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진정한 관심
어느 젊은이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죄목은 문서위조죄였다. 이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유명한 포터박사였는데, 그는 이 피의자의 아버지를 잘 아는 처지였다. 이 피의자의 아버지는 유명한 법조계의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포터 판사 자신도 그의 부친이 쓴 「신용법」(The Law of Trusts)이라는 책을 읽고 배운 바 있었다.
포터 판사는 이 젊은이에게서 옛 스승을 떠올리며 꾸짖었다.
“네 아버지는 법조계의 뛰어난 인물이셨는데 너는 이런 파렴치한 일을 하다니......”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도 기억합니다만, 그 「신용법」 책을 쓰실 때에 제가 아빠의 도움이나 충고, 사랑을 받으려고 응석을 부리면 ‘얘야! 저리 좀 가라, 나는 바쁘다. 이 책의 원고를 끝내야 돼’ 하시면서 귀찮아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이 피의자의 아버지는 위대한 법률가였지만 아버지로서의 자격은 결여된 사람이었다. 우리는 자녀의 미래를 위해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27일
질투가 생길 때
질투는 행복을 파괴시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가장 유명하던 때였다. 플로렌스의 한 건물을 장식하기 위하여, 다빈치와 그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화가 미켈란젤로에게 스케치가 맡겨졌다. 다빈치가 스케치한 작품도 훌륭했지만 미켈란젤로의 스케치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 작품에 대해 경이적인 반응을 보였다.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자신의 명성이 퇴색되어 감을 느끼자 다빈치의 여생은 구름 낀 나날이 되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유혹이 미치지 못할 만큼 거룩하거나 은밀한 곳은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질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첫째, 질투가 일어날 때 자신의 질투를 합리화시키지 마라.
둘째, 그것을 하느님 앞에 가지고 나와 고백하라.
셋째,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
넷째, 다른 사람의 축복과 성공에 동참하라.
항상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두고 하느님을 섬기고자 할 때 질투는 사라진다.
28일
탐심
아라비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탐심은 벗어난 욕망이다. 그의 딸은 부정이요, 그의 친구는 폭력이다.”
또한 “탐욕과 행복은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다”라는 말도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도널드 트럼프는 어느 날 장난감 하나 사는 기분으로 2천 9백만 달러짜리 요트 한 척을 샀다. 이 배는 5층으로 되어 있으며, 100개의 방이 있고, 초대형 냉장고 6대에는 1백 명이 3개월 동안 먹을 음식을 저장할 수 있었다. 이발관, 미용실, 병원, 당구장, 식당, 오락실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영화관에는 800개의 영화 필름 도서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배를 사고 겨우 1년 만에 트럼프는 “이 배에 있어도 전혀 즐겁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돈으로 행복을 사려고 했으나 기쁨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님을 아주 잘 보여 주고 있다.
일찍이 독일의 신학자 알프레드 델프는 말했다.
“빵은 중요하다. 자유는 더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다.”
하느님 없는 자유는 방종, 방탕, 탈선에 이르게 한다. 물질을 선한 물질이 되게 하고, 자유를 참 자유가 되게 하고, 지식을 선하게 만들며, 권력을 봉사의 수단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고 복된 것은 신앙, 믿음, 말씀이다.
29일
대통령임을 증명해 보세요
어느 날, 조지 부시 대통령이 워싱턴 교외에 있는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그리고 장난기가 심한 1학년 교실의 강단에 섰다. 그때 여덟 살 난 앤터니 헨더슨이라는 어린이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미국 대통령인 것을 증명해 보세요.”
부시는 잠시 당황했지만 얼른 호주머니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내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대통령임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러자 부시는 지갑에서 다시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것으로도 대통령임을 증명하지 못했다. 부시는 창밖에 대통령 전용 최고급 리무진이 있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꼬마는 사업가들도 저런 차를 타고 온다고 말했다. 결국 부시는 비서를 시켜 대통령 문장에 친필 사인이 있는 문서를 가져와 대통령임을 증명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라면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 천국 문 입구에서 천국으로 들어갈 증표를 갖고 왔느냐고 묻는다면 무엇을 내밀 것인가?
30일
회개
열심한 신자가 기도 중에 하늘나라의 환시를 보았다. 그는 그곳에서 하느님과 사탄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먼저 사탄이 물었다.
“하느님, 여기 천국에 온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죄를 지었는데도 용서하시어 천국으로 오게 하시면서, 저는 한 번밖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사탄아, 네가 언제 나에게 용서를 빈 적이 있느냐?” 하며 회개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셨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 죄가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했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그 자체가 복음이다.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그 죗값으로 벌을 받음이 마땅하지만,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니 얼마나 큰 복음인가? 우리는 누구나 죄인이지만 진정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린다.
31일
두 소년의 인연
한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 시골에 갔다가 수영을 하려고 호수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발에 쥐가 나서 수영은커녕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았다. 귀족의 아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한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주었다. 귀족의 아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그 시골 소년과 친구가 되었다.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키웠다.
어느덧 13살이 된 시골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귀족의 아들이 물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하고 아이들도 아홉 명이나 있어서 집안일을 도와야 해”
귀족의 아들은 가난한 시골 소년을 돕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졸라 그를 런던으로 데리고 갔다. 결국 그 시골 소년은 런던의 의과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그 후 포도당 구균이라는 세균을 연구하여 페니실린이라는 기적의 약을 만들어냈다. 이 사람이 바로 1945년 노벨 의학상을 받는 알렉산더 플레밍이다.
그의 학업을 도운 귀족 소년은 정치가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26세의 어린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런데 이 젊은 정치가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 폐렴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 무렵 폐렴은 불치병에 가까운 무서운 질병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플레밍이 만든 페니실린이 급송되어 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시골 소년이 두 번이나 생명을 구해준 이 귀족 소년은 다름 아닌 윈스턴 처칠이다. 어릴 때 우연한 기회로 맺은 우정이 평생 동안 계속 되면서 이들의 삶에 빛과 생명을 주었던 것이다.
후일, 영국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무시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시골 소년은 의사가 되어 페니실린을 만들 수 없었을 테고 처칠은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귀족 소년과 시골 소년의 깊은 우정으로 농부의 아들은 의사가 되어 노벨의학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귀족 소년은 전쟁 중에 나라를 구하고 민주주의를 지킨 수상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지위나 계급이 낮은 사람, 힘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학식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하대하곤 한다. 이는 교만한 마음 때문이다. 교만한 마음은 반드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업신여기거나 깔보면 안 된다. 위의 귀족 소년과 시골 소년의 우정처럼,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을 베풀 때 서로에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6월
1일
마음을 살펴보라
중무장을 한 군사들이 나자렛의 한 목수를 둘러싼 채 구타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채찍질은 명령이었다. 이 나자렛의 목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도 명령이었다. 그러나 거의 죽어가는 자에게 침을 뱉으며 쾌감을 맛보는 인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침 뱉음이란 몸에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침은 몸에 고통을 줄 수가 없다. 그것은 영혼에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이다. 군사들은 그리스도를 초라하게 만듦으로써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알았다.
당신도 그런 적이 있는가?
당신은 누군가에게 침을 뱉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남을 험담하거나 비방한 일은 없는가? 분노로 손을 치켜 올리거나 교만하게 눈을 흘긴 적은 없는가? 누군가의 백미러에 전조등을 쏘아 댄 일은 없는가? 내 기분을 좋아지게 하려고 남의 기분을 비참하게 만든 적은 없는가?
그것이 바로 군사들이 예수님께 한 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곧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다. 성경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한다. 속이 부패해 있다. 군사들의 침이 우리 마음의 더러움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더러움을 어떻게 하시는지 잘 보라. 그분께서는 그것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신다. 그분은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다(갈라 3,13).
죄인들에게 성인의 얼굴을 주시려고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얼굴을 취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