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포해전의 승리요인
‘조선 함선 180여 척 : 일본 함선 470여 척’의 부산포해전은 함선의 척 수면에서는 조선 수군이 현저히 열세인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순신은 어떻게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아래에서는 제1, 2, 3차 출동에서 살펴 본 승리 요인을 토대로, 질적 전투력 우위, 전쟁 승리의 원칙, 전략, 전술 등의 관점에서 부산포해전의 승리요인을 세부적으로 규명해 본다.
(1) 질적 전투력 우위
부산포해전 승리요인의 첫 번째 요소는 단연코 조선 수군의 질적 전투력 우위이다. 임진년(1592년) 제1,2,3차 출동의 해전 결과에서 확인한 것처럼 조선 수군의 질적 전투력은 일본 수군을 압도하였다. 조선 수군은 제1차 출동에서 44척, 제2차 출동에서 72척, 제3차 출동에서 79척 등 총 195척의 일본 함선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 함선은 단 한 척도 격파되지 않았다. 그것은 제4차 출동에서 치른 7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함선은 134척이 격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의 함선은 단 한 척도 격파, 분멸, 나포되지 않았다.
제4차 출동의 하이라이트인 부산포해전은 단순히 수적인 측면에서 보면 ‘180여 척 : 470여 척’이라는 중과부적의 상황이었지만 조선 수군은 일본의 함선을 100여 척을 격파시킨 반면 일본 수군은 조선의 함선을 단 한 척도 격파, 분멸시키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제1,2,3차 출동에서의 해전을 분석해 보면 조선 수군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의 화포로 격파 사격을 실시하고 병행하여 활을 이용. 다양한 형태의 화살을 쏘아 인명을 살상하며 마지막으로 화공(火攻)으로 분멸(焚滅)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또한 일본 수군은 기본적으로 원거리에서는 조총이나 활을 쏘다가 접근하여 그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벌이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부산포해전에서의 일본 수군은 자신들의 장기인 등선백병전술(登船白兵戰術)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선 수군이 부산포로 진입해 들어오자 배를 버리고 산 위로 올라가 원거리 사격전으로 응수하였다. 대형화약무기류인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으로 무장한 조선 수군과의 정면 대응을 회피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임진년 제1,2,3차 출동을 통해 경험한 조선 수군의 질적 전투력 우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이순신이 아무리 탁월한 역량을 지닌 장수였다 하더라도 180여 척을 이끌고, 470여 척의 일본 함선이 정박해 있었던 부산포를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 수군의 질적 전투력 우위, 부산포해전의 승리를 이해하는 데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2) 전쟁 승리의 원칙
부산포해전의 승리요인 중 두 번째로 살펴 볼 것은 ‘전쟁 승리의 원칙’이다. 임진년 제1,2,3차 출동의 해전에서 확인한 것처럼, 이순신이 해전에 적용한 모든 전쟁 승리의 원칙에는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운다’, ‘이겨놓고 싸운다’(先勝求戰)라는 병법의 요체가 일관되게 관통해 있다.
부산포해전에서 살펴 볼 수 있는 ‘전쟁 승리의 원칙’은 대략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가운데 첫 번째로 살펴 볼 전쟁승리의 원칙은 <만반(萬般)의 준비태세를 갖춘다>는 이른바 ‘만전(萬全)의 원칙’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이순신이 처음으로 출동한 제1차 출동은 5월 4일에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20여 일이 지난 시점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틀 후인 4월 15일, 일본의 침략 소식을 듣고 예하 직속 부대인 5관 5포에 전쟁준비를 하면서 출동 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한다. 그리고는 4월 29일까지 전라좌수영인 여수 앞 바다로 집결할 것을 명령한다. 예하 부대에서 해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2주일 정도의 말미를 준 것이다. 그리고 4월 30일 출동할 것임을 조정에 보고한다. 그런데 적의 세력이 많고 물길을 인도할 경상우수영 소속인 남해의 미조항, 상주포, 곡포, 평산포의 진장들이 모두 도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라우수영의 함대가 오기를 기다린 후 함께 출전할 것임을 재차 조정에 보고한다. 전라좌수영 함선 세력만으로는 500여 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에 대적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전라우수영의 함대의 도착이 지연되자 드리어 5월 4일 새벽,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도합 85척으로 구성된 전라좌수영의 함대가 단독으로 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5월 5일과 6일, 경상우수영 함선 세력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 등과 합류하여 5월 7일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이 벌어진다. 조선 수군의 최초의 출동이 이루어지는 5월 4일의 하루 전인 5월 3일까지 4일 동안 비록 전라좌수영 함선 세력에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 진형법이나 해전 전술 숙달 등 해전을 위한 훈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출동 때도 처음에는 전라우수영 함대와 합류하여 6월 3일 출동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적선 10여 척이 벌써 사천, 곤양 등지에 진출하였다”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을 받고는 5월 29일 전라좌수영의 함선 세력 23척을 이끌고 단독 출전한다. 그리고 노량 앞 바다에서 경상우수영 함선 3척과 합류하여 전선 26척으로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을 치른다. 그리고 전라좌수영 함대 단독으로 두 번의 해전을 치른 뒤인 6월 4일, 이억기가 지휘하는 전라우수영 함선 25척이 합류함에 따라 총 51척의 함선 세력으로 당항포해전과 율포해전을 벌인다. 출동 중이었지만 처음으로 전라좌·우수영, 경상우수영 등 3개의 함대가 통합하여 해전을 치른 것이다. 그런데 제1차 출동은 전라좌수영 함선 세력이 주축이었지만, 제2차 출동의 세 번째 해전부터는 세력이 비슷한 전라우수영 함대가 통합되어 무려 50여 척의 대함대(大艦隊)가 함께 해전을 치르다 보니 효과적으로 해전 전술을 구사하는 데 어느 정도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제3차 출동 때에는 출동 전 처음으로 주력함대인 전라좌·우수영 통합 함대의 전술 숙달 훈련을 실시한다. “처음에 전라우수사와 모이기로 약속한 이 달 7월 4일 저녁 때, 약속한 곳에 도착하여 7월 5일 서로 약속하고, 7월 6일 함대를 거느리고 일시에 발선하여...”라고 기록한 장계 <견내량파왜병장(見乃粱破倭兵狀)>를 보면 제3차 출동을 시작하기 전에 전라좌·우수영 함대가 7월 5일 하루 종일 통합 함대 전술 숙달 훈련을 한 것이 확인된다. 아마도 이 날 전라좌·우수영 통합 함대가 처음으로 학익진(鶴翼陣) 진형에 대한 기동 및 전술 훈련을 실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4차 출동에서는 제1,2,3차 출동에서 노출된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이순신의 철저한 준비 과정이 돋보인다. 이순신의 장계 <부산파왜병장(釜山破倭兵狀)>에는 제4차 출동의 준비 상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과 협선 92척을 모두 갑절이나 엄하게 정비하여 지난 8월 1일 본영 앞바다에 이르도록 하여 결진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하였는데... 8월 24일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과 함께 배를 띄워...남해의 관음포에 이르러 밤을 지냈습니다. 25일에는 사량도 바다의 약속한 곳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나 적의 소식을 상세히 물은 뒤에 함께 당포에 이르러 밤을 보냈습니다.”
제4차 출동을 준비할 때의 이순신의 마음 자세는 다른 출동 때와는 매우 달랐다. 위의 표현처럼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과 협선 92척을 모두 갑절이나 엄하게 정비하였다’는 구절이 먼저 눈에 띄인다. 전선과 협선을 <갑절이나 엄하게 정비하였다>는 것은 제1,2,3차 출동의 경험에서 노출된 문제점을 보완하여 그야말로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8월 1일에 여수 본영 앞 바다에 전라좌·우수영의 함선 166척이 집결하여, 20여 일 동안 각종 진형법 및 해전 전술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제1차 출동 때는 전라좌수영 함대만 단독 출동을 하고, 제2차 출동 때는 출동 중에 전라좌·우수영의 함대가 통합되었으며, 제3차 출동 때는 출동 전 하루 동안 기동 및 전술 훈련을 한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제4차 출동은 철저한 전투 준비태세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것처럼, 준비 없는 승리는 없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질적 전투력이 일본 수군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 고려 말 이래 200여 년 동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병력, 무기, 함선을 착실히 준비하고 또 준비한 데 기인한 것처럼 이순신의 전승무패의 승리 신화 이면에도 이와 같은 치밀한 전투 준비가 있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만전(萬全)의 원칙’ 부산포해전 승리의 굳건한 기초였던 것이다.
두 번째로 살펴 볼 전쟁 승리의 원칙은 ‘전투력 집중의 원칙’이다. ‘전투력 집중의 원칙’은 이순신이 임진년 제1차 출동부터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초미일관 적용한 핵심적인 전쟁 승리의 원칙이다. 이순신의 함대 운용의 특징은 예하 단위부대별 작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전의 최소 단위가 언제나 함대급(艦隊級)이었다. 그는 언제나 전라좌수영 소속의 가용한 모든 함선을 동원하여 작전에 투입하였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늘 전라우수영과 경상우수영의 함대를 통합하여 해전을 벌였다.
제1차 출동에서는 가용한 전라좌수영의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85척을 총동원하였으며 여기에다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의 판옥선 4척, 협선 2척 등 6척을 더하여 조선 수군의 함선 세력은 총 91척에 달했다. 제2차 출동에서는 해전에 참여한 조선의 함선 세력이 처음의 두 해전과 나중의 두 해전이 차이가 있다. 처음의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에서는 전라좌수영 함선 23척과 경상우수영 함선 3척 도합 26척이 참여한 반면, 나중의 두 해전인 당항포해전과 율포해전에서는 전라우수영 함선 25척이 통합되어 판옥선, 거북선 등 전투함만 총 51척에 달했다. 제3차 출동에서는 전라좌·우수영의 모든 가용한 함선과 경상우수영의 함선 7척을 합하여 55척∽58척의 통합 함대를 운영, 전투력을 집중시켰다.
이것은 제4차 출동 때도 마찬가지이다. 제4차 출동 때의 함선 세력은 전라좌·우수영의 판옥선·거북선 74척, 협선 92척 도합 166척에 경상우수영 함선 판옥선 7척 이상, 협선 7척 이상을 합쳐 총 180여 척 이상이었다. 임진왜란 개전 이래 최대의 함선 세력이 동원된 것이다. 제4차 출동이 시작되고, 부산포해전 이전 단계에서 벌인 장림포해전의 경우는 180여 척 : 6척, 화준구미해전 180여 척 : 5척, 다대포해전 180여 척 : 8척, 서평포해전 180여 척 : 9척, 절영도해전 180여 척 : 2척, 초량목해전 180여 척 : 4척이었다. 질적인 전투력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함선의 척 수 측면에서만 볼 때도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의 해전이었다. 마지막 해전인 부산포해전에서만 ‘조선 함선 180여 척: 일본 함선 470여 척’으로, 처음으로 함선의 척 수면에서 열세의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통합 함대의 함선 180여 척은 철저히 해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일본의 함선 470여 척은 해전을 포기한 채 포구에 정박해 있었으므로 수적 우위의 장점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가용한 함선 세력을 총 집중하여 운용하는 ‘전투력 집중의 원칙’, 제4차 출동과 부산포해전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전쟁 승리의 원칙으로 작용하였다.
세 번째로 살펴 볼 전쟁 승리의 원칙은 ‘주도권 확보의 원칙’이다. 주도권이란 전장(戰場)에서 피동(被動)이 아니라 주동(主動)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전장(戰場)에서의 주도권 확보의 핵심 요소는 싸울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적을 아군(我軍)에게 유리한 시간과 장소로 끌어내거나, 유리한 시간과 장소를 선점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을 의미한다.
제1,2,3차 출동에 벌인 9회의 해전에서 이순신은 한 번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았으며, 언제나 그가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해전을 벌여 일본 함대를 격파하였다. 제1,2,3차 출동 중에 치른 가장 큰 해전이었던 한산해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견내량의 좁은 포구에 정박해 있던 일본 함대를 한산도 인근의 넓은 바다로 이끌어 낸 사람은 바로 이순신이었다. 견내량은 포구가 좁아 대선인 판옥선이 기동하기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일본 수군은 해전을 하다가 불리하면 배를 포구에 대고 육지로 도망가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제4차 출동 중에 있었던 모든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해전의 장소와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였다. 갑자기 출현한 조선 수군의 함대를 만나 어쩔 수 없이 대응하거나 도망갈 수밖에 없는 피동의 국면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산포해전에 앞 서 있었던 6회의 해전인 장림포해전, 화준구미해전, 다대포해전, 서평포해전, 절영도해전, 초량목해전에서 전투의 장소와 시간을 선택한 것은 언제나 이순신이었다. 부산포해전도 마찬가지이다. 부산포에 500여 척의 일본 함선이 정박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이순신은 절영도 앞 해상에서 이억기, 원균과의 작전회의를 통해 부산포 공격을 결정하였다. 부산포 앞 해상을 해전 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부산포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일본 수군들은 부산포까지 조선 수군이 공격해 들어올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포는 그들이 원하는 해전의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전의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주도권 확보의 원칙, 부산포해전의 또 다른 승리요소가 아닐 수 없다.
네 번째로 살펴 볼 전쟁 승리의 원칙은 ‘공세의 원칙’이다. ‘공세의 원칙’은 수세(守勢)가 아니라 공세(攻勢)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으로 이순신이 벌인 해전에 관통하는 매우 특징적인 전쟁 승리의 원칙이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제1,2,3차 출동에서 벌인 9회의 해전에서 단 한 번도 수세의 상태에서 해전을 치른 적이 없다. 9회의 해전에서 먼저 적을 먼저 발견하고, 추격하여, 공격을 주도한 것은 언제나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었다.
제4차 출동에서 부산포해전 이전 단계에서 벌인 6회의 해전 또한 모두 수세가 아니라 공세의 상황에서 벌어졌다. 탐망선을 풀어 언제나 적을 먼저 발견하고, 추격하여, 공격하는 탐색->추격->격파라는 공격 패턴은 제4차 출동의 해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구체적인 해전의 양상을 보면 8월 29일 장림포 해전부터 9월 1일 절영도 해전에 이르기까지 일본 수군들은 갑자기 출현한 조선 수군에 놀라 가까운 포구나 해안으로 앞 다투어 도망갔다. 그리고는 포구나 해안에 열을 지어 함선을 정박시켜 놓고는 모두 육지로 피신하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일본 함선에 대한 조선 수군의 공격은 해안이나 언덕에 열을 지어 정박해 있는 일본 함선들을 일방적으로 격파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부산포해전 직전 초량목으로 나오고 있었던 일본 함선 4척과의 해전이 거의 유일한 해상에서의 전투였다.
제4차 출동의 마지막 해전인 부산포해전의 경우도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었다. “우리의 군세로써 만일 지금 공격하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시 적이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는 470여 척이 정박해 있는 부산포 앞 바다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자 일본의 함선들은 발선(發船)을 포기한 채 배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일본군들이 총통과 활을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 여섯 곳에 나누어 진을 치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과 우박처럼 쏘아대었다. 사실상의 해전을 포기한 것이다. 조선의 함대는 부산포 앞 해상에서 공격을 주도하고, 일본군들은 배를 포기한 채 산으로 올라 수세적으로 방어전(防禦戰)을 펼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세가 아니라 공세의 입장에서 해전을 주도해 가는 ‘공세의 원칙’ 부산포해전에서도 빛난 전쟁 승리의 원칙이 아닐 수 없다.
다섯 번째로 살펴 볼 전쟁 승리의 원칙은 ‘정보 획득의 원칙’이다.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고, 함선 세력을 집중하여 적보다 우세한 전투력을 만들어야 하며, 아군에게 유리한 시간과 장소를 택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세의 고삐를 죄어 전장의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전쟁 승리의 원칙을 효과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획득이다. 적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아군의 함선세력은 통합된 상태에서, 적군의 함선 세력은 분산된 상태에서 해전을 벌일 수 있으며, 아군에게 유리한 장소와 시간에 적을 공격하여 전장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년 제1차 출동 때 벌인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에서도 적을 먼저 발견한 것은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 권관 김인영이었다. 그들은 적을 발견하자 신기전(神機箭)을 쏘아 일본 함대의 존재를 알렸다. 두 번째 해전인 합포해전, 세 번째 해전인 적진포해전에서도 적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파견된 탐망꾼들의 보고가 큰 도움이 되었다.
제2차 출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4일 이른 아침에 당포 앞바다로 나아가 진을 치고 소선(小船)으로 하여금 적선을 탐망하게 하였는데...”
제3차 출동에서도 견내량에 일본 함선 7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미륵도에 숨어 있던 목자(牧子) 김천손으로부터 획득한다. 한산해전이 처음부터 유리하게 전개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정보였다.
이순신의 정보획득을 위한 노력은 제4차 출동에서도 일관되게 보인다. 여수에서 출발한 조선 수군의 통합 함대가 작전 지역인 가덕도 주변 해역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남해의 노량과 한산도 앞의 견내량을 통과해야 했다. 만약 일본군들이 조선 수군의 동태를 파악하려 한다면 반드시 정보 요원이나 정찰부대를 파견하여 살펴야 할 물목이다. 특히 견내량의 경우는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경계에 해당하므로 일본군의 정찰부대가 반드시 주시해야할 물목이다. 따라서 이를 의식한 이순신은 조선 함대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8월 26일 밤을 이용하여 견내량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8월 27일 원포에 도착해서 밤을 지낸 이순신 함대는 28일에 사전에 파견한 정보원으로부터 <고성⦁진해⦁창원 병영 등지에 머물고 있던 왜적들이 이 달 24, 25일 밤 중에 모두 도망했다>는 정보 보고를 받는다. 그리고는 <필시 산에서 망을 보던 도적들이 우리 함대를 바라보고 위엄에 놀라 배를 정박해 둔 곳으로 급히 도망했을 것>이란 정보 분석,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함대를 출동시켜 김해강, 양산강 앞 바다로 향할 때 포로로 잡혀갔다가 3일 만에 도망쳐 온 창원 구곡포의 보자기 정말석으로부터 <김해강에 머물고 있던 적선이 며칠 동안에 많은 수가 떼를 지어 몰운대 바깥바다로 노를 재촉하며 나가는바, 도망가려는 형적이 현저하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러나 양산강 쪽의 일본군 동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고 느꼈던지 이순신은 탐망군을 임명해서 직접 파악해 오도록 조치한다. 오후에 돌아온 탐망군의 보고는 <종일 살펴보았으나, 일본의 소선 4척이 두 강 앞바다로부터 나와서 바로 몰운대로 지나갈 뿐이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미 많은 일본의 함선들이 조선의 함대를 피해 부산포 쪽으로 이동하였다는 정황이 속속 감지되었다. 9월 1일 부산포를 공격하기에 앞서서도 이순신은 작은 배 한 척을 부산 앞 바다로 보내 <대개 500여 척이 선창의 동쪽 산 기슭의 언덕 아래 줄지어 있는데, 선봉의 일본 대선 4척이 초량목으로 마주 나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전격 부산포 공격을 결정, 단행한다. 부산포해전도 결국 정확한 정보의 획득, 분석, 판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속)
첫댓글 분량이 상당해서 프린트하는데도 시간이 걸리는데 쓰신분의 노고 생각하면 껌입니다.
그려요...쓰고 보니..분량이 많긴 해요. 제1,2,3차 출동에서의 해전 의미와 연계하여 설명하다보니..길어졌어요. 어쨋든 임진년 해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ㅎ