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아파트 가격은 내가 다 알아
이 순 화
‘어라!! 노처녀 시집가는데 지들이 더 신났네.’
결혼을 앞두고 오랜만의 친구들과 모임은 산만한 분위기 속에 혼이 쏙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혼수 리스트를 본 친구들이 새신부의 로망을 무참히 깨트리고 돼지 꼬리를 연신 그어대며 옛날 고릿적 경험담을 여기저기서 쏟아냈기 때문이다.
“뭐? 오븐?”
“이건 지금부터 살 필요 없어.”
“결혼하자마자 음식을 많이 차릴 것 같지?”
학교에서도 어떤 일이든 야물딱지게 일을 해결해서 별명이 똑순이인 은진이가
핀잔을 섞어 내뱉고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조잘댔다.
은진이를 보고 있으면 말과 행동이 명쾌해서 박하를 먹은 것처럼 속이 시원함을 느낀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오붓하게 둘만 밥 먹으라고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냐.”
“평소에 요리를 안하던 사람이 결혼했다고 음식이 맛있어지는 줄 알아?”
둘이 찰떡궁합이라 좋아하는 사람도 똑같은 미영이가 은진이의 말을 거들었다.
멍하니 친구들 입만 바라보고 있는데, 슬쩍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8배속 잔소리가
시작됐다.
반찬 만들어 놓고 “버리기 바쁘고 나중엔 양념 아까워서 만들기도 싫어져.”
“음식도 못 하는데 전자제품 미리 사놔봤자 야.”
“정작 음식 잘할 땐 헌 거 돼서 쓰지도 못하고 버린다 너.”
장식품으로 모셔둔 전자제품을 이제 쓰려니 기능이 떨어져 홈쇼핑을 볼 때마다 후회막심이라며 주부 선배인 은진이와 미영이가 도시락을 싸 들고 말릴 기세였다.
나는 다른 친구들이 결혼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티스푼 하나라도 의미 있고 개성 있는 예쁜 신혼살림을 전국을 돌아서라도 구하리라 다짐했었다.
친구들이라고 예비 신부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신혼살림 준비로 내 허리가 휠 것을 염려한 오버 액션임을 나는 안다.
얘들은 내 친구답지 않게 수학이 재밌다며 둘리 만화 희동이를 닮은 수학 선생님을 쫓아다니고 내 뇌를 떠서 보는 것 같이 눈치가 빨라 될 수 있으면 멀리했었다. 그렇게 깐깐한 친구들이 후회하는 일도 있다니 허당들을 너무 우러러봤구나 생각했다. 은진이와 미영이가 오랜만에 나와 같은 사람처럼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뭐? 잠옷?”하고 엉뚱한 것을 적어 놓았다는 듯 임신한 배를 자랑삼아 불룩 내밀고 거들먹거리던 현정이의 외침에 학창 시절 희동이 수학 선생님이 즐겨 부르던 ‘나는 못난이’ 노래가 귓전에서 맴돌다 날아갔다.
‘해도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 소곤대는 너와 나를 흉보는가 봐’~
‘수학을 잘하면 얇샵하고 이기적일 것 같은데 이렇게 동화 같은 순수한 노래를 부르니 반전 매력이 있어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았지’ 나는 수학 선생님만 보면 교실 바닥만 보고 있느라 좋아 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 현정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안 그래도 신경 쓸게 한두 가지가 아니고 신혼여행 가방도 무거운데 뭘 라고 잠옷을 적어놨냐.”
“실용성 없게 구색 맞추느라 돈 낭비 시간 낭비하지 말고 결혼 생활 하면서 천천히 이쁜 것 골라서 사.”
“네가 제일 마지막에 결혼하는 거라 하는 말인데 막말로, 신혼여행 가서 꽁꽁
싸매고 잘래?”
리더십이 있고 성격이 좋아 학급 부반장을 자처해서 했던 현정이가 언제나처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결혼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나니 혼수품을 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진짜 결혼을 하는 건가?’ 하고 넋을 놓고 있을 때 꼼꼼한 남편은 적정한 금액의 편안한 집을 구하기 위해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다.
“순화야! 군산 아파트 가격은 내가 다 알아.”
힘들다는 얘기를 에둘러서 하는 남편이 안쓰럽고 얼굴이 반쪽이 되어 휑한 모습을 보니 눈물
이 핑 돌았다. 연예할 때도 어디서 뭐 할 거냐고 물어볼 것도 없이, 수첩에 스케줄이 다 짜여서 어딜 가거나 문을 닫아 허탕을 친 적이 없었고 음식점에서 예약을 안 하고 음식점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너는 남자친구 차를 타면 어디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물어볼 정도였다.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이 여러 상황을 다 맞춰보고 결정을 하느라 얼마나 애가 타고 있을까 눈에 선했다. 나는 부동산에 대한 지식이 없어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힘든 일을 혼자 감당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같이 집을 보러 다니기로 했다.
김제에서 군산으로 오가는 길은 갈 때 틀리고 올 때 틀리고, 군산을 뺑뺑 도는 일
이 많았다. 미로 속을 헤매다 보는 남편이 더욱더 애틋하고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길을 모를 때는 무조건 큰길로 빠져나와 알았지?” 남편 말대로 무조건 큰길로 빠져나왔던 길은 영동 사거리였다. 걸어서도 가는 길을 차로 못 와서 유턴, 좌회전, 우회전 운전의 모든 기호를 다 써먹고 다녔다.
Y아파트 매물이 나왔으니 방문해 보라는 연락이 부동산에서 걸려왔다. 맨 꼭대기 층의 사이드였는데 드라마에 나오는 럭셔리한 재벌 집처럼 리모델링을 해서, 드라마 세트장 분위기의 집안을 둘러보다가, 작은 공간을 지나 거실 베란다로 다가갔다. 그 순간 우리는 창밖에 펼쳐진 은파호수공원 풍경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탄성을 질러댔다.
“와아~ 예술이다”
“꼭 멋진 달력을 보는 것 같아”
온종일 기분 나쁜 일만 겪었어도 베란다에 앉아 물빛 다리의 불빛을 보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고 황홀경에 빠져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지만, 이 집의 인테리어와 풍경이 어우러진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았다.
선뜻 결정을 못 할 것 같아 Y아파트의 다른 동에 사는 남편 선배의 조언을 들어 보기로 했다. 남편 선배는 마치 내일인 양 버선발로 달려와 동 위치와 아파트 조건을 꼼꼼히 살피며 확인해 주었다.
“아파트가 맨 위층 꼭대기에다 사이드라 춥고 곰팡이가 끼는 것 때문에 리모델링을 거창하게 한 것 같은데.”라고 진단을 했다.
“베란다에서 보는 은파호수공원 풍경이 잊혀 지질 않아요.”
나는 아름다운 조망권이 아쉬워 한마디 거들었다. 남편도 동조하는 눈짓으로 그 집 베란다에 순간 이동을 해서 은파공원을 다시 보고 있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려?”
“그림 같은 달력도 한두 번이지 살다 보면 여유롭게 베란다 밖 풍경을 볼 일이 별로 없어”
“투자하려면 사”
선배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아파트를 또 알아보기로 하고 퇴근 시간과 휴일을 이용해 군산 아파트를 셀 수 없이 방문했다. 한 아파트는 베란다에서 모텔이 보였고, 어느 아파트는 바다가 가까워 습기와 비린내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는 말이 나왔다. 어떤 아파트는 아파트 구조가 불편하게 설계됐고 또 어떤 집은 집을 보든지 말든지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를 취하며 투명인간 취급했던 아파트 주인도 있었다. 우리는 머릿속에 있는 집 조건을 비슷하게라도 충족하는 신혼집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었지만, 신혼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스트레스로 죽을 것 같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힘들었지만 내 자식들이 우리의 연애 시절과 결혼생활에 대해 궁금해할 때 간질 나게 들려줄 이야깃거리가 많아지는 것에 감사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경제도 불안한 상태라 이제 겨우 보금자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섣불리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정책적으로 다주택 주인의 심장을 쥐어짜고 있을 때, 우리는 언능 먹잇감을 가로챌 하이에나의 자세를 취하고 심장을 움켜쥔 집주인의 매물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신혼부부가 전세로 살고 있긴 한데 집주인이 집이 여러 채라 빨리 팔아야 하는 아파트가 있다는 부동산의 연락을 받았다. 새 아파트는 아니지만, 위치적으로 교통과 근린생활 시설 이용이 편리했고 무엇보다 가격 면에서 만족스러운 아파트였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젊은 남자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신혼부부가 살고 있다는 정보는 알았지만 와이프가 임신해서 병원에 입원한 상황인 줄은 몰랐다. 젊은 남자는 갑작스러운 아파트 매매 통보에 당황하고 화가 난 듯 보였다. 안타까운 사실을 알았어도 집을 보러 갔겠지만 왠지 모를 죄책감에 우리도 멋쩍게, 아파트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그 남자가 툭 한 마디 던졌다.
“동남향 아파트라 햇살이 일찍 잠을 깨우고 온종일 햇빛이 안 들 거고요”
“주변이 시끄러워서 한여름에도 베란다 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는 약간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덧붙여 부연 설명을 했다.
“초등학교가 베란다 맞은편에 있어서 체육대회 때나 평일 아침에 엄청 시끄럽고, 저녁에는 배달 오토바이가 바퀴를 뽑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밤새도록 달릴 거예요.”
눈치 보느라 차마 물어보지 못한 우리의 질문을 어떻게 알고, 그 남자가 알아서 고려해야 할 점을 시크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연애 시절에 이 아파트를 지날 때면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시끄럽겠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내가 그 아파트에 집을 보러 오다니 사람 일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듣고 싶은 소리 외에는 소음에 민감하지만 앞으로 내 아이가 다닐 학교의 소음은 기꺼이 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 오가는 모습을 베란다에서 지켜보는 내 모습이 상상되어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의 신혼 보금자리는 초등학교 운동장이 훤히 보이는 이 집으로 마음이 굳혀지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 상황이 되어 여기에 살던 신혼부부에게 미안한 마음
이 들었다.
수많은 아파트를 거처 얻은 소중한 우리만의 보금자리라 나는 만족하지만, 농구선수처럼 야들야들 꺼벙하게 키만 커서, 언제 모가지가 꺾일지 모르는 식물 입장에서는 우리 집이 불안한 환경일지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화분을 상전 모시듯 햇빛을 따라 이리저리 이동시키기 바쁘다.
제가 빽빽한 글을 싫어해서 문단으로 나눠서 띌려고 했는데 문단을 잘 못 나눈 듯 합니다.
첫댓글 순화 선생님, 글이 늘 맛깔 납니다. 살아있는 공처럼 요^^^
어릴적에는 많이 슬프고 미친년처럼 널뛰어도 내 맘대로 않되는 현실에 좌절했었는데 그 안에서 사랑으로 지켜봐줬던 고마운분들이 있었기에 깊이 되새김질 하는 날이 온 것 같습니다. 부부는 젊어서는 같은 길을 꿈꾸고 나이들어서는 서로의 젊은 날을 기억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존경하는 남편을 만나 우리의 젊은 날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수필을 쓰게 됐어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저도 나의 한 시간 뒤의 일을 언제나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