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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577돌 한글날은 가장 보람스럽고 기쁜 날이 되었다. 한글날의 기원이 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인 간송본과 세종 시대에 나온 “훈민정음 언해본” 복간본(재구정본)을 세종대왕께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복간본 책임자로서 해설서(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 저자로서 10문 10답으로 정리해 보았다.
1. 복간본이란 무엇인가? _복제본(교예본), 복간본, 영인본의 차이
복제본은 실제 원본과 똑같이 만드는 것이다. 뒷면 낙서뿐만 아니라 색깔까지 완벽하게 같아 일반인들은 원본과 복제본을 구별할 수 없다. 따라서 제작 비용이 최소 천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든다. ‘복간본’의 경우는 다시 간행했다는 의미지만 원본과 최대한 똑같게 간행한 것이므로 일종의 준복제본이라 할 만하다. 복제본은 뒷면 낙서까지 그대로 재현했지만, 복간본에서는 뒷면 낙서는 모두 지웠다. 복간본이 초간본(1446)에 더 가까운 셈이다. 영인본은 복사 수준으로 비슷한 책자로 재현한 책을 말한다.
2.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은 어떤 책이고 왜 중요한가?
1997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해례본은 1443년에 세종이 창제를 마무리한 훈민정음을 상세하게 여덟 명의 집현전 학사들(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과 함께 해설한 문자 해설서이지만 단순한 문자 해설서가 아니다.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꾼 책이고 그때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최고의 학문과 사상이 응축된 인류 최고의 고전이다.
한문본 해례본은 33장 66쪽으로 앞의 7쪽까지를 세종이 직접 저술했고 이 부분을 해례본 간행(1446, 음력 9월 상순) 후에 언문(훈민정음)으로 번역하고 풀이하여 30쪽 분량으로 펴낸 책이 언해본이다. 지금 전하는 것은 1459년(세조 5년)에 월인석보 앞에 실어 펴낸 책이지만 실제 간행은 세종 당시에 펴냈다는 것이 전문학자들의 중론이다.
이번에 복간한 언해본은 세종 때 펴낸 추정 언해본을 복간한 것이다. 실제 한글 보급은 언해본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기에 언해본도 중요하다. 물론 세종 때 언해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책을 보완한 “월인석보권두본”이 남아 있어 2007년에 국어사학회와 문화재청이 재구정본 안을 만든 바 있고 이를 바탕으로 실제 복간본으로 만든 것이다.
1459년에 나온 월인석보에 실린 언해본과 세종 때 언해본의 가장 큰 차이는 첫째 쪽이 다르다. 해례본이나 언해본 모두 책 제목과 권두 제목은 “훈민정음”이다. 그런데 세조 때 나온 언해본은 ‘세종이 지은 언해본이라는 의미’로 ‘세종어제’가 더 붙어 ‘세종어제훈민정음’이다. (옛날식 표기 생략)
3. ≪훈민정음≫ 해례본의 2차 복간의 의미는 무엇이고 왜 동시 복간이 최초인가?
1940년 발견 소장 이후 2015년에 교보문고에서 1차 복간본이 나왔다. 그런데 25만 원 고가인데도 6개월 안에 2천 질이 나갔고 1년 안에 모두 다 나갔다. 7년이 흐른 2022년 헌책방에서 400만 원까지 치솟아 오를 정도로 이 책에 대한 열망이 높아 다시 복간하게 된 것이다.
2차 복간하면서 해례본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 언해본을 한 세트로 복간해 더 의미가 커졌다.
세종 때 언해본이 복간된 적이 없다. 세조 5년(1459년)에 나온 서강대 소장 월인석보 권두본이 영인본 수준으로 많이 유통되었고, 안동 유교 보존회에서 세조 때 나온 것을 복간한 적은 있지만, 세종 때 언해본은 이번이 처음이다.
4. 해례본의 2015년 복간본(교보문고)과 2023년 복간본(가온누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복간 주체인 간송미술관에서 정밀 촬영한 같은 파일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같다. 다만 두 가지가 달라졌다. 첫째는 2015년보다 2022년이 인쇄용 한지 기술이 발달해 이번 복간본은 순응용한지 100g 종이를 사용했다.
해설도도 크게 달라졌다. 2023년도판은 4부로 구성하여 1부 문자 이야기, 2부 책 이야기, 3부 <훈민정음> 해례본 내용 풀이 4부 <훈민정음> 해례본 번역 5부 <훈민정음> 언해본 해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가운데 1부, 2부는 부분적으로 보완했지만, 3부 해례본 내용 풀이와 5부 언해본 해제가 추가되었다.
5. 간송본(1940)과 상주본(2008)의 차이는 무엇이고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가?
상주본(배익기 소장)이 정식으로 소개된 적이 없으므로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다만 언론에 공개된 자료와 본인이 2016년에 배익기 님을 직접 만나 면담한 결과, 그리고 상주본에 대한 이상규, 김주원, 남권희 등의 논문에 의하면 둘 다 1446년에 간행한 초간본이 맞다. 다만 상주본은 앞뒤가 즉 세종이 직접 저술한 정음편과 맨 뒤 정인지서가 없는 셈이다. 두 책의 역사적 맥락이 다르므로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상주본은 앞뒤가 없다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다. 다만 간송본이 위아래 여백 일부 잘려져 있지만, 상주본은 보존되어 있다. 해례본 원본이 워낙 무가지보의 가치가 있으므로 단 한 장이라도 소중하다. 다만 배익기 소장자가 법적으로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고 조용훈 님과의 재판 다툼 중에 조용훈 님이 문화재청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증은 법적 효력이 없다. 조용훈 님 소유라는 것이 입증되지 않은 상태의 기증이기 때문이다.
6. 왜 올해가 창제는 580주년이고 반포는 577주년인가? 왜 아직도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 단독이나 집현전 학사들과의 공동 창제로 논란이 되는가?
세종이 창제를 마무리한 해는 1443년 음력 12월이고 반포는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을 통해서였으므로 해례본이 완성된 1446년 음력 9월 상순이다. 따라서 2023년은 창제 580주년, 반포 577주년이다.
단독 창제냐 공동 창제냐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공동 창제설은 100% 역사 왜곡이다. 가장 중요한 문헌인 해례본과 세종실록에 단독 창제로 나오는 데다가 양반 사대부들은 한자보다 더 뛰어난 문자 또는 대체 문자 창제를 돕는 것은 불가능했다. 8인이 반포를 위한 해설서 집필을 도운 것은 기적이었지만 그들도 훈민정음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7. 해례본의 뒷면 낙서를 완전히 판독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뒷면 글자가 보이는 쪽은 다음과 같이 모두 41쪽으로 모두 66쪽 가운데 62%나 되는 뒷면 글씨가 배접으로 인해 또는 글자 농도로 인해 앞면으로 배여 나왔다. 뒷면 글씨 최초 판독자인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님과 함께 이번에 처음으로 모든 면의 글씨를 판독해 모두 ‘십구사략언해’임을 밝혀냈다
십구사략언해는 명나라의 여진(余進)이 편찬한 『십구사략통고(十九史略通攷)』의 제1권을 1772년(영조 48년)에 원문에 한글로 한자음을 달고 토를 붙인 뒤 매장마다 언해한 번역문을 붙인 책이다.
8. 해례본 전문학자로서 현재 해례본과 언해본의 문제는 무엇인가?
해례본, 언해본이 문제가 아니라 해례본과 언해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가르치는 국문과나 국어교육과조차 없다는 것이 문제다. 전국 모든 교육청이 주관하는 국어교사 연수에서도 해례본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훈민정음 전공으로 교수를 뽑은 적이 없다.
9. 1940년 간송 선생께서 해례본 구매 가격이 만 원, 삼천 원 등 다르다. 어떤 금액이 맞는가? 그리고 이번 복간본 35만 원이 비싸다는 의견이 있다.
간송 선생께서 얼마에 구입하셨는지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아 근거 기록은 없다. 다만 그 다시 경성(서울)에서 비싼 기와집 열 채 값이라고 두루뭉술 알려져 그때 물가를 고려해 누군가가 만 원으로 추산한 듯하다. 간송께서 기록에 남기지 않았지만 만 원이라고 누군가에게 얘기하셨을 수도 있다.
세 권 한 세트 책값 35만 원이 일반 책보다 비싼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들인 공력과 가치에 비해서는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일반 종이로 조잡하게 만든 해례본과 언해본이 해설서도 없이 각각 최고 10만 원 적게는 5만 원에 유통되고 있다. 그런 책값에 비하면 오히려 싼 편이다.
10. 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간송본)을 최초로 직접 보고 해설한 학자라고 하는가?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해설해 오지 않았는가?
간송께서는 일제강점기이기도 해서 원본 보호에 신경을 많이 쓰신 듯하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송석하 서지학자에게 모사본을 만들게 하고 그 모사본을 전문가들에게 연구하게 했다. 최초 연구자인 홍기문, 방종현, 최현배 선생도 그 모사본으로 연구를 했고 해방 후 두 차례 영인 때도 본인이 직접 인쇄소에 나와 인쇄를 주관했고 그렇게 영인본인 1946년 조선어학회본은 방종현 선생이 2차 영인본인 1958년 통문관본은 김민수, 이상백 두 분이 해제를 썼다. 그 뒤 모든 학자들은 이렇게 나온 영인본으로 연구를 했다. 본인은 간송미술관 배려로 2014년 12월 17일 수장고에서 직접 보고 해설을 했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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