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따르리
오인순
장맛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날이다. 남편이 술 한 잔 마시고 싶다고 한다, 이런 날은 입안에 고소한 기름기가 배이는 쫀득한 감자전이 안성맞춤이다.
손이 바빠진다. 냉장고에서 감자 두어 개와 애호박, 풋고추를 꺼내온다. 감자를 감자칼로 껍질을 벗겨나가니 낡은 놋숟가락으로 감자를 긁던 어린 시절이 스쳐 지나간다. 감자 위로 숟가락이 지나가며 서걱거리던 그 소리. 달밤의 풀벌레 소리처럼 애틋하다.
부엌에서 커다란 알루미늄 양푼의 감자를 깎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감자 껍질을 긁으면 갯바위에 부딪히는 포말처럼 손등과 얼굴에 하얀 분말이 튀어 올랐다. 그럴 때면 감자가 여름 향기를 풍기며 나를 보고 웃는 듯했다.
감자를 강판에 간다. 하얀 속살의 녹말즙이 뭉개지며 그릇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감자를 보면서 내 삶을 들여다본다. 책과 시詩 밖에 모르는 철없는 남편을 콩깍지에 씌어 만나 살면서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나는 땅속에 숨어 자라는 외로운 감자였는지도 모르겠다. 가난의 꼬리표를 떼려고 한 달 월급을 여섯 개의 항목별로 나누어 봉투에 담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부부가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데도 홀로 된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삶까지 도움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푼 두 푼 아껴가며 살아도 연말이면 세 집의 사글세 집세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전셋집에라도 살아보려면 딸의 구멍 난 속옷까지 꿰매 입혀야만 했다. 왜 그리 시간은 빨리 가는지 세월을 나무에 붙들어 매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둔 땅에 박힌 채 가혹한 운명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감자를 보면 힘이 났다. 그것은 생동감 넘치는 삶의 드라마였다.
그릇에 감자즙이 쌓여간다. 남편이 등뒤에서 손부채질을 하며 토닥인다. 하얀 감자즙을 보며 밥상에 둘러앉아 감자만 골라 먹던 감자밥과 소금에 찍어 먹던 포실포실한 찐 감자 이야기를 나눈다. 그 아린 맛이 그리워진다.
생각해보면 감자만큼 친숙하고 가까운 음식이 또 어디 있으랴. 우리네 식탁 위에 흔히 볼 수 있는 감자의 운명도 기구하다. 감자는 울퉁불퉁하게 못생겼다고, 가난하고 미개한 사람들이 먹거나 악마가 먹는 음식이라고 누명까지 썼다.
첨예한 갈등이나 대립하는 쟁점마다 왜 `뜨거운 감자`라고 부르는가. 감자가 뭐를 어떻게 했다고. 감자는 억울하다. 이랑에서 감자를 캘 때면 줄줄이 엮어 나오듯 우리 주변 곳곳은 해결법을 찾지 못한 뜨거운 감자가 천지이다. 아직도 역병으로 감자가 말라 죽고, 사람도 배곯아 굶어 죽어 나간 아일랜드 대기근의 아픈 사건도 모두 씻겨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떤 먹거리 못지않게 값싸면서도 몸에 좋은 것으로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감자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얼마나 생명력이 뛰어나면 화성의 인류 생존기를 다룬 영화 <마션>에서도 감자 재배 성공 장면이 등장했겠는가.
길어진 이야기에 남편이 냉장고를 열고 막걸리를 꺼내며 재촉한다. 선반 아래 칼과 도마를 꺼내 풋고추는 송송 썰고 애호박은 채썰기를 하고, 가라앉은 감자즙에 부침가루를 넣고 반죽을 한다. 달구어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반죽 한 국자를 떠 얇게 편다. 노릇노릇 앞뒤로 지지며 홍고추를 고명으로 두 쪽 얹으니 촉촉한 마음에 윤기가 흐른다.
감자전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바삭거리는 촉감과 찰진맛이 혀끝에 달라붙는다. 남편도 입꼬리가 올라가며 배시시 웃더니 맛있다고 거든다. 막걸리 두어 잔을 걸치고 나니 남편의 얼굴에 홍조가 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쓸어 넘기며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떨리듯 말문을 열었다.
“남은 인생 선물이라 생각하자, 이젠 당신의 뜻대로 따르리라.”
느닷없이 그 말을 들으니 먹먹하다.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 속으로 외롭고 고단했던 시간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대답은 하지 못했지만 나도 존경과 사랑으로 감자꽃의 꽃말처럼‘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수줍은 새색시처럼 마음속으로 되뇌어 본다.
거실에는 우리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TV에서 최성수의 <동행>이 흐르고 있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지난 서러운 일들이 감자전 속으로 스며들며 녹아내린다.
아직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빗물에 고개를 숙인 텃밭에 핀 흰색, 보라색 감자꽃이 정겹고 소박하다. 감자꽃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감자꽃이 비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며 노래한다. 감자꽃의 달콤한 고백을 듣는다.
‘당신을 따르리.’
오인순_제주대학교 가정교육과 졸업. 제주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7년 《문학청춘》 신인상 당선. 2020년 《에세이문학》 추천 완료. 2022년 석파 시선암 철쭉제 전국시낭송대회 금상. 2023년 탐라문화제 한라상 수상. 에세이문학작가회, 제주문인협회, 서귀포문인협회, 동백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