에 대해 그는 이집트에서 귀국하여 브뤼메르 무혈정변으로서 저항하고 이것이 성공하여 시에스(Emmanuel J.Sieyes) 뒤꼬(Ducos)와 함께 통령이 된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대외적으로도 활동하여 1801년에 제 2차 대불동맹을 와해시키는데 성공한다. 다만, 마지막 남은 영국과는 1802년 아미앙(Amiens) 조약을 체결하고 휴전하였는데 이 조약에서는 쌍방간의 현상유지를 규정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유럽에서의 프랑스의 패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영국에게 있어서는 안전상의 큰 위협이었으며 무역로가 막힌 상인들의 반발을 나타나게 하였고 프랑스에서도 조약에 대한 영국의 불성실한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조만간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대외적인 위협요소를 제거한 나폴레옹은 헌법개정을 통해 자시의 독재권을 강화해 나갔는데 1799년 12월 국민투표에서 '공화국 8년의 헌법'을 통과시킨다. 이 헌법에 따라 그는 임기 10년의 제 1 통령이 되고 제2, 3통령 및 국가위원회를 임명할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이 개헌으로 나타난 양원 중 하나인 호민원(Tribunate)은 입법의 토의만 하고 입법원(Legislature)은 입법의 표결만을 하게 결국 제 1통령인 나폴레옹이 실질적인 입법권을 장악하였다. 한마디로 나폴레옹의 정부는 공화제를 가장한 독재였던 것이다.
결국 프랑스 국민은 그들이 피를 흘려 얻은 정치적 자유를 상실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에 대해 나폴레옹 정부는 호율적이고 활동적인 정책으로 대처해 나간다. 그래서, 프랑스 농민의 납세액은 줄어들고 엄격한 재판과 유능한 사법관을 통해 불법과 무질서을 억제하였으며 도로, 교량, 항만, 운하등을 재건하였다. 이러한 국가재정의 개선과 질서회복 및, 사회안정을 꾀하는 정책은 농촌과 도시에서 지지를 받게 되었고 이에 힘입은 나폴레옹은 1804년에 또다른 헌법 개정을 통해 종신임기의 통령이 되었으며 계승자에 대한 지명권까지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내놓은 성직자법은 교황청과 프랑스와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구교도 프랑스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01년 비오 7세와 협약(Concordat)을 체결하여 종교상의 불안 요인을 해결하고 일반대중의 지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공립국민학교에서 전문적인 특수학교 및 대학에 까지 이르는 국민교육제도를 도입하였고 명예훈장(Le'gion d'Honneur)제도를 시작하였으며 1804년에는 당시까지의 프랑스 법들을 체계화하여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이라 일컬어지는 민법전을 완성하였는데 이 법전에는 프랑스 혁명으 많은 성과들이 포함된다.
1804년 나폴레옹은 비오 7세의 집전으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로 등극하고 이로서 프랑스 제 1제정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영국을 중심으로 하여 제 3차 대불동맹이 결성되는데 나폴레옹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 결과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였으며 영국을 제외한 전유럽의 지도를 바꾸어 놓을 만큼의 강력한 정복 및 합병의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영국에 대해서는 대륙봉쇄령으로서 고립시키려 하는데 이것이 궁극에는 다른 유럽국가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다시금 프랑스와 유럽국가간의 전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대륙봉쇄령의 유지를 위해 고심하던 나폴레옹은 결국 1812년 러시아 원정을 단행하는데 이 원정이 성과 없이 패전하자 유럽 각구들의 대(對)나폴레옹 공격이 활기를 띠게 된다.
1813년 라이프찌히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나폴레옹 1세는 퇴위하고 프랑스 원로원은 부르봉왕가의 복고를 결정하여 루이 18세가 등극하지만 엘바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1815년 2월에 다시 파리로 돌아와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6월에 워털루에서의 패배로 나폴레옹 시대는 완전한 막을 내리게 되었다.
1794년의 테르미도르 반동은 혁명의 주체가 민중으로부터 다시 부르조아에게로 돌아감은 의미했다. 그리고, 이 반동을 유지하기 위해 활약한 나폴레옹과 또 그에 의한 브뤼메르 쿠테타로 프랑스 혁명은 일단 끝이 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프랑스 내부의 혁명은 끝이 났으나 나폴레옹의 집권은 프랑스 혁명의 목적과 이념을 유럽 각국에 전파하였다는데서 중요하다. 즉,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은 일차적으로는 프랑스 내부의 일이었으나 전유럽에 곧 영향을 미쳤고 이 두 시기를 통해 얻은 역사적 성과는 다른 어떤 혁명들보다 포괄적이며 큰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주권재민, 국민개병, 애국심, 개인주의적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 했고 이러한 것들은 나폴레옹에 의해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고 그 반응은 심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나폴레옹에게는 자신이 정복한 국가내에서 자유주의와 Nationalism의 씨앗을 뿌리는 결과를 가져와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제국의 흥망
이집트에서 귀국한 나폴레옹이 부르조아층과 협력하여 무능한 도독 정부를 타도하고 통령 정부를 구성한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 때 집권한 나폴레옹은 1799년 2월에 새헌법을 제정하는데 이것을 공화 8년의 헌법이라고도 한다. 이 헌법에 의해 제 1통령이 모든 행정과 입법권을 가짐에 따라 모든 권력은 나폴레옹에게로 집중된다.
나폴레옹의 내정에서 먼저,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행정 기구를 확립하고 경찰력을 강화하였으며 그리고, 이를 통해 왕당파와 자코벵 파까지도 숙청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중앙 은행을 설립하여 재정과 화폐를 안정시켰으며 상공업을 진흥시키고 조세를 공정히 거두었다. 교육면에서도 초등교육제를 확립하였고 문화명에서는 민법전을 와성하였다. 외정을 위해 그는 초기에는 자신의 집권이 불안하므로 외국과 평화 조약을 맺어 평화의 회복에 노력하였다. 그래서, 1801년에는 교황과 타협하여 카톨릭을 국교로 회복할 것과 몰수한 토지는 다시 반환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1802년에는 영국과 평화 조약(Amiens 조약)을 맺어 외부적인 위협 요소를 제거하므로써 내정 정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내정 정비가 이루어 진 후 본격적인 침략 활동에 나서게 된다.
내정 개혁을 실시하며 나폴레옹의 권위가 높아지자 측근의 인사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게 되고 이것을 국민 투표로 결정하게 하여 프랑스 제 1 제정이 탄생한다. 아첨 의원들의 제안에 따라 실시한 이 국민 투표에서 나폴레옹은 375만표 대 2500 표의 압도적인 차이로 황제로 추대되는데 이것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자신의 제국을 'Democratic Empire'라 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에 노틀담 사원에서 교황의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은 농민들과 부르조아들의 보호자로 간주되었는데 이러한 나폴레옹 독재의 사회적 기반으로는 먼저, 신흥 부르조아층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내 외에서 자신들에 대한 반대 세력에 부딪히자 군사력을 가진 나폴레옹과 제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특히 외적으로 산업 혁명이 이루어지던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의 군사력이 꼭 필요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의 지지세력이 보수화된 분할지 농민들 즉, 자작 농민들인데 이들은 분여받은 토지의 소유권을 보존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지켜줄 수 있는 다시 말한다면 자신들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보호자가 필요하였고 그 보호자로 선택한 사람이 나폴레옹이었다. 세 번째로는 프랑스 국민주의(Nationalism)가 대두함에 따라 프랑스 혁명 이념의 확대를 위해 나폴레옹이 필요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1804년부터 시작된 제 1제정에서 나폴레옹은 평화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교황과의 화해 그리고, 영국과의 아미앙 조약 체결등이 모두 평화를 위한 시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를 통해 어느 정도 내정의 개혁에 성공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난 이후 나폴레옹은 대외 정복에 나서는데 이 정복 정책의 목적은 먼저, 경제적으로 프랑스 자본주의의 대외적 발전을 꾀하는 것이었고 정치적으로는 국내 반대 세력의 관심을 국외로 돌리고 프랑스 국민주의와 혁명 정신의 확대를 위해 이러한 정복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 과정에서 먼저, 대영 투쟁의 문제는 나폴레옹 전쟁의 본질적인 문제였는데 그것은 산업 혁명으로 경제적 선진 지역인 영국의 경제적인 유럽 지배를 막기 위해 즉, 경제적 선진을 군사적 힘으로 타도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1802년에 프랑스와 영국은 아미앙 조약으로 일시적인 평화를 회복하는 듯 했으나 1803년에 이 조약을 폐기되고 즉시,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로서는 영국의 강력한 해군력을 고려할 때 영국과 교전시에 해외 식민지에 대한 관리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므로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할양받아 소유하고 있었으며 미국 영토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루이지애나 지역을 미국에 헐값에 양도한다.
1805년에 영국이 중심이 되어 제 3차 반불동맹이 결성된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을 정복할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 그는 이 계획을 포기하고 연합 함대에 명령하여 영국이 아닌 지중해 지역의 이탈리아로 항해할 것을 명령하는데 지중해로 진입하려는 이 연합 함대는 트라팔가에서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와 조우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 스페인의 연합 함대는 33척 그리고, 영국의 함대는 27척으로 영국이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전의를 가지지 않고 단지, 지중해로 들어가려는 연합 함대에 대해 넬슨은 바람의 잇점을 이용하여 연합 함대를 대파한다.
그러나, 이 승리는 엄밀히 본다면 전의를 가진 두 세력이 싸운 전투라기 보다는 영국의 일방적인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영국 침공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정복의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를 침공한다. 이들 국가 역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으나 나폴레옹은 이들의 예상을 능가하는 빠른 기동력으로 승리를 거둔다.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해 군사적으로는 패했으나, 경제적으로라도 승리하기 위해 '대륙 봉쇄령(Continental System)'을 발표하는데 이 조치는 1806년 11월에 베를린 칙령으로 발표되었다가 1807년 밀라노에서 앞서의 베를린 칙령을 보완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이 두 칙령을 합해 대륙 봉쇄령이라 한다. 이것은 폴란드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에까지 이르는 유럽의 해안을 봉쇄하는 것과 함께 영국을 경제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해 유럽 대륙을 프랑스 영향하에 보호 무역국화 시키고 유럽 대륙내에서는 프랑스 주도하에 유럽 경제를 지배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대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그 원인은 이 조치를 통해 발생한 여러 가지의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모순들은 먼저, 대륙 봉쇄령의 초기에 영국은 이 조치로 인해 많은 곤란을 겪었으나, 신대륙 무역과 밀무역으로 이 곤란을 극복해 나간데 비해 반대로 유럽 대륙운 경제적인 곤궁에 빠지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일례로 러시아의 경우는 곡물과 목재를 영국에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했으나 이것이 금지됨에 따라 심각한 곤란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유럽 대륙의 경제적인 곤란은 각국으로 하여금 부분적으로 영국과 밀무역을 하게 하였고 특히, 심한 곤란을 겪던 러시아가 행한 영국과의 밀무역은 나폴레옹의 분노를 사고 나폴레옹은 이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러시아 원정을 단행하는데 이 원정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연합하여 나폴레옹에 대한 대책을 세우던 중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아 Austerlitz전투(1805.12.2)에서 대패한다.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키고 1806년 6월에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킨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은 962년에서 1806년에 이르는 긴 역사에 종말을 고하게 되고 그 대신 나폴레옹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 Westphalia 왕국과 폴란드 지역에 Warsaw 공국을 건설하여 동생 제롬(Jerom)을 베스트팔리아 왕국의 왕으로 봉하였다.
프러시아도 러시아와 동맹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했으나 나폴레옹은 1806년에 Auerstadt에서 프러시아를 굴복시키고 1807년에는 Tilrit 조약을 맺는데 이 조약은 프러시아의 국민적 자존심을 송상시키는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이러한 국가 이외에도 1807년 9월에는 포르투갈이 그리고, 1808년 6월에는 스페인이 각각 프랑스에 굴복하여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국을 건설하여 형인 조셉(Joseph)을 스페인 왕에 봉한다. 이들 두 국가는 친영적인 국가로써 영국과 밀무역이 성행했으며 후일 영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각 지역을 프랑스령에 편입시키면서 나폴레옹은 교황령조차 편입하여 카톨릭 교도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복 활동과 함께 이 시기에는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eone)'이 만들어 탄생했는데 이것은 1800년에서 1807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1804년에는 '민법전' 이라 하다가 1807년에 나폴레옹 법전이라고 이름이 바뀐다. 최초에 이 법전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중세적인 요소와 근대적인 요소가 혼합된 프랑스의 법체계에서 프랑스 전국에 통용될 통일적인 법전을 만드는 것을 1791년 헌법에 규정함에 따라 그 작업에 착수하였다. 1800년에 민법전 기초 위원을 선출하고 이들은 1801년에 기초를 마치고 이것을 1804년까지 심의하여 1804년 2281개조의 '프랑스 민법전'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즉위 후에 '나폴레옹 법전'으로 개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 법전의 특성은 먼저, 시민 사회의 성격을 규정해 놓은 것을 들 수 있으며 소유의 절대권을 규정하는데, 이것은 봉건제의 폐지를 의미하며 시민 사회 성립의 전제로써 자본주의의 발달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약 자유의 원칙을 규정했는데 이 또한 자본주의 발전과 자유로운 소유권 유통의 전제가 되는 것이었다. 이 법에는 게르만적인 관습법과 프랑스 혁명법이 결합되었는데 세계 3대 법전의 하나로 시민 사회의 법률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나폴레옹 법전은 산업 혁명이 진전된 다음 프랑스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의의를 지니는데 나폴레옹 스스로도 '나의 진정한 명예는 40번 싸운 전승이 아니다. 워터루는 모든 전승의 기록을 사라지게 했으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나의 민법전이다.' 라고 하며 이 법을 자신의 최고의 업적으로 간주하였다.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 원인으로는 대륙 봉쇄령의 모순과 각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로 인한 반항을 들 수 있다. 이 중 특히, Nationalism은 나폴레옹의 유럽 원정 이후 유럽에서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프랑스에 정복당한 스페인. 포르투칼 등지의 피정복국에서 발흥하였다. 그래서, 최초의 민족주의적인 반항은 영국의 지원하에 스페인에서 일어나고 이것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나타나는 곳이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였다. 프랑스는 인종적으로 라틴인인데 비해 프러시아는 게르만인으로 이러한 민족적 모순 상황에서 프러시아 내부에서는 민족적인 움직임들이 나타난다. 프러시아는 내부의 정치, 경제, 사회 및 군사제도의 개혁을 통해 프랑스에 대항할 힘을 키웠다.
대륙 봉쇄령으로 가장 큰 압력을 받은 러시아가 영국과 밀무역을 행하자 나폴레옹은 '러시아 없는 대륙 봉쇄령은 무의미하다.'라고 하면서 러시아를 응징할 것을 결정하였다. 프랑스의 러시아 원정군은 약 60만명 이상으로 1813년 5월 9일에 출발하여 9월 14일에는 모스코바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국민들에 대한 소개 작전을 벌여 모스크바를 비우고 건물들을 불태웠으므로 프랑스군은 모스크바를 점령 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10월 19일에 모스크바에서 퇴각을 시작한다. 그러자, 이런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Kosac 기병대가 추격하여 배후를 습격하여 12월 18일에 나폴레옹은 간신히 단신으로 파리에 돌아온다. 이에 프랑스의 패배 소식을 들은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은 제 4차 반불 동맹을 맺어 1813년 10월에 드디어, 라이프찌히(Leipzigh) 국민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게 된다.
1814년 4월에 반불 동맹에 대해 나폴레옹은 항복을 하는데 동맹국들은 이 때 나폴레옹에게 호의를 베풀어 프랑스 황제의 칭호와 수입을 유지한 채 그의 고향에 가까운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귀양을 보낸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엘바에 있는 동안 비엔나에서 동맹국들은 영토 문제로 탁상 공론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틈탄 나폴레옹은 1815년 2월에 엘바를 탈출하고 3월 20일에 파리에 입성하여 6월 28일에 왕정이 복고 될 때까지 이른바 그의 '백일천하'를 실시한다. 백일 천하가 끝나게 되는 계기는 1815년 6월 18일에 브뤼셀 교외의 지역에서 있었던 '워터루 전투'였는데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반불 동맹군들과 싸웠으나 패배하고 10월 17일에 대서양상에 있는 영국의 식민지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되어 1821년에 그의 생을 마치게 된다.
나폴레옹을 재차 패배시킨 동맹국들은 재차 비엔나 회의를 열었으며 파리 강화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1790년 이전의 국경으로 후퇴할 것과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15만 반불 동맹군이 프랑스 북부에 5년간 주둔한다는 것을 결정하였다.
나폴레옹의 시기에 영국에서 그에 대항했던 인물들로는 먼저, 월리엄 피트(大,William Pitt,1708-1806)가 있다. 그는 Chathain 伯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1766년에서 68년까지 수상을 역임 했으며 미국 식민지 건설, 오스트리아와 전쟁 등 영국의 세계제국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다음으로는 그의 아들인 월리암 피트(1759-1806)가 있는데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하여 흔히 少피트라고 부른다. 그는 22세에 M.P가 되었으며 23세에는 재무상 그리고, 24세에는 수상을 역임하여 의회를 개혁하고 자유무역을 옹호했으며 노예무역 폐지를 주장하는 등 열렬한 자유주의자(Whig)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진전은 그를 반동, 보수주의자로 만들어 그를 세차례의 반불동맹에 앞장 서게 했다. 말년에 그는 가톨릭에 대한 옹호의 주장을 펴다가 왕과 반목하고 사형당하게 된다. 나폴레옹 시기 영국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웰링턴이있다. 그는 워터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장군으로 유명하고 1828년에 수상을 역임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가 계속되는 동안 '대륙 봉쇄령'으로 인하여 영국에는 곡물의 가격이 상승되었다. 그런데 이런 곡물가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곡물의 수입이 많아짐에 따라 하락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지주 계급과 상공업 계급이 결합하여 '곡물법(Corn Law, 1815)'을 제정하게 되는데 이 법은 지주 계급이 곡물가격을 높이 유지시키기 위해서 외국으로부터의 곡물 수입을 제한하는 법령이었다.
비인회의 CONGRESS OF VIENNA(1814.9-1815.6)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큰 역할을 하게 되자 유럽의 중심은 파리에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로 옮겨지게 되고 유럽 정치를 주도하는 인물도 나폴레옹에서 메테르니히로 바뀌게 된다. 메테르니히는 1815년에서 1848년까지 유럽의 정치를 주도하다가 그 이후 다시 프랑스의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에게로 유럽의 주도권이 넘어간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 이후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이 19세기 유럽 정치 주도권의 흐름이다.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국제 회의라 하는 Westphalia 회의 다음으로 열린 큰 국제 회의인 비엔나 회의에서는 비엔나 반동체제가 등장하여 1848년까지의 유럽을 풍미하게 된다. 이 회의의 참석자는 각국의 군주와 외무상등 200여명에 달했는데, 전승국으로는 오스트리아(메테르니히), 영국(Castlereagh), 러시아(Alexander 1세), 프러시아(Heidenberg)의 4강국과 스페인, 포르트칼, 스웨덴같은 전승국이지만 회의에서 무시당하고 이로 인해 불만을 가졌던 3개국이 있었다.
이들이 나폴레옹을 엘바로 귀양보내고 난 후 영토 처리 문제로 갑론을박하는 도중 나폴레옹은 엘바을 탈출하여 그의 '백일천하'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워터루의 승리로 나폴레옹을 완전히 몰락시킨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영토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이 때 프랑스는 불만을 가진 소국들을 이끌고 자기 주장을 큰 목소리로 주장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4강국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대 영국 프러시아로 갈라져서 대립하게 된다.
비엔나 회의의 지도 원리는 곧 비엔나 체제의 원리가 되는데 이것으로는 먼저, '정통주의(복고주의)'가 있다. 이것은 메테르니히가 주장한 것으로 유럽의 국경을 비롯한 통치자등 모든 것들을 1792년 이전의 상황으로 돌리자는 주장인데 정치적인 면에서 본다면 왕정 복귀를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반동, 보수주의의 고수'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자유 및 이 시기에 일어난 국민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로는 '배상주의'가 있는데 이것은 영토 문제로 회의에서 국가간에 대립할 때 자국과 이해 관계가 있는 어떤 지역을 포기하는 국가에게는 다른 지역으로 보상한다는 원리이다. 네 번째는 '세력 균형 주의'인데 이것은 한 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막는 원리이다. 이러한 원리들이 비엔나 체제라는 모습으로 실현됨에 따라 이 원리들은 1848년까지의 국제 질서가 되었다.
비엔나 회의에 참가한 강대국들의 주된 대립점은 폴란드에 대한 문제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위치한 작센(Sachsen,Saxonia) 지방에 대한 문제였다. 먼저, 폴란드 문제는 폴란드가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사이에 위치함에 따라 러시아는 서방 진출의 교두보로 이 지역을 탐내자 프러시아와 영국은 그러한 러시아의 진출이 장차 위협 요소가 될 것으로 파악하고 이것에 반대하는데 특히, 영국의 경우는 러시아가 폴란드를 차지할 경우는 영국과 바다를 마주하게 되어 직접적인 침공의 위협이 있으므로 강하게 반대하였다. 다음으로, 작센 지방은 지하 자원이 풍부하고 독일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유리한 위치이므로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다툰다.
따라서, 이 두 문제로 인하여 4강국들은 영국과 프러시아 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로 갈라지고 양자 사이에서는 전쟁도 불사 하려는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패전국인 프랑스는 양측에 대해 선택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미묘한 위치에 서게 되어 패전국이면서도 오히려 정승국들이 프랑스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는 탈레랑(Talleyrand)이었는데 그는 매우 능란한 수단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그의 경력을 보면 이러한 점은 더욱 확실해진다. 그는 언제나 여당의 편에서 활동한 사람으로 혁명전에는 주교로서 성직자 신분이었다. 그러던 그가 혁명 이후에는 혁명 정부에 결탁하여 '성직자 민사 기본법'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혁명 정부가 무너지고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그뤼메르 쿠테타에도 주역으로 참여하였으며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에는 프랑스 대표로 비엔나 회의에 참가하여 강대국들의 대립 상황을 이용하여 큰 역할을 하였고 왕정 복고시에도 여전히 그의 직위를 유지하였다. 또한, 훗일 7월 혁명이 일어났을때에도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는 등 언제나 권력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처럼 능숙한 정치가인 탈레랑은 패전국 대표이면서도 스페인, 포르투칼 등의불평 소국을 이끌고 강대국들의 대립 상황속에서 그의 능란한 외교술이 엿보이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먼저, 폴란드 무제에 대해서는 폴란드의 분할을 제안하였는데 폴란드의 댜蒁부분을 러시아가 장악하게 하고 프러시아는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도록 일부 지역을 차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해 당사자의 하나인 영국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도록 하였다. 작센 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을 프러시아가 차지하게 하고 일부는 작센 왕국에게 맡겨서 이것으로써 독일 통일의 중심이 프러시아가 되는 계기가 생겼다. 대신, 오스트리아는 비엔나 회의의 원칙에 따라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게 하였는데 그 곳이 이탈리아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요한 지역인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영국에 대한 보상은 유럽 대륙 내의 영토가 아니라 비유럽 지역 영토로 이루어졌는데 영국은 해군국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요구하여 승인받게 된다. 당시 영국이 요구한 지역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식민지, 지중해의 말타섬, 아시아의 실론등 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영국은 해군력을 이용하여 세계를 평화적으로 지배하는 'Pax Britanica'를 이루게 된다.
비엔나 조약은 1815년 6월 9일에 체결되고 이로써 비엔나 반동 체제가 등장한다.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2개의 동맹이 맺어지는데 먼저, 그 하나는 '신성 동맹'이고 다른 하나는 '4국 동맹'이다. 신성 동맹(Holly Allience)는 1815년 9월에 결성되는데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결성을 주창한다. 이 동맹은 자유주의, 국민주의 등의 혁명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모든 군주가 결합한다는 취지하에 조직되었으나 영국과 교황은 이에 참가하지 않았다. 1815년 11월에는 4국 동맹이 결성되는데 이것은 실질적인 군사 동맹으로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이 동맹에 참가하였으며 나중에 프랑스가 참가하여 5국 동맹이 되었다. 그리고, 이 동맹의 내용은 유럽의 국가에 혁명이 발생할 때는 연합하여 군사적으로 탄압한다는 것이었다.
비엔나 반동 체제의 실질적인 내용으로는 먼저, 자유주의와 국민주의를 탄압한다는 정통주의의 실현에 입각한 내용이 있고 다음으로, 세력 균형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프랑스의 고립화 정책을 취하고 프랑스에 대해서는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약탈해간 미술품들을 반환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러한 비엔나 체제로 인하여 영방 국가로 분리된 독일내에서 프러시아의 지위를 향상시켰으며 이탈리아는 소국으로 분열되고 많은 영토를 오스트리아에 빼앗기게 되었다.
7월 혁명
19세기라는 한 세기를 크게 개관하여 볼 때 이 시기는 혁명과 반동(Revolutioa and Reaction)의 교체가 끊임없이 일어났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최초로 일어났던 것이 루이 16세의 Ancien Regime에 대해 로베스피에르의 프링스 혁명이 있었으며 메테르니히의 비인 반동체제에 대해 루이 필립에 의한 7월 혁명이 1830년에 있었으며 Guizot의 7월 왕정(July Monarchy)에 대해 비인 체제를 무너뜨린 2월 혁명이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이 혁명의 결과 제 2공화정, 제 2제정. 제 3공화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7월 혁명은 1830년 7월에 시작되었는데 혁명전은 복고 왕정인 부르봉왕조가 집권하고 있었다. 7월 혁명의 원인은 먼저 루이 18세가 과격파들을 처형하다가 중도정치를 폈고 다시 찰스 10세가 아주 반동적인 정치를 실시하여 카톨릭을 부화시켜 카톨릭을 모독하는 자들을 처벌하고 망명 귀족 배상법을 만들자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직접적인 원인은 1830년 5월에 찰스가 광대한 알제리 식민지를 얻고 자신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 생각하여 총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의외로 선거 결과는 왕당파보다 자유주의자가 더 많은 지지를 얻게 되자 그는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의회 해산과 언론을 탄압(언론 출판 검열)하고 선거법을 개정(토지세를 기준으로 선거권 부여, 10만명에서 2500명으로 선거권자 축소))한다는 발표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거법의 개정은 도시의 중소 상공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토지 귀족만이 선거권을 지니는 것이었다.
찰스는 9월에 총선거를 재실시할 것이라는 발표를 하는데 국민들은 이것을 정치적인 쿠테타라 생각하고 혁명을 일으킨다. 혁명의 주도자는 Thiers와 저명한 역사가인 Guizot였는데 약 3만명의 시민,학생,병사들이 27일에서 29일 사이에 3일간 시가전을 벌인다. 이것을 '영광의 3일'이라 하는데 그 결과 찰스 10세는 영국으로 망명하지만 혁명 후의 정부는 공화정이 아니라 왕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루이 필립을 왕으로 선출하고 7월 왕정이 성립되는데 그 이유는 공화주의자와 학생,노동자들은 공화정을 주장했으나 자유주의자들 가운데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이 승리하게 된 결과이다. 그리고, 이 왕정의 성립에는 탈레랑이 큰 공헌을 하였다.
7월 혁명의 결과 프랑스에는 왕정이 성립되었는데 이것은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부르조아가 참가함에 따라 자본이 있었으며 탈레랑이라는 두뇌가 있었으므로 이 세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왕정은 자유 왕정이었고 부르조아 과두정권이었는데 이에 따라 땅을 가진 귀족들은 몰락하게 되고 생산을 하지는 않고 자금을 이용해 수입을 얻던 금융 부르조아지가 집권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에서 금융 부르조아지가 집권할 수 있었던 다른 이유로는 산업 혁명의 미발달로 산업 부르조아지의 발달이 미약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7월 혁명은 유럽의 각 국에 영향을 미쳐서 각 국에서는 혁명 운동이 발생하게 되는데,먼저 1831년에 벨기에(Bergie)의 독립이 이루어지게 된다. 당시 벨기에는 비인 회의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에 통합되어 있었는데 구교로서 농업국인 벨기에와 신교이고 상업국인 네덜란드 사이에서 대립이 생기게 된다. 1830년 8월 브뤼셀의 한 극장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독립 운동이 시작되는데 10월에 독립 선언을 하고 1831년 1월에 런던 국제 회의에서 독립을 승인하였는데 영세 중립국의 성격을 지녔다.
벨기에의 뒤를 이어 펄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 하였고 1832년 영국에서는 '혁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제 1차 선거법 개정(Reform Bill, *ACT는 통과된 법을 말함.)이었는데 이 개정은 오랫동안 상원에 의해 부결되는등 많은 논의를 거쳤으므로 Bill이라 칭한다.
1815년 워터루의 승리 이후 영국에서는 지주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곡물법'이 제정된다. 그러나, 도시 노동자와 중산 계급들을 중심으로 'Anti-Corn Law League'를 결성하여 이 법에 반대함에 따라 이 법은 1846년에 폐지 된다. 당시 영국은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많은 기계가 보급되고 이에 이해 실업자가 증가하자 1812년 무렵에 노동자들이에 의한 'Ludditism(기계파괴운동)'이 나타난다. 1819년 맨체스터의 St.Peter 광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노동 운동을 벌이는데 정부가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것을 'Peterloo 대학살'이라 하는데 실제의 사상자는 학살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이러한 사태에 대해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반정부운동을 벌이게 된다.
1830년에 7월 혁명이 유럽에서 발생하자 영국에서도 혁명이 우려되었으나 청교도 혁명의 교훈을 가진 영국은 혁명 없이 의회의 의정 활동을 통해 개혁을 이루려 하였는데 이때 나타난 것이 선거법 개정이었다. 영국의 선거법은 대략 15세기에 만들어지고 16세기에는 대부분의 선거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정국의 선거구를 자치 도시 선거구인 Borough와 州선거구인 County로 나누고 평균 2명의 M.P를 선출 하였다.
그러나, 자치 도시인 버러는 국왕의 특허장을 필요로 한다는 조건에 의해 국왕은 친국왕적인 의원수의 증가를 위해 버러의 수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리적인 문제로 실제로는 종재하지 않은 선거구의 의원도 나타나게 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합리한 선거구에도 불구하고 15세기 이래의 선거법은 고쳐지지 않았다.
선거법에 의하면 선거 자격은 연수 40s의 Freeholder(Yeomanry 이상)로 제한 되었는데 1711년에 Property Qualfiction(선거재산자격제도)에 의해 재산을 600파운드로 제한하여 그 이하는 M.P가 될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지식자에게는 3표까지 행사할 수 있게하여 불합리한 제도가 계속되었다. 그래서, 선거법 개정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특히, 버러 지역에서 이러한 요구가 심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부패 선거구를 Rotten Borough 혹은 Pocket Borough라 하였다.
산업 혁명으로 인하여 이구의 중심지가 이동되나 신중심지에는 선거구가 없으므로 이에 대해 개정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여기에 프랑스 7월 혁명의 분위기가 가세되자 1832년 6월 4일에 의회를 중심으로 부패 선거구를 개혁하는 선거법의 개정이 이루어진다(제 1차 선거법 개정). 당시 영국에는 토리당(보수당)과 휘그당(자유당)의 2대 정당 체제가 있었는데 휘그당에서 선거법 개정을 주도하여 그레이(Grey)내각 때 이러한 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것은 300년만에 이루어진 개정으로 하나의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정안이 하원에서는 통과되나 귀족들의 상원은 이것을 거부한다. 이에 대해 그레이는 국왕을 설득하고 새로운 귀족 즉, 자유당을 지지하는 귀족을 만들것이라 위협하여(귀족 임명권은 하원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국 이 법안을 통과시킨다.
개정법안의 내용으로는 먼저, 56개의 버러를 폐지하고 30여개 버러에서는 M.P의 수를 1명으로 축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133개의 의석이 새로 생기게 되고 이것을 도시의 인구 숫자에 따라 1 2명씩 배정하는 선거구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선거 자격에도 수정이 가해졌는데 40s Freeholder는 그대로 두고 도시의 Middle Class 중에서 £10 Householder에게 즉, 자기 집을 가지고 10파운드의 재산을 가진 세대주들에게도 선거권을 주었고 농촌에서는 부유한 Famer(£10 Leaseholder,Copyholder)에게 선거권을 주었다. 이 결과 유권자의 수가 16만에서 93만으로 증가되었고 영국의 Middle Class(부르조아지)가 참정권을 가지게 되어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승리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상층 계급(Overload,Landlord) 즉, 귀족들과 중산 계급 그리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립을 심화 시켰는데 이들의 대립은 Rent(지대)와 Capital(자본) 그리고, Wage(임금)의 대립으로 달리 표현 되기도 한다. 곡물법에 대해서는 귀족이 그것의 폐지를 불허하고 중산계급과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폐지를 주장한 반면 선거법의 개정에 대해서는 귀족들과 중산층의 타협이 이루어지고 노동자들은 소외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이 두 계급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2 3차 선거법 개정 운동을 벌인다.
선거법의 개정 후에는 일부 지식인층(부르조아층)의 참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단독적인 계급 구성이 나타나서 Chartism 혹은 Chartist Movement가 나타난다. 여기서 Chart는 헌장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에서 헌장을 만들고 운동을 지도한 인물들은 노동자들의 계급 구성에 참가한 일부 지식인층이었다.
2월 혁명
7월 혁명으로 탄생한 7월 왕국은 18년간 지속되었는데 이 정권은 과도기 정권으로서 금융 부르조아지의 자의적인 정권이라는 성격을 가짐에 따라 이에 반동으로 2월 혁명(February Revolution)이 1848년에 발생했는데 혁명은 2월 22일에서 24일까지 3일간의 시가전 후에 승리하게 된다. 혁명의 배경으로는 프랑스 산업 혁명의 진전과 산업 부르조아지가 등장함에 따라 산업 부르조아지들은 자신들을 가로막는 금권 정치와 금융 부르조아지 정권을 타도하려 한 것이 있고, 산업 혁명이 진전된 결과 노동 계급과 같은 사회주의세력이 등장하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사회주의 세력의 주도자로는 영국의 Saint Simon, Karl Marks, Fredrich Engles등과 프랑스의 Louis Blanc이 있었는데 1848년 2월에 발표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은 2월 혁명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2월 혁명이 발생한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먼저, 7월 혁명을 일으켰던 Guizot 내각의 부패와 무능을 들 수 있다. Guizot는 1840년에 외상을 역임하고 1847년에는 수상이 되었는데 이 정부는 과두적 금융 부르조아지 내각으로 선거 매수와 매관 매직, 외교 정책의 무주견 등이 만연된 부패정권이었다. 특히, 외교 정책의 면에서 영국 함대가 프랑스 군함을 정지시키고 임검을 실시한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론 대책 없이 굴복하여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원인으로는 정부가 노동세력과 산업 부르조아지의 반항을 탄압한 것을 들 수 있고, 산업 부르조아지와 노동자 계급이 불합리한 선거법의 개정을 요구한 것이 거부된 사실도 하나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정당이 일치하여 귀조 내각의 사퇴를 요구하자 정부는 일체의 집회를 불허하게 된다. 이에 대해 정부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개혁 연회(Banquet of Reform)'를 개최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은 전국적인 개혁 연회의 개최를 준비하게 되고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이 준비 활동을 탄압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일어나는데 이에 대해 군대가 발포함에 따라 3일간의 시가전이 벌어지게 되고 이것은 2월 24일에 정부 붕괴로 이어진다. 그리고, 국왕 루이 필립이 퇴위 하고 영국으로 망명함에 따라 7월 왕국이 끝나게 되고, 2월 혁명 후에는 새로운 정부의 구성을 위해 사회주의 세력과 공화주의 세력이 대립하게 되어 그 결과 제 2공화정이 등장한다.
프랑스 제 2공화정
7월 왕국이 붕괴하고 임시 정부가 수립되는데 이 임시 정부의 수반은 공화주의자인 Lamartine이었고 사회주의 세력(지도자는 루이 블랑)이 대거 내각에 참여하여 4명의 사회주의자와 수반을 포함한 6명의 공화주의자가 정책 수행에 있어서 대립하게 되는데 이러한 양파의 대립 상황으로는 먼저 실업자 대책 문제를 들 수 있다.
혁명 후 파리에서는 매일 10만명의 노동자가 직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은 공세적인 정책을 취하여 '국립공장(노동장, National Workshop)'의 설립을 요구하여 도로 개설, 공원 조성 등의 국가 사업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공화주의자들은 수세적인 정책을 취하여 국가 재정을 이유로 사회주의자들의 요구에 반대하였으나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 하는 무능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결국 몇 개의 국립 공장이 생기지만 실업자의 일부만을 구제했을 뿐이며 실업자들의 공산주의적 주장을 펴는 시위에 대해 산업 부르조아지와 지주 계층의 우려가 발생하였다.
4월에 제헌의회를 위한 총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는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남자만의 보통선거로서 유권자수는 종전의 25만에서 900만으로 크게 증가하였는데 선거 결과는 사회주의자들의 100여명의 의원만을 당선시켜 대패를 하게 된다. 반면 공화주의자들은 700여명이 당선되는데 이러한 결과가 나온 원인으로는 프랑스 인구의 대부분인 분할지 농민들이 노동자들의 사회주의적 시위에 우려를 느낀 때문이었다. 5월에는 노동자들의 대시위가 일어나 15일에는 의회에까지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에 대해 공화파들은 중산층으로 구성된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사회주의자들을 투옥하였으며 국립 노동장을 폐지하는 등 반사회주의적 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러자 6월에는 노동자들에 의한 6월 폭동(Bloddy June Day)이 일어나는데 이에 대해 공화주의자들은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하여 임시정부군의 장군인 Cavaignac이 노동자들의 폭동을 진압하면서 강력한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는 2000-10000명 사이의 사회주의 세력을 살상하면서 사회 불안을 틈타 군사 독재를 실시하였다.
11월에 의회가 소집되면서 제 2공화국 헌법이 제정되는데 이 헌법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담은 민주 공화국 헌법으로서 삼권 분립의 원칙을 표방하고 있었으며 대통령은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그 임기는 4년 1회 단임으로 제한했으며 군사 외교 행정 관리 임명권 등을 주었다. 그리고, 의회는 750명을 정원으로 3년의 임기를 가지고 단원제를 채택했다. 그래서, 12월 10일에 대통령이 취임하고 제 2공화정이 출범하였는데 그 이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는 군인인 Cavaignac과 공화파인 Lamertine, 그리고, 공화파이고 2월 혁명의 주도자 중의 한사람인 Ledru Rollin, 투옥 중인 사회주의자 Raspail과 나폴레옹의 조카인 Luis Napoleon 등이 출마 예상자였다.
이 선거에서는 루이 나폴레옹이 승리하는데 그는 인상은 악한의 인상을 가지고 있으나 원대한 포부를 지닌 인물로서 1815년 워터루의 패배 이후 그의 가문이 추방되어 유럽 각지를 떠 돌 때 스위스 의용군에도 참가하고 카르보나리에 가입하기도 하였으며, 삼촌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3번이나 쿠테타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834년에 리용에서의 봉기가 실패하고 1836년에는 Strassbourg에서 반란을 일으키나 이것도 실패하여 체포당하고 미국으로 추방된다. 그리고, 1840년에 나폴레옹의 유해가 파리로 귀환되면서 'Napoleon Leggend'가 1840년대 전 프랑스에 유포되자 당시 영국에 있던 그는 밀입국하여 부르고뉴에서 반란을 일으키지만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846년에 다시 탈출하였고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2월 혁명의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대통령에 출마하게 된다.
선거 유세시에 그는 나폴레옹의 후광을 크게 입었으며 삼촌의 미완성 위업을 이룰 것을 공약하였다. 그리고, 선거 결과 동정표에 힘입어 그는 전체 표의 74%를 획득하여 대통령에 당선된다. 루이 나폴레옹의 당선 원인으로는 보수화된 농민들이 사회 질서의 유지를 원했다는 사실과 부르조아지들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위협과 대영 투쟁의 필요성을 느낀 사실을 들 수 있고 당시 널리 유포된 '나폴레옹 전설'의 영향도 무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1848년 12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이 나폴레옹은 Barrot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루이 나폴레옹은 마상의 Saint Simone으로 찬양하였다.
2월 혁명의 성격으로는 비인 반동체제를 붕괴시킴으로써 자유주의의 승리를 가져오게 한 혁명이었으며 노동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강화시킨 사회 혁명이었으나, 결과로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반작용이 나타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혁명이었다고 규정지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혁명이 끼친 영향으로는 먼저, 비인 반동체제를 붕괴시켰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이 혁명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에서 3월 혁명이 발생한 결과 메테르니히는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시민 계급의 성장이 취약하였으므로 노동자 계급과 연대를 이루지 못 하였고 10월에는 다시 정부에 의해 진압되고 구체제로 복귀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헝가리, 보헤미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독립 운동이 발생하는 성공하지 못 하였다.
프러시아에서도 베를린에서 3월 혁명이 발생하여 새 헌법을 제정하고 5월에는 '국민의회'가 소집된다. 그러나, 시민계급의 성장이 미약함에 따라 결과적으로 실패하여 지주계급(Junker)들이 혁명을 진압하고 보수적인 '프러시아왕국 헌법'을 1850년에 제정하였으며 이 헌법이 1차 세계대전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1848년 5월에 소집된 '국민의회'는 다시 프랑크푸르트에서 과거 신성 로마제국내의 여러 국가들을 프러시아가 주동이 되어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독일 통일을 논의하나 오스트리아 중심의 통일 방안인 대독일주의와 프러시아 중심의 통일 방안인 소독일주의가 대립되어 큰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프랑스 제 2 제정
헌법상 루이 나폴레옹은 1852년에 임기가 끝나야 했다. 그래서, 임기 후 황제가 된 루이 나폴레옹에 의해 제 2 공화정은 1852년에 붕괴하고 프랑스 제 2제정이 등장하여 1852년 12월 2일에서 1870년 10월 4일까지 존속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간은 다시 권위주의적 제정(Autocratic Empire)이 행해진 1860년까지의 전기와 자유주의적 제정(Liberal Empire)이 이루어진 1861년에서 70년까지의 후기로 나누어진다.
제 2제정이 수립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1848년 12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이 나폴레옹은 49년 5월에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입법의회를 구성한다. 입법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는 공화파와 반공화파간의 투쟁이 벌어지는데 반공화파들은 사회적 혼란에 대해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요구하였고 Property, Family, Religion, Order를 유지할 것과 공화정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질서당(Party of Order)'으로 나타났는데 선거 결과 이들이 압도적인 승리를 하게 되자 역시 반공화파인 루이 나폴레옹과 함께 질서파들은 사회주의파의 진출을 역제하며 반동정치를 실시한다.
반동정치는 국민군 해산, 언론 집회 취체, 가톨릭에 의한 교육, 의회의 권한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였고 보통 선거 제도를 폐지하고 제한 선거로 다시 개혁함에 따라 968만의 선거권자가 680만으로 감축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여론이 동요하게 되자 루이 나폴레옹은 이것을 집권 연장을 위해 이용하려 하였는데 군사지휘권을 두고 질서파의 국방장관인 Changariniere과의 사이에서 대립이 발생한다. 이 때 병사들이 열병식 도중 루이 나폴레옹 만세를 연호하며 대통령을 지지하자 자신감을 가진 그는 국무장관을 해임하고 군사지휘권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1851년 7월에는 의회에 중임이 가능鱁하도록 개헌할 것을 요구했으나 부결되었고 11월에는 보통 선거 제도의 부활을 요구하였는데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의회에서는 7표차로 부결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12월 2일에 루이 나폴레옹은 군사를 동원한 쿠테타를 일으키는데 사회주의자들이 꾸미는 음모를 타도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한다는 명분하에 의회를 해산하고 보통선거제도를 부활했으며 선동가와 빅톨 위고 등 급진파 의원들을 포함한 반대파 의원들을 체포하여 반나폴레옹파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그러자, 이에 반대한 노동자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가전을 벌였으나 곧 진압되고 이 과정에서 수천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전체 민중들은 루이 나폴레옹에 크게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이 쿠테타는 성공할 수 있었다.
쿠테타에 성공한 루이 나폴레옹은 12월 20일에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데 52년 1월에 새로운 헌법이 제정된다. 이 새로운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의 임기는 10년이고 의회는 양원제였으며 상원은 대통령이 유식자를 임명하였고 하원은 제한된 사안에 대한 결정권만을 지닐 뿐 제안권은 지니지 못하여 거의 루이 나폴레옹이 독재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의 등장과 당시의 프랑스를 관찰하던 마르크스는 2월 혁명과 루이 나폴레옹의 등장을 브루메르 혁명과 대비시켜 설명한 {Brumaire 18th of Louise Bonaparte} 라는 저술을 남기는데 여기서 그는 인간은 이전의 시대에서 물려받은 조건으로(환경하에서) 역사를 창조하지만,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부르조아지 사회에서는 농민과 자본가는 서로 용납될 수 없으므로 화합될 수 없다. 하지만, 이 쿠테타는 농민과 부르조아지의 합작이 이루어졌으므로 따라서 농민들의 동맹자는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저술은 계급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자세한 이론서였다.
1852년 11월 21일에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가는 국체 변경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데 780만표 대 28만표라는 입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래서, 12월에 '제국헌법'이 제정되는데 이 헌법은 황제에게 독재권을 부여하는 내용으로 의회는 허수아비와 같았으며 모든 권한은 황제가 차지하였다. 그리고, 12월 2일에 루이 나폴레옹은 황제로서 즉위하고 나폴레옹 3세라는 칭호를 가지게 된다.(나폴레옹 2세는 이탈리아왕을 역임했던 나폴레옹의 아들을 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사회주의 사상을 많이 가진 인물이었는데 투옥 기간동안 사회주의 사상을 보이는 {빈곤의 근절}, {나폴레옹의 이상} 등의 저술을 남겨 한 때 마상의 생 시몽이라 불리기도 했다. 제 2 제정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세력 균형하에 성립된 반동적이 독재 체제로서 시민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정권이었다. 그리고, 보수화된 분할지 농민을 기반으로 했으며 시민적 자유를 억압하면서도 프랑스의 자본주의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즉, 프랑스의 산업 혁명 발전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전기 제정의 치적으로는 내정면에서 먼저, 프랑스의 산업 혁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보호 관세 정책을 실시하면서 1850년대 프랑스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규모의 투자 은행이 설립되었고 철도가 건설되었으며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또한, 파리의 도시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Haussmenn이 도시 계획을 담당하여 방사선 도로를 중심으로 번화가, 주택가 등을 건설하였으며 왕자가 탄생한 1855년에 파리에서는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여 세계에 프랑스의 번영과 영광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외정의 면에서는 기본적으로 굴용적인 비인 조약을 개선하여 국위를 선양하려는 목적에서 친영, 반 러시아, 오스트리아 정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1854년에서 56년 사이에 러시아와 터키간에 크리미아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가 승리하는 것은 그들의 지중해 진출을 가능케하는 것으로 파악한 영국이 터키를 지원하자 친영적인 프랑스도 터키를 지원하였다. 그 결과 Sebastok에서 양군 함대가 격돌하여 러시아가 패배하고 1856년에 파리 강화조약을 통해 나폴레옹 3세와 프랑스의 국위가 선양된다. 이 강화조약은 흑해에 군사기지 설치를 금지한다는 것과 다뉴브강 유역을 모든 나라에게 개방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였는데 이것으로 러시아에 대한 복수는 일단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반오스트리아 정책의 일환으로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지원하는데 그 배경에는 오스트리아 세력의 약화와 함께 이탈리아 동정론이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망명 시기에 카르보나리 당에 가입하기도 하였는데 대통령 시절 그는 이탈리아 독립 운동에 간섭하거나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58년에 이탈리아인인 Orsini가 폭탄을 던져 나폴레옹 3세에 대한 저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옥중에서 오르시니는 황제에게 올리는 편지를 쓰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것에 의해 그는 이탈리아 독립 지원을 생각하게 된다. 1858년 7월에 남프랑스의 Prombiers에서 피서 중이던 나폴레옹 3세의 별장에 사르데냐의 수상인 카부르가 방문하여 밀약을 맺는데 이것이 '플롬비에르 밀약'이었다. 이 밀약의 내용으로는 먼저 프랑스는 이탈리아가 다른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지원하겠다는 것과 이탈리아는 독립시에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에 할양하겠다는 것이 있었다.
1859년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제 1차 독립전쟁이 발생한다. 이 때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자극하여 오스트리아가 먼저,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플롬비에르 협약상 프랑스의 개입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서, Solferino에서 프랑스,이탈리아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을 격멸한다.(솔페리노 대첩)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의 통일이 가져올 이탈리아의 강성을 우려하였고 이탈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독점적인 영향력 행사를 영국과 프러시아 등이 우려하는 것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하여 프랑스는 독단적으로 Villa Franca에서 오스트리아와 휴전한다.(빌라 프랑카 휴전) 이 것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내의 공화주의자들은 나폴레옹 3세에 대해 강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1860년에서 69년 사이의 기간은 프랑스 제 2제정의 후기로 불리는데 이 시기에는 전기의 권위주의적 제정이 자유제정으로 변화되었으며 1870년 이후에는 의회제정기라 할 수 있다. 1860년 11월에 'Liberal Empire'가 선언되는데 그 배경으로는 먼저, 국외적으로 나폴레옹 3세의 이탈리라 정책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즉, 나폴레옹 3세는 빌라 프랑카에서 오스트리아와 단독으로 휴전함으로써 이탈리아인들의 배신감을 샀고 프랑스 내의 친카톨릭 세력과 공화주의자 및 친이탈리아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861년에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이 되는데 나폴레옹 3세는 이 신생 왕국의 승인에 주저하였고 영국이 먼저 승인함에 따라 이탈리아인들은 나폴레옹 3세를 비난하였고 프랑스인들도 이탈리아인들을 친영파로 만들었다고 나폴레옹 3세를 비난하였다.
이와 함께 국내적으로는 1860년에 산업 혁명이 완성되고 자본가와 노동 세력(사회주의 세력)이 등장한 영국처럼 프랑스에도 이 두 세력이 등장하여 이 세력 사이에서 정부의 태도가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나폴레옹 3세는 보호관세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자본가들의 압력과 친영 정책이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1860년 11월에 영국과 비밀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자유 무역 정책으로 전환한다. 하지만, 이 조약이 알려지면서 의회와 제조업자들이 반발하고 이것을 비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에 황제는 의회에 권한을 그리고, 국민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자유주의 제정 선언을 하였고 이것은 권위주의 제정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제정 선언의 자세한 내용으로는 의회의 권한 강화, 언론 취체 완화, 교육에 있어서 반교권주의 정책 채택 그리고, 국민의 정치적 자유 인정 등이 있는데 특히,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노동세력이 증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제정하에서도 자유주의가 신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외정의 면에서 이 시기에는 프랑스 식민제국이 건설되는데 이것은 황제권과 금융자본권이 결합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1850년에 'Arrow호 사건'으로 중국에 출병하고 '천진 조약'을 맺었으며 1860년에는 '북경 조약'을 통해 중국에 상당한 식민권을 차지하여 중국으로의 진출이 이루어졌으며 1859년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여 French -Indochina 식민지를 획득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대외 팽창 정책은 1867년에 캄보디아를 점령함으로써 아시아에서는 성공을 거두지만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실패를 하게 된다.
아프리카에서는 1830년에 알제리를 식민지화 하고 1860년에는 세네갈,튀니지아를 식민지화 한다. 그리고, 1859년에서 69년 사이에 이루어진 수에즈 운하의 개통도 프랑스人인 Lesseps에 의해 이루어져 이집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이집트는 재정 곤란으로 수에즈 운하의 주권을 영국에 넘김에 따라 영 불 대립이 생기고 결국 영국이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는 라틴 아메리카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는데 1860년대 초에 멕시코에서 재정 파탄으로 혁명 사태가 발생하고 민족주의적인 정부가 들어서서 이들이 외채의 상환을 거부하자 스페인,영국,프랑스 3국이 멕시코에 원정을 단행한다. 특히, 프랑스는 1863년에 4만명의 병력을 출동시켰는데 이들 3국간에 불화가 발생하여 영국과 스페인은 풍토병을 이유로 철수하지만, 프랑스는 멕시코 시티를 점령하고 합스부르그 가문 출신의 Maximillian을 멕시코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멕시코인들은 게릴라전으로 이에 대항하였고 멕시코를 동정한 미국은 프랑스에 대해 위압을 가하였다. 이러한 상황과 함께 1868년에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보 오 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 전쟁은 독일의 통일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 전쟁의 결과는 프랑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1867년에 멕시코에 있는 4만의 군대를 철수시키게 되고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에 황제 막시밀리안은 게릴라들에게 잡혀 사형된다. 이 사건은 결국 프랑스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고립과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대외 정책에 있어서 이러한 식민지 경영의 실패와 함께 Bismark에게 나폴레옹 3세는 외교적으로 패배하는 사건이 생겨 비난받게 되는데 그것은 보 오 전쟁전에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를 회유시켜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간에 전쟁이 있을 때 중립을 지키면 프랑스의 벨기에 병합을 묵인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나, 이 약속은 사실상 속밍수로서 문서로 이루어진 조약은 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보 오 전쟁시에 프랑스는 외교적 성과가 없는 중립을 지켰으며 오스트리아에 승리한 프러시아는 후일 프랑스와 '보 불 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은 프랑스 제 2제정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나폴레옹 3세의 이탈리아 정책에 대한 비판도 나타났는데 1864년과 67년 두 번에 걸쳐 프랑스 군은 이탈리아에 출병하였는데 이것은 남부 이탈리아를 통일한 Garibaldi가 로마 교황령으로 진군하자 교황령 보호를 구실로 출병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은 이것을 배신으로 간주하고 그를 비난하였다.
1870년 1월에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의회에 큰 권한을 주는데 이 시기를 '의회 제정(Parliament Empire)'이라 한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는 먼저, 1867년대부터 발생한 경제 공황을 들 수 있고 그 외에 사회주의 세력의 대두, 외교 정책의 실패, 정치 정세의 불안으로 인한 혁명의 우려 등을 들 수 있다. 새로운 헌법의 내용으로는 '황제는 내각과 의회와 협의하에 통치한다.'는 것과 의회(원로원,입법원)에 법안 방의권과 법안 수정권을 부여하는 것 등이 있었다. 이 해 10월에는 보 불 전쟁의 도중에 나폴레옹 3세가 프러시아의 포로가 되어 결국 제 2제정이 붕괴하고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으며 1875년에는 제 3 공화정이 성립되어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진다.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면서 등장한 국민공회는 왕당파의 반란과 국외 반혁명 국가들의 위협 속에서 온건한 지롱드당이 물러나고 과격한 쟈코벵당에 의한 공포 정치가 수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정치는 일부 부르조아지들의 반동으로 인해 종식되고 새로운 반동정치체제가 성립한다. 그리고, 이 불안한 새 정부에 대해 다시 반동을 일으키고 프랑스의 권력을 잡은 이가 나폴레옹이며 그의 활동은 프랑스 혁명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